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와 한국교회
허순길 교수 강의 (다우리 교회 2011년 9월 4일 오후 1시 20분)
1. 한국 교회의 현실
흐릿한 정체성
한국 교회는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 교회는 있어도 주소는 없는 것 아닌가! ‘OOO교회’라고 하지만, 구체적인 소속이 없다. 예를 들면 ‘대한예수교장로회 OOO교회’라고 쓰지 않는다. 이것은 유감이다. 이름만 다르고 간판만 다를 뿐 교회의 구별이 없다. 교회마다 설교의 내용이 거의 같다. 장로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감리교회가 차이가 없다. 교리와 신학의 차이를 볼 수 없다. 대부분의 목사들이 시장전략을 가지고 목회를 한다. 마치 코카콜라, 월마트처럼 크게 성장해 가기 원한다. 대형 교회는 지 교회를 세운다. ‘대성전’이 있고 ‘지성전’이라는 개념이 있다. 마치 큰 회사가 문어발식 적은 회사를 세우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런 교회들은 세상을 시장으로 보고 사람을 고객이라고 생각한다.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 TV에는 오락 프로그램 많다. 다른 나라에는 이런 오락프로그램이 많지 않다. 이렇게 가벼운 것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부담되는 말 싫어한다. 그래서 교회 성장 전략가들은 대교회를 세우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설교에 부담되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한다. ‘죄 값’, ‘사망’ 같은 어두운 단어와 주제를 설교하지 말라고 한다. 교리는 딱딱하니 말하지 말라고 한다. 들으면 항상 좋고 즐거운 말만 사용하도록 권한다. 번영과 치유의 목회하도록 유도한다. 노래 방에 가지 않아도 교회에서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팝송을 닯은 복음 송을 부르는데, 몸을 흔드는 행위는 오락을 즐기는 것으로 존엄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된다.
무지 넓지만 깊이는 얕아
이런 현상은 강단으로부터 참된 말씀의 선포가 사라지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거룩과 존엄이 사라지고 있다. 고신 교회도 전혀 다르지 않다. 모 목사가 “예배는 즐겁게 드리면 되지 신학과 예배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 보고 참 가슴 아팠다. 그 후 그 교회는 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참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한국 성도들은 장로교, 성결교, 순복음, 침례교 등 교파에 관심이 없다. 말씀이 즐거운 교회면 찾아간다. 한국 교회는 한 없이 넓다. 장로교, 침례교, 순복음을 오가는 성도들은 26km나 될 정도로 넓지만, 신앙의 깊이는 2~3mm밖에 되지 않는 것은 아닌지...... 한국 교회 신자들은 예수 믿으면 잘 되고 병 낫는다는 것은 잘 알지만, 교리적 지식 없다. 유치원 어린이에게 묻는 물음으로 세례 문답을 한다. 왜 장로교회인지, 다른 교회와 차이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신앙고백을 한다. 분명한 주소 없는 교회가 되고 있다. 강단 교류하는 옅은 신앙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는 옅은 신앙을 가진 자들은 박해가 오면 인사도 없이 소리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교파의 특이성이 분명히 있는데, 이것을 정확하게 드러낼 때 정체성이 나타난다.
무분별한 교회연합 운동
무분별한 일치 운동과 연합운동은 사탄이 주는 독주라고 생각한다. 많은 교회가 이 독주에 취해 비틀거리고 있다. 결국 이렇게 가다가 넘어지고 말 것이다. 오늘 우리 세대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 후손들과 직결된 문제이다. 우리의 신앙, 교회 선택, 생활은 우리 자신 분 아니라, 우리 자녀들과도 관계가 있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주의가 아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내가 내 언약을 너와 네 후손과 맺어......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라고 하셨다. 부모와 자손의 관계는 끊어질 수 없다. 나와 나의 손자들을 함께 보아야 한다. 내 손자들도 다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 자손과 후손을 위해 바른 믿음, 교회, 생활을 해야 한다.
개인주의적 신앙
개인주의에 젖어 있는 현대 교회는 심각한 문제 있다. 나의 믿음 나의 교회의 선택이 나의 자녀들의 신앙과 직결된다는 것 알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간판만 장로교라고 하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을 가르치고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교회를 찾아보기 힘들다. 장로교회이면서 장로를 세우지 않는 것도 문제이다. 장로는 목회에 거리낌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알미니안적 교회
하도례 목사의 예를 보라. 정직한 말을 했다. “한국 교회는 장로교회가 아니라, 집사 교회입니다.” 서리 집사들이 너무 많은 것을 빗대어 한 말이다. 장로교회는 감리교회와 다르다. 감리교회는 알미니안주의를 따른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을 믿지 않는다. 구원을 위한 자신의 선택을 믿는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영적으로 부패하고 완전히 죽었다고 믿는다. 교회 정치도 감리교회와 다르다. 감독정치를 하는 감리교회는 본래 영국 국교회와 비슷하다. 성공회는 천주교회와 같이 감독이 다스린다.
교회의 직분관
장로교회는 사도들이 특별히 후계자를 세우지 않고, 교회에 장로를 세우신 것으로 믿는다. 장로교회 정치는 감독이 아닌, 장로들에 의해 정치를 한다고 보았다. 감독은 장로이고, 목사도 장로이다. 가르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가 당회를 구성한다. 순복음교회는 그 신학과 교리와 정치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정치적으로 장로가 없고, 목사가 절대권을 가지고 있다. 독립교회와 회중교회와 같은 정치를 한다. 장로는 성경적인 확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냥 장로교회를 본 딴 것에 불과하다.
세례관
가장 큰 차이는 세례관이다. 침례교와 순복음 교회는 유아세례를 거부한다. 세례는 믿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아는 믿지 않기에 세례를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구원이 개인주의적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성경은 이런 개인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믿는 개인과 자녀를 함께 보신다. 자녀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본다. 그의 아들과 자녀를 함께 본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출생되는 이삭도 그에게 속한 것으로 보았다. 그 증거로 할례를 주신 것이다. 8일 만에 할례를 받는다. 사람이 증거를 원하니 주신 것이다. 그러니 침례교회와 장로교회는 이렇게 다르다. 고신교회가 침례교회와 강단교류를 하는 데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침례교 목사가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개인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신약의 세례는 할례를 대신해서 세운 것이다. 언약을 무시하는 침례교와 순복음은 성경 해석에 있어서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강단교류를 할 수 있을까?
의미 잃은 유아세례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라는 표이다. 믿는 자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들은 언약의 자녀이다. 하나님에게 속하고 언약을 받은 자이다. 하나님은 불가해한 그의 뜻에서 데려 갈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의 약속을 받았다. 여기에 믿는 자들의 참된 위로가 있다. 친구 목사(개혁교회)가 죽은 자녀의 사진을 그대로 보관하는 것은 천국에 간 아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아세례를 부인하는 것은 언약의 복을 거부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5장 15-16절, “믿고 세례를 받은 자들은 구원을 받은 것이요.....”라는 것을 인용하는데, 이 말씀은 특별한 선교 상황에서 말씀한 것이다. 초대교회는 믿고 세례를 받은 자들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보고 유아세례를 주었다. 베드로는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이렇게 베드로도 세례와 관련해 ‘너희와 너희 자녀’를 포함시켜 생각했다. 예수를 믿은 간수는 베드로에게 자기와 자기 가족에 속한 모든 가족 구성원이 다 세례를 받았다고 전한다.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표현이다. 놀라운 은혜의 복을 무시하고 장로교회를 떠나 순복음과 침례교회로 넘나드는 것은 신학과 신앙의 깊이가 얕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시류를 따라 목회하는 목사의 문제도 심각하다. 교회 간판만 정확하게 정체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대로 목회해야 한다. 신앙고백을 공부해야 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속한 교회의 교인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2.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차이
칼빈 신학 안에 ‘개혁교회’와 ‘장로교회’가 속한다. 16세기 개혁교회는 칼빈을 따르는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교회를 가리킨다. 장로교회는 요한 낙스를 중심으로 한, 웨일즈, 스코틀랜드, 영국에 있는 교회를 가리킨다. 두 교회는 칼빈의 신학을 따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각기 자기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개혁교회는 세 가지 일치 신조(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 벨기에신앙고백 + 도르트 신조)를 고백하지만,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대소교리문답을 가지고 있다. 두 교회 모두 정치적으로 반 교권적인 입장과 그리스도의 왕권을 분명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이 원리를 적용하는 면에서는 양 교회가 큰 차이를 보인다. 본인은 장로교회 목사로 개혁교회에 봉사해 보면서 차이를 볼 수 있었다. 장로교에 속한 우리는 16세기 이후 칼빈의 신앙을 더 잘 보존해 온 개혁교회의 특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 개혁교회
(1) 교회관이 뚜렷해
개혁교회 교인들에게는 교회관이 뚜렸하다. 신앙고백을 교육 받는 가운데 참 교회가 무엇인지 그 표와 증거가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벨기에 신앙고백 29항으로부터 교회의 표지(복음의 순수한 설교 + 성례의 집행 + 권징(죄의 교정과 지도)를 잘 알고 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생활하지 않고 교회를 구분 없이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참 교회에 대한 관심이 없다. 이것은 장로교회의 신앙고백과도 관련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개 교회는 공적 예배가 얼마나 순수하게 시행되는 가에 따라..... 차이가 있다.’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교회를 평가하는 데는 이것 가지고는 힘들다. 참 교회에 대한 분명한 얘기가 없으니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교회를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만드는 위험 있다.
(2) 교리 교육을 중요하게 여겨
유아세례를 받은 아이들은 철저하게 교리교육을 받는다. 1주일에 한 시간씩 교리 교육을 받는다. 교리 교육은 5년 정도 계속 된다. 신앙고백을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교리로 받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입교와 세례 때 고백하는 내용은 너무 평이 하고 넓어 구체적인 신앙의 내용에 들어가면 믿는 바가 너무나 다양하다. 그렇게 해서는 교인이 이단 교회의 교리를 거절하기 힘들다. 또 고백하는 신앙고백대로 살겠는가, 라는 구체적인 질문이 없다. 그리고 교회의 신앙고백에 대한 내용과 이단에 대한 내용 없다. 자녀들이 교리 반에 참석하도록 할 의미가 부모에게 있다. 부모가 자녀교육에 대한 약속을 하면 철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한국 교회에는 신앙고백에 대한 내용이 전혀 없다. 기도는 하고 주일학교는 보내지만 장로교가 속한 신앙고백에는 관심이 없다. 부모는 장로교회에 나오지만, 자녀들은 침례교회와 감리교회에 보내는 경우도 있다.
개혁교회 성도는 초등학교만은 절대로 불신자에게 맡기지 않는다. 공립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아무리 적은 교회라도 초등학교는 한다. 주일 두 번 설교 가운데 한 번은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을 듣게 된다. 결과적으로 개혁교회의 장년 청소년 대부분이 정체성 있는 개혁교회의 교인이 된다.
(3) 교회 역사를 귀중하게 여겨
개혁교회 성도들은 기독교 학교 꼭 세운다. 초등기독교학교는 기본이다. 성경과 교회사를 필수적으로 가르친다. 자기 교회와 다른 교회가 다른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자부심을 가질 수 없다. 그리스도인으로 교회사를 모르면 교회의 정체성을 알 수 없다.
지난 해 캐나다 교회를 방문했다. 기독교학교 교육과정 개발위원회에서 교회역사 책을 출간한 것을 보고 놀랐다.
(4) 일반 신자의 직분의식이 분명해
모든 성도가 직분자!
개혁교회는 공식적 직분자만이 교회에 봉사를 한다고 믿는다. 성경에 근거가 없는 권사를 세우고, 직분자를 많이 세우는 것 한국 교회의 문제가 아닌가! 개혁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 자체가 직분이다. ‘기름 부음 받았다’는 것이 제사장으로, 왕으로, 선지자로 직분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왕으로, 자비로우신 대제사장으로, 선지자적 직분자로 사역하셨다. 이는 곧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세 가지 직분자로 세움을 받았다는 뜻이다.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32문답을 보라. “그분의 기름부음에 참여했으니, 제사장, 왕, 선지자로...... ”
명예로서의 직분?
한국 교회는 직분자를 명예로 보는 것이 문제이다. 많은 목사와 장로들이 면류관을 쓰기 원한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면류관을 약속한 적 없다. 오히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셨다. 집사를 마구 주고 있는 문제이다. 교회의 반 수 이상이 집사이다. 세례 받고 몇 년 지나 집사 받지 못하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풍토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무서운 속화이다. 오순절 예루살렘 교회는 3천, 5천으로 늘었는데, 이 때 사도들 12명이 다스렸다. 집사는 겨우 7명이었다. 자비 사역이 받은 사명이니, 사도들의 숫자의 반인 7명이 임명 받았다. 개혁교회에는 장로가 많고, 집사는 1/3 혹은 1/4밖에 되지 않는다. 감독자는 많고 집사는 적어야 맞다. 장로가 15명 되어도 집사는 몇 되지 않는다. 명예를 추구하는 한국 교회는 심각 문제가 있다. 모든 신자가 기름 부음 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한다.
직분을 호칭으로 삼는 것의 문제
교회 직분을 호칭으로 부르는 것은 세계에서 우리나라 밖에 없다.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한국 문화에서 생긴 것 같다. 한국에는 집사직을 주어야 십일조 내고 충성한다는 얘기 있다. 십일조 내는 사람만이 집사의 자격이 된다, 라는 문구는 물질주의에 따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나? 그러면 어떻게 부를까? 가족 공동체이기에 ‘아버님, 어머님, 형님, 주님’ ‘장로 형제, 집사 형제’라고 부르는 교회도 있다. 가족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것 필요할 것이다.
반교권 철두철미해
개혁교회는 교권을 멀리 한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교회의 감독이다. 한국 장로교회는 원리뿐이고 교회 생활은 다르다. 직분 사이에 높고 낮음이 있다. 집사로 있다가 장로가 되면 승진으로 간주하는 경향 있다. 의식하지 않으면 교회의 직분을 계급으로 인식한다. 목사는 장로를 세우지 않고 작은 교황으로 일하려는 문제가 있다. 장로도 순수하게 봉사한다는 생각보다는 군림하거나 목사를 경계하려는 태도가 있다. 교권의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교회는 출발부터 교권을 멀리 했다. 1571년에 엠던(Emden)에서 첫 총회가 모였는데, 첫 조항에, ‘어느 교회도 어떤 형식으로든 다른 교회를 지배하지 않아야 하면 어떤 직분도 다른 직분을 지배하지 않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도시 교회가 지역 교회를 지배하거나, 감독 있는 교회가 지역교회를 지배 했다. 목사와 목사, 목사와 장로, 장로가 집사를 지배하는 경향이 있었다. 종교개혁 이 후 개혁교회는 500년 동안 교회는 교권을 허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아름다운 전통으로 남아 있다. 목회를 하면서 감사했던 것은 목사와 장로의 높고 낮음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장로와 집사의 높고 낮음이 없다. 목사에 대해 존경하고 높이는 것이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목사를 ‘주님’이라는 단어인 ‘도미네이’(dominee)라고 부른다. 그러나 목사는 서로 동역자라는 관점에서 일한다. 담임목사와 부목사라는 개념이 없다. 이런 원리가 개혁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장로가 목사 위에 군림하는 일이 전혀 없다. 그래서 교회의 직분자는 자신의 책임을 맡아 일하는 동역자일 뿐이다. 동역자라는 의식으로 교회에 봉사한다.
한국에서 당회장을 직책으로 생각하는 것은 문제이다. 당회의 사회권자라는 의미에서 당회장이지만, 회의를 인도하고 법적인 대표로 서명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직분자도 아니다. 이 부분은 개혁교회에서 분명하다. 장로교회는 이 점에서 분명하지 않다. 상회와 하회의 구조도 문제이다. 선거운동에서 금권선거가 난무하는 것 이해할 수 없다. 한기총의 문제가 그 예가 아닌가! 목사가 선거운동으로 사용했다는 수억을 어떻게 벌었을까? 교회의 것을 썼다면 도적과 마찬가지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중세 교회의 부패 중 하나가 돈으로 교회의 지위를 사는 것이었다. 개혁교회는 당회만의 치리회이고, 노회, 총회, 대회는 교회의 공동유익을 위한 넓은 범위의 회(Broader Assembly)이다. 대의원들이 모이는 임시회에 불과 하다. 개혁교회는 교권의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자리를 주지 않는다. 이를 위한 눈치도 보이지 않고 그냥 봉사한다. 1998년 ICRC(고신교회가 회원 교회)가 열렸는데, 본인을 회장으로 세웠다. 10일 동안 회의를 인도했다. 그런 것에 대해 아무런 감각이 없다.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한다. 이것이 개 교회의 방식이다. 교권은 무서운 속화를 가져온다. 이런 교권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만이 왕이고 영광을 받으시도록 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정말 변해야 하고 개혁되어야 한다. 장로교회면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설교를 달리하고 시류를 따라가지 않아야 한다. 산 물고기는 시류를 거슬러 올라 간다. 개혁교회의 정체성을 찾고 보여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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