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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교의 제주선교

이기풍목사

by 김경호 진실 2011. 2. 27.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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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한국교회의 성장

II. 해외선교를 하는 초기 한국교회

1. 대한예수교장로교의 제주선교②

이기풍은 1865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1883년까지 개인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하지만 괄괄한 성격으로 싸움과 술을 좋아해서 젊은 날을 허송세월하며 보냈다. 1893년 마포삼열 목사가 처음으로 평양에 선교하러 갔을 때 그의 집에 돌을 던진 불량배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성질이 괄괄했던 그가 주님을 만난 것은 청일전쟁이 절정에 달할 때였다. 청일전쟁(1894~5년)으로 인해 원산으로 피난을 떠난 이기풍은 담뱃갑에 그림을 그려가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꿈속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후 그 동안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자신에게 예수 믿으라고 권하던 김석필의 도움으로 스왈른 선교사를 만나 그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후 이기풍은 1901년까지 매서(성경책을 파는 사람, 나중에는 책을 팔면서 전도하는 사람인 권서로 불림)로서 함경도에서 성경을 배포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1902년에서 1907년까지는 스왈른 목사를 따라 황해도의 안악, 문화, 신천, 장연, 해주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 업무를 돕는 조사(helper)로 활동했다. 또 마포삼열 선교사가 설립한 평양장로회신학교에 1901년에 입학하여 1907년에 졸업함으로써 최초의 졸업생 일곱명 가운데 하나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되는 영광도 함께 얻었다.

1908년 1월 11일, 청중들이 좌석을 가득 메운 가운데 길선주 목사가 시무하는 장대현교회에서 이기풍 선교사 파송예배가 드려졌다. 첫 선교사의 파송예배가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지인 평양에서, 그것도 부흥운동의 발원지인 장대현교회에서, 부흥운동의 주역인 길선주 목사에 의해 진행된 것은 뜻 깊은 일이었다. 길선주 목사가 집례한 파송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선교 한국에 대한 비전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날 이기풍 선교사가 간단히 작별인사를 한 후 길선주 목사는 설교를 통해 “당신이 어떻게 평양의 첫 선교사들에게 돌을 던졌는가를 기억하고” 설령 제주도 사람들이 당신에게 돌을 던진다고 하더라도 결코 실망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선교사로서의 자긍심과 소명의식을 강하게 일깨워 주었다. 그날 그의 메시지는 파송 받아 떠나는 이기풍 목사에게는 물론이고, 장대현교회를 가득 메운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에게 다시 한 번 복음에 빚진 자의 사명을 새롭게 환기시켜 주었다. 이 날 말씀과 성령의 강한 능력이 어우러진 길선주 목사의 설교는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평양에 복음을 들고 온 선교사들에게 돌을 던지며 복음전파를 방해했던 이기풍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복음의 불모지인 제주도에 그가 그토록 핍박했던 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선교사로 떠나리라는 것은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것은 심지어 이기풍 목사 자신마저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날 역사의 주인공 이기풍 목사는 친구이자 평양신학교를 같이 졸업한 사랑하는 동료‘길선주가 설교하고 있는 동안 눈물을 주룩 흘리면서 앉아 있었다. 그 눈물은 돌에 맞을 것이 두려워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지나온 생애가 주마등같이 스쳐 지나가면서 자신의 과거의 한 순간 한 순간이 하나님의 깊은 은혜요 섭리였음이 마음 깊이 느껴져 자기와 같이 너무도 못나고 부족하고 방탕했던 사람을 주의 복음을 전하는 거룩한 종으로 불러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감격의 눈물이었다. 그날 그를 파송하는 집회는 “참석한 이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집회였다.” 파송예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한국교회가 출발부터 선교하는 교회로서 세워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감격을 금치 못했다.

1월 17일, 아내와 함께 평양역을 출발한 이기풍 선교사는 같은 날 서울 남대문에 도착해 승동교회에서 7일을 체류한 후 1월 24일에 목포행 기차에 올랐다. 목포에 도착한 그는 프레스톤(John F. Preston)과 폴시더(W. H. Forsythe)를 비롯한 그곳 선교사들과 교우들의 환영을 받으며 얼마를 더 체류한 뒤 자신의 선교지 제주도로 향했다. 광주와 목포에서 집회를 인도한 이기풍은 2월 20일 목포를 출발하여 제주도로 향했으나 풍랑으로 인해 추자도에서 표류하는 바람에 44일 만인 4월 초순에야 제주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길선주의 예견대로 오랫동안 우상과 미신의 굴레에 매여 있던 제주도 원주민들은 한국의 첫 선교사 이기풍을 처음부터 극심하게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심한 좌절감에 평양의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편지를 보내 제주선교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두 달 후 이기풍은 마포삼열로부터 “이기풍 목사, 편지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 아물지 않았고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 더욱 분투노력하시오.”라는 답신을 받고, 죄책을 회개하고 다시 제주선교의 의지를 다졌다. 혹독한 박해와 핍박도 동족 복음화에 불타는 이기풍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 돌에 맞고 죽음의 위협을”받았으나 조랑말을 타고 제주 전역을 순방하거나 일손을 도우며 헌신과 사랑으로 전도한 결과 불과 3년 만에 이기풍 선교사는 “그곳의 모든 한국인들로부터 대단한 사랑을 받는” 복음의 역군이 되었다.

1908년 독노회 앞에서 제주도에 파송 받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원입인 9명, 주일 출석 20명이라는 선교 결과가 보고되었다.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결실이 가능했던 것은 한편으로 성령께서 우상으로 물든 제주도 사람들의 강퍅한 마음을 강권적으로 변화시켜 주셨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기풍 선교사가 제주도에 도착하기 전 이미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가 예수를 영접한 김재원과 젊은 구도자 김행권, 홍순홍의 협력이 이기풍의 제주선교에 중요한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기풍의 파송으로 촉발된 선교정신은 전국 교회에 적지 않은 도전을 주었다. 독노회와 한국교회는 이기풍 선교사 외에도 다른 사역자들이 장단기적으로 제주에서 동역하도록 여러 다른 사역자들을 파송했다. 1908년에 평양 시내 여성 교우들은 제주도의 여성 사역을 위해 이선광(李善光) 여전도사를 파송하였고, 1909년에는 평양 숭실대학과 숭실중학 학생들이 정성스럽게 선교비를 모금, 동료 숭실대학생 김형재(金亨載)를 파송하여 이기풍 선교사의 선교사역을 측면에서 지원토록 했다. 김형재는 과거 자신이 받던 봉급의 절반이 조금 넘게 받으면서도 이기풍 선교사를 돕기 위해 제주도로 떠났다. 이들은 1908년 10월과 1909년 5월 각각 이기풍 선교사와 합류했다. 이들의 협력은 이기풍에게 적지 않은 힘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평양여선교회에서 파송한 이관직 전도사가 제주선교에 합류하여 1913년까지 그곳에서 사역했다. 제주선교가 시작되면서 같은 나라이면서도 여러 가지 면에서 타문화권 선교를 방불케 하는 제주선교를 위해 장차 제주 출신의 사역자를 찾아 훈련시켜 파송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것은 이기풍 선교사가 도착한 후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1908년 이기풍은 이미 복음을 받아들인 김재원의 지원을 받으며 금성리교회를 설립했는데, 바로 그 현장에 훗날 제주선교의 산 증인이자 목격자이며 또한 제주에서 처음 순교한 제주 출신의 목사 이도종이 참석하여 장차 제주선교를 준비하고 있었으니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고 놀라운 것이었다. 여러 차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복음을 전한 결과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이 밝히고 있는 것처럼 제주에는 1908년 금성교회 설립에 이어 1909년 조천교회, 그리고 1910년에 성내교회가 설립되었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선교 기구가 파송한 “평양 중학 학생 김형재의 열심과 부인 전도회가 파송한 이성광의 수고”는 제주의 복음전파는 물론이고 그곳에서 집회들을 여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들의 지원을 받은 이기풍 선교사는 복음의 불모지 제주도에서 여러 차례의 전도집회를 열어 불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젊음을 바쳤다. 그는 제주도에서도 목포에서처럼 직접 가가호호 방문하여 복음을 전했고, 그들이 저녁집회에 참석해 수백 명의 사람들이 교회를 가득메워 마당 밖으로까지 사람들이 넘쳤다. 이처럼 복음의 불모지 제주도에 복음이 전해진 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아 복음의 씨앗이 놀랍게 싹트고 자라기 시작했다.

이기풍 선교사가 제주도로 파송 받은 지 불과 3년 만인 1911년 9월에 제5회 독노회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이기풍 선교사는 제주도에 예배당 세 곳, 예배처소 두 곳과 160명의 교우, 또한 17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는 학교 하나를 설립했다. 원주민의 위협과 박해 속에서 시작된 제주도 선교가 불과 3년 만에 박해가 멈추고 그와 같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축복이었다.

이와 같은 놀라운 복음전도를 촉발시킨 사건이 이즈음에 일어났다. 이기풍 선교사를 통해 난치병이 고침을 받고 귀신이 나가고 정신 이상자들이 고침을 받는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제주도 선교사 이기풍 목사는 한 의료 선교사가 치료를 하기위해 목포로 데려온 11살 먹은 한 절름발이 소년에 대해 말했다. 약 3개월 동안 그 소년을 치료하려고 노력한 후 의사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자신이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제주도로 돌아가 성령의 능력으로 치료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해 주었다. 소년은 제주 집으로 돌아가 7일 동안 기도에 전념했는데, 그 마지막에 그가 힘을 얻어 일어나 걸었다. 이 때문에 많은 환자들이 그들에게 찾아왔고, 교회는 병원이 되고 말았다.

제주선교가 그렇게 놀랍게 성장하기까지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신유의 역사와 자신들의 집을 예배 처소로 내놓은 두 여인의 헌신이 배후에 있었다. 복음에 대해 그토록 배타적인 곳에서 예배 처소로 자신들의 집을 내놓는 것은 곧 마을로부터 매장되는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실천했던 것이다.

1912년에 이르러 제주선교는 상당히 진전되었다. 창립총회 때 보고한 제주선교 현황에 의하면 1년 동안 세례받은 사람이 17명, 전체 세례교인 58명, 당해 유아세례 2명, 당해 학습교인 35명, 전체 학습교인 57명, 당해 새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 200여 명, 교인 도합 400명이었다. 조사 1명, 영수 1명, 집사 2명, 예배당 3곳, 기도처 5곳, 그리고 학교가 1개였다. 매주 남자 100여 명, 여자 20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수요예배에 150명이 모일 정도로 외형적인 성장을 이룩했다. 매주 아침 성경공부에도 12명이 참석하여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였다. 이와 같은 질적, 양적 성장과 더불어 무엇보다도 “교인 중에 권능 받아 병고치는 자 많고 전도인이 전도함에 문이 크게 열린”일은 제주선교의 장래가 밝다는 사실을 예견해 주었다. 1913년에 이르러 제주도에는 6명의 사역자들이 사역하고 있었고, 교회도 12개나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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