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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볼턴은 널리 알려진 청교도이다. 1626년에 처음 출판된 『상한 양심의 위로서』(A Treatise on Comforting Afflicted Consciences)라는 유명한 저술이 다시 출판됨으로써 오늘날까지 그의 명성이 남아 있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 Jr)는 이 책이 '죄책을 실제적으로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결정판'이라고 평하였다. 맥아더는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가 다시 낸 출판 서문에서 "지난 20년 동안 이 책보다 더 낫게 상한 양심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깊이 있게 다룬 책을 한 권도 보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였다. 볼턴이 쓴 다른 무게 있는 저서들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과의 편안한 동행』(A Comfortable Walking with God), 『네 가지 영원한 것들 : 죽음, 심판, 지옥, 천국』(Four Last Things : Death, Judgement, Hell and Heaven)

 

로버트 볼턴은 1572년 랜커셔의 블랙번(Blackburn)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볼턴에게 특별한 은사가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가난했지만 경제적인 희생을 하면서 그의 교육에 힘썼다. 볼턴은 중고등학교에서 우등을 하였고 20세에 옥스퍼드의 링컨 대학(Lincoln College)에 들어갔다. 그는 대학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올렸다. 그는 헬라어에 능통해서 헬라어 교사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다가 나중에 30세에 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볼턴은 복음으로 회심한 자가 아니었다. 그는 현 세상의 악을 사랑하였고 케임브리지에 있는 잘 알려진 청교도 교사인 윌리엄 퍼킨스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그러던 볼턴이 깊은 죄의 확신을 체험하였다. 이 죄의 확신은 여러 달 동안 계속되었는데 너무 강렬하고 고통스러워서 마르틴 루터의 체험과 비교될 정도였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선물인 의(義)에만 의지하여 평안을 얻었다.

 

그는 35세에 복음 사역자로서 안수를 받았다. 그는 40세가 되어 결혼하였고 그의 아내로 인해 큰 복을 누렸다. 볼턴의 아내는 그의 사역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볼턴은 사역의 자질과 정열이 탁월하였다. 그의 설교는 영혼 구원이라는 한 가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수백 명이 그의 사역을 통해 회심하였다. 그는 노트햄턴셔의 브라우턴(Broughton) 교구에서 20년 동안 열정적인 사역을 하였다.

 

그는 과거에 세상 열락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죄의 기만성과 파괴성과 유독성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속속들이 파헤칠 수 있었다. 볼턴의 설교 스타일은 담대하였고 타협을 몰랐다. 그는 공적으로 설교하기 전에 혼자 사적으로 설교를 연습해 보면서 준비하였다.

 

세례 요한과 주님처럼 그는 신실한 사역으로 초래될 수 있는 반대파의 적개심에 대해 조금도 염려하지 않았다. 그는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거저 주는 복음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전하였다. 그는 기도에 철저히 투신된 자였다. 그는 하루에 여섯 번씩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겸비와 기도의 날들을 정해 놓고 지켰는데 특히 성찬식을 인도하기 전에 주 앞에서 오랫동안 엎드려 있었다.

 

볼턴은 60세의 나이로 그의 마지막 병상에 있을 때 가족과 다른 교우들에게 영광스런 증인이 되었다. 그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구원을 확신시키면서 각자를 기도로 주님께 의탁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받으셨다는 구원의 확신에 차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이 세상을 떠나길 열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