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목회와 설교
written by
박 혜근(Hyaekun Park), Th.M., Ph.D.
서론: 설교와 성경관
신학은 언제나 신앙의 체계적인 조직화의 결과이다. 따라서 신학이 병든다면 그 저변에 있는 신앙이 병들었기 때이며, 신앙의 탈선이나 왜곡은 반드시 신학의 변질이라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과 신앙의 순환관계의 중심은 성경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한 설교자의 신학을 표출하는 설교는 언제나 궁극적으로는 그 자신의 신앙을 결정짓는 성경관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이므로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다름 아닌 설교자의 성경관이 무엇인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모든 설교자들은 나름대로 성경관을 가지고 있고 이 성경관에 따라 설교가 구성되고 전달된다고 말한 맥킴(Donald McKim)의 주장은 설득력을 지닌다
오늘 이 시대의 설교의 문제는 분명히 성경관의 문제라고 감히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자유주의적 성경관의 영향력은 교파를 초월하여 거의 모든 신학교와 교단에서 어렵지 않게 목도할 수 있는 현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성경의 신적권위에 대한 타협적인 태도는 성경을 신앙의 참고서 정도로 받아들이는 사고로 대변된다. 성경의 권위란 “아래로부터”의 권위로 전락했다. 즉 성경의 권위란 해석과 그것에 대한 청중들의 동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 정도로 치부된다. 설교의 권위도 성경의 신적권위에 의존한다는 사상을 과감히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데이빗 버트릭(David Buttrick)은 설교의 권위가 성경에서 나온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는 설교의 권위는 전적으로 성경의 해석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1세기적 시공간의 문화와 세계관의 족쇄에서 성경을 풀어놓는 소위 탈신화화의 과정이 요구된다는 그의 주장은 이런 맥락과 함께 한다. 불트만의 신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명백한 이런 그의 입장에서도 이미 암시되었듯이 성경은 있는 그대로는 이 시대의 세계관에 적용될 수 없으므로 해석자의 중계역할이 필요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세계관적인 문화적인 이탈을 전제하는 이런 성경관으로 인해 설교의 권위를 해석자에게서 찾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계시보다는 인간의 감각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실증주의를 지향하기 때문에, 설교자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보다 앞세우고 더 중요하게 보는 이런 입장은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에게서 어김없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렇게 성경의 권위가 설교가 갖는 정당성의 우선적인 근거가 되지 못할 때 설교는 결국 윤리적인 설교나 혹은 통속적인 행복론에 그치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바른 설교의 시작은 어떤 방법의 개선에 있지 않고 성경관의 정립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해석자의 해석이 가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겸손하게 먼저 듣고 받들기를 요구하고 있다. 성경은 해석학의 피동적인 대상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서 외치고 우리를 심판하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전부를 하나님의 계시라고 본다면 본문의 의도를 중시하고 그것을 동시대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것을 설교자의 사명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본문의 의도를 존중하는 것은 계시의 요체에 접근하고 그것을 전달하고자 할 때의 필연적이고 또한 가장 자연스러운 노력이기 때문이다. 즉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보는 사람들이 본문의 의도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성경의 저자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본문을 선택하는 것은 설교자의 권한이지만, 일단 본문을 선택한 다음부터는 설교자는 그 해당 본문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계시로서의 성경을 다룬다는 전제하에서는 우선순위는 언제나 본문이 차지해야 한다. 해석자는 본문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일 뿐이므로 본문이 말하는 메시지를 본문의 신전권위에 의거해서 청중에서 충실하게 전달하는 것을 설교자의 본분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선 개혁주의의 성경관을 먼저 살펴보고 설교에 관한 논의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개혁주의의 신학적인 특징은 엄격한 성경관에 있다. 개혁주의의 성경관에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는 구절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이다. 성경의 신적권위에 관한 개혁주의의 모든 논의는 반드시 딤후 3:16의 의미의 이해로 돌아온다. 따라서 이에 대한 성경신학적인 의미를 밝힘으로써 개혁주의 성경관의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I. 성경의 영감과 권위
딤후 3:16에서의 성경의 영감성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딤후 3:16). 성경의 영감을 증명하는데 본문은 대단히 중요하다. 많은 학자들이 이 교리와 관련하여 이 본문에 호소하고 있다. 이 본문에서 가장 먼저 다루어야 할 것은 “모든”(pa/sa)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와 그 범위에 관한 것이다.
“모든”(pa/sa)의 해석
개혁주의 신학에서 성경의 교리는 가장 중요한 교리들 중의 하나인데, 그 이유는 성경관이 잘못될 때 이로 인해서 기독교 신앙을 역사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의심하는 것을 정당화하거나 혹은 극단의 경우에는 종교적인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본질에 대한 바른 이해를 구현하기 위해서 많은 주석과 논문에서 자주 호소하였던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성경의 영감을 위한 내적인 논증을 위한 근거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구절로 인정받았다. 본문이 성경의 계시적인 권위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본문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들로 인한 논쟁이 있으므로 그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이 본문과 관련하여 맨 먼저 다루어야 할 점은 “pa/sa grafh. qeo,pneustoj”에서 “pa/sa”가 본문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대개는 pa/sa를 “모든”(all 혹은 every)으로 번역했는데,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것이다. The American Standard Bible, the New Testament: A Translation in the Language of the People(Williams), the New Testament in Modern English(Philips), the New Testament in the Language of Today(Beck), and the Revised Standard Version 등은 모두 the King James Version을 따라 pa/sa를 “all”로 번역하였다. 한편, the American Revised Version과 the New English Bible 등은 pa/sa를 “every”로 번역했다. 전자의 경우는 유기체적인 전체로서 집합적인 하나를 가리키는 반면에 후자의 경우처럼 “every”로 번역할 경우는 유기적인 통일체를 이룬 전체로서 하나를 가리키기보다는 그 안에 있는 개체적인 요소 즉 성경의 낱권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모든”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all” 혹은 “every”라는 두 가지의 경우로 모두 해석가능하다. 어느 것이 정확한 본문의 의미와 일치하는지는 이 두 해석이 가지게 되는 의미와 관련하여 학자들마다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으나, 결론적으로 미리 말하자면 그 의미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두 단어의 의미가 갖는 해석학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버나드(Bernard)에 따르면, “모든”이라는 말을 every라고 이해해야 할 이유로서, 그는 명사에 관사가 없다는 것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즉 pa/sa라는 말이 무관사 명사와 함께 사용되었을 경우 반드시 every로 번역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번역할 경우 성경은 유기체적인 전체로서 이해되기보다는 성경에 속한 각각의 책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헨드릭슨(Hendricksen)이나 거스리(Guthrie) 같은 학자들은 여기에도 예외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헨드릭슨은 관사가 없는 경우에는 언제나 “every”라고 번역한 A.R.V.의 해석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성경에는 선행하는 관사를 갖지 않고서도 “all”로 번역되어야 마땅한 경우가 성경에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도행전 2장 36절의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pa/j oi=koj VIsrah.l)”라는 경우에서는 명백하게 “all the house of Israel”이라고 번역되는 것 옳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경우로서 엡 2:21; 3:15; 골 4:12 등을 들고 있다. 이에 덧붙여 이들 학자들은 pa/sa와 함께 사용된 명사가 고유명사이거나 혹은 집합명사인 경우에는 pa/sa는 all로 번역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논리에 따라 물(Moule)은 “every inspired Scripture”라는 번역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면서 본문의 적합한 의미는 “the whole Scripture is inspired”라고 번역해야 그 완전한 의미가 전달될 수 있다고 했다. pa/san dikaiosu,nhn(마 3:15), pa,sh| sofi,a(행 7:22) 등의 구절들 역시 “all”로 번역된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두 개의 명사가 모두 고유명사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위에서 말한 원칙이 옳다는 전제하에서는 “all”로 번역한 것은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grafh.라는 말이 헬라어 성경에서 55번 정도 사용되었는데, 이들 모두가 특수명사 아니면 고유명사였다. 따라서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도 “all”로 번역되는 것이 옳다고 보는 입장이 학자들 사이에서 우세하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자면, “모든(pa/sa)”이라는 말이 분절명사와 같이 사용되었을 때는 해당 명사의 개체적인 요소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고 그 번역을 every로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모든”이 선행하는 명사가 집합적인 명사인 경우에는 유기체적인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여 “the whole” 혹은 “all”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따라서 본문은 “the whole Scripture is inspired”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헨드릭슨이 이미 바르게 지적하였듯이 “every”로 번역하든 아니면 “all”로 번역을 하든 어느 경우에든지 본문의 근본적인 의미가 달라질 정도로 번역상의 의미가 상이한 것은 아니며 성경의 영감과 계시적인 권위에 관한 디모데후서 3장 16절의 본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만일에 각각의 성경이 모두 영감되었다면 논리적으로 유기체적인 하나의 성경이 영감되었다는 것을 자명하므로 어느 쪽으로 번역되든지 본문의 근본적인 의미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다고 해야 옳다. 따라서 어느 쪽으로 번역하든지 성경의 본질적인 의미에 손상을 주는 정도의 차이는 없다고 본다.
“성경”(grafh)의 범위
신약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기록된 구약성경을 뜻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된 모든 경우는 예외 없이 그러한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성경 외의 고대의 헬라의 다양한 문서에서는 이 단어는 단순한 기록(a writing) 혹은 서신(a letter)을 뜻하는 것으로 통용되었다. 종종 이 단어는 여러 개의 문서가 연결된 분절적인 명사였는데, 그 때에도 그 의미는 거의 동일했다. 헬라적인 문서에서는 단일한 하나의 문서 혹은 다수의 분절이 가능한 합본을 의미하는 명사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단 한 번도 분절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단어는 일관되게 전체로서의 성경을 의미했다는 사실은 성경에 나타난 이 단어의 다양한 경우를 분석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그리스적 유대의 문화권 안에서는 개체적인 의미로 사용된 적이 있기는 하지만 신약성경에서만은 그렇지 않았다. 실제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경우를 살펴보면, grafh.라는 말은 단지 단편적인 글이나 구절을 의미하지 않고 “성경”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grafh.라는 말을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번역하지 않는다면 정확한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예컨대, “모든 글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써졌다”라고 한다면 이는 성경의 독특성을 심대하게 훼손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며 이는 사도가 글을 쓸 때 가지고 있었음이 명백한 의도에도 반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grafh.가 성경을 의미한다면 그 구체적인 대상과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학자들 중에는 성경을 당시에 성도들에게 인정을 받았던 모든 기독교 관련 문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본문에 선행하는 15절에서 디모데가 어릴 때 교육을 받았다고 할 때 교육의 내용으로서 성경(gra,mmata, 문자적으로는 “거룩한 문서들[sacred writings]”)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으므로 이런 포괄적인 해석은 지지될 수 없다. “거룩한 문서들”(sacred writings)이라는 분절적인 명사의 복수로 사용될 때는 이 말은 히브리 성경을 가리키는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초기의 유대문학에서 무수히 발견된다. 바울은 16절에서 이 “거룩한 문서들”을 언급하면서 당시에 좀 더 흔히 사용하던 용어로서 성경(grafh.)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요약하면 디모데의 어린 시절의 교육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단순히 거룩한 글 혹은 신앙서적이 아니라 “구약성경”이었고 16절에서 바울은 이 성경의 속성과 목회적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 성경이란 최고한 구약성경을 가리킨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더 나아가 문맥을 살피면, 바울은 성경을 디모데로 하여금 구원을 알게 하는 지혜로 묘사하고 있는 사실은 성경이 단순히 구약성경 이상의 것임을 암시한다. 구원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구약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그렇다면 바울이 구원의 관한 하나님의 지혜를 디모데에게 주었다는 성경을 언급할 때 구약성경으로 한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구약보다 더 나은 계시 즉 이미 오신 그리스도와 그 구속사역에 관한 사도들의 증언과 가르침을 포함하는 신약의 성경을 사도들이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성경에 포함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구약성경에 속하는 것으로 한정했다고 보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성경의 범위는 구약성경과 함께 디모데가 교육을 받을 당시에 교회에서 회람되고 있었던 신약성경까지 포함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 3:15-16).
위의 두 구절을 종합하면 다른 사도들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였고 이것을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주어진 계시의 말씀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당대의 인물인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구약성경과 같은 권위인 성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수님의 다른 사도들의 글 역시 계시적 권위로 받아들였음이 분명한데, 사도들의 가르침이나 글을 곧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은 신약교회의 확고부동한 사도적 권위의 원천이었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딤전 5:18)에서 전반부는 신 25:4에서 인용되었으나 후자의 것은 구약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눅 10:7에서부터 인용된 내용이다. 바울은 눅 10:7의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성경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근거로 논의를 정리하면 신약의 사도시대에 이미 성경으로 간주되었던 구약성경에 사도들의 증언이나 가르침이라는 특별한 범주의 내용이 부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신약성경의 내용이 성경의 범주에 속하게 된다는 사실을 확보하면서 딤후 3:16의 “모든 성경”의 범주에 신약의 기록들도 포함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에 대한 다른 보충 근거는 쉽지 않게 발견된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전 14:37)라고 말한다. 이 본문에서는 바울은 예배를 위한 규점을 제정하고 있는데, 그것을 주의 명령의 차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바울의 가르침을 예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에 수반하는 권위와 비교하면 열등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성급한 판단이다.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 . .”(고전 7:12)에서 바울은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리지 말고,”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라는 가르침과는 달리 독신에 관한 그의 권면은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하신 말씀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 출처는 직접적으로 주님으로부터라고 할 수는 없으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진리 가운데 있는 사도(요 14:26; 16:13)요 “주님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고전 7:25)의 말씀이라는 점에서는 그의 가르침은 곧 주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딤후 3:16에서 바울이 “모든 성경”을 언급하면서 사도바울이 구약성경으로 한정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을 외면하는 처사이다.
“하나님의 감동”(qeo,pneustoj)의 의미
qeo,pneustoj의 의미에 관해서는 우선 두 가지가 쟁점으로 떠오른다. 하나는 이 말 자체의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이 말이 “grafh”와의 관계의 문제이다. 이 말은 두 가지의 번역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 수동태의 동사로 번역할 경우 성경의 본질을 강조하게 되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부터 왔음을 뜻하게 되고, 반대로 능동동사의 형태로 읽게 된다면 성경의 특별한 기능성에 강조를 두는 해석이 가능하게 되어 성경은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감을 불어넣는 특별한 기능성과 관련한 의미로 귀결되게 된다.
신정통주의 신학자인 바르트(K. Barth)는 우선적으로 수동태의 의미로 이해해야 된다고 주장하면서고 동시에 그것의 능동적인 의미도 동시에 함축하는 것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주어지고 충만하게 되고 감독되는 까닭에 성경은 능동적으로 독자들에게 영감을 수여하고 성령을 알게 한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자신이 수동과 능동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알아차리게 해 준다. 수동의 의미는 그것의 기원에 돌리고, 능동의 의미는 인간의 실존에 호소하는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작용에 돌리고 있다. 즉 “성경이 영감되었다”는 말씀을 성경이 성령의 주도하에 기록되었다는 기원에 관한 진술로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성경은 읽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음성을 듣게 하는 능동적인 신비적인 작용에 관한 말씀으로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본문을 실존적인 관점에서 본문을 읽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신정통주의 신학의 성경관에서는 성경의 본문을 신적 계시를 중개하는 수단으로 보는데, 이 때 본문 자체는 문자로서는 어떤 계시적 의미도 갖지 못한 것으로 간주된다. 성경의 본문이 스스로는 아무 것도 전달할 어떤 계시적 내용이나 권위를 갖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록되었다는 신적 기원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가 본문을 통해서 의미있는 실존적인 체험을 할 때 비로소 본문은 계시를 중개하는 살아있는 언어가 되는 것이다. 즉 실존적인 인식의 과정 안에서 성경의 본문은 운동력을 가지고 비로소 말하게 된다. 성경의 본문은 인간 실존의 주관성을 떠나서는 그 스스로는 아무런 독립된 계시적 권위를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바르트를 비롯한 신정통주의신학자들에게 디모데후서 3장 16절의 능동적 해석의 의미가 훨씬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pneustoj”는 원칙적으로 반드시 수동태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고 능동의 의미는 이차적으로 유추될 수 있을 뿐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것처럼 본문이 수동태와 능동태의 의미를 가질 수는 있지만 그러나 본문과 같은 특별한 상황에서 두 가지 태의 의미를 동시에 다 갖는다고 보는 것은 지지될 수 없다. 이런 유형의 해석은 신정통주의 신학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것이다. 성경은 읽는 이들에게 영감을 준다든지 혹은 성경의 본문이 하나님의 영감을 보유하고 있는 특별한 문서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 없고, 성경 자체가 곧 하나님의 영감이라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만일에 그렇지 않다면 성경의 계시적 권위는 심대한 손상을 입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런 경우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전달하는 도구적 필연성만 인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중개하는 다른 여러 가지 가능한 수단 중의 하나의 탁월한 도구로 인정됨으로써 결국은 성경의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권위는 상실되고 말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독자에게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영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되어서도 안 되고 더욱이 하나님의 영감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감되었다고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 성경의 영감교리는 근본적으로 성경은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영감이라는 사실이 그 핵심이다.
그러나 우려스럽게도 성경의 영감과 관련한 오해는 상당히 일반적이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이런 오해는 흔히 발견된다. 예를 들면, 무어(Moore)는 성경의 영감을 본문을 기록한 저자가 영감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무어가 간과한 점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저자들이 영감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영감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헬라어 사전을 참조하면 qeo,pneustoj는 qeo,와 pne,w란 말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영감되었음”(inspired by God)을 나타내는 말로 풀이하고 있다. 크레머(Cremer)는 이 단어의 어근을 pne,w로 보지 않고 e.mpne,w로 보는데 그 이유를 신적 활동을 나타내는 동사로서 단순동사가 사용된 적이 없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그의 주장과 반대로 단순동사가 신적활동을 나타내는데 사용되고 있는 적어도 칠 십 인경(the Septuagint)에서는 지지될 수 없는 주장으로 드러난다(시 147:18).
-pneustoj는 동사적 형용사이며 동사어근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넓은 의미에서 이런 유형의 단어들은 분사들인데 왜냐하면 이런 단어들은 동사와 형용사적인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 근본적인 의미는 수동이다. 이 단어가 어떻게 조성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동사적 형용사들이 제 1 혹은 제 2 부정과거(aorist) 수동태의 동사어근에 -toj라는 접미사를 갖는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pneustoj는 -toj와 pne,w의 제 1 부정과거 동사어근인 pneu와 결합된 형태인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pne,w는 짧은 자음꼬리로서 엡실론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부정과거 수동태 어근과 결합하기 위해서 시그마가 붙어 pneus가 되었다. 즉 -toj가 제 1 부정과거 수동태 어근과 결합하고 그리고 qeoj와 합쳐진 것이다. 따라서 의심의 여지없이 qeo,pneustoj는 그 본래적인 의미에서 수동의 의미는 갖는데 이와 같은 꼬리를 가진 다른 단어들 역시 의미에서 있어서는 수동의 뜻을 가진다(물론 여기에도 약간의 예외가 존재하는데, 헬라어 사전에서 그런 경우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리델(Liddell)과 스캇(Scott) 같은 학자들은 수동의 의미를 갖는 동사적 형용사가 사용된 경우를 제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본문에 관한 한 어형론적인 혹은 사전 편집적 의미에서 qeo,pneustoj가 수동적인 의미로 해석되지 말아야 되는 움직일 수 없는 이유란 없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책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전적으로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계시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그들이 불신가운데 있음을 증거한다. 반대로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은 이들이 바른 믿음 안에 있음을 증거한다. 그 이유는 성경의 계시적인 기원과 권위에 대한 확신은 전적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성경의 감동이 없이는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리를 수납하거나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자연인의 지성적인 인식은 타락으로 인한 지적왜곡(noetic effect of the fall)을 겪고 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죄인들의 자의식에도 하나님의 지식은 계속적 주어지고 있으나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적대적인 관계에 있으므로 기쁨과 신뢰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의존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자연인의 윤리적인 마음의 상태는 주어진 특정한 증거의 인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 결과적으로는 기존의 불신을 강화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1:32). 결국 객관적인 정합성과 주관적인 인식과의 괴리와 불화가 상존하는 이유는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을 인식할 때 그것이 이성의 활동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전 존재의 상태가 그것에 연루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잘못된 관념이 있는데, 그것은 이성은 객관적이고 믿음은 주관적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이다. 이성의 작용은 근본적으로 믿음 아니면 불신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이성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도달했다고 믿는 결론은 그러나 사실은 처음에 이미 전제된 믿음에 따른다. 이런 면에서 이성은 객관적이지 않고, 믿음 또한 객관적인 사실의 바른 인식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주관적인 것이 아니다.
진리를 파악하는 일은 전적으로 전 인간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며, 성경은 이를 “마음의 변화”로 표현한다. 왜냐하면 마음은 인간의 전 존재의 중심이며 마음의 변화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변화를 수반하는 본질적인 변화이기 때문이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 3:5)은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임하신 성령의 사역의 결과이다.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사역은 우리의 어두워진 지성을 회복하여 만물을 지으신 이가 곧 기독교의 하나님,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심을 보게 한다. 중생의 직접적인 효과 중의 가장 중요한 것은 죄로 인해서 비뚤어 져 있던 이성의 회복이며 그 결과 종교적인 지식에 대한 바른 이해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바른 이해는 언제나 “성령의 내적 조명”(testimonium internum Spiritus sancti)으로만 가능하게 된다. 성령의 내적인 조명이 없다면 즉 성령의 조력이 없다면 복음의 이해는 관념적 피상적인 이해에 그치게 되고 말 뿐이다. 바른 지성은 언제나 회복된 마음을 전제로 한다. 이런 면에서 지성과 도덕성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를 가진다.
처음의 논의로 돌아가서,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인 것을 아는 것은 이성의 힘만으로는 안 되고 성령의 내적인 조명으로 인해서 마음이 새롭게 되고 이성의 능력이 회복될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임을 확신하고 고백하는 것은 다른 어떤 논증이나 현대의 과학적인 증거로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 주어지는 일이다.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다양한 증언과 체험, 다른 책들과 비교할 때 드러나는 우월성과 심오함, 지적이고 아름다운 문체와 영속적인 호소력 등등이 성경의 신적 권위를 뒷받침하는 부수적인 증거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성경의 영감성을 사람들에게 확신케 하는 일에 있어서는 이차적이며 제한적인 자료들일 뿐이다. 성경의 신적 기원에 대한 확신으로 이끄는 일은 전적으로 성령에게 속한다.
“이 모든 점들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풍성하게 증명하는 논거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의 틀림없는 진리와 하나님에게서 온 그 권위를 우리가 완전히 깨달으며 확신하는 것은 성령이 내면적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말씀으로 또 말씀과 함께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WCF 1, 5).
“하나님의 감동”(qeo,pneustoj)의 위치
현재의 단계에서는 성경의 영감과 관련하여 수동태와 능동태 사이의 의미의 차이는 매우 심대하다는 점과 수동태의 의미로 해석되어야만 하는 신학적인 이유를 염두에 두고서 다음의 논의에 들어간다. pa/sa grafh. qeo,pneustoj kai. wvfe,limoj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qeo,pneustoj가 한정적으로 혹은 서술적으로 사용되었는지를 규명하는 일이다. 논의를 진행하기에 앞서 형용사가 서술적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주어와 서술어를 연결하는 be와 같은 연사(連辭)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미리 밝혀둔다. 본문의 경우에는 qeo,pneustoj의 의미가 한정적 혹은 서술적인 의미 두 가지 모두의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따라서 어느 쪽으로든지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만일에 서술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면 qeo,pneustoj 앞에 is가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경우 qeo,pneustoj는 서술적인 형용사일 것이다. 그래서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also profitable”로 풀이된다. 반면에 한정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면 “All God-breathed Scripture is also profitable”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쿡(Cook) 같은 학자는 대개의 경우 한정적인 형용사로 간주되어야 할 경우에는 형용사는 명사에 앞선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본문이 “All God-breathed Scripture is also profitable”라고 번역되어야 할 경우라면, 이런 경우 헬라어 본문의 어순은 일반적으로 pa/sa qeo,pneustoj grafh.라고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쿡의 주장과 같이 반드시 모든 경우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 무관사적 형용사들의 경우에는 그것이 서술적인지 혹은 한정적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관사를 동반하는 한정적인 형용사들은 명사 앞에 오고 반드시 관사 뒤를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런 법칙이 무관사적 형용사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데 어려움이 있다. 비록 관사를 동반하는 한정적 형용사들이 일반적으로 명사를 선행하지만, “무관사인 한정적 형용사들은 명사나 명사구 뒤에 따른다는 것이 법칙이다.” 로버슨(Robertson)은 무관사인 한정적 형용사들이 그들이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명사 뒤에 따르는 경우를 제시하고 있다.
로버츠(Roberts)는 성경에서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21번의 다른 경우를 살펴보면서 이 때 형용사는 한정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디모데전서 4장 4절의 말씀이다. 여기에서 형용사와 명사 사이에 얼마의 단어가 끼어 있다. 대개의 경우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구절에서는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동일한 구조를 가진 상황에서는 형용사는 한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또한 모세 오경의 칠 십 인경에서도 몇 가지의 예를 찾아내고 있다(창 1:21, 30; 출 12:6; 18:26; 신 1:39; 17:1). 이들 성경 구절도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같은 순서로 배열되어 있으며 형용사들은 틀림없이 한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현재 논의가 되고 있는 디모데후서 3장 16절의 경우를 생각할 때, 지금까지의 논의를 근거로 한정적인 형용사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일반적인 법칙을 적용해서 해당본문을 이해해야 할 것으로만 주장하기보다는 이 본문이 가진 특수성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말하자면 pa/sa grafh. qeo,pneustoj kai. wvfe,limoj에서 성경이라는 단어가 위에서 로버츠가 언급한 것과 동일한 유형의 명사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위에서 이미 다루었지만 grafh.는 구약의 성경과 그리고 당시에 교회에 계시적 권위를 가진 글로서 회람되고 있었던 사도들의 가르침과 글을 다 포함하는 오늘날의 성경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grafh. 자체는 표면적으로 관사를 가지고 있지 않으나 관사를 가진 것(the Bible)으로 이해해야 한다. 또한 서술적인 형용사의 경우 일반적으로 명사 앞에 선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법칙이지만, 이 법칙 역시 강제적 규정은 아니라는 점도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위너(Winer)가 바르게 지적했듯이 헬라어의 경우에 정확하게 동일한 경우가 아니면 일률적인 법칙의 대상으로 간단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성경의 몇몇 구절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서술적으로 해석되는 경우가 있다(롬 7:12; 고전 11:30; 고후 10:10). 이들 성경 구절을 엄밀하게 분석하면 형용사를 한정적으로 해석하면 그 뜻이 매우 애매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디모데후서 3장 16절과 정확하게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위에서 밝힌 대로 이들 구절을 가지고 디모데후서 3장 16절이 서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아마도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qeo,pneustoj를 서술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에 반대하는 가장 두드러진 이유는 kai가 문장의 의미를 구현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The New English Bible에서는 kai를 빼버리고 해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kai.를 해석하지 않고 간과한 것은 전적으로 임의적인 것이며 성경의 영감으로 주어진 구성요소는 각기 그 중요성이 있으며 그것은 그 본문에서 대단히 유용하고 합리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무시한 처사라고 할 것이다. 알포드(Alford)는 kai의 강의적 혹은 접속사적 용법이 적극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이 구조적으로 상당히 애매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kai의 역할은 강의적인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그와 유사한 경우를 들어 설명한다. 예를 들면 눅 1:36, 행 26:26, 롬 8:29과 갈 4:7절 등이 그 경우인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 구절에서도 kai는 강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구절들의 경우는 디모데후서 3장 16절의 kai는 강의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설득력있는 증거를 제공한다. 알포드는 만일에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kai를 강의적으로 이해한다면 해당본문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뜻을 연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즉 kai는 하나님의 영감인 성경이 지닌 유익(wvfe,leia) 혹은 목적을 뜻한다는 것이다. kai.를 강의적인 것으로 번역하면 본문의 의미는 무리 없는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all Scripture is profitable.”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문법적으로만 논하자면 qeo,pneustoj를 한정적인 형용사로 이해해야할지 혹은 그 반대로 서술적인 형용사로 번역해야할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문법적인 관점에서는 두 가지의 해석의 가능성이 다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의 문법적인 가능성 중에서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한다면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이 점에 관해서는 로버슨이 분명하게 그 차이를 지적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서술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서술적 형용사는 그 해당문장의 요점이 되고, 한정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명사나 혹은 명사구에 반드시 필연적인 것은 아닌 부가적인 특질을 나타내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문법적인 관점에서 매우 기본적이지만 현재 논의되고 있는 디모데후서 3장 16절의 해석에 대단히 의미심장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qeo,pneustoj는 결코 부가적인 혹은 한정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qeo,pneustoj는 wvfe,limoj만큼이나 중요한 요점에 해당한다. 사도 바울은 사도적인 성경의 중요성과 가치를 보이기 위해서 pa/sa grafh를 15절의 i`era. gra,mmata와 대조하고 있다. 이는 그의 제자인 디모데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을 권위있게 뒷받침하는 또한 목회적인 주요한 수단이 되는 성경의 가치를 가르치기 위한 의도에서 글을 쓰고 있는 바울에게는 성경의 신적인 기원을 언급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qeo,pneustoj는 grafh.의 부차적이고 한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상 본문의 요점이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바울은 먼저 성경의 신적 기원을 말하고 그것의 실천적인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요점을 바울은 kai.라는 강의접속사로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가장 중요한 본성은 그것의 신적인 기원으로서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따라서 바울의 말의 뜻을 풀이하자면, 성경 자체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영감으로서 그것은 또한 매우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에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이 아니라면 신자는 영적인 싸움에서 사탄과 맞서 싸울 무기를 갖지 못한 것이 되고,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느 부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지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감동”을 해석함에 있어서, 흔히 범하기 쉬운 잘못은 감동의 대상이 저자가 아니라 성경 자체라는 사실이다. 흔히들 성경의 영감의 이해할 때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들을 감동하시고, 저자들이 성령에 의해서 감동되었다는 그 사실 때문에 그 결과물인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가지고 있는 거룩한 문서라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3장 16절의 해석을 근거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성경이며, 성경은 인간적인 저자의 영감을 거친 이차적인 산물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감과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영감이 된 것은 성경이고, 따라서 성경의 영감의 교리는 하나님의 보존의 섭리를 강조하는 것이 된다. 성경은 성경의 저자들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듣는 말씀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당대의 저자 외에 후의 다른 시대의 여러 장소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동일하게 전달되도록 하나님이 보존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고 이것이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강조하고자 한 사실이다.
성경은 인간에 의해서 기록되었으나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영감된 계시 그 자체이다. 즉 성경의 내용과 구성과 문체와 시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해서 규정되었고 따라서 성경은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
성경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확신과 용기를 갖게 하는 근원이 된다. 엘리야는 그의 기도 때문에 더욱 유명하게 된 사람이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구한 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 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 5:16-18). 그가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비가 오지 않기를 구한 기도는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신 11:17).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53) 저희가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눅 8:53~54).
성경의 말씀을 불신하거나 불순종하는 일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것과 같다. 성경이 곧 하나님의 영감이므로 성경의 어떠한 말씀에 대해서도 불순종하거나 불신하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죄가 된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을 믿지 못하는 그의 제자들을 꾸짖으셨던 것이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눅 24:25). 또한 성도들은 주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가르침을 지키고 순종해야한다(“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요 15:20]).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준행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벧후 3:2).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에 대한 궁극적이 기준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이 말씀에서 “진실한”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지 않고 명사형으로서 “진리”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참되고 거짓이 없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의 완전하고 궁극적인 기준이 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즉 무엇이 진리이며 무엇이 진리가 아닌지를 논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모든 진리에 대한 주장이 검증되어야 할 참조점(reference point)인 것이다. 즉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주장이나 이론은 진리성을 결여했다고 단정할 수 있다.
탈현대주의의 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다원주의(pluralism)는 성경의 절대적인 진리성과는 분명하게 역행하는 사상이다. 다원주의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관점과 동등하게 진리에 대한 타당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어떤 다른 이들의 종교나 윤리적 기준이 우리 자신의 그것과 다르다고 해서 단순하게 틀렸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다원주의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가진 가치 혹은 진리에 대한 주장은 상대적일 뿐이므로 절대적인 진리나 윤리적인 표준에 대한 배타적인 주장은 용인될 수 없다.
II. “Sola Scriptura”의 원리와 설교
설교는 그 구성과 전개방식 그리고 형태에 따라 교리설교, 인물중심의 설교, 삼대지설교, 연역적 설교와 귀납법적 설교 등 실로 다양하게 세분화될 수 있다. 설교의 방법에 있어서 정해진 표준이란 있을 수 없다. 실제로 성경의 선지자와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언약백성들에게 전달하기를 기대했던 메시지를 비유, 대화, 이야기, 시, 편지, 상징 등의 방법을 통해서 전달했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에 있어서 청중과 상황에 적합한 다양한 방법들을 매우 자유스럽게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 사도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그는 자신의 설교와 가르침을 방법을 탄력적으로 선택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20~21). 따라서 설교의 방법이 반드시 어떠해야 한다는 고정된 틀이 있다고 말하거나 혹은 어떤 방법이 반드시 다른 방법보다 항상 더 낮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설교를 하든지 반드시 성경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고 그리고 그것을 청중의 변화라는 목표의식 가운데서 구성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한다는 이 원칙은 반드시 일관되게 고수되어야 한다.
칼빈: 견실(堅實)한 강해설교자
역사적으로 성경의 무오한 신적권위를 믿었던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 지속적으로 고수되어온 설교는 바로 “강해설교”이다. 설교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이다. 성경의 본문이 우리들에게 전달하고자 의도하는 메시지를 설교의 주 내용으로 삼는 강해설교는 개혁주의 설교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주의의 전통 안에서는 우선 성경의 본문을 정하고 그 본문의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것을 설교의 제 일의 목표로 삼았는데 그 까닭은 상황(context)은 변화할지라도 본문(text)은 변하지 않는다는 성경의 항구적 진리성과 진정성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결국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계시라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음을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종교개혁자 칼빈(John Calvin)은 평생 설교자로서 강해설교에 주력했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일생 소논문, 기독교강요, 계시록을 제외한 신약성경 주석과 모세오경, 여호수아, 시편, 이사야에 관한 주석을 썼고, 강의록 그리고 매 주 5편의 설교문을 작성했다. 이들 모든 저작의 공통점은 그것이 성경 본문의 강해였다는 점이다. 딜렌버그(John Dillenberger)는 말하기를 “칼빈은 자신의 전체 신학적인 노력은 성경의 강해였다는 점을 언제나 분명히 하였다”고 했다. 이런 사실은 운명하기 전에 칼빈이 남긴 유언과 고백에서도 드러난다. “나는 설교와 주석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전하고 겸손하게 전하기를 노력했고 그 거룩한 말씀을 강해하는 일에 신실하기만을 애썼다.” 신학자와 목회자로서 그의 일생의 노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하는 것이었다. 그의 사역은 성경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깊은 인식에 의해 촉진된 것이었다. 성경은 언제나 그의 가르침의 중심이었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성경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스스로의 권위를 가진 계시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권위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경의 강해라는 그의 노력은 정점은 역시 설교였다.
그의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종류였는데, 그것은 강해설교였다. 이것에 관한 가장 좋은 예는 1538년 부활절 설교 후에 제네바 시 의회의 해임으로 제네바의 성 베드로 교회(St. Peter's Church of Geneva)의 강단을 떠났다가 1541년 9월 다시 제네바로 돌아왔을 때 그는 부활절 설교를 한 다음 본문에서부터 다시 강해를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칼빈은 성 베드로 교회에서 25년 동안 설교자로서 사역하는 동안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강해설교는 했다. 그 예외라는 것도 그의 전 사역기간을 통틀어 12편이 채 못 된다. “주일 예배에는 언제나 신약성경을 설교했고(몇 번의 주일오후에 시편을 강해한 것을 제외하고), 주중에는 구약성경을 설교했다.” “부활절이나 성탄절이라고 해서 특별한 이에 관련된 성경구절을 택하지 않고 강해설교의 흐름을 이어갔다.”
칼빈이 이렇게 강해설교에 주력한 이유는 명백하다. 그는 설교자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거나 왜곡하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운 일로 생각했다. “양과 같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등불과 같이 비추어야만 할 말씀을 숨겼거나 억압하고 말았습니다. . . . 주님 비참한 나에게 이제 남겨진 것은 나의 공과에 따라 심판하시지 않기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무서운 일(fearful abandonment of thy Word)에서 나를 건져 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는 일뿐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전하는 대신에 자신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실제적인 것이었다. “설교에 임할 때 설교자가 자신의 생각과 환영을 가지고 오는 것은 금물이다.”
정리하자면, 설교자로서 칼빈은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말씀이라는 믿음에 완전히 지배를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바치는 경외를 성경에도 꼭 같이 바쳐야 한다. 그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나오고 인간의 어떤 것도 그것에 섞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이 믿음은 그로 하여금 강해설교에 헌신하도록 만들었는데, 그 자신의 믿음 안에서는 강해설교 외에는 하나님의 엄위한 계시를 달리 더 적절하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강해함으로써 설교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말씀하고자 하신 바를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적어도 칼빈에게 강해설교는 성경의 무오성과 신적 위엄에 대한 그의 믿음에 부합하는 그리고 그 믿음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오직 성경만으로”를 고수한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 강해설교의 전통은 중단 없이 이어져 왔다.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설교자로 봉직했던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인 로이드 존스(D. Martyn Lloyd-Jones)는 로마서 강해를 완료하는 데 수년이 걸린 것은 유명한데, 거의 한 설교에 한 구절만을 다룰 정도 본문의 의미를 세밀하게 연구하였다. 다른 유명한 강해설교자로는 존 스토트(John Stott), 딕 루카스(Dick Lucas), 영국의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스코틀랜드의 윌리암 스틸(William Still), 필립 젠슨(Philip Jensen)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데이비 쿡(David Cook)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아마도 미국에서 현재 가장 탁월한 강해설교자임이 분명한데, 그는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주제설교를 누구보다 강하게 비판하고 강해설교의 신학적인 우월성과 성경적인 적합성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이론가이기도 하다. 척 스미스 또한 독특한 나름대로의 방법을 동원하기는 하지만 정기적으로 강해를 설교를 행하는 설교자로서 정평이 나 있다.
성경의 무오성과 강해설교
강해설교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하는 것이 설교의 근본원리임을 표방하는 설교이다. 강해설교가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 고수되어 온 이유는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음은 자명하다.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여기는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성경 이외에 다른 어떤 사상이나 철학도 설교에서 우선순위를 차지할 수는 없었고, 당연히 신적 권위를 지닌 성경이 최 우선순위에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강해설교는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설교자들의 믿음의 표현이자 열정이었던 것이다.
칼빈주의적 정통주의를 지향하는 설교자들조차도 소위 “강해설교”란 선택할 수 있는 많은 설교유형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이는 전적으로 자신의 탁월한 신학적 유산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오해라고 할 수 있다. 강해설교는 다양한 설교의 방법 즉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메시지의 전달방법의 한 유형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강해설교는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라는 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설교의 “규범적 원리”를 나타낸다. 즉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말씀으로서 다루고 그것만을 설교의 내용으로 삼는 설교원리의 실현이 곧 강해설교인 것이다.
다른 주요한 설교유형과 비교하자면, 주제설교는 먼저 특정한 주제를 선정하고 그 주제에 연관된 여러 성경구절을 전체 성경에서 인용하고 다루는 방식이다. 주제설교의 경우 주제와 본문 사이의 상관성이 그리 뚜렷하거나 필연적이지 않은 편이다. 한편 본문설교는 해당 본문의 요점을 설교의 요점으로 삼지 않는다. 이에 비해서 강해설교는 오직 특정 본문에만 집중하고 그 본문에서 제기된 주제만을 다루는 것이기에 설교와 성경 본문 사이의 사상의 교환성과 합치성이라는 관점에서는 강해설교가 주제설교 혹은 본문설교보다 훨씬 더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전달과정에서 저자의 사상과 동시대의 문화적인 반영이 있으나 설교의 내용은 성경 본문의 의미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강해설교는 설교자의 중계역할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적 진리의 선포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을 신봉한다면, 우리의 설교는 반드시 성경적 강해여야 한다. 설교자가 성경의 무오성을 고수한다면 강해설교는 설교자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것이다. 물론 성경의 무오성을 믿지 않는 설교자도 강해설교를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윌리암 바클리(William Barclay)는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을 적극적으로 고수하지 않으면서도 강해설교에 집착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 바클리는 자신의 신념과 설교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무오한 계시라고 믿지도 않는 성경의 자구(字句), 문장, 시제와 태, 구문론, 어형론 등에 연연하는 일은 실로 모순이 아니던가! 성경의 글자, 문장, 특정한 어법과 문법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감의 결과라고 믿지도 않는 마당에, 설교할 때 그런 따위에 매여야 할 논리적 필요가 과연 있는 것인가!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을 갖지 않는 설교자에게 강해설교란 반드시 필연적인 것은 아니고 기껏해야 단지 그의 자의적 선택일 뿐이다. 이같이 모든 강해설교자가 반드시 성경의 무오성을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을 가진 설교자라면 그런 그에게 강해설교는 필연적인 귀결이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진리를 가졌다면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믿음은 설교자의 역할을 신적 진리의 중계자로 규정한다. 설교자는 창조적인 사상가가 아니라 계시의 해석자이며 받은 것을 전하는 전달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설교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막중한 책임은 자신이 받은 완전한 진리를 정확하게 그리고 충실하게 전달하는 것에 있다. 이것이 바로 개혁주의 설교자가 갖는 자기 정체성이다. 전달자로서의 설교자의 자기 정체성은 설교자로서의 사역의 보람과 의의를 청중의 반응보다는 청중에게 전달한 메시지의 계시적 충실도에서 찾도록 유도하는데, 이는 항상 설교의 과중한 부담 아래 있는 설교자의 내적인 확신의 근거가 되고 설교하는 일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크게 공헌하게 된다.
최근의 경향
최근에 흔히 듣는 말로서, 설교할 때는 무엇보다 청중들이 느끼는 필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설교는 제목설교를 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이를 위해서 설교자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위한 제목을 선정하고 이 제목에 관하여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찾게 된다. 그러나 이런 주제설교의 가장 큰 문제는 설교자가 성경의 본문에 깊이 빠져들지 못하고 자신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특정한 본문에 부당하게 생각 없이 주입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설교는 특히 구도자예배에 관심을 갖고 있는 교회나 혹은 미국의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릭 워렌(Rick Warren) 그리고 빌 하이벨스(Bill Hybels), 그리고 대중의 주목을 받는 이들을 따르는 대형교회의 목사들에게서 크게 환영받고 있다.
이들의 설교는 공통점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이들은 결코 강해설교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강해설교를 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이 모두 강해설교를 명시적으로 반대한다는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워렌같은 경우는 자신은 강해설교를 한다고 믿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강해설교를 한다고 할 수 없는 때가 많다. 워렌의 경우 『릭 워렌의 목회의 연장통』(Rick Warren's Ministry Toolbox)에서 강해설교를 성경의 본문을 설명하고 사람들의 변화를 위해서 적용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빠져있는 것은 석의(exegesis)를 통해서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연구하는 과정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본문을 잘못 설명하고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설교를 불과 몇 편만 들어보면 그의 설명과 적용이 본문의 의미에서 완전히 빗나간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본문이 의도하지 않는 설명과 적용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본문의 의미를 건실하게 파악해야 하고 그리고 적용해야 한다. 말하자면 본문의 주석적 이해가 본문의 설명보다 선행하고, 본문의 설명이 적용보다 선행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본문을 설교자가 주석적으로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제대로 본문을 석의할 수 있고 본문의 의도한 바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에, 클라인 스노그래스(Klyne R. Snodgrass)가 지적한 대로, 많은 설교자들이 석의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강조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정작 그것을 바탕으로 설교에 효과적으로 사용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설교하는 일에 익숙해 져 있는 오늘의 설교자들에게 석의의 과정은 몹시 수고스럽고 짜증스럽기까지 한 과제로 인식되고 있고, 바로 이런 까닭에 강해설교는 더욱 접근하기 힘든 일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강해설교라고 하지만 정작은 강해설교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고, 이들의 설교 스타일을 모방하려는 과정에서 강해설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전파되는 것이다. 결국 이들의 영향력이 세계적으로 확대되면서 강해설교는 뒷전으로 밀려나 현대교회에서는 유용하지 않다는 인상을 심어주며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기껏해야 주제 혹은 본문설교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성경 본문의 석의를 저자의 의도보다는 청중의 관심사와 필요를 중심으로 한 설교의 경향은 이미 지난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현대적인 위험”은 지그프리드 모우어(Siegfried Meuer)가 이미 1960년대에 그 폐해를 경고한 적이 있었다. 모우어는 자신이 말한 설교의 현대적인 위험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미 1920년대에 해리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이 정확하게 말해 주고 있다고 보았다. “설교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관심사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 . . 설교는 반드시 청중이 당면하고 있는 실제적인 문제를 건드려야 한다.”
포스딕의 이런 주장은 현대의 설교를 저자 중심의 해석학에서 독자 중심의 해석학으로 나가게 하는 물꼬를 틀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곧 이어 1930년대에 엘리옷(T.S. Eliot)과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가 주도한 신비평학(New Criticism)이 등장해서 본문의 의미는 저자와 독립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본문에서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충실하게 탐구하는 설교의 정신이 퇴색되고 나중에는 급기야 독자의 창의적인 해석이 의미를 창출한다고 하는 독자비평까지 등장하게 된 일은 포스딕을 전후한 현대주의의 발전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여기에서 대중의 각광을 받고 있는 하이벨스의 목회적 충고를 한 번 인용해 보자. 그의 주장은 분명히 현대주의의 흐름에 서 있음이 분명하다.
불신자들은 궁극적으로 구매자들이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호감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들은 우리들이 행하는 매 설교에 대해서 이렇게 묻는다. ‘우리가 그런 설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만일에 그들이 우리들의 설교에 무관심하다면, 우리가 아무리 열정적으로 전한다고 해도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떠난 것이다.
그의 주장은 분명하다. 목사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선포하시기를 원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듣기를 원하는 관심사를 설교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로 모이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관심사를 설교의 내용으로 다루는 일은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들린다. 이 얼마나 실용주의적인 주장인가! 성도들이 모이지 않는 목회적인 위기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하이벨스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성경에서 이미 경고한 말세의 사조에 가깝다.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후 4:3-4).
한국의 개혁파 교회는 성경의 계시적 권위와 무오성을 수용하는 교리적인 건전성에 있어서는 대단히 우수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의 무오한 계시로서의 성경에 대한 믿음을 교리적으로는 전폭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설교와 교육에서 그 믿음을 저버리는 모순적 경향이 한국교회에서도 농후하다. 구체적으로 지적하자면,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오하고(inerrant) 절대적으로 무류한(infallible) 계시라는 믿음을 설교 행위에서도 드러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것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설교자 자신이라고 믿고 그 결정은 실용성 즉 얼마나 교인들이 반응할 것인가에 따른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설교자의 설교인식일 것이다. 설교를 설교자의 재능과 능력에 달린 것으로 보는 “잘 한다” 혹은 “못 한다”는 식의 설교의 기예(技藝)적 이해가 설교자와 교인들 사이에 확산되었다. 그 결과 한국교회의 설교는 성경적인 설교에서 멀어져서 체험적, 윤리적, 그리고 실용적인 접근에 치우쳐 흐르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한국교회의 상황은 현대주의의 영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특히 미국에서 여론을 주도하는 대형교회들의 설교자들의 사상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설교와 신앙서적에 접할 수 있는 기회는 이전 세대에 비해서 훨씬 많아졌고 교인들의 지적 수준은 높아졌으나 교회는 갈수록 그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는 이런 기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런 고민은 비단 한국교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교회에도 꽤 오래된 고민이었다.
그 주된 원인에 대해서는 제프 레이(Jeff D. Ray)가 바르게 지적한 대로, “교인들의 사고와 생활이 점차 세속화되어 가는 것만이 아니라, 교회가 설교에 중대한 약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데 그 전부는 아닐지라도 한 중요한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 없이 전달하는 것에 제 일의 목표를 두고 있지 않은 설교는 교회의 중대한 약점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개혁교회는 로마교회처럼 강력한 상징들(symbols)이나 화려한 의식을 갖고 있지도 않고, 오순절교회처럼 개인의 체험을 강조하는 빗나간 카리스마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개혁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로 일어서기도 하고, 그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여 쇠하기도 하는 것이다. 설교가 교회의 약점이라는 이 기막힌 상황을 극복하지 못한 채로는 어떤 목회적인 대안이나 프로그램으로도 교회의 부흥을 기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세워졌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왕좌에 앉히지 않고 단지 부차적인 위치에 처하도록 하는” 설교의 문제는 곧 오늘날 교회 문제의 원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월터 카이저(Walter Kaiser)는 현대교회의 설교가 본질적 원리에서 탈선하여 지극히 부적절하게 되어버린 병리적 상황을 논하면서 그 원인을 진지한 강해설교에서 멀어진 까닭이라고 진단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많은 부분에서 건강하지 못하다는 이 전 세계적인 현상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교회는 방부제와 인공색소 그리고 화학조미료로 범벅이 된 불량식품을 지속적으로 먹은 까닭에 지극히 쇠약해지고 말았다. 교회는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영양결핍으로 인해서 너무 오랫동안 고통을 받은 결과 마침내 자신들의 무기력과 허약함이 해롭고 치명적인 음식을 섭취한 결과라는 사실 조차도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암 8:11)이 세계의 모든 교회에서 더욱 거세지고 있고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강해설교야 말로 이 시대 교회의 힘과 생명력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강해설교의 중요성과 유효성을 재발견함으로써만 다가오는 세대가 영적인 기회를 포착하고 사탄의 권세의 거센 도전을 거뜬하게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III. 강해설교의 회복
말씀을 가르치라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권했다. “(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2). 어떤 설교이든지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목적하신 바를 정확하게 가르치는 것에 집중하지 않는다면 성경을 주신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하지 못 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설교의 본질을 재인식하기 위해서는 설교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고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그리고 계시록은 하나님의 뜻이 진리를 전하는 복음전파를 통해서 성취되고 따라서 그것을 전할 것을 권하는 많은 예를 발견할 수 있다. 성경적 설교는 사도적 전통 안에서 확립되었다. 즉 교회가 가르쳐야 하는 것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글을 포함해서 성경으로 인정된 하나님의 계시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성경의 근거를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딤전 4:5~6).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딛 2:1).
설교의 성경적인 이해
설교와 관련된 중요한 몇 몇 단어를 살펴보면서 설교의 성경신학적인 이해를 도모할 필요가 있겠다. 게르하르드 프리이드리히(Gerhard Freidrich)는 “설교하다” 혹은 “선포하다”라는 뜻의 헬라어 동사 khru,ssw에 대한 연구에서, 신약성경에서는 설교에 대한 묘사에서 무려 33개의 서로 다른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설교의 의미가 얼마나 광범위한가를 짐작하게 한다고 했다. 그 중에서 몇 몇 중요한 단어와 용례를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마 4:17과 행 28:31에서 khru,ssw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가 가리키는 바는 설교행위를 의미하는데, 특히 바울이 딤후 4:2에서 디모데에게 “가르치라”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자신이 디모데에게 이미 가르친 성경의 말씀을 목사로서 교인들을 향한 설교의 내용으로 삼을 것을 명령한 것이다.
euvaggelizo,menoi는 khru,ssw와 교호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단어로서 행 15:35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주의 말씀의 좋은 소식”을 설교한 사실을 묘사할 때 사용된 말이다. 이와 같은 용례로서 눅 8:1과 행 8:4~5을 들 수 있다.
marture,w는 “증거하라” 혹은 “증언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단어는 법정적인 진술의 의미를 강하게 가지고 있어서 최초로 목격하거나 일차적인 지식을 소유한 자로서 제 삼자에게 사실 혹은 진리를 전달하는 행위를 묘사한다. 세례 요한이 빛에 대해서 증거할 때(요 1:7~8) 그리고 사도 요한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계 1:2) 사용되었다.
dida,skw는 특히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과 목적에 초점을 두는 단어이다. 예수님의 대위임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라”라고 했을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칠 것을 권면했을 때(딤전 6:2; 딤후 2:2)도 이 단어가 역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종종 khru,ssw나 marture,w와 연계되어 사용되었는데, 그 가르칠 내용이나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의 길”(마 22:16)과 “하나님이 말씀”(행 18:11)이었다.
설교에 관한 위의 네 개의 동사들 외에도 신약성경에는 다른 많은 동사들이 설교의 성경적인 양식을 강조하거나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행 8:31에서 에디오피아 내시가 이사야 53장을 읽는 중에 그 뜻을 몰라서 빌립을 도움을 청했을 때 o`dhge,w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문자적으로 “안내하다”는 뜻이지만 그러나 정확하게 이는 구약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밝히는 설교행위를 가리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딤후 2:2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에게 부탁하라”고 했을 때 “부탁하다”라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parati,qhmi이다. 이 말 역시 선포 혹은 설교하는 행위로서 그 내용은 바울 자신이 이미 디모데에게 전해주었던 복음이었다.
눅 24:27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시는 도중에 두 제자를 만나서 동행하신 그 때에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설교의 높은 차원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설명하다”라는 말은 diermhneu,w인데 여기에서도 강조되고 있는 바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행하신 설교 역시 그 내용은 구약에서 자신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는 사실에 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은 구약성경에 관한 예수님의 설명(opened to us the Scripture[KJV], dianoi,gw)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dianoi,gw의 내용, 설명해 주신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성경이었다.
이외에도 설교에 관한 단어와 용례는 신약성경에 더 있지만 지금까지의 간단한 연구로도 한 가지의 사실이 분명해 진다. 위의 모든 성경적인 용어의 문맥을 연결하는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과 성경을 설교자의 중심 메시지로 갖는다는 점이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것은 성경적인 설교의 독특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내용, 오직 그것만이 신약성경의 선포의 필수조건이었다.
강해설교의 이해
“강해(expository)”라는 말은 해당 성경구절의 의미가 전체적으로 그리고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실 때에 의도한 그대로 드러내고자 하는 설교자의 노력과 의도를 뜻한다. 영어로는 “expose, exposition, expositor, expository”등이 강해를 표현하는 언어 군(群)에 해당한다. 웹스터 사전을 참조하면, exposition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설명하거나 그것에 관한 정보를 전달하는 담화”라고 되어 있다. 이런 사전적인 정의를 설교에 적용하게 되면 강해설교자는 본문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것을 일반인이 알기 쉽도록 드러내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설명하고 적절하게 적용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강해설교의 사전적 정의는 오래 전 칼빈이 가졌던 강해설교에 대한 그의 이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우선 칼빈은 설교를 성경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성경말씀이 설교의 내용이자 원천이었다. 강해설교자로서 칼빈은 설교적 작업에 자신이 젊은 시절 연마했던 인문학의 모든 기술과 지식을 총동원했다. 해석자로서 칼빈은 본문의 일반적이고 참된 의미 그리고 성경적인 의미를 파헤쳐 그 의미를 밝혔다. . . . 설교는 단순히 성경의 설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또한 적용하였다. 칼빈은 성경을 단어 하나하나를 일일이 설명하였던 것처럼 성경의 각각의 문장을 그의 교인들의 삶과 경험에 적용하였다.
강해설교는 메시지의 형태보다는 메시지가 구성되는 과정과 메시지의 주 내용이 도출되었던 원천이 그 판별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강해설교의 기준에 대해서 메릴 웅거(Merill F. Unger)가 아주 간단명료하게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
얼마나 장황하게 설명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그 설명이 성경적인 저자가 의도했던 그대로 그리고 성경의 전반적인 맥락에서 의도되었던 그대로의 참되고 본질적인 의미가 평이하게 드러나고 청중의 현재적인 필요에 적용되었을 때, 그것은 강해설교라고 불려 마땅하다. . . . 그것은 성경에 관해서 설교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설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것은 설교의 시작과 끝이다. 설교는 성경에서 시작하고 성경에서 끝나고, 그 처음과 나중 사이를 가로지르는 모든 것은 성경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강해설교는 성경중심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강해설교의 예로서 느 8:8과 행 20:26~27을 들 수 있다. 특별히 회당에서 주님께서는 사 61:1~2까지의 내용을 유대인들에게 강해하셨고, 나중에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에서 만난 두 제자들에게 그 자신에 관한 주제강해를 하셨다(눅 24:27, 32, 44~47). 행 8:27~35에서 빌립은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사 53:7~8까지의 내용을 강해했고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순교하는 현장에서 유대인들에게 역사적 전기적 강해설교를 했다(행 7:2~53).
강해설교의 구성
지금까지의 논의를 염두에 두면서, 강해설교를 준비할 때 거쳐야 할 필수적인 세 단계를 간략하게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주석적 요점과 본문의 설명: 본문이 기록된 당시의 문화적 배경과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저자의 의도가 정확하게 드러나도록 고전어로 기록된 해당 본문을 상세하게 진술하고 밝히는 과정이다. 이 때는 본문의 직접적인 맥락, 시대적인 상황, 역사와 관습 그리고 문화적인 배경 안에서 본문의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본문에 대한 연구를 나중에 강단에서 모두 동원할 필요는 없으나 설교 시에 능숙하게 말할 수 있도록 통달하고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바로 이런 고된 과정을 거치면서만 하나님이 의도하신 메시지를 획득할 수 있다.
목사는 제한된 시간 안에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설교를 작성해야 하는 사람들이므로 성경의 원어와 본문의 시대적인 배경, 사건의 인과관계 그리고 부가적인 참고서적과 장시간 씨름하는 일이 만만하지는 않다. 강해설교가 대단히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라고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해설교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누구에게나 강해설교의 가장 큰 장애물은 헌신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바로 여기에 실천적인 어려움이 있다. 본문의 주석적 분석과 이해라는 만만치 않은 과정은 시간과 정신력,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여기에 더해서 오랜 시간 기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성경의 본문의 세심한 주석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가르칠 수는 없는 법이다.
(2) 논리적 확장과 보편적인 원리: 이 단계는 본문의 의미에 현대의 상관성을 부가하기 위해 거쳐야 할 중간과정으로서 구원역사의 어느 때에 존재하는 어떤 신자에게든지 적용될 수 있는 영속적인 원리를 구축하는 단계이다. 본문의 독자에게 사실이었던 만큼 시대적 간격과 세계관적인 이질감을 갖고 있는 오늘의 독자에게도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성경적 원리를 얻기 위한 논리적 확대가 이루어져야 한다. 청중들은 설교를 들을 때 “그것이 실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인가?” “그것이 사실인가?” 혹은 “그것을 믿을 수 있는가?” 라고 성경의 진리주장에 대해 진지하게 그 수용여부를 묻는다. 흔히 하는 말로 “하나님께서 말씀했고 따라서 나는 그것을 믿는다. 고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간단히 넘길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서적이고 지적인 의구심이 남아 있는 한 설교의 메시지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청중들은 설교자가 제시한 성경적인 진리를 믿고 싶어 하므로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와 증거를 얻기를 바라는 것이다. 설교자는 본문을 듣는 청중들에게서부터 제기될 수 있는 기능적인 질문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을 준비함으로써, 설교의 유효성을 배가할 수 있다.
(3) 설교적 적용과 구체적인 목적: 가장 까다로운 과정으로서 본문의 강해가 청중과 깊은 상관성을 갖추는 과정이다. 청중의 현재적인 필요를 상정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구체적인 명령과 교훈적인 강화를 위해서 신학적인 요점을 오늘의 청중에게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단계로서 본문의 철저한 강해 자체가 곧 설교가 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경우에도 청중과의 상관성을 구현하기 위해서 본문에 대한 충실도를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본문의 충실하기보다는 상관성을 추구하고자 하는데, 그 결과 도덕적인 설교에 그치거나 심리학이나 행복론(eudaemonics)의 일종으로 전락하고 만다. 설교적인 적용이 미흡하게 되면 신학교에서 행하는 신학강좌로 그치게 된다. 강의와 설교의 두 장르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바로 유효적절한 적용에 있다.
Appendix: 고후 2:14~16까지를 본문으로 한 주석과 설명의 예.
고후 1:9~10은 고후 전체를 이해하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주제는 “고난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즉 바울이 당하는 고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으로 베푸시는 구원과 위로가 뒤따랐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극심하면 하나님의 위로도 극적으로 나타나서 고난의 불길을 능히 이기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난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바울은 자신이 진술하고 있는 바와 같이 “사형선고” 선고에 해당하는 극한의 절망과 고난 가운데서 그렇게 끝까지 의연하고 그토록 충성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자신의 고난에 찬 삶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진지하게 고려할 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이 주제가 전체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질그릇 같은 연약함에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이 나타났고(고후 4:7), 우리의 겉 사람이 후패할 때는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게 되는 은혜를 받습니다(고후 4:16). 우리가 약할 그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은 그 약함 가운데서 완전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이런 원리는 주님께서 자신을 희생하고 구원을 성취하실 때 취하셨던 바로 그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약함 가운데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으나, 도리어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리심을 받아 자기의 언약의 백성들을 위한 의로움을 완성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고난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주제는 고린도후서 전체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데 고후 2:14~16까지의 본문에서도 대단히 극적으로 다시 반복되고 있습니다. 고후 2:14~16에서 바울은 자신을 패배하여 포로로서 잡혀가는 자로 자신을 묘사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 본문은 로마의 군대가 승리하고 개선할 때 신전에서 향을 피우고 꽃가루를 뿌리면서 행진하는 장면을 종교적인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1세기의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하자면, 이 장면은 단순히 승리의 개선이 아니라 전쟁에서 포로로 잡은 사람들의 발목과 손에 쇠사슬을 매어 끌고 다니며 사람들 앞에서 놀림을 받게 하고 심한 수치와 모욕을 안기던 행사였던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본문은 사도 바울이 자신을 개선하는 장군으로 혹은 보병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신 바울은 자신을 포로로 잡혀가는 패배자로 인식하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14절의 헬라어 qriambeu,w라는 말은 라틴어로 triumphare로 번역할 수 있는데, 이 말의 의미는 해당 헬라어의 일반적인 의미로 볼 때, “정복당한 포로로서 개선행진에 참여하다”라고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여기에 본문의 해석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 바울은 개선행진에서 패자(敗者)로서 끌려가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했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런 어려움으로 인해서 칼빈은 본문을 신학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이 난점을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즉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개선장군으로 혹은 개선군의 일원으로 행진하게 하신 것을 감사했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오늘에 있어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는 하나 분명히 본문의 참된 의미를 흐리고 있다고 봅니다.
본 구절의 의미는 바울의 고난과 관련되어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는 한 때 교회를 핍박하고 복음을 훼방하던 하나님의 원수였으나, 마침내 하나님께 사로잡혀 그의 사랑의 포로가 되었습니다(롬 5:10; 빌 3:18). 그 결과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기까지 되었으나 도리어 아시아와 마케도니아에서 당한 그 극한의 고난을 통하여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은 고난과 수치를 당하고 사람들에게 조롱과 미움을 받는 물건 같이 되었으나, 그것은 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복음을 더욱 널리 전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을 포로로서 말하고, 이런 포로와 같은 처지가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고 있다는 역설적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은 고린도후서의 주요한 주제인 “고난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주제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바울이 말하는 바는, 자신이 당하는 극한 박해와 여러 가지 형태의 고생과 위험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중단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고난이 더욱 복음을 널리 전해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고린도교회에 있는 그의 반대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고자 하는 그의 의도에도 잘 부합하게 됩니다. 고린도교회의 반대자들은 바울과 같이 밤낮으로 고생스럽게 살면서 천대받는 비루(鄙陋)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자(使者)라고 행세하며 고린도교회에 서신을 보내 교인들의 믿음과 행위에 대한 원리와 규범을 권위적으로 제시하는 그런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느냐고 비난하고 있었습니다(고전 4:18~21). 바울은 이들의 주장에 맞서서 그의 비참한 고난은 사도로서의 권능을 제약하는 요소가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본문에서도 바울은 그런 비난을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적인 섭리는 얼핏 보기에는 패배처럼 보이는 일을 통해서 승리를 거두시고 죽음 대신에 생명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약한 모습으로 죽으셨으나 부활로 승리하신 것처럼 그도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고전 4:13) 되었으나,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널리 드러났습니다.”
고후 2:14~16의 한글 개역성경은 그 뜻이 매우 모호하여, 그 본문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순히 읽어서는 마음에 그 깊은 뜻이 와 닿지 않습니다. 이런 가운데 위의 설명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더욱이 고린도후서 전체의 주제의 반복이라는 일관된 흐름 안에 해당 본문을 유입시키고 그 뜻을 설명함으로써 청중에게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봅니다. 이제 다음 단계는 설명을 통해서 얻어진 주석적 요점을 정리하고 이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적용될 수 있는 신학적 원리로 확장해 나가야 할 단계입니다. 주석적인 요점을 정리할 때는 본문의 주제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흔히 저지르기 쉬운 잘못은 본문의 메시지를 드러내기보다는 본문을 예화로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주석적 요점: 모진 박해와 극한 고난을 겪는 바울을 사람들은 조롱하고 멸시하였을지라도,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의 고난을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본문의 주제를 어떻게 제시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몇몇 주석과 설교집을 참조하였는데 일반적으로 가장 지배적인 것은 “그리스도의 향기” 혹은 “그리스도인다운 삶”등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주제가 과연 본문에서 바울이 의도했던 메시지와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다. 본문의 저자의 의도와 전혀 일치하지 않는 이런 식의 주제 선정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얼마 전에 창 15:1~5까지를 본문으로 한 설교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설교자는 본문의 주제를 “아브라함의 불행”으로 선정했다.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했던 아들을 얻지 못한 것 외에는 다른 모든 것은 다 가져 남들보다 못한 것이 없었으나 다만 그것 한 가지로 인해서 자신은 불행하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제는 본문의 저자가 의도한 바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 설교자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성경에게 강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는 본문이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지를 드러내지 못한 채 설교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위해서 본문을 단지 하나의 예화로서 사용한 가장 전형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논리적인 확장에서는 그것이 과연 보편적인 원리로서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인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는 주제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접근이 상당히 유용할 수 있다. 어떤 논리적인 확장이 성경적인 가르침에 일치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방법은 해당 주제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위의 논리적인 확장은 위에 제시한 본문설명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고린도후서 전체의 주제, 즉 “고난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주제와도 잘 합치한다. 더욱이 고후 1:4에서 parakale,w라는 현재 능동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 택한 성도들에게 베푸시는 위로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즉 하나님의 위로는 간헐적이거나 단발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위로는 해가 일정한 것처럼 지속적이고 틀림없는 은혜이다. 하나님의 위로가 주어지는 특정한 고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당하는 모든 종류의 고난에 항상 적절한 도움이 되도록 주어지는 것이다. 특히 본문은 하나님의 위로는 개인의 안위(安危)만을 위해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위로는 언제나 그 위로를 체험한 사람을 통해서 그의 형제와 이웃에게도 그것이 전해지도록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신의 책임을 지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신자 개인의 복지와 특혜로 머물지 않고 그것은 선교적 지향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향해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고후 1:4에서 바울은 신자들의 겪는 다양한 어려움과 괴로움이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하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넘친다는 역설적인 원리를 말씀하고 있다.
비슷하게 바울 사도는 1:28절에서 역경을 당할 때 신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 것을 권면하면서 믿는 우리에게 복음을 위한 고난은 멸망의 표가 아니라 도리어 구원의 표가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29절에서 고난은 은혜로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것은 evcari,sqh라는 말이다. 은혜를 뜻하는 말에서 왔는데, 복음을 위한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밝히고 있다.
분명한 것은 복음을 위한 고난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논리적인 확장을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가능한 논리적 확장 1: 신자들에게 복음을 위한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따라서 그렇게 여겨야 합니다.
이 경우는 고린도후서 2:14~16의 본문설명과 정확하게 부합한다. 따라서 매우 견고하고 안정적인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고난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거나 혹은 “고난이 곧 하나님의 은혜”라는 선언은 곧 청중에게 “그것이 사실인가?” 혹은 “그것은 실제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가 고난을 통해서 가져오게 되는 성경의 약속과 소망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좀 더 확장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원리도 가능할 것이다.
가능한 논리적 확장 2: 신자에게 어떤 불행한 사건이나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중단되지 않습니다.
두 번째의 확장은 “복음을 위한”이라는 고난의 성격을 제한하는 조건을 제거하였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고난과 하나님의 은혜의 관계는 더욱 확대되었다. 이러한 확장이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를 물어야 하는데, 그 근거를 야고보서에서 찾을 수 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성경은 “만일 시험이 닥치면”이라고 말하지 않고 “시험이 닥치는 때”라고 말하였다. 이는 시험이 누구에게나 있는 일임을 뜻한다. 그렇게 시험을 맞이하는 때 기쁘게 여기라고 한 것이다. 그 이유는 시험이 그리스도인을 연마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게 하고 결국에는 완전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두 가지의 논리적 확장을 좀 비교하자면, 첫 번째의 경우는 고난과 하나님의 은혜의 상관관계가 선교의 진보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지게 될 것이고, 두 번째의 경우는 신자의 삶이라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 두 가지의 모두는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고난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본문의 주제를 반영하고 있으므로 모두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세 번째 단계에서 설교의 적용과 목적과 관련해서 결정해야 할 것이고, 이 둘을 모두 한 번의 설교에 주요한 대지로 삼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세 번째 단계로서 설교의 적용과 목적인데,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설교자가 청중이 “어떻게” 반응하기를 기대할 것인지를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따른 설교의 구성과 적용이 수반되어야 한다. 몇 해 전 미국의 한 설교자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자신이 대학교 재학시절 출석하던 교회의 목사님에게 가졌던 불만이라면서 소개한 내용이다. 그 목사님의 설교가 상당히 탁월하여 특히 청년들이 많이 모였다고 한다. 그런데 목사님의 설교가 다 좋은데, 구체적인 지시나 제안이 없어서 예배를 마치고 나서면서 언제나 “그러면 정확하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라는 불만을 떨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대개 설교의 목적이 구체적인 제안이나 지침을 통해서 제시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서 창 13장에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들이 가축 떼가 늘어나면서 물과 초지를 두고 다툼이 생겨난 사건을 생각해 보자. 이 본문의 주석적 요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번영과 복을 추구하되 분쟁이나 다툼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근거해서 설교의 목적을 설정할 때 다음의 두 가지를 비교해 보자.
a. 분쟁이 발생했을 때 여러분은 먼저 그 분쟁의 해결을 시도해야 합니다.
b. 분쟁이 발생했을 때 여러분은 점심을 같이 하거나 혹은 먼저 전화를 걸어서 분쟁을 해결한 방안을 제시하십시오.
첫 번째는 일반적이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라는 제안이 뚜렷하지 않은 반면에, 두 번째는 좀 더 구체적인 행동을 위한 지시가 있어서 청중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설교의 목적은 이와 같이 실천적인 제안을 구체적으로 제안하는 행동 원리나 지침을 통해서 드러나야 한다.
고후 2:14~16과 관련해서 설교의 목적을 두 가지로 제안, 비교해 보자.
a. 고난이 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십시오.
b. 교회가 어려울 때 피하여 숨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 기꺼이 동참하십시오.
첫 번째 진술은 방송 설교에서 실제 사용되었던 것인데, 이것은 논리적인 확장의 단순한 반복에 지나지 않으며, 고난이 정확하게 현대의 청중에게는 어떤 상황일 수 있는지를 규정하지 않아서 설교의 유효성이 떨어진다. 이런 경우 청중들에게서 적극적인 반응을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두 번째의 진술은 현재 청중들이 직면할 수 있는 고난을 교회의 어려움으로 적시했고 그것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를 제안하고 있다. 교회의 어려움을 고난이라는 상황으로 좀 더 세분화하고 분명하게 규명함으로써 행동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설교의 구체적인 목적이란 성경의 저자가 당시의 청중에게 기대했던 바로 그것이어야 한다. 한 마디로 설교의 효과적인 목적이란 저자의 목적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설교의 목적을 정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저자는 과연 이 본문의 내용을 우리에게 말씀함으로써 무엇을 이루기를 기대하는 것인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설교자로서 나는 이 설교 후에 교인들의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는지를 반문해야 한다. 물론 설교자의 설교의 목적이 본문의 저자의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얼마든지 다르게 설정될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구성에 따라 주로 좌우되는데 지적 수준이나 연령 혹은 직업이나 환경 등을 고려해서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맺는 말
오늘날 설교자들 사이에서 시장원리에 따른 목회와 청중과의 상관성에 초점을 둔 설교가 유행하는 마당에 우리는 성경적인 설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신적인 만족과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복음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말씀을 전할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풀어 가르쳤다(고전 2:1~5). 그는 지혜로운 말이나 학자적인 천재성을 앞세우지 않았고, 자신의 확신이나 사상을 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했고,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하는 메시지를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수단으로 삼으실 것임을 확신하였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행 16:14). 바울이 빌립보 지역에서 얻은 첫 신자는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는 한 여인이었다. 기도처를 찾아 냇가를 찾았다가 빨래터를 찾은 여인 중에 루디아라고 하는 여자에게 말씀을 전했는데, 성령이 그 말씀을 전하는 중에 마음을 열어 그 전하는 말씀을 청종하게 하셨던 것이다. 바울이 말씀을 가르쳤으나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듣는 이의 마음을 여신 분은 성령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바울이 전하는 그 말씀을 통하여 루디아를 복음의 은총 안으로 효력있게 불러들이시고(efficaciter vocare)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로 삼아 주신 것이다. 설사 정성들여 수고롭게 설교문을 준비하였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결코 사람의 심령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든 신실한 종들의 인격적인 특징이자 자세이어야 한다. 강해설교의 수고스러운 노력의 과정을 거치면서 본문을 연구하는 까닭은 성령의 전능하고 신비로운 사역을 전적으로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성령께서 준비되고 정확한 복음의 메시지를 통해서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하는 말씀에 성령이 돕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아버지께서 택하신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에 설교자가 쓰임을 받는 것이다.
21세기 새 밀레니엄의 여명을 맞아 우리는 다가오는 새로운 세대를 위해서 강해설교의 방법과 적극적인 실행을 모색해야만 한다. 강해설교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정 반대이다. 다른 어떤 설교의 유형도 강해설교만큼 많은 과제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어떤 설교도 강해설교보다 더 많은 결실을 안겨다 줄 수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http://cafe.naver.com/solideogloriafaith/958
설교 - 존 오웬 (0) | 2013.04.20 |
---|---|
설교 - 윌리엄 퍼긴스 (0) | 2013.04.20 |
[스크랩] 칼빈의 예배로서의 설교에대한 이해 (0) | 2012.04.10 |
개혁주의 성경신학과 설교 / 이승구 교수 (0) | 2011.04.01 |
예배와 말씀 사역자(국제신대원 조직신학회 발표자료/이광호목사) (0) | 2011.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