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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철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신자의 삶>(1)

황영철목사(의왕)

by 김경호 진실 2011. 5. 1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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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신자의 삶

 

    이 장에서는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 혹은 천국이 임했다는 사실이 오늘을 사는 신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공부할 것이다. 천국을 사후의 세계나 예수님 재림 이후의 세계로만 이해하는 일반적인 생각이 어떤 점에서 문제가 있는가,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를 천국의 현재성 미래성이라는 측면에서 다루며, 천국의 이런 이중성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그리고 천국이 현재 여기에 임해 있으면서 앞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에 이른다는 성경의 가르침이, 하나님 경륜의 현재 역사 시기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삶을 요구하는지를 다룬다. 마지막으로, 그런 가르침에 비춰서 정치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간단하게 언급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사역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함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막 1:15) 그런데 예수님을 앞서서 왔던 세례 요한도 역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전파했다.(마 3:1) 또한 누가복음 4장 4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다른 동리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해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하나님의 나라 전파라고 밝히셨다. 또한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눅 8:1)라고 말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의 내용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구절들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하나님의 나라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뒤 40 일 동안 땅에 계시면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내용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우리는 부활하신 뒤 40 일 동안 예수님께서 땅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구체적인 내용을 전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이후의 제자들의 태도가 현격하게 변화한 사실에 비춰볼 때, 그 기간 동안에 제자들은 하나님 구원의 일에 대한 많은 중요한 것을 배웠으리라고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누가는 그 내용을 한 마디로, 하나님 나라의 일로 요약했던 것이다.

    누가가 사동행전을 맺으면서 한 말은 더욱 인상적이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 28:31) 이 구절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첫째는, 바울이 전파한 내용의 핵심을 하나님 나라로 소개함으로써 예수님과 바울이 동일한 것을 가르쳤음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서ㅡ따라서 신약성경 전체 가르침에서ㅡ 하나님의 나라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주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하나님을 최고의 위치에 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최정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이 점을 지적한 게할더스 보스의 경고는 하나님 나라를 공부하는 모든 사람이 귀담아 들을만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실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신약성경의 열쇠다.”라고 까지도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주님의 가르침과 사역에서 멀마나 중심적인 위를 차지하는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구절들을 우리는 이 이외도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다.ㅡ예를 들면, 요한복음 3장과 마태복음 16장 16절 이하.ㅡ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 주님의 가르치심을 정당하게 이해하는 일에서 불가결의 요소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정당한 이해는 신자의 하루하루 생활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한 가지 언급하고 넘어갈 것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천국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 논의에서도 그 두 단어를 구별 없이 사용하기로 한다.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천국 개념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거의 전적으로 내세적인 것으로 이해돼 왔다. 이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실례가 찬송가에 나타난 천국 이해이다. 우리나라의 찬송가집을 펴서 천국에 관한 찬송을 찾아보면, 예외 없이 장례식에서 부르기에 적합한 가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나라 기독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영원한 안식의 처소로만 이해돼 왔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비록 완전히 틀린 이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심히 부족한 이해인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기독교가 현실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이와 같은 천국관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세상은 신자에게 별로 의미가 없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신자는 이 유혹이 많고 고생이 많은 세상에서 어떤 의미 있는 일을 이루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신자가 빨리 건너서 지나가야 할 곳이지, 거기에서 어떤 일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영원한 가치가 있는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천국관은 필연적으로 기독교를 내세 지향적이 되게 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현세는 자연히 관심의 중심이 못됐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일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함께 천당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에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천국에 대한 어떤 형태의 이해가 그에 상응하는 기독교의 형태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신자들이 지금 천국이 여기에 임해 있으며 우리가 이 땅에서 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닐지라도 천국을 이루며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현실에 대해 훨씬 큰 의미를 부여하며 이 세상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천국 이해가 과연 정당했는가? 만약 거기에 어떤 부족이 있었다면, 그 부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공부를 해 나감에 따라서 점점 분명하게 밝혀질 것이다.

 

천국을 이해하려 할 때에 주의해야 할 점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 17절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한다. 비록 이 구절은 언뜻 볼 때에 천국에 대한 정의로 들린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천국은 정의에 의해 알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점이다. 즉 로마서의 이 구절을 외우고 있는 사람은 천국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알 뿐이지, 천국 그 자체의 실상을 깨달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천국을 실제로 아는 사람은, 설사 이 구절을 모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천국의 실상인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이 점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다른 모든 진리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을 안다는 것은 천국의 왕이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요, 그 왕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고 산다는 것이다. 천국을 안다는 것은 사죄의 은혜와 능력을 맛보며 그 은혜와 능력을 함께 맛본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거룩한 교통을 나누며 산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으며 정당한 교회 생활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알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천국을 안다는 것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 속에서 역사함을 아는 것이다. 즉 마귀를 제압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체험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삶이란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온 피조물의 왕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므로, 신자도 지금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그분께서 주시는 능력을 받아서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적하는 세력을 쳐서 물리치면서 사는 삶을 의미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의 완전한 승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낙심치 않고 그날을 소망하며 오늘이라는 날 동안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요, 사변적인 철학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생생하게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 통치’의 사실이다. 하나님의 능력의 발휘이다. 이런 사실을 늘 명심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진리를 연구해야 할 것이다.

 

천국 사상의 기원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이 사상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우리는 과거의 거의 모든 사회와 문화 속에서, 현재의 질서가 아닌, 현재의 질서보다 더욱 더 완전하고 이상적이 세계에 대한 기대와 대망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 세상은 자기의 본향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비록 자기는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며 이 세상에 살 수 밖에 없는 형편이지만, 이 세상보다도 더 완전한 이상 세계가 그 어디엔가 있으며, 어떤 방법을 잘 사용하기만 하면 그 세상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막연한 형태의 기대는 거의 모든 인간 사회와 문화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비록 그 형태가 모두 동일하지는 않지만, 고대 희랍에서도, 고대 중국에서도, 인도에서도 이런 사상은 발견된다. 불교에도 이런 생각이 있으며 한국의 전통적인 민간 신앙에도 역시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존재한다.

    이 질문에 대한 바른 답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 사회에 보편적인, 새롭고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기대는 하나님의 계시의 왜곡된 형태이다 하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

 

 

*황영철 편저 [그리스도인의 현실참여 어떻게 할 것인가?](서울: 도서출판 나비, 199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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