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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 생애와 사상

헤르만 바빙크

by 김경호 진실 2011. 9. 25.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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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 생애와 사상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와 벤쟈민 비.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1851-1921)등과 더불어서 세계 3대 칼빈주의자로 불리우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작고한지 이미 80년이 지났지만 그의 신학적인 영향력은 자신의 모국을 비롯하여 전 세계적으로 아직도 강력하게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신학적 대작인 『개혁 교의학(gereformede dogmatiek)』은 여전히 정통적인 개혁신학의 기념비적 작품으로서 그 신학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4권으로 된 이 대작을 영어로 번역하려고 하는 시도는 이미 1951년에 간행된 신론에서 시작되었지만, 전체를 다 영역하려는 본격적인 시도는 1990년대에 들어서부터 칼빈 신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있다(현재까지 신학서론, 신론, 창조론,종말론완간, 2005년말에 제3권이 출간될 예정이고, 2006년에는 마지막 4권이 번역될 예정이다). 국내에서도 바빙크의 저술들을 소개하려는 노력은 박윤선 박사와 차영배 교수 이래로 지금까지도 간헐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바빙크의 신학과 한국 장로교회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우리는 교의신학 수업 시간이나 교재들을 통하여서 그의 이름을 너무나 많이 들었고 보았기 때문에 전혀 그의 이름이 낯설지가 않다(박형룡박사는 빠빙크라고 발음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도 빈번하게도 참조되고 있다면 그의 신학적인 비중은 남다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1955년 2월 25일(금) 오후 늦은 시간에 당시 암스테르담 시내를 흐르는 운하중 하나인 꺼이저스흐라흐트 가에 위치하고 있던 자유대학교를 방문한 박형룡 박사는 이사회실에 걸려 있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화상(portrait)을 가장 유심히 보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i. 헤르만 바빙크의 사상적인 배경

1. 헤르만의 아버지는 1834년 화란 국교회(nhk)에서 분리(afscheideing)하여 생겨난 기독교 개혁교단(cgk)의 목회자였다. 바빙크의 부모는 정통적인 신학과 화란적인 경건주의 혹은 청교도 운동인 나더러 레포르마치(nadere reformatie)의 영향을 공히 받은 인물들이었다.

2. 바빙크는 kampen에 소재한 교단 신학교에 진학하여 1년만 공부하고, 보다 더 폭넓은 신학 공부를 하고 싶어서 당시 자유주의 신학의 아성이던 레이든 신학부로 옮겨간다. 네덜란드 근대주의의 아테네라고 할 수 있는 leidse school에서 스콜턴 교수의 지도하에 근대 신학의 진수를 배우게 된다.

존 칼빈과 종교개혁 이후 개혁신학

(post-reformation reformed theology)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자 하는 바빙크의 노력과 자기 시대의 문화나 학문과 끊임없이 대화의 고삐를 늦추지 아니하는 바빙크의 열정은 이미 젊은 시절에 노출되고 있다. 레이든 대학교 신학부에서 <츠빙글리의 윤리>라는 연구로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다.

3. 학위를 취득한 바빙크는 당시 신설된 자유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청빙을 받았지만 거절을 하고, 자신이 속한 개혁교단의 목회자로 안수받고, 화란 북쪽에 소재하고 개혁신학교가 한 때 소재했던 유서 깊은 소도시 프라너꺼르(franeker)에서의 1년간의 짧은 목회를 하게 된다. 이 목회 동안에도 그는 독일 철학 연구등을 쉬지 않았다.

4. 개혁교단 총회는 바빙크를 깜뻔에 소재한 개혁파 신학교(theologische school te kampen)의 교의학 교수로 임명한다. 그는 1883년 1월에 <거룩한 신학의 학문>이라는 주제의 취임 연설을 함으로 교수직에 취임한다. 바빙크는 카이퍼의 거듭되는 초빙에도 응하지 아니하고, 1902년까지 이 작은 교단 신학교에서 교의신학 교수로 머물게 된다. 약 20여년 동안의 깜뻔 신학교 교수 재직 기간 동안에 바빙크는 열정적인 강의를 통해서 개혁교단 목회자들을 양성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안에 최고의 결실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의 대작(magnus opus)인 [개혁 교의학(gereformeede dogmatiek),4vols.(kampen: zalsman,

1896-1901)]의 집필과 출간이라고 할 것이다. 아마도 깜뻔이라고 하는 전원적인 소도시에서 소규모의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직에 머물지 아니하였다면 이와 같은 대작은 산출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빙크는 1906-11사이에 2판 개정판을 출간하게 되는데, 이것이 결정판이 되었다. 그와 신학을 달리하는 레이든의 신학교수 h. 베르코프(1914-95)는 바빙크의 주저에 대하여서 이렇게 평가한다:"4권으로 된 개혁 교의학은 지금까지도 네덜란드어를 읽을 수 있는 신학자들에게 지식들과 통찰들을 제공하는 보고(eine fundgrube von kenntnissen und einsichten)로 남아있다"(h.berkhof,200 jahre theologie,120).

5. 바빙크가 깜뻔에서 교수하고 있는 동안 카이퍼에 의해서 주도된 또 한 차례의 교회 분열과 분열된 교회들간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1834년에 일어난 분열(afscheiding,영어로는 secession)에 이어서 1886년에 카이퍼의 주도로 일어난 분열(doleantie)로 nederduits gereformeerde kerken이 조직되었고, 1892년에 양 교단은 통합 교단을 만들고 [화란 개혁교회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1892-2004)]라고 이름하였다.

1901년에 아브라함 카이퍼가 네덜란드의 수상이 되면서 부득불 자유대학교 신학부의 교수직이 공석이 되고, 바빙크는 네 번째의 카이퍼의 초청을 수락하여 카이퍼의 후임자가 되게 된다. 바빙크는 1902년에 자유대학교에 부임하여 1921년에 갑작스러이 서거하게 되기까지 약 20년간을 교의신학 교수로 사역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에 바빙크는 신학적인 저술들 뿐 만 아니라 교육학이나 심리학에 대한 많은 저술들을 하게 되며, 상원의원으로서 정치적인 활동도 하게 된다.

1. j. h. landwehr, in memoriam prof. dr h. bavinck(kampen:kok,1921)

2. v. hepp, dr herman bavinck(amsterdam:ten have,1921)

3. r. h. bremmer, herman bavinck en zijn tijdgenoten(kampen:kok,1966)

4. 유해무,<헤르만 바빙크>(서울:살림사,2004)

출처 : [이상웅님의 미니홈피]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신3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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