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영문번역: 게할더스 보스 (Geerhardus Vos, 미국 구 프린스턴 신학교 성경신학 교수)
한글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비록 로마 가톨릭교회는 다양하고, 심지어 이질적인 요소들로 이룩되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종교적 원리에 의해 전체적으로 치밀한 구조, 세상과 삶에 관한 통일성 있는 견해를 갖고 있다.
첫째로, 이 종교는 초자연적이고 헤아릴 수 없는 신비들을 포괄하고 있으며, 그것들 가운데 최고의 신비는 삼위일체와 성육신이다. 이러한 진리들은 보존되고 계승되며 방어되기 위하여 교회에 위임되었다. 이런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교회는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교황이란 사람 안에서 무오성이란 권한을 필요로 한다. 교리들은 공적인 권위를 입고 교회에 의해 그 구성원들에게 강요된다. 이 신비들을 받아들이는 믿음은 교회의 교리를 그 특별한 대상으로 갖는다; 그 믿음은 교리가 말하는 신비들 자체를 교리를 통해 통찰하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것은 종교적 행위를 대표하지 않고 지적인 행위, (지적) 동의, 역사적 믿음(fides historica; ※역자주: 역사적 기록들에 대한 동의) 을 대표한다. 믿음은 그 자체로 구원하는 능력이 아니라, 단지 구원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교회적 권위에 복종하는 행위이기에 그리고 그런 행위인 한에서 공로적인 것이다. 하지만 교회는 단순히 초자연적 진리의 소유자만은 아니다.
둘째로, 교회는 또한 초자연적 은혜의 보관자이자 분배자이다. 교회의 교리가 모든 인간의 지식과 학문 위에 무한정 높아질수록, 교회에 의해 보존되고 시여되는 은혜는 자연을 아득히 초월한다. 이 은혜가 치유적 은혜라는 말은 맞지만, 이것은 우연적이고 외래적인 속성을 가진다. 무엇보다 그것은 기복이 있는 은혜이고, 자연에 추가되고 자연 위에 높아진 것이다. 그렇게 그것은 타락 사건 전에 아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 속으로 들어왔고, 그렇게 그것은 다시 그 형상의 원래 상태로의 회복가운데 나타난다. 은혜가 자연에 초자연적 요소를 더해 자연을 높아지게 한다는 견해에서 볼 때, 은혜는 물질적이고, 성례에 동봉되며, 그렇게 사제에 의해 분배되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초자연적 진리에 대한 자신의 지식에서 그리고 초자연적 은혜를 자신이 받음에서, 즉 자신의 천상의 구원에서, 절대적으로 교회와 사제와 성례에 의존하게 된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Extra ecclesiam nulla salus)’.
하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상실과 회복이라는 가변성에 분명히 종속된 채 남겨진 이 은혜는, 심지어 사람에게 하나님과의 사귐에 도달했는지도 확신시키지 못한다. 그것이 하는 일은 만약 그가 그렇게 선택한다면 선행을 통해 하나님의 비전인 초자연적 구원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게끔 할 수 있는 능력을 그에게 나누어 주는 것뿐이다. 행위와 보답이 반드시 비례를 이루어야 하기에, 초자연적 구원을 받을 만하게 하는 선행들은 모두 특정한 종류여야 하고 따라서 그것들은 교회에 의해 규정되고 명해져야 한다.
교회는 또한 셋째로, 진리의 보관자와 은혜의 시여자인 것 외에, 입법자이고 재판관이다. 교회가 강요하는(죄의 빚에 대한) 보상들은 지은 죄들의 성격에 따른다. 어떤 사람이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는 시간의 빠름과 느림, 얼마나 그가 오래 연옥에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인지, 그가 얼마나 값비싼 면류관을 천국에서 받을 것인지, 이 모든 것은 그가 행하는 특별하고 초자연적인 일들의 개수에 의존한다. 따라서 영적인 계급 제도가 만들어 진다. 천사의 세계에서의 계급 제도와 교회 조직에서의 계급 제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땅의 성인들이나 천상의 성도들 사이에서의 계급 체계도 있다. 순서와 등급으로 나뉘어져 있는 성인들은, 오름차순으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거나, 신적 본성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데 비례해서 신에게 예배하고 경배하도록 허락 받는다.
지금까지 얘기된 것들을 고려할 때 분명한 점은 진리, 은혜, 그리고 선행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하면, 특별하고 초자연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님이 지정하신, 이 모든 축복의 시여자이기 때문에, 은혜와 자연의 관계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와 일치한다. 세계, 국가, 일상의 삶, 결혼 그리고 문화는 그것들 자체로는 악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들은 하위 질서에 그리고 세속적 본질에 속해 있고, 교회에 의해 성별 되지 않으면 쉽게 죄를 짓는 기회가 된다. 이것은 세상과 관련된 교회의 기능을 결정한다. 세상에게 그 자체로는 속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의해 성별 되면 은혜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 교회의 소명이다. 로마교에게 세상에 대한 거절과 세상에 대한 통치권은 하나의 동일한 원리에서부터 비롯된다. 사제의 독신주의와 성례 등급으로의 결혼의 승격은 동일한 줄기에 달린 가지들이다. 그 전체적인 계급 제도적 사상은 자연과 은혜 사이의 선명한 구분위에 세워져 있다. 교회의 초자연적 성격과 성례의 효험과 제사장직(사제직)이 관련될 경우, 이 체계는 타협이나 양보를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경우 외에도 그것은 온갖 종류의 단계와 등급을 위한 여지를 남겨둔다. 교회는 오직 몸 (※역자주: 제도적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 그 회원들을 가진다; 그리고 회원들은 자신들의 권한의 일부 혹은 모든 권한과 함께 교회의 회원이 된다; 교회는 (신앙이) 연약한 자에게 양보를 하고 성인들을 숭배한다; 느슨한 도덕성과 엄격한 금욕주의가, 적극적 삶의 방식과 관조적 삶의 방식이, 합리주의와 초자연주의가, 그리고 불신앙과 미신이 동등하게 그 담벽 안에 자리를 찾는다.
중세시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이 체계는 거의 모든 면에서 부패했다. 진리의 영역에서 그것은 율법주의적 스콜라주의로 퇴보했다; 은혜의 영역에서 면죄부로 인해 방종케 하는 장사치로 변질했다; 선행의 영역에서 사제들과 수도승들의 부도덕한 삶으로 타락했다. 수 많은 노력들이 이 잘못들을 고치고 교회를 내부로부터 개혁하기 위해 행해졌다. 하지만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이 모든 시도들과 달랐다. 이는 그것이 단순히 그 외부적으로 병든 부분들에 관해 로마 가톨릭체계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의존했고 원리적으로 그것이 발전되어 왔던 토대들에 대해 그 체계를 내부적으로 공격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그 전체적인 체계를 거부했고, 진리와 은혜와 선행에 대한 전적으로 다른 견해로 그 체계를 대체했다. 그것은 학문적 반성이나 철학적 사변을 통해서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진지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온 관심을 통해 이 새로운 견해를 갖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하나부터 열까지 종교적이고 윤리적 운동이었다. 그것은 루터의 영혼의 고통에서 태어났다.
한 무력한 인간이 영혼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복음에 관심을 집중하여 기울일 때, 복음은 전혀 새로운 빛으로 그에게 나타나게 된다. 일시에 복음은, 교회의 권위로- 이성의 요구를 거절한 채, 공로적 동의에 의해 - 받아들여진 일련의 초자연적이고 헤아릴 수 없는 신비들이길 중단한다. 복음은 즉각적으로 새로운 복음, 구원의 좋은 소식,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롭고 유효한 뜻의 계시, 그 자체로 죄 사함과 영생을 주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것은 잃어버린 영혼에 의해 기쁨으로 받아들여지고 모든 죄 위에 그리고 온 세상 위에 천상의 구원에 대한 숭고한 소망으로 그 영혼을 들어올린다. 그러므로 그것이 사람의 자발적 동의에 의해 응답되는 초자연적 신비들로 구성된다고 보는 로마 가톨릭과 같은 견해로 복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복음은 율법이 아니고, 지성에 대한 것도 아니며, 의지에 대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약속, 요구가 아닌 선물, 하나님께서 은혜로 값없이 거저주시는 선물이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 (the divine will) 자체는 복음을 통해 사람의 의지, 마음, 가장 깊숙한 본질에 스스로를 전하고, 거기서 이 하나님의 뜻을 의지하고 기반으로 하며 신뢰하는- 모든 위기 속에서, 임종 시까지도- 믿음을 일으킨다.
원칙적으로 원래 성경적 개념으로의 회귀인, 복음에 대한 이 새로운 이해로 인하여, 믿음 또한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복음이 은혜가 나중에 그것에 추가되는 진리가 아니라 그 기원에 있어 스스로 은혜이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뜻의 계시이며 동시에 이 뜻을 인간의 마음에 효력 있게 만드는 방편이라면, 믿음은 더 이상 단순한 지적 동의일 수 없다.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로운 뜻에 대한- 하나님 자신에 의해 사람의 마음에 산출되는 – 확고한 믿음; 하나님의 은혜에의 전인의 항복;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함; 하나님의 은총을 받음;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들어가는 권리; 구원에 대한 전적인 확신이어야 한다.
바빙크는 이 글을 칼빈 출생 400주년을 기념해서 썼다. 게할더스 보스에 의해 이 글은 화란어에서 영어로 번역되었다. 그 번역된 글(영문제목:“Calvin and Common Grace”)은 1909년 프린스턴 신학 리뷰(The Princeton Theological Review)에 실렸다. 그 페이지는 437쪽에서 465쪽까지이다. 거기엔 65개의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그의 성경주석들과 관련된) 각주들이 달려 있지만, 이 한글 번역에서는 그것들을 생략한다.
바빙크의 글 “칼빈과 일반은총”에서 발췌한 이 부분은 로마 가톨릭 체계가 어떤 토대위에 어떻게 수립 되었는지와 루터에 의한 복음의 재발견이 어떻게 그 토대를 내부적으로 허물 수 있었는가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다. 다음 발췌 부분들에선 복음과 믿음, 예정과 인간의 자유와 책임, 은혜와 자연, 교회와 세상, 등의 주제들에 대한 루터, 츠빙글리, 칼빈 등의 견해들이 비교 분석되고 점차 그 주제들에 대한 칼빈의 견해가 부각되어 설명된다.
http://reformedjr.com/xe/board05_02/4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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