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에 대하여
정병길 강변교회 목사
1. 들어가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그 이름을 불러서 찬송하는 일은 사람의 의무인 동시에 특권이요 복이다. 하나님만이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오 그 권세와 능력과 영광과 존귀가 한이 없으신 분이시므로 인생은 스스로 인생임을 알고 하나님 앞에 경배와 찬송을 드려야 할 것이다. 이 일은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무방한 선택 사항이 아니며, 반드시 해야 할 인생의 최우선적인 의무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는 자들을 그 타락한 데로 버려두셔서 자기들의 죄악 된 행실대로 보응을 받도록 하셨다(롬 1:18-32).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고귀한 위치에 이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경배하고 찬송을 올리게 하기 위함이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2).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키심을 받아 하늘에 앉히운 그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들에게 돌아온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라고 찬송한다. 그러므로 주일에 신자들이 교회로 모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고 예배드리며 그 이름을 불러 찬송하는 것은 인생의 존재 목적을 이루는 지극히 복된 일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두루 감찰하시사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 예배드리는 자를 만나시고 그에게서 기쁨을 거두신다.
이렇게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복된 것이 하나님께 경배와 찬송을 드리는 일이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뜻에 부합되지 않게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미워하시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신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제사장으로서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께 분향하다가 여호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단에서 나오는 불에 타서 여호와 앞에서 죽었다(레 10:1-7).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요 거룩하신 주권자이시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또 그 뜻을 보이셔서 그 뜻에 따라 정하신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의 뜻을 계시하지 못하는 말 못하는 우상이 아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자기 신에게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므로 사람이 정한 뜻과 욕심과 열정을 따라 우상에게 나가서 절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찬송에 대하여 정하신 뜻은 무엇이며 어떤 찬송을 어떻게 드리는 것을 받으신다고 가르쳐 주시는가? 세상에 찬송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어떤 것이 참된 찬송이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고 또 어떻게 찬송을 불러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 찬송과 예배
찬송과 예배가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지만 그 형식과 본의가 각각 구별된다. 요한계시록 4:8-11과 5:9-11을 보면 한 정경 안에서 성도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찬송하는 것과 경배하는 것을 구분하였고, 또 찬송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다.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고 자기 마음을 지극히 낮추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것이고 찬송은 하나님의 계시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고 거룩한 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 그 영광을 기리고 높이는 것이다. 찬송의 본의와 형식이 따로 있고 예배의 본의와 형식이 따로 있으며 각각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은 구별해서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송이나 예배가 모두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그 정신이 같고 따라서 찬송을 드리며 예배의 심정을 품을 수 있고 또 찬송은 예배 의식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러므로 어떤 찬송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가를 생각할 때는 먼저 성경이 가르치는 예배의 원칙과 정신을 생각하는 데서 시작하여 찬송에 대한 하나님 말씀의 교훈을 찾을 때 찬송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잘 배울 수 있을 것이다.
3.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하나님을 믿는 우리 곧 신자의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원칙에 대하여 이같이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24). 하나님은 영이시니 만유의 창조주이시고 신자의 구속주이시며 신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신령하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자기의 심정과 열성을 다 쏟아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한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열쇠가 되는 말은 “곧 이때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남김 없이 다 계시하시고 마침내 성신을 그들에게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성신께 속한 사람들이 되게 하셨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 말씀과 성신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고 그에 합당한 경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즉 예배는 교회가 성신의 인도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성삼위 하나님께 부복하고 절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이다. 따라서 예배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깨닫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른 예배의 첫째 요건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예배란 의식(儀式)이 중요하지 않고 정신이 중요하며 어디서나 언제나 그런 마음만을 품으면 된다는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같이 말씀하신 예수님은 구약의 경륜하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법을 지도하신 분이시다. 이스라엘이 구약의 교회로서 함께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에 모여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안식일에 제사장의 인도로 정한 방식의 제사 법을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음을 잘 아시는 분이시다. 이런 의식의 제도를 내신 것은 구약의 경륜 하에서 즉 물적으로 그 백성을 교육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다. 사람은 몸을 가진 존재로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살도록 하나님께서 지으셨다. 따라서 이 신령하고 고귀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일정한 형식을 좇아서 자신의 마음과 위치와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신자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생활로써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또한 그것과 구별되는, 예배 의식이라는 하나의 형식으로서 예배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에는 예배 모범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예배 의식법을 다 이루셨으므로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교회와 다른 형식으로 예배를 드리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사도들은 바로 그 정신에 따른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일정한 예배의 형식을 가졌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행 2:42). 여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서로 교제하는 것 즉 연보하여 헌상하는 것이 있고, 또 떡을 떼는 것 즉 성찬식을 갖는 것과, 기도하는 것 즉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기도와 찬송을 하는 일이 있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또 이것이 일련의 과정으로 구성되어 구약의 예배와는 다른 신약의 예배 형식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예배는 일정한 형식을 수반한다. 이 예배 모범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대로 신령과 진정으로 구성된 것이어서 예배드리는 자의 예배를 바로 지도하여 하나님 앞으로 그의 마음을 인도 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예배는 교회로서 드리는 것이다. 모든 교인이 한마음으로 예배드릴 때 예배 모범이 그릇되어 예배자의 마음을 혼란케 하거나 억눌러서는 안된다. 따라서 개개인의 경건에 앞서 성도가 드리는 예배의 지도 지침이 될 만한 예배 모범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교회라 하면서 바른 예배 모범 하나 정하지 못하고 목사의 형편대로 때로는 즉흥적으로 예배가 인도되는 현실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러면 바른 예배형식은 어떻게 제정되어야 하며 그것을 지배하는 정신, 즉 신령과 진정은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교회의 전통을 성경과 동등한 위치에 놓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결국 우상 숭배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개혁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았을 때 비로소 예배를 바르게 드릴 수 있었는데 예배 모범의 제정의 정신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장에 이렇게 나타나 있다.
1절: 본성의 빛은 만유의 주와 통치자이시며 선하시고 만물의 선을 행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시며 따라서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의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를 경외하고 사랑하며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신뢰하며 섬겨야 함을 나타낸다. 그러나 참되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방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여 주셨고,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여 주신 뜻에 의해 한정되었다. 이는 사람의 상상이나 고안을 따라서, 혹은 사탄의 제안을 따라서,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으로나 성경에 규정되지 않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2절: 경건한 예배는 성부 성자 성신 하나님께,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며 천사나 성자나 혹은 어떤 다른 피조물에게 드려서는 안 된다. 타락 이후에는 중보자 없이 예배를 드릴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다른 중보로 드려서는 안 된다.
5절: 경건한 두려움으로 성경을 낭독하는 것, 바른 강설 및 그 말씀을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이해와 믿음과 경외심을 가지고 정당하게 듣는 것,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편을 부르는 것,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를 바르게 집행하고 합당하게 받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 통상적으로 드리는 경건한 예배의 부분들이다. 이외에도, 특별한 경우에 하는 경건한 맹세, 서원, 엄숙한 금식, 감사 등은 각각 그 때와 절기에 따라서 거룩하고 경건하게 실행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주의 날에 성도들이 교회로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과 성신의 인도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고 감사와 경건과 경외의 심정으로 정해진 예배의 요소 즉 찬송과 기도와 헌상과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는 것과 강설하는 것에 참여하는 일이다. 평일이 아니라 주일에 개인이 아니라 교회가 전체로 모여 바른 예배 모범을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형식 속에서 예배의 바른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4. 찬송에 대하여
이런 예배의 정신이 찬송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찬송의 정당한 위치는 그것이 예배의 중요한 한 요소라는 점이기 때문에 이 위치에서 바른 찬송이 무엇인가를 분별해야 한다. 예배가 예배 모범이라는 일정한 형식을 가진 것처럼 찬송도 거룩한 말로 된 시에 곡이 붙여진 하나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찬송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그러므로 부르는 찬송이 기독론적이고 성경적이어야 하고 또 부르는 사람이 깨닫는 마음으로 불러야 한다.
히브리서 13:15-16은 다음과 같이 찬송을 정의하고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찬송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며,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높여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공경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준다. 찬송에서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첫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 집중되어야 하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 계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교회로 모여서 찬송을 드리되 교인 전체가 찬송으로 드리는 일에 참여한다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곡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가사의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게 돕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로마 가톨릭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남으로써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는 데서 떠났듯이 바른 찬송을 드리는 데서도 떠났었다. 개혁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왔을 때 예배에서 찬송의 정당한 위치를 회복할 수가 있었다. 로마 가톨릭은 성가대를 세워서 찬송을 드리게 하였고 일반의 신자들은 그것을 앉아서 듣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도록 하였다. 또 그레고리안 성가같은 어려운 곡을 부르거나 연주하여 종교적인 감흥을 한껏 돋우어 신비한 제의적 분위기를 조장하였고, 신자들은 그 어려운 곡을 쉽게 따라 부를 수도 없었다. 이에 대하여 개혁자들은 찬송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하신 모든 백성들에게 주신 은혜요 복이며, 찬송을 부르는 것이 사람의 본분임을 들어서 특권층만 찬송을 부르는 것을 폐하고 모든 성도로 하여금 다 함께 찬송을 부르도록 하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도의 권리를 회복시켜 준 것이다.
또 찬송은 무엇보다도 계시를 좇아서 하나님의 이름을 바르게 불러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 가사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찬송은 노래가 아니므로 곡이 아무리 좋아도 가사가 바르지 못하면 찬송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찬송의 기본 요건은 가사가 신학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가령 개인의 구원 경험이 찬송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니지만 모든 사람에게 보편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이 교회에서 함께 부를 수 있는 찬송이 되지 못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가식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말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높이는 것은 우리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다 나타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낸 하나님의 영광, 그 영광이야말로 하나님 그분의 영광인 것이다. 또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낼지라도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성삼위 하나님으로 나타내신 그 이름에 부합하지 않거나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이 찬송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개혁자들은 무엇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려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매우 신중하였다. 신약의 백성이라면 성삼위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리스도의 강생과 고난과 부활과 승천과 성신을 부어 주시고 교회를 세우신 일을 찬송하는 것이 마땅한 것을 알았다. 그래서 루터 선생은 그런 점을 나타내는 찬송을 저작하여 교회에서 찬송 부르는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칼빈 선생은 당시 로마 가톨릭이나 과거 영지주의자들, 아리안 이단들이 자의적으로 찬송을 지어서 찬송을 어지럽히는 현실을 보고, 시편 찬송을 부르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삼았다. 오늘날 어떤 개혁 교회는 시편 찬송으로 찬송하기를 힘쓰며, 또 신약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찬송을 지어 부르는 일도 하고 있다. 다만 어떤 찬송을 교회 찬송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인가는 총회의 승인을 거쳐서 결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정당한 일이다. (참고. 캐나다 개혁교회 헌장 55조: 총회에서 채택한 운율에 따른 시편과 총회에서 승인한 찬송을 예배 의식에서 부를 것이다.)
5. 찬송의 곡에 대하여.
찬송의 가사, 그 거룩한 말은 운율에 따라서 부르면 노래가 된다. 일정한 가락과 곡조를 따르는 노래를 부르는 것은 실제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은 고도한 정신세계와 사람의 깊은 심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성악은 모든 음악의 기본이다. 찬송의 가사를 곡에 붙여서 표현함으로 사람의 영혼을 쏟아낼 수 있다. 그러나 찬송은 음악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은 가사를 표현하기 위한 보조 수단이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화란은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고 개혁자들의 지도하에서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다. 가톨릭은 교회 안에 오르간을 들여 놓고 그것을 연주하여 종교적인 분위기를 돋우었는데, 종교 개혁 이후 개혁 교회 신자가 된 사람들은 그때의 이 무의미한 일에 대하여 진저리를 내었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9)고 한 성경 말씀을 따라 총회는 오르간을 교회에서 퇴출시키기로 결정하고 찬송은 반주 없이 육성으로만 부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시 당국에서 그 큰 오르간을 쉽게 옮겨갈 수가 없었으므로 오르간은 오랫동안 그냥 방치되었다. 세월이 상당히 흐른 후에 오르간을 예배에 도움이 되도록 사용할 수 있는 신앙과 기능을 가진 사람이 나와서 다시 교회에서 오르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점을 보면 개혁자들은 찬송에서 음악을 예배의 요소로 보았다기보다는 예배의 환경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잘 숙련된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가사 없이는 찬송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예배 찬송을 음악 축제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진행하는 것은 예배를 훼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음악이 예배의 환경이라 하여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찬송 가사에 좋은 곡이 붙으면 찬송의 정신을 훨씬 더 잘 드러낼 수 있다. 다만 그 음악이 예배의 정신에 맞는 것이어야 한다. 칼빈 선생은 예배에 적합한 찬송곡은 단순하고 장중해야 하며 그 가사의 정신을 잘 살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당시에 유행하던 곡을 찬송곡으로 채용하지도 않았고, 사람의 음악적 감흥을 위주로 하는 곡을 만들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작곡자에게 시편을 주고 거기에 적합한 곡을 창작하여 붙이도록 독려하고 이 일을 위하여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537년 칼빈이 제네바에 체류할 당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올리고 찬송으로 그의 이름을 높이도록” 모든 회중이 시편 찬송을 부를 것을 제안했지만 시 의회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 당시 그들은 이것이 너무 혁신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후 1537년에 제네바에서 배척당하여 스트라스부르그에 온 후 19개의 찬송곡을 단 시편 찬송집을 간행하였다. 그 중 6개는 칼빈 선생 자신이 작곡하였고 13개는 끌레멍 마로(Clement Marot)가 작곡하였다. 이후 칼빈이 제네바로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49개의 시편 대부분이 끌레멍 마로의 손에 의하여 작곡되었고, 이것이 출간되었으나 프랑스 궁정 시인이었던 마로는 제네바의 엄격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곧 떠났다고 한다. 이후 칼빈 선생은 자신의 후계자가 된 데오도르 베자 선생에게 작곡의 은사가 있음을 발견하고 그에게 시편의 곡을 붙이도록 요청했고 베자는 이 일을 사명으로 여겨서 부지런히 작곡하였다. 1559년 제네바 아카데미가 설립된 이후는 제네바로 옮겨와서 계속 작곡한 나머지 1562년 봄에는 가톨릭의 극렬한 반대라는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시편 전체에 곡을 붙인 이 찬송가가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실로 칼빈 선생이 처음 이 일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어서 완성된 것이다. 베자는 이 일을 함에 있어서 결코 자신의 시적 감흥이나 취미적 성향으로 임하지 않았다고 후대인들은 증언한다. 그러나 이 곡의 완성은 이것으로 다 끝나지 않았다. 칼빈은 이 일을 하는 동안에 루이 브루좌로 하여금 작곡도 하고 또 마로와 베자가 작곡한 곡을 다시 편곡하여 좀 더 찬송곡답게 만들도록 하였다. 이로 보건대 제네바 개혁자는 18,19세기 경건주의자들이 그러했듯이 결코 당시 유행하던 민속곡이나 명곡을 찬송의 곡으로 채용하지 않았다. 칼빈 선생의 찬송 음악 선정의 큰 원칙은 첫째, 곡은 가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 하고 곡이 가사의 정신을 잘 나타내 주어야 한다. 따라서 곡은 경박하지 않고 장중한 것이 되기를 원했다. 둘째, 음악의 특별한 훈련이 없는 일반 교인들도 부르기 쉬워야 하고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인공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 보다는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부를 수 있는 항상성을 가진 단순한 것이어야 한다
찬송곡 그 자체는 예배의 요소가 아니고 예배의 환경으로 볼 수밖에 없을지라도 이렇게 신중을 기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에 포함된 이상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정결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어떤 찬송의 곡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곡이라고 확신할 만한 특징을 하나의 원칙으로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이다. 물론 음악은 문학도 철학도 논리학도 아니어서 그런 점을 하나의 원칙으로 말하는 것이 매우 모호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일이 결코 그렇게 어려운 일만은 아니다. 성경의 교훈과 개혁자의 찬송곡 작곡의 원칙의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무슨 곡이 어떤 식으로든지 찬송곡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오히려 찬송 음악이 가져야 할 분명한 원칙과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고, 그 외의 것은 모두 찬송곡의 영역에서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는데 이것도 역시 예배의 큰 원칙에서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찬송음악이 되고 되지 않고를 나누는 단일의 원칙은 그것이 경건한 신(神) 지식으로 인도받는 곡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른 찬송곡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바른 심정이 투영된 것이어야 한다. 이 말은 결코 애매하지도 모호하지도 않다. 가령 어떤 사람이 한국의 민속 음악도 찬송곡으로 채용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가능한 일이겠는가? 일반적으로 한국의 민속악이란 무속의 영향을 받아서 생성된 것이다. 이것이 이교에서 왔기 때문에 찬송곡으로 부적합하다는 단순 논리를 펴려는 것이 아니다. 한국 민속악에 나타나는 가장 강렬한 정서는 한(恨)이라는 것이다. 한의 심정은 내세가 그 세계관 속에 없는 사람이 비참하게 생활하다가 죽었을 경우에 맺히는 절망적인 감정의 응어리이다. 그런데 이런 한의 감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또 하나님의 신성 앞에 얼마나 걸맞지 않는 심정인가?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고뇌를 잊어버린다. 하나님 그분이 모든 것이다. 그분이 구원이고 그분이 영원한 복이 되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가까이 나오도록 용납하시는 천지의 창조주요 만물의 대주재이시며 인생의 구주가 되시는 지극히 높으시고 거룩하시며 그 영광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라. 그분 앞에 어떻게 한 서린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있겠는가? 그것이 그분을 얼마나 만홀히 여기는 것인가? 그분 앞에 절제하지 않고 구원을 호소하지 않고 어떻게 끝없는 절망의 울음을 터뜨릴 수 있는가? 그분의 숭엄하신 엄위 앞에 어떻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그의 처분을 기다리는 경외심을 품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런 한을 쏟아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민속 음악에서 적어도 이런 한의 요소를 제거하지 않고는 그것을 찬송의 곡으로 사용할 수 없음이 자명하다. 이와 같이 사람의 감정을 심하게 자극하고 유흥을 돋우는 비트가 강한 록(rock) 음악이 하나님 앞에 서는 자의 찬송의 곡으로 적합하지 아니하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마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의 무절제한 곡도 찬송의 곡으로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찬송의 곡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받는 예배의 정신에서 나와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숭엄함을, 또 구원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을 하나의 큰 원칙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6. 결론
찬송은 크고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의 일이다. 이상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찬송을 드리기 위한 방도를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교회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다 함께 찬송을 드리기 위해서는 예배의 정신에 부합한 찬송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교회가 찬송의 정신을 잘 배워 바른 기준으로 바른 찬송을 잘 선정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 동시에 교인들은 예배의 정신을 잘 체득해야 한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를 배우고 아는 일에 자라서 하나님의 크신 이름과 그 구원을 친숙히 알아서 항상 찬송드리려는 심정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런 준비 위에 찬송을 잘 드리려는 노력은 먼저 그 찬송의 가사의 뜻을 잘 아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 가사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면 찬송 부르는 일은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다. 다음은 하나님을 높이려는 심정으로 노래하되 곡은 이 가사를 잘 표현하기 위한 것이므로 탐미주의자의 심정으로 그것을 익혀서 부르거나 시대에 유행하는 경박한 풍으로 불러야 할 것이 아니라 그 가사의 뜻으로 곡을 해석하여 불러야 할 것이다. 곡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음악 그 자체를 즐기며 음악이 주는 감동에 몰입되어 가사를 생각하지 못하고 성삼위 하나님을 주목하지 못하면 찬송하는 자의 자리에서 비꾸러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것을 다시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돌려주신다. 바른 찬송을 드리면 그 찬송의 정신과 정서를 우리에게 돌려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높이는 안정된 정서 속에서 살 수 있다. 이것이 찬송드리는 자의 또 다른 큰 복이다. 하나님은 바른 찬송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 시편 69:30-31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하나님은 신자가 드리는 바른 찬송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만방에 알리신다. 따라서 찬송하는 우리는 제사장일 뿐 아니라 선지자의 반열에 서게 되는 것이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며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편 40:3).
* 이 글은 성격상 각주를 붙이지 않았으나 김홍전, 최낙재 목사의 강설과 John Calvin, Edmund Clowney, K. Deddens, W. W. J. Van Oene, N. H. Gootjes의 서책과 논문의 도움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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