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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 강문구(1909. 1.20~1950. 3. ?) 목사 ]

강문구목사

by 김경호 진실 2011. 2. 14.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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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 강문구(1909. 1.20~1950. 3. ?) 목사 ]

 

1909년 1월 20일 경북영주에서 출생했으며, 숭실전문을 거쳐 장로회신학교와 일본 신호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중공산치하 평양 경창문밖교회를 시무하며 신학교 교수로 출강할 때 1950년 3월 공산당에게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서 살해되었다.

 

1935년 평양숭실전문 영문학과 졸업
1937년 평양신학교 중퇴
1941년 일본 고베 쥬우신학교(中央神學校) 졸업
1941년 평양교회에서 목사안수 받은 후 평양 고정리교회 부임
1942년 선천남부교회 부임

 

1910년 1월 20일 경북 영주군 이산면 신천리에서 내매교회 강석초장로와 이중평권사의 1남 2녀중 외아들로 태어났다.총명하고 재주가 남달랐던 그는 보통학교 가기 전 사서삼경을 다 읽었다. 대구 계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숭실전문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학생시절에 벌써 어린이 부흥사로 소문이 났다.
학생시절 주일학교 운동과 킨슬러가 한국교회에 도입한 성경구락부 운동에 매진하였으며 돈이 없어 공부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성경구락부로 공부기회를 주었으며 교사가 될 수 있는 기회도 마다하고 목양에 뜻을 두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문서운동을 펼쳐 후에 '겨자씨'라는 신앙잡지를 발전시켜 '신앙세계'를 펴냈다. 어찌된 영문인지 평신을 중퇴하고 일본 중앙신학교를 1941년에 졸업하고 평양으로 돌아와 평양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평양 고정리교회에 부임한 후 이듬해에는 선천남부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하였다.

 

교회가 발전부흥하여 선천북교회 선천남교회로 분립하였는데 그는 1942년에 선천남부교회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선천남부교회는 교인이 1천명이나 되었고 장의자도 1200석이나 되었다. 일제의 잔인한 압박이 가해지면서 재주많은 강목사도 뜻을 펴지 못하고 위축돼 갈 수 밖에 없었다. 그같은 곤고의 세월도 지나가고 1945년 해방을 맞으며 교회는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강문구목사는 일제하에 문을 닫았던 교단 신학교를 재건하고 새로 조직된 신학교수의 한 사람이 되어 평신을 민족교회의 보루로 만들겠다고 동분서주하였다. 당시 교장 김인준목사는 "선지학교가 하늘나라에 등록되면 되지 세상나라 관청에 구지 등록할 필요가 있나요"하면서 신학교를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성에 등록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1947년 소련군 사령부 특무대로 연행하여 시베리아로 유배시키는 바람에 이성휘박사가 교장을 이었고 강문구는 박경구 목사등 교수진에 합류하였다.

 

공산군이 평신을 접수하자 마포삼열기념관으로 학교를 옮겨 임시로 사용하며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고 강목사가 담임목사로 맡아 설교를 했다. 1950년 3월 이른 새벽에 일어난 강목사는 신학생들을 상대로 새벽설교를 했다. "사명자의 목소리는 광야의 소리가 되어 시대를 선도해야 합니다 듣든지 안듣든지 외칠 사명만 있는 것입니다"라고 설교했다. 그날 아침따라 강목사는 몸이 가렵다고 목욕 수건을 찾아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공산당에 체포되어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물론 아내에게 작별인사말 한마디도 없었다.
이같이 강문구 목사는 공산세력의 강압과 위협속에서도 학교와 신앙을 지키다 1950년 3월에 공산군에 체포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출처(k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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