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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다른 복음

이판용목사(군산)

by 김경호 진실 2011. 7. 19.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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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강해(1)

복음과 다른 복음

딤전 1:1-4

 

오늘부터 수요일 저녁에는 디모데전서를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디모데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의 본질인 순결과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떤 장치들을 마련하셨는가를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순결과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 세워진 자들은 어떤 자격을 가져야 할 것인가를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 1, 2절 말씀에 의하면 디모데전서는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쓴 편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3절 말씀에 의하면 로마 옥에 갇혀 있다가(61-62) 석방된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그레데 섬을 지나 에베소까지 왔습니다. 이 때 그레데 섬에 디도를 머물도록 했고, 에베소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에 남아 있을 것을 권고하여서 디모데는 에베소에 머물게 되어 에베소 교회를 목사로서 섬겼습니다.

 

사도 바울에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도록 한 것은, 에베소 교회 안에 거짓 선생들이 침투해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고, 디모데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적당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도록 한 사도 바울은 마게도니아로 향하였고, 그 후에 사도 바울은 대략 63-66년경에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기록하여 보냈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디모데후서는 재차 로마 옥에 투옥된 후에, 67년경에 디모데후서를 써서 보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은 사도직은 구주 하나님과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왔다고 했습니다. 사도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파송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고전 15:8, 9; 2:8). 처음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함께 생활한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6:13), 나중에는 사도의 조건이 예수의 생활과 죽음과 부활을 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발전하였습니다(1:23-26).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내서 에베소 교회로 하여금 읽혀지도록 한 편지에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지금 자신이 하는 권고(眷顧)가 사람의 권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로부터 온 권고로서,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계시를 받아 전달할 수 있는 직분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권고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권고로서, 이 명령의 기원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이 명령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목사들이 하는 사역도 이와 같은 권위를 가지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만 목사들 역시 하나님께서 말씀의 수종자들로 부르셔서 말씀을 해명(解明)해서 교회의 강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는 의미에서는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뜻을 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도전하는 세력으로부터 보호하여 바로 세우는 직임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직분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된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목사의 가르침과 치리(治理)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3, 4절에서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머물게 한 이유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족보에 끝없이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의 목사로서 해야 할 일은 교회를 감독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고한 것은 에베소 교회 침투해 들어온 거짓 선생들, 즉 이단들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교회를 순수하게 보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거짓 진리를 가르쳐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을 교회에서 쫓아내서 하나님의 교회가 교회의 본질인 순결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목사가 해야 하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교회가 순결을 잃으면 타락한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으로 순결해 질 수 있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결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불결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처 두고 다른 것을 쫓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쫒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도 쫓고 다른 것도 쫓을 때 교회는 불결해지고 타락해 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바로 그런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면서, 즉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도 믿었으며 또 할례를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거짓 선생인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도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즉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 구원의 도리 외에 다른 것은 거짓된 복음으로서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교훈에 대해서 사람들이 쉽게 동요되는 것은 그것이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추구하는 일에 합법화를 시켜주기 때문이고, 자기의 아상(我相)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냐는 사고를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온전히 드러내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서 인간의 행복을 갈망하도록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빠져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재미와 웃음을 통해서 자기 아상을 드러내고 살도록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만족을 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라고 하는데, 자기 행복과 만족도 충족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좋지 않으냐고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느냐고 말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성경을 다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어디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가려운 귀를 긁어줄 설교가들을 찾고 있습니다.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부분을 터치해 주어서 가벼운 신자들을 만들어 주는 목사를 좋은 목사라고 설교 잘하는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가르치고 치리하는 목사와 교회의 살아있는 회원들은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고 정신을 차려서 다른 복음, 거짓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가르침이 침투해 들어와서 교회를 타락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사실 교회사를 보면 교회는 밖으로부터 잘못된 가르침이 침투해 들어올 때 스스로 물리치는 정화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한 번 타락한 교회를 다시 고쳐서 쓰신 적이 없으시다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거짓된 가르침 뒤에는 항상 사탄이 있고, 간교하고 교묘한 사탄이 교회 안에 거짓된 것을 집어넣어서 교회를 불결하게 하여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사탄이 하는 이 어두운 것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면 이것은 아주 전염성이 강해서 사람들을 쉽게 어둠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긴장의 끈을 풀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려서 교회의 거룩성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에베소 교회에 침투한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본문 3절 하반절부터 4절 상반절을 보면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베소 교회 안에는 거짓 선생들이 침투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고, 그들이 다른 교훈을 가르쳤으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게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 우리말 다른 교훈이의 헬라어말은 헤테로디다스칼레오(eJterodidaskalew)ㅇ입니다. 이 말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도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것을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까 보았던 갈라디아 교회처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도의 가르침을 떠나, 믿음으로도 구원을 받지만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을 따른 것처럼, 에베소 교회도 다른 교훈을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의 의미는 사도들이 가르친 방법과 다른 방법으로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에베소 교회에 침투해 들어온 거짓 선생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방법이 아니라 인간적인 방법으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오직 성령님을 의지하여서 전하지 않고 인간적인 어법(語法)을 동원해서 감동을 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설교는 성령께서 들어서 사용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데 그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 인간적인 설교와 설교 방법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혹시 교인들로부터 칭찬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런 인간적인 방법이 결국에는 복음의 내용까지도 오염을 시킨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지적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 5)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청중들을 사로잡은 웅변적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당시 유행하던 철학적 방법론을 취하여서 전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즉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님을 의지하여서만 복음을 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믿음이라는 것이 사람의 지혜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말로 복음을 잘 포장해서, 즉 듣기 좋은 형용사를 사용해서 전해야만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님을 의지해서 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보낸 다른 편지에서 내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고후 11:6) 이 말씀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 말에는 좀 어눌했던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님을 의지해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일어났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교회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이 방법이 아닌 것은 다른 방법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4절에서 말하고 있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신화와 족보는 하나의 표현입니다. 신화란 어떤 인물이나 사건에 신적인 의미를 과장되게 붙여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모든 만물에 영()이 있다는 영지주의 사상이 있었습니다. 이 영지주의자들과 유대교의 학자들은 가문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유대의 문화권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끝없는 족보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약 인물들에 대한 가상적 족보를 만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에 있는 족보를 가지고 그 족보에 자신들의 집안을 말한다고 하고, 거기에다가 더 끊임없이 과정해서 자랑하곤 하였습니다. 여기 몰두하지 말게 하라는 것을 보면 유대인들이 허황된 말로 얼마나 자랑하며 말하였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서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통일성으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 됨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앞서서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신 말씀에서 주님께서 교회의 하나 됨을 얼마나 원하셨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듯이 교회의 하나 됨은 교회의 본질인 것입니다.

 

족보를 자랑하는 유대인들의 이런 모습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개인 간증이나 순교자들의 열전 같은 일들이 어디까지 발전하여 나가느냐 하면 한 시대의 영웅으로 만드는 데까지 나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사람이 차지하는 데까지 나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웅담을 들을 때 사람들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수단이 됩니다. 일반 세상 나라에서도 경제가 침체되거나 여론이 분열되어 있을 때 영웅들을 등장시켜, 옛 선인 가운데 한 사람을 영웅화 시키든지, 사회적으로 칭찬받을 말한 일을 한 사람이 나타나면 영웅으로 그리고 선전하여서 그것을 호재로 사용하여 어려움을 돌파해 나가려고 하는 일들을 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어떤 사람을 불러다가 개인 간증을 하게 하는 문제도 어떤 마음의 상태에서, 어떤 마음 바탕에서 시작된 일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다른 교훈을 받고, 신화와 족보에 몰두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교회에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4절 중간을 보면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경륜이란 계획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말합니다.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론, 즉 논쟁만 일으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변론은 끝없는 암흑의 터널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혼돈하게 만들고 모호하게 만들어서 교회를 하나 되게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뿐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의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가면서 경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교회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교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지 않은 방법론도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아야 하고, 무슨 일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꿩 잡는 것이 매라고, 방법이야 어찌 되었든지 간에 그 중심에 내용만 전달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지 몰라도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강단이 유머로 넘치고, 농담을 스스럼없이 말하는 그런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온갖 제스처들이 난무한 그런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강단이 화려해야 하고 심지어는 춤까지 추는 원맨쇼를 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해서 청중들을 웃겨야 하고 그래야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칼빈 선생은 예배당 안에서 말씀을 듣는데 장애가 되는, 시각적으로 장애가 되는 모든 요소들을 없앴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온전히 전달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과 말씀을 통해서만 서 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칼빈 선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사고(思考)가 그렇듯이 사탄도 교회에 조금만한 틈만 보이면 그곳을 비집고 들어와서 교회를 타락시킵니다. 그로 인하여서 교회는 심각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멘.

 

(2010.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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