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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란히톤과 부처 Melanchthon and Bucer

마르틴 부처

by 김경호 진실 2011. 3. 3.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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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란히톤과 부처 Melanchthon and Bucer 


 멜랑히톤의 「신학 총론」의 저술 배경
누군가 처음으로 걸어가면 길이 된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대학 교회 정문에 95개 조항을 못 박으면서 이신칭의를 중심 교리로 삼는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후 중세까지의 표준적인 교리를 대체할 새로운 교리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시작하면서 새로운 개혁 사상들을 계속해서 주장했지만, 그러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책을 저술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의 개혁 활동에 동참했던 인문주의자가 멜란히톤이었다. 멜란히톤은 1521년에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주제별로 설명한 「신학총론」(Loci Communes)을 저술했다. 이 「신학총론」은 종교개혁이 발생한 이후에 종교개혁 진영에서 신학의 주제를 설정하여 조직적으로 설명한 첫 번째 저술이 되었다. 그래서 16~7세기의 조직신학 저술들 가운데 많은 책들이 loci communes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멜란히톤은 개혁 진영의 조직신학 저술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첫 번째 길을 걸어갔던 셈이다.

멜란히톤은 튀빙겐에서 공부를 마친 후에 1518년 21세의 젊은 나이에 비텐베르크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헬라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인문주의자로서 헬라어를 가르쳤던 그는 루터의 영향으로 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멜란히톤은 스스로 신학사 학위를 준비하여 1519년 9월에 24개의 루터 명제들을 변호한 후에 소망했던 신학사 학위를 받고 신학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는 1519년 여름과 겨울 학기에 로마서를 강의하면서 바울신학에 대한 논문들을 썼다. 그러던 중 1520년에 멜란히톤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가 로마서에 근거하여 제시했던 “신학의 요약”을 「신학적 문제들의 주제들 혹은 논제들」(Rerum theologicarum capita seu loci)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멜란히톤의 강의 내용이 이처럼 갑작스럽게 출판된 것은 당시에 종교개혁의 신학적인 내용을 조직적으로 설명하는 책에 대한 요구가 그만큼 많았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갑작스런 책의 출판으로 당황했던 멜란히톤이 자신의 강의 내용을 최대한 정리하여 책으로 출판한 것이 1521년에 나온 「신학총론」이다.

멜란히톤은 「신학총론」을 저술하면서 loci communes의 방법론을 사용했다. loci communes 방법론은 책을 저술하는 방식에서 수사학의 이론을 원용한 것이다. 즉, 어떤 전체적인 내용을 제시할 때 그 전체 내용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주제(명제)들을 설정하고 그러한 주제들을 중심으로 설명해나가는 것이다. 멜란히톤은 스콜라주의 신학의 방법론의 문제점들을 극복하려고 이러한 수사학적인 방법론을 이용하여 신학 내용을 조직적으로 제시했다. 루터와 멜란히톤이 파악했던 스콜라주의 신학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논리학을 이용하여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번잡스러운 신학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멜란히톤은 “모든 철학은 어둠과 비진리다”라고까지 비판했다. 그는 loci communes의 방법론을 사용해 신학의 근원인 성서, 특히 로마서로 돌아가서 성서의 핵심적인 주제들을 선정하고, 그러한 주제들의 정의를 내린 후 그 정의를 관련 성경구절들을 인용하여 간결하고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자 했다.

「신학총론」의 내용 - 이신칭의의 구원론을 설명
멜란히톤은 「신학총론」을 통해 처음으로 종교개혁 진영의 신학체계를 구성했다. 그는 주로 로마서를 강의하면서 파악했던 바울의 구원론을 중심으로 신학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신학총론」을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서 스콜라주의의 철학적인 성향을 비판하여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에 대해 “신성의 신비들을 탐구하는 것보다는 경배하는 것이 낫다”고 하면서 루터의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되었던 구원론과 관련된 주제들을 다루었다. 멜란히톤이 「신학총론」에서 다루는 주제는 루터가 재발견한 복음이었다. 이 복음의 내용을 주제 중심적인 방식으로 설명하여 종교개혁이 추구하는 신학적인 내용을 쉽게 파악하도록 도와줄 뿐만 아니라 성경을 종교개혁의 시각에서 연구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고자 했다.

멜란히톤은 이전의 신학에서 다루었던 여러 주제들 가운데서 죄와 은혜, 율법과 복음이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핵심 주제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신 구원의 내용을 가장 잘 알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멜란히톤이 가장 먼저 다루는 주제는 자유의지의 문제다. 중세 구원론과 루터가 가장 격렬하게 충돌했던 것이 인간 타락의 심각성에 대한 문제였고, 그래서 멜란히톤은 타락한 이후에는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을 제일 먼저 다룬다. 그후에 원죄와 자범죄로 구성된 죄를 다룬다. 멜란히톤은 죄와 부자유한 의지의 논의에서 정서들 혹은 내적 성향들은 지성이나 의지의 능력 안에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행동만이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율법은 죄의 권능을 드러내는 것으로 선한 것을 장려하고 악한 것을 금한다. 그러나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 없으므로 율법에 의해 정죄 당하게 된다. 이러한 정죄 아래 있는 인간에게 가장 복된 소식인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약속이며, 특별히 죄의 용서며 하나님의 선의에 대한 증거다. 이러한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난다. 은혜는 “하나님의 호의”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라고 정의된다. 그는 은혜를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특성”으로 이해하려는 로마 가톨릭의 교훈을 강력하게 거부한다.

믿음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떤 역사적인 지식이나 의견에 대한 동의라고 보았던 로마 가톨릭의 견해를 비판하고, 하나님의 죄 용서에 대한 약속에 대한 개인적인 신뢰라고 묘사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지각이며 참으로 “마음의 정서”로 이해될 수 있다.
멜란히톤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를 붙잡을 때에 우리의 행위와 관계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는 도구며, 칭의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통해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으로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다.

멜란히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들의 삶에는 성령의 열매인 선한 행위가 나타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의 살아 있는 능력 아래서 성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뜻인 성령에 의해 갱신되어 갈 때 율법이 요구했던 것을 자발적으로 의도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법정에 가거나 고발할 필요가 없고 모든 사람과 재산을 공유해야 한다고 하면서 완전주의적인 일면을 나타낸다.

로마 가톨릭은 구약은 외적인 행위를 요구하는 일종의 율법이고 신약은 외적 행위에 더하여 마음을 요구하는 율법이라고 구별하는 데 반해, 멜란히톤은 구약과 신약의 차이에 대해 신약에서는 의식법과 재판법뿐만 아니라 도덕법까지 폐기되어 그리스도인에게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자원하여 율법을 지킨다.

멜란히톤의 「신학총론」은 24세의 젊은이가 루터의 영향을 받으면서 발견했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놀라운 복음을 제시하는 이야기다. 아직 그의 신학이 온전하게 성숙하지 못하여 앞으로 발전해야 할 부분들이 많지만, 수사학자의 놀라운 감동으로 자신이 발견한 복음의 진리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멜란히톤의 「신학총론」을 읽으면서 개신교에서 최초로 루터의 영향을 받은 구원론의 체계적인 설명으로 인해 감동을 받는다.

마틴 부처의 「그리스도 왕국론」의 저술 배경
「그리스도 왕국론」(De Regno Christi)은 마르틴 부처가 생애의 말년에 영국 교회 개혁의 청사진으로 제시한 저술이다. 마르틴 부처는 15세가 되었을 때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통을 따르는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으나, 후에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아 신앙의 실천을 통해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인문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이러한 인문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1518년 루터의 하이델베르크 논쟁에 참여했다가 그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후 1523년부터 25년 동안 스트라스부르그와 독일 남부 지역의 가장 중요한 종교개혁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제네바에서 1차 개혁에 실패하고 1538년부터 3년간 이곳에 와 있던 칼뱅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3년 동안 부처는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화해와 일치를 시도하는 많은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뿐만 아니라 개신교 내에서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의 일치를 이끌어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열매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는 일치와 화해를 이끌어내려는 열정 때문에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에 양편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부처는 루터의 영향을 받아 종교개혁에 가담했으나, 에라스무스와 츠빙글리에게서 받았던 영향으로 신앙의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그는 우리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루터의 이신칭의의 기본원리를 확고하게 주장했다. 그렇지만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종교개혁을 추진하면서, 교회의 제도적인 개선과 함께 성도들 개개인의 영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사회생활까지 개혁하고자 했다. 이러한 부처의 관심은 교회의 치리를 강조하게 만들었다. 루터는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하는 문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데 크게 관심을 기울였으나, 성도들의 치리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츠빙글리와 부처, 그리고 이들의 영향을 받은 칼뱅은 교회의 치리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부처는 자신의 신학에서 성도들의 개인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시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치리를 통한 개혁을 강조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부처는 루터와 구별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부처의 이러한 개혁의 비전이 저술로 구체화된 것이 이 책에 소개된 「그리스도 왕국론」이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종교개혁을 추진하던 부처는 1547년부터 48년까지 일어났던 슈말칼트 전쟁에서 승리한 신성로마 황제가 개신교도들에게 강요했던 로마 가톨릭적인 색채가 강한 인테림(Interim)을 거부하라고 촉구하다 그 도시에서 추방당했다. 이때 영국의 종교개혁 지도자인 토마스 크랜머가 마르틴 부처를 영국으로 초빙했고, 그는 1549년 4월에 영국에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 부처의 가르침을 받았던 인물들이 엘리자베드 여왕 시기에 청교도 운동의 지도자들로 활동했다. 부처는 영국에 건너간 초기에 교수로 임명을 받았지만 건강이 나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영국 왕 에드워드 6세의 많은 환대를 받았다. 그의 영국 친구들은 왕에게 받았던 환대에 보답하여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종교개혁을 진행했던 경험을 살려 영국에서의 종교개혁 추진 방향에 대해 조언하는 글을 써서 왕에게 신년선물로 줄 것을 제안했다. 그는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여 이 책을 1550년 10월에 완성했다. 따라서 「그리스도 왕국론」에는 마르틴 부처의 평생에 걸친 종교개혁 경험과 함께 그의 성경신학적 지식이 폭넓게 소개되어 있다. 그는 당시에 어린 국왕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진행되던 영국의 종교개혁이 국왕과 목회자들의 협조 아래 잘 진행되어, 영국이 그리스도의 왕국이 될 것을 기대하여 이 책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 왕국론」의 내용- 영국 교회 개혁의 청사진
마르틴 부처의 「그리스도 왕국론」은 두 권으로 구성된다. 1권에서 부처는 그리스도 왕국에 대한 성경신학적인 이해를 제시하고, 2권에서는 국왕이 어떻게 국가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해나갈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제시한다. 그는 1권에서 15장에 걸쳐 성경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왕국을 논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이 하나님의 왕국과 하늘의 왕국 등 다양한 용어로 불리는데, 그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은 하나님의 선민의 영생을 관리하고 돌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리스도는 “이 목적을 위해 선택하신 적합한 사역자들을 통해 집행하시는 가르침과 교훈으로 선민들을 자신에게 모으신다.” 예수님은 백성들을 교회에 모아서 교회 안에서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1권에서 그리스도 왕국의 중요한 기구로 나타나는 교회를 다루면서 그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을 상세하게 취급한다. 교회가 성례를 집행하고 생활을 개혁하기 위해 회개를 위한 치리를 할 것을 강조하며, 거룩한 예배를 드리면서 가난한 자를 구제해야 할 것을 설명한다. 그는 1권에서 결론적으로 모든 교회 구성원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선물의 분량에 따라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사역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2권에서 부처는 1권에서 제시한 그리스도의 왕국이 영국이라는 나라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되기 위해 통치자인 왕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를 조언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따라 종교뿐만 아니라 공동생활의 모든 다른 부분을 집행을 갱신하고 제도화하고 확립할 수 있고 확립해야만 하는 수단들”을 묘사하고자 한다. 그리고 모든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서 기독교적인 훈련과 규율의 준수를 보장하려고 만들어진 일련의 법률들의 개요를 제시한다.

부처는 이러한 개혁을 위해 영국에서 제일 먼저 종교개혁의 업무를 담당할 위원회를 설립할 것을 제안한다. 다음으로 백성들에게 복음을 알릴 복음 전도자들이 전국에 파송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교회 재산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보존하고 자금을 목회자들의 급료, 대학에서의 훈련, 교회 건물의 유지, 그리고 빈민 구제를 위해 사용할 방안이 마련되어야 한다. 부처는 제대로 훈련받은 목회자들이 전국에 파견되고 나면 “기독교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 제정되어야 할 법률들의 내용을 14개 분야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러한 법률은 먼저 교회와 관련되고 다음으로 국가의 공동생활과 관련된다. 그가 제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법률 분야는 1) 어린이 교리문답 교육 2) 주일 성수 3) 교회 건물들의 성화 4) 교회 목회 사역의 회복 5) 교회 재산의 보호와 올바른 사용 6) 빈민 구제 7) 결혼과 이혼 8) 공공교육과 공공윤리 9) 사치에 대한 통제 10) 시민법 개정 11) 행정관의 임명 12) 법원 13) 형벌 체계 14) 형법과 사형제도다.

물론 이러한 부처의 제안들은 성경의 내용들이 그대로 현실 가운데 실현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성경의 여러 선례들이 그대로 영국의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는 이러한 제안들을 하면서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개혁 경험과 함께 영국 친구들의 조언들을 종합하여 영국의 현실에 맞는 제안들을 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자신이 구상하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영국에서 실현될 것을 기대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교회와 공공생활의 밀접한 연결 관계 속에서 구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는 영국의 국왕이던 에드워드 6세의 지도력 아래서 영국 교회가 올바르게 개혁되고 그와 함께 국가가 개혁되어, 교회와 국가의 긴밀한 협력 속에 그리스도의 왕국이 건설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이 책을 저술했다.

우리는 부처의 「그리스도 왕국론」을 읽으면서 한 개혁자가 생애 말년에 종교개혁이 막 시작되던 영국에 대해 품었던 원대한 개혁의 비전을 찾아볼 수 있다. 부처가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비전을 전개할 때에, 먼저 성경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왕국론을 정립하고 그것을 영국의 현실에 맞게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했다는 점이 큰 도전으로 다가온다. 물론 부처 자신도 1551년에 세상을 떠나고 에드워드 6세도 1553년에 세상을 떠나 부처의 청사진이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펼쳐지지 못한 아쉬움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한 나라를 그리스도의 나라로 건설하고자 했던 부처의 신앙적인 열정과 학문적 깊이는 우리에게 큰 비전과 도전을 준다.

이은선 | 20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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