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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를 통하여 전향한 삶을 사는 성도

장수민목사(의왕)

by 김경호 진실 2011. 10. 18.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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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교회론 강의

회개를 통하여 전향한 삶을 사는 성도

(고후 7:10-11)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면 지금까지 세상 속에서 살아나오던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나왔던 세상적인 삶의 방식이란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악된 것이었던가를 생각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다웁게 살아가야 할 일련의 법도가 있는 것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이것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한 마디로 회개라고 합니다. 성도는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가 이렇게 회개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기를 부정해야 하며, 나아가 적극적으로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복음은 능히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까지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께로의 전향

첫번째로 회개는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것입니다. 전향자(轉向者)라는 말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공산주의자이던 사람이 자본주의로 사상을 바꾸게 되면, 이렇게 불러서 ‘전행했다’고 합니다. 전향자에게 일어난 변화가 무엇인가 하면, 당시까지 생명처럼 여기던 자신의 사상을 바꾼 것입니다. 사상을 바꾸었으니, 당연히 삶의 형식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를 전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향이란 말은, 현실 사회와 배치되는 자기의 사상을 그 사회와 맞게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는 거듭나기 전에 세상이라고 하는 옛 사람의 사상을 가졌습니다. 이후 거듭난 까닭에 하나님의 나라 사상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는 사상적으로 완전히 배치됩니다. 성도가 되려면, 그때까지 세상나라에서 살아나오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상 전향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성도들이 지금까지 안주하고 있던 세상으로부터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을 떠나서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맺어지지 않습니다(행 26:20). 이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행위는 외적으로 기독교적인 의식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키지 아니하고, 마음과 성품으로서의 인격 전체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가령 바울은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롬 1:9)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회개의 본질이 외적인 행위에서 찾아진다기 보다는, 내면적인 심령의 변화에 우선적인 초점이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로의 전향은 회개의 대표적인 특성인데, 따라서 이것은 마음이 변화되는 것을 수반합니다.

보통 우리는 회개를 생각할 때에 어떤 구체적인 결단을 연상하곤 합니다. 가령 남자들은 초등학교 시절에 고무줄 놀이하는 여자 아이들의 고무줄을 끊고 달아남으로 여자 찬구들을 괴롭혔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죄라고 토로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눈물 콧물 흘리는 경험을 가졌던 것을 가리켜 회개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어른이 되어서는 무언가 좀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생활의 변화를 하나나님 앞에서 약속하는 것과 관련하여 회개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술이나 담배를 끊는 결단을 한다거나 사업터나 직장에서 자행해 나오던 어떤 부정한 짓에 대해서 손을 깨끗이 씻는 결단을 하면서 회개와 연결시킵니다. 혹은 예배를 드리는 때라든가 성경 공부와 기타 기독교적인 집회 때에 좀더 의롭고 도덕적인 삶을 살 것을 결심하고 서원하며, 이를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 평소보다는 훨씬 두툼한 헌금 봉투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에서 회개의 모습을 찾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것이 전혀 무익한 것은 아니고, 때로는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외적인 결심과 결단보다도 내적인 마음의 변화를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옛날 사무엘이 다스리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의 인도 하에 대대적인 회개 운동에 들어갔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 사무엘의 설교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의 표시로 여러 가지 외적인 의식을 수행했습니다. 죄를 슬퍼하며 눈물을 흘린다는 표시로 여호와 앞에 물을 길러다 부었고, 하루 종일 금식함으로 육체적으로도 근신하면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했습니다(삼상 7:6). 그러나 이들이 그토록 많은 물을 길러다 붓고 금식하는 등의 의식적인 행위에 열심을 내었다 할지라도, 정작 그 내적인 심령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실질에 이르지 아니하였다면, 이는 진정한 회개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회개는 심령의 변화, 곧 마음의 변화로부터 그 외적인 행위가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곧 심령의 변화로부터 나오는 하나님께로의 전향인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일관되게 가르쳐지는 진리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모세의 율법도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심령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모세는 신명기에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는 명령을 되풀이 하는 것을 봅니다(신 6:5 10:12 30:2,6,10). 이것은 심령의 변화 혹은 변화된 심령으로부터 나오는 삶일 때에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가 비로소 가치 있는 것이 되어진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또한 ‘육체의 할례’와 대조되는 ‘마음의 할례’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신 10:16 30:6), 이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말해진 것입니다. 할례가 담고 있는 정신, 곧 마음을 정결케 하는 일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외적인 할례 행위 그 자체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라고 한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할례는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세례로서 그 정신이 계속됩니다. 따라서 성도가 받는 세례에는 회개를 결심하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성도는 교회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통하여 동시에 이후부터 회개하는 자로서 살아갈 것을 약속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이때 세례를 받는 외적인 행동 그 자체 못지 않게 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는 일인 것입니다. 과연 회개에는 ‘마음의 변화’라고 하는 중요한 요소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마음의 변화 문제는 구약 때부터 중요하게 가르쳐진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모세 율법의 강령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여기에 보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회개의 행위가 ‘하나님께로의 전향’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적인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는 입니다. 마음의 변화로부터 나오는 회개가 아니면 안됩니다. 가령 여기에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삶을 살기로 결단한 어떤 성도가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날 이 사람이 그야말로 단단히 회개했고, 선한 결심을 했습니다. 무엇을 회개하고 결심했는가 하면, 지금까지 이런 저런 핑계만 생기면 주일 예배에 불참하기를 밥먹듯이 한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더 이상 주일날 교회가 드리는 예배에 흠을 내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예배에 개근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는 과연 결심한 자다웁게 주일날이 되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예배에 결석하는 일이 없습니다. 다른 성도들이 볼 때에도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될만큼 획기적인 신앙의 변화를 보여준 것입니다.

이 성도는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예배에 참석합니다. 예배 시간에 지각하는 일이 없고, 결석하는 일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배에 참석하는 마음의 태도와 관련해서는 심각한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예배 시간 동안 이따금씩 마음이 흩으러지고, 잡념에 사로잡히며, 때로는 깜빡 깜빡 졸기도 하고, 예배가 끝나고 나면 도무지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설교 시간에 딴 생각하는 일이 다반수이고, 찬송을 부를 때에도 진지하고 엄숙한 태도를 유지하지 못합니다. 이런 식의 형식적인 예배 참여가 부지기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적으로 볼 때에는 변화한 모습이 빈틈 없이 나타나는데, 내면을 보게 되면 엉망인 것입니다. 이런 경우 진정으로 회개했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외형적인 변화에만 머무르고, 마음이 변화를 받지 못하는 한에는 진정한 회개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타락과 구원이 반복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사시대에 이러한 패턴이 잘 나타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십니다. 이후에 이스라엘은 다시금 타락합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스라엘은 또 다시 타락합니다. 또 다시 구원해 주십니다. 또 다시 타락합니다. 이러한 반복의 패턴은 이스라엘 역사가 종말을 고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처럼 마치 습관과도 같이 나타난 이스라엘의 ‘구원과 실패’의 반복(反復)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데서 초래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회개를 요구할 때에 근본적으로 마음이 변화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타난 메시지가 바로 유명한 ‘밭가는 농부’ 비유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 오라 …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서 파종하지 말라…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 ”(렘 4:1,3-4).

농부가 파종함에 있어서 밭에다 아무리 씨를 많이 심는다 할지라도 가시덤불 속에다 뿌리는 한에는 싹이 나지 않습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땅을 갈아엎음으로 가시덤불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새싹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땅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나와 자라나게 됩니다. 이처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진정으로 회개하려면 무엇보다도 마음 가죽을 베라고 요구합니다. 마음이 변화를 받아야 진정한 회개에 이를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아니한 외형적인 회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비록 이 비유는 평범한 것이지만 회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이해함에 있어서 적절한 도움을 줍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것이 참된 회개를 성립시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변화가 뒤따르지 않는 꾸며지고 조작된 회개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께는 거짓과 술책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평범한 진리조차도 얼마나 가볍게 여깁니까?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처럼 가련한 인생이 없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평범한 진리마저도 얼마나 가볍게 취급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합니까? 이 시대는 마음의 변화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마음의 변화로 응답하지 않는 회개는 진실한 것이 되지 않으며, 도리어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로 전락할 뿐입니다. 진실로 이 시대는 마음의 변화로부터 시작되는 진실한 회개를 필요로 하는 시대입니다. 마음의 변화가 뒤따르지 않는 한에는,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성도가 복음을 영접했다고 하면,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일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사실이 있는 것 못지 않게, 전향한 이 마음을 끝까지 지키고 보존하는 일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로의 전향은, 나아가 이렇게 변화된 마음을 지키는 일까지 포함하며, 이로 말미암아 성도가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 영원히 보존됩니다. 잠언 4:23에 말하기를,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전향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으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세를 갖는 것은 기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보존될 때에 지속적으로 회개를 이루는 일도 가능하게 됩니다.

회개의 첫 번째 동인으로서의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

두 번째 주제로 회개의 동인인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핵심부터 말하자면, 진실한 회개는 만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진실로 두려워할 때에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회개의 진수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 이후에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판결(判決)을 받아야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 곧 사후(死後)에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게 된다고 하는 이 중요한 사실을 마음 속 깊이 새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결정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인간에게 다 임합니다. 다만 이것이 인간의 죽음 이후로 잠시간 연기되어 있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 생애에서의 기회를 잘 살려 진정으로 회개케 하시려는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부단히 참으시고 인내하시면서 인생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제공해 주십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어리석은 존재라서 이같은 하나님의 인내를 무시하며 멸시하는데, 이는 사후에 심판의 날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벧후 3:3-5). 그렇지만 바울은 회개치 아니하는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날에 대하여 분명하게 경고합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4-5).

신자와 불신자의 유무를 무론하고,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요, 아니 진정한 의미에서 비로소 이때로부터 생명이 시작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 이후에 창세 전부터 사람에게 작정된 선택(選擇)과 유기(遺棄)의 효과가 본격적으로 집행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판단하게 될 하나님의 법정이 인간의 죽음 이후에 즉각적으로 펼쳐집니다. 이 날에 각 사람은 자기가 행한 바대로 각기 합당한 판결을 받게 됩니다. 이 날에 어떤 이는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에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롬 2:6-8).

로마서에 나타난 이 ‘심판의 필연성’에 대한 교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케 하려는 의도로 기록된 것입니다. 진실로 죄인의 마음이 회개를 하려면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사후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정신을 차려 회개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기를 방탕에 방임하도록 방치할 수 있는 인간이 상천하지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따금씩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생각해야 하고, 이로 말미암아 일체의 교만과 자만에 급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이런 메시지가 더더욱 선포되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회개를 요구할 때에 반드시 이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하곤 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진정한 회개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너희 행악을 인하여 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렘 4:4)는 심판의 말씀을 덧붙임으로 적절히 경고합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이 부요하고 윤택하며 평안하십니까? 그러나 잊지 마십시다. 부지불식간에 여러분은 죽음에 직면할 것이요, 그 즉시로 하나님의 심판대 혹은 그리스도의 심판태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은 모든 공포 가운데 공포입니다. 사실 이 죽음에 대한 공포는 짐승들에게서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가령 보신탕 집으로 팔려가는 개의 경우를 보십시요. 어떻게 그렇게 희한하게도 아는지, 자신이 죽음에로 끌려간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비록 불가항력적인 저항이지만, 끌려가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저항합니다. 이 저항이 얼마나 극렬한지는, 끌려가지 않기 위하여 다리가 벗겨지고 부러지는 고통까지 무릅쓰면서 끝까지 저항하는 모습을 통하여 잘 나타납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냥 죽는 것으로 끝인 짐승들도 죽음을 이렇게 두려워 하는데, 하물며 죽음 이후에 심판을 받게 되는 인간의 경우는 이것이 얼마나 더 두렵겠습니까? 인간 모두에게 있어서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만큼이나 그렇게 강렬합니다. 이런 까닭에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삶의 의미도 깨닫지 못한다고 누군가가 말한 것이 사실입니다.

누누히 말하지만 인간은 불신자이거나 신자이거나의 여부를 무론하고 영원불멸의 생명으로서의 영생(永生)을 누립니다. 그렇지만 신자와 불신자의 영생은, 그 질적인 차이점에 있어서 마치 동(東)에서 서(西)가 먼 것처럼 그렇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이 이같은 사실을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을 외면함으로 죄를 즐기며 살아온 가련한 인생들은 일순간도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요, 심지어 숨이 막히는 것과도 같은 공포에 빠져들 것입니다.

성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같은 두려움이 있을 때에 더더욱 자신의 생활 태도를 고쳐야 할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게 될 것이고, 나아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방편을 간절히 부여잡으려 할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제아무리 의롭고 정당한 삶을 살아나왔다 할지라도 그것을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가를 깨달으면서, 다시금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잡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이 진지하면 진지한만큼 상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다운 삶의 태도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곧 신앙과 회개가 다시금 일어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삶을 사는 사람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회개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엄중하신 심판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한데, 여기에 그쳐서는 안되고,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여잡는 신앙이 동시에 수반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심판에 대한 공포심 그 자체만으로는 진정한 회개에 이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국가마다 형법이라는 것입니다. 이 법에 기준하여 죄를 범한 사람에게 형벌을 내리게 됩니다. 도적질한 자는 그에 걸맞는 형벌을 내리고, 살인한 자는 또한 그에 합당한 고통을 가합니다. 그러나 범죄률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더욱 늘어만 갑니다. 흉악범은 갈수록 늘어만가며, 형벌을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반복하는 전과자들이 있어서 그들의 별도 늘어만 갑니다. 이것은 준엄한 사법적 심판만으로는 범죄률을 줄이는 것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가능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곧 복음입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회개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생각해야 하지만, 덧붙여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심판을 모면하는 방편을 내신 사실까지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자기에게 임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진정한 회개가 가능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성경적인 회개의 방법을 단순히 이론적으로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회개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실제적인 능력까지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이 능력을 소유하는 수단입니다.

회개의 두 번째 동인으로서의 하나님께 대한 신앙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세 번째 주제로 회개의 원동력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회개가 먼저냐 신앙이 먼저냐의 문제를 생각할 경우가 있습니다. 보통 복음을 전할 때에 말하기를, ‘술 담배 끊고 예수님을 믿어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복음을 받는 불신자들이 말하기를, ‘그래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이제 작심을 하고, 술 담배 끊겠다. 그런 다음에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점은 먼저 회개부터 한 다음에 신앙을 갖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볼 때에는 그럴듯한 생각인 것 같지만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결론부터 내린다면 회개를 가능케 하는 것은 신앙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할 수 있으려면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사랑하신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진정한 회개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회개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는 때에, 그것이 가져올 형벌을 두려워하고, 그것을 벗어나 보려는 마음으로 회개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형벌이 두려워서 회개하는 사람의 경우, 그것이 오래간다거나 지속적으로 유지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합의 경우를 보면 이 사실이 잘 나타납니다. 아합은 이방 아내인 이세벨에게 홀딱 빠져서 그녀가 가져온 우상숭배를 받아들이고, 나아가 이를 국가의 정책으로 삼아 온 국민으로 하여금 우상을 숭배하게 한 사람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을 강탈하기 위하여 그를 무고히 모함하여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보내어 장차 아합과 이세벨에게 임할 엄중한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엘리야는 장차 아합에게 임할 무시무시한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이때 아합이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아합은 회개하게 됩니다.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왕상 21:27). 여기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는 행동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여 스스로를 학대하고 자학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보면, 유교의 영향을 받은 분들이 부모님과 같은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시면, 일정 기간을 정하여 굵은 베옷을 입습니다. 엣날에는 삼년 동안을 이렇게 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생시에 부모님께 효도를 충실하게 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스스로를 불편하게 함으로 자학하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었을 때 아합은 이렇게 함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아합을 받으시고, 그에게 내리시고자 하신 재앙을 다음 세대로 연기해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진정한 회개에로는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끝끝내 다시금 우상숭배에로 나아갔고, 그래서 마침내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심판을 생각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는 진정한 회개에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 자체로부터 회개를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어떠한 사랑을 베푸셨는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사실을 아는 때에 비로소 회개다운 회개를 진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이 비로소 회개를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하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심판보다는 하나님의 자비가 회개의 원동력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에 비로소 진정한 회개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성도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행하신 일이 있음을 아는 것이요, 이것의 실체와 원리를 논리적으로 잘 이해하고, 자신을 거기에 합당하게끔 적용시켜 나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문제를 좀더 심도 깊게 살펴보기 위하여 몇 가지 사항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는 진정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이때 회개란 한 순간의 결단이나 작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생애 내내 동안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이런 차원으로 회개할 수 있으려면, 때로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심판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함으로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진정한 회개는 외적인 행동의 변화로만 그쳐서는 안되고 마음의 변화를 수반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의 변화를 수반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도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면, 그는 이후부터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변화를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변화로 말미암아 진정한 회개를 이루는 삶이 가능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를 이루는 원동력은 바로 신앙이다’라고 하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좀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한다고 할 때 이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실 때, 성도는 자기 자신도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이렇게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받아야 하는 죄에 대한 성도의 모든 책임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전가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책을 대신 담당해주신 것이요,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시기 위하여 그와 같은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이 죄값은 우리의 과거의 죄값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장차 미래에도 범해질 수 있는 죄값에까지 그 영향이 미친다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나타날 수도 있는 우리의 죄에 있어서까지도 다 미리 사유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성도가 진정으로 회개하는 삶을 살 수 있으려면 이런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됩니다. 여기까지만 알게 되면 큰 일 나고, 실제로 여기까지만 아는 사람들이 큰 일을 내고 있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장차 얼마든지 범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까지도 미리 용서해 주시는가에 대해서까지 알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성도의 미래적인 죄까지도 용서해 주시는가? 이것을 알아야만이 비로소 회개다운 회개를 이루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앞에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통하여 그분의 죽으심에 함께 동참하였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에 성도에게 일어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장사되신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홀로 그렇게 살아나신 것이 아닙니다. 함께 십자가상에서 못박혀 죽었던 우리 모든 성도들도 함께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이 사실은 놀랍게도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 성도들 모두에게서도 동일하게 일어난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성도가 된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에 연합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것은 더 이상 옛 사람의 인격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새 사람의 인격으로 살고 있습니다. 곧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인격입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지금 우리 안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생명력을 가졌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버리움을 받은 자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성도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를 신비적으로 연합시키심으로 이러한 일이 성립되게 하십니다. 성도는 더 이상 스스로 혼자만의 힘으로 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삽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자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성도는 진정으로 회개를 이루는 삶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동시에 이 회개는 마음의 변화로부터 나오는 것이 되어지기도 합니다. 나아가 일순간의 결단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일평생에 결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회개가 되어집니다. 설혹 오늘 실수하고 넘어져서 범죄에 빠져드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다시금 용기를 내고 힘을 내서 새 사람다운 삶을 전개해 나아갑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비록 아차 실수하여 범죄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더 크게 보기 때문이고, 이런 까닭에 다음에는 같은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하는 결심과 각오를 더더욱 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범사에 신중한 태도로서 인생을 경영하게 되고, 더욱이 여기에는 성령께서 성도를 인도하시는 역사가 병행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마음의 변화로부터 나오는 회개’와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회개’의 삶이란 것이 나오게 됩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께로 전향한 자다운 삶의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구원을 주실 때에 미래적인 죄문제까지도 다 용서해 주시는 원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진정으로 받고 믿은 사람은 확실하게 회개합니다. 이런 성도는 날마다 성령의 소욕을 쫓는 삶을 사는 일에 민감해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자기 자신의 출세와 부귀영화를 위하여 살아나온 인생길을 더 이상 계속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을 자신의 인생의 목표로 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데서 자신의 인생의 보람과 가치를 느낍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복음의 목적이요,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원하시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예수 그리스도는 일평생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신 분이십니다. 바로 이 생명력이 지금 우리 성도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일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인 한에는 생명을 걸다시피 하면서 거부합니다. 온 몸으로 거부합니다. 죄에 대하여 반항하며, 항거합니다. 불신자는 이렇게 살지 못합니다. 불신자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오직 성도이기 때문에 이렇게 삽니다. 성도이기 때문에 이렇게 사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 성도는 자기 안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적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복음을 진정으로 받은 성도라면,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구원은 이미 따놓은 당상이니, 그까짓것 제멋대로 살면 어떻겠나! 그가짓껏 하늘나라에 가서 상급 좀 덜 받으면 되지 뭐! 죄좀 범하면 어떻나! 다시 기도하고 회개하면 되지!” 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성도는 죄 짓고 회개하고, 다시 죄 짓고 회개하고 하는 일을 의식적으로 반복해서는 안됩니다. 복음의 원리라는 것이 이렇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하루 속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구원에서 떨어질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 같이 위대한 분도 이것을 염려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믿음과 회개의 의미를 잘못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과거서부터 있어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죄 짓고 회개하고, 또 죄 짓고 회개하면, 그마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 크게 드러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일부러 죄에 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롬 6:1). 믿고 회개하는 것을 자꾸자꾸 반복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만일 이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나 짓게 하시는 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루어진 복음의 역학적인 원리는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게 합니다(갈 2:17). 이런 사람은 자기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새 생명 가운데 거하는 회개

끝으로 네 번째 주제로 회개의 모습과 방법 혹은 상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회개는 육체를 죽이는 것과 영혼을 살리는 것의 두 부분을 부단히 추구해 나가는 것으로 성립됩니다. 여기서 육체는 옛 사람의 요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전체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는 성향을 가리키고, 반면 영혼은 새 사람의 요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자의 경우 철저하게 인본주의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시는 성령님의 조명(照明)을 받아들이고 그 인도(引導)하시는 역사에 전폭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래서 회개는 육을 죽이고 영을 쫓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5-8).

여기에 보면 거듭난 중생인이 살아가는 삶의 특징으로 ‘영의 일을 생각한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한다’는 동사는 ‘육신의 일’과 ‘영의 일’ 두 상황에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영의 일을 생각하도록 부단히 그의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성도는 이 역사에 순종함으로 육체를 죽이게 되며, 그 영혼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육체를 죽이는 일은 우리의 본성(本性)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주제가 나옵니다. 성도는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도 부패하기 때문입니다(렘 17:9). 그러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인간의 의’라는 것은 기껏해야 ‘더러운 옷 같으며’, ‘쇠패함이 잎사귀 같다’고 했습니다(사 64:6). 이 거짓되고 부패한 본성은 성도의 거듭난 생명력을 부단히 침식하여, 성도로 하여금 육신의 일에 빠지도록 온갖 기회와 방법을 통하여 역사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회개하는 삶의 모습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모범이 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눅 9:23).

첫째, 회개를 지속적으로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부인’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늘날 자기 부인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이 많이 감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있어서 ‘자기 부인’의 요소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성도가 회개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산다는 것을 의미함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은 아무든지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의 자기 부인은 이중 분야에서 이루어집니다. 먼저는 육체의 정욕인 옛 사람이 죽는 것이요, 다음으로는 겉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먼저 첫 번째 사항부터 보겠습니다. 육체의 정욕으로서의 옛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와 이성과 감정을 죽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 속에서는 육신적인 욕망과 감정이 끊임없이 샘솟아 나와서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를 대적하게 합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은 유전법칙에 의하여 생득적으로 이 부패한 정욕을 가지고 태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천진난만한 듯이 보이는 어린 아이의 경우도 ‘악독과 악의와 자만으로 가득찬 작은 독사들’인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부모는 아이들을 맹목적으로 귀여워하거나 사랑해서는 안되고, 천진난만한 듯이 보이는 옷을 입고 역사하는 육체의 정욕을 잘 분별하여 적절히 통제하고 신앙으로 지혜롭게 교육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성애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에게 있는 모성애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나가는 데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더욱이 이 모성애가 아이에게 인본주의적으로 역사되게 되면, 복음은 엄청난 훼방을 받습니다.

이 부패한 정욕이 인간의 심령을 사로잡고 인간의 육체를 통하여 역사함으로 인간의 전체 인격으로 하여금 죄악의 덩어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 그 자체는 악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이것이 항상 정욕에 지배받음으로 말미암아 전체 인격을 죄악덩어리가 되게 합니다. 가령 사람은 육체를 보존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어느 정도의 양식이나 재물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소유하기 위하여 수고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그 자체로는 전혀 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항상 부패한 정욕이 역사함으로 욕심을 잉태하게 하고, 마침내 죄로 나아가게 하며, 최종적으로 사망에 빠트리고야 맙니다(약 1:15).

인간의 존재란 것이 이렇게 분석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신앙생활이란, 자기 본성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려고 하는 정도만큼에 비례하여 그것을 반대하고 거스리는 우리의 본성의 반항이 강렬하게 일어납니다. 한번 구체화시켜 보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를 다스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이때 즉시로 인간에게 있는 본성적 이성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평가하고 판단하며, 이런 저런 핑계로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역사합니다. 정 안되면 나중에 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식으로 뒤로 미루는 전술까지 동원됩니다. 결국 지금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지난번의 경우처럼 이번에도 스쳐지나가고야 맙니다.

이런 까닭에 자기 부인이란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기 부인은 인간이 자기의 이성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이 가진 본성적 사고가 폐기되지 않는 한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자기 부인이란 것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의 이성을 의지하는 자아중심적인 생활을 포기하지 않는 한에는, 상대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무지와 무식을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 부인을 떠나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어렵고, 이런 사람은 회개를 이루는 삶을 영위하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자기를 부인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는 좋은 시금석을 제시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자기 부인의 반대는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 사랑이 극력하게 불타오르는 인격과는 함께 하지 않습니다. 자기 부인을 이루려면 자기 사랑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기 부인과 자기 사랑은 피차 불과 물처럼 상극입니다. 자기 사랑을 포기하는 것을 통하여 자기 부인을 이루어 나가는 좋은 방법은, 자기 사랑의 방향을 틀어서 형제 사랑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성도는 자기 부인이 이루어지고 있는가의 여부를 살펴볼 수 있는 또 한 가지 시금석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에게서 형제를 사랑하는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점검해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부인, 곧 자기 사랑이 포기되지 않는 한에는 이웃과 같은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돌아보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부인을 실천하는 가장 좋은 방법들 중의 하나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자기 부인의 두 번째 측면인 겉사람의 죽임이란 것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성도의 자기 부인은 이 겉사람을 죽이는 것과 관련해서도 부단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겉사람을 죽인다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자신의 건강, 신분, 명예, 재산 등의 상실을 통해서 이루는 것입니다. 복음 때문에 건강을 헤칠수도 있고, 복음 때문에 명예도 버릴 수도 있으며, 복음을 위해서 호화로운 음식도 절제할 수 있는 것이고, 복음을 섬기기 위하여 가난한 자의 삶을 자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겉사람을 부정하는 모습입니다. 오늘날은 자기 부인에 있어서 겉사람을 죽이는 이 측면도 잘 강조되지 않는 불행한 시대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겉사람이 죽는 자기 부인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도들은 세상 속에서 이것을 부단히 이루어야 합니다. 또한 교역자들은 교회를 섬기는 사역 속에서 이것을 부단히 이루어야 합니다. 가령 바울은 위대한 복음의 사도였고, 그가 그 힘든 사역을 수고한 것을 생각한다면, 신분과 명예와 존경에 있어서 극치의 대접을 받아야 했지만, 겉사람을 죽이기 위하여 일체 사양했습니다. 그는 사도의 직무에 뒤따르는 일체의 명예와 신분과 지위와 재산을 포기함으로 겉사람을 죽이는 자기 부인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는 사실상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결과를 얻었기에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라고 선포했습니다.

이런 두 가지 형태의 자기 부인을 통해서 성도가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분명한 제자로 확인되고 성립되는 축복입니다. 자기 부인을 이루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으며 그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부인을 이루는 때에 받게 되는 일체의 고난이 있다면, 그러한 고난이 있으면 있는만큼에 비례하여 상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부인을 이루는 데서 성도가 어려움이나 고난을 겪는 것이라면, 이것은 단순히 자기 억제와 극기 훈련을 실천하는 것으로서의 의미로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이 이루어지는 때에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와의 산 친교가 일어납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인의 극치를 이루신 가운데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하신 일이 제공해주는 그 효력에 근거하여, 성도가 지금 자기 부인을 이루고 있는 것인 까닭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까지 들어가신 자기 부인을 함께 누리는 효과에 참여하는 일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자기 부인을 이루며 사는 성도의 삶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 있는 신학적 사실을 실제로 맛보고 경험하는 일인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까지 이끄신 그 성령님의 인도와 능력에 동일하게 참여하는 실질에 성립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

둘째, 이제 회개를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 성도가 감당해야 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이 일도 회개를 이루는 삶의 본질인 것이요,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제자도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성립시키시기 위하여 엄청난 핍박과 박해를 기꺼이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당신의 사명이었고, 곧 예수님 당신의 자기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도 각기 공통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성도는 모두가 예외 없이 이 사명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까닭에 이 사명은 성도에게 각기 ‘자기 십자가’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지기를 자원하는 사람일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기꺼이 복종하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곧 자기에게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환난과 핍박은, 그분만이 받으셔야 했던 특별한 고난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시대에 받아야 하는 그 환난과 핍박과 동일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마만큼 이 시대의 성도들이 환난과 핍박을 받는 것은 당위성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골 1:24). 여기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이 부족했다는 말은 분명 아닙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지금 이 세상에서 여전히 사역을 계속하신다고 가정한다면, 옛날의 그 고난이 여전히 예수님께 가해질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이 바로 그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예수님이 받으셨던 그 핍박과 고난을 동일하게 받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의 모습입니다.

교회가 고난을 받고, 그래서 성도가 핍박을 받는다면, 거기에는 이미 과거에 받으셨던 그리스도의 고난이 드러나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교회와 성도들이 고난을 받는 때에는, 교회가 더더욱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다워지는 효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성도는 신앙생활의 내영과 목표를 날마다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그러진 길로 간 것이 있거나 혹은 부진하고 미흠한 것이 있으면 과감하게 바로잡아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신앙생활이란 것이 부지불식간에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해 버릴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이미 목적입니다. 무슨 목적인가 하면,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을 누리는 것입니다. 인내하고 참다보면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하여, 십자가를 지는 일을 어떤 목표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미 목적인 구원에 이르렀기 때문에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는 이렇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바로 이 생명력이 지금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와 태평성대와 안일과 무사를 삶의 목표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이런 썩어빠진 사고방식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것, 자기시대의 문화와 가치를 따라 사는 것, 바로 이것이 죄의 본질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정말 이 점에 있어서 속아서는 안됩니다. 죄의 큰 성격이라는 것이, 그까짓것 남을 좀 미워했고, 교통법규를 위반했고, 아내에게 혈기를 냈고 하는 등의 것에서 찾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죄의 큰 성격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자기 스스로 영위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나가고, 자기시대의 문화와 가치를 따라 사는 데서부터 찾아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러한 인생관을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허망한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인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워주시는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말해보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통하여 세상에서 누리고자 하는 부귀영화를 더더욱 확대시켜 보겠다는 것이 믿음의 의미가 아닙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호소하거니와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 중에 행여라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이는 심히 두려운 일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이 일이 때로는 자기의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는 것으로 요구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여기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가족 관계라는 것은 더 이상 혈육 관계로서는 성립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성립되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당신의 어머니에게까지 ‘여자여!’라고 호칭하셨습니다(요 2:4 19:26). 또한 예수님은 사람들이 나아와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고 예수님께 아뢰던 상황 속에서도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라고 반문하신 후, 당신 앞에 앉아 있는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최종적으로 마무리하시기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2:50).

성도가 복음을 영접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가입하게 되면, 이제부터는 자기와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는 다른 지체들과 새롭게 가족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가족관계는 이론이 아닌 실질의 영역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친밀감에 있어서 육신적인 가족 관계에서 취하는 태도보다도 더 우선권을 두어야 합니다. 참으로 성도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요, 새로운 가족 관계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의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의무사항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건대 과연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 원리를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까? 이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 14:26)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런 원리를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까? 안믿는 육신의 가족을 위하는 일이라면 그야말로 생명과 재산까지도 다 바치고 허비하면서도, 정작 함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형제 자매의 고난은 거들떠도 안보는 것입니다. 물질과 사랑으로 참여하는 것은 고사하고, 잠깐의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조차도 귀찮아하고 아까워합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서야 성도들이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과만 끼리끼리 사랑하고 희희낙락하는 것이어서야 불신자들과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에 입각해서 세워지고 엮어진 세상의 삶의 법칙을 깨끗이 떨쳐버리고 일어나서, 오직 하나님께서 설정하시고 제정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법도를 생명처럼 순종하는 일, 바로 여기에 과연 세상이라고 하는 죄를 이기고 극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발현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도덕과 윤리와 상식을 그대로 간직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삶의 모습이 아니며, 제자도를 이루는 일과는 배치되며, 하나님께로 전향한 자다운 인생의 모습이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의 법도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하려고 할 때에 세상은 무서운 박해를 가해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박해를 기꺼이 담당하는 것이 성도가 져야 할 자기 십자가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 속에다 영광스러운 복음의 광채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인격을 발휘하며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핍박과 환난을 감내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죄와 악을 범한 것 때문에 징벌과 징계를 받는 것이 아니고, 복음 때문에 환난을 받는 것이라면, 이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복음으로 말미암는 환난과 고난을 기꺼이 감내하고 견뎌내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에게 기본적으로 짊어지워져 있는 자기 십자가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나가는 성도의 삶이 진정으로 회개를 이루는 자다운 삶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는 일평생 동안 회개를 전개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회개는 한 순간의 경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일평생 동안 지속되는 삶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되려면 근본적으로 마음이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는 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신 까닭에, 우리의 육체 또한 저주를 받아 그 생명이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일어나 부활하신 까닭에, 우리 역시 부활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로 신비적으로 연합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가운데서 회복되기에 이르렀고, 따라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서 사는 일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요,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작은 예수들이 되어서 이 세상 곳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시대의 역사 속에서 힘차게 전진해 나가게 됩니다. 이같은 삶의 과정 전체를 가리켜 회개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더더욱 회개를 이루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전향한 자다운 삶을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장수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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