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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1 세대 : 에드워드 데링 (1540~1576)|

에드워드 데링

by 김경호 진실 2012. 3. 29.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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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1 세대 : 에드워드 데링 (1540~1576)

 

에드워드 데링은 켄트(Kent)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572년에 앤 로크(Anne Locke)와 결혼했다. 신부는 존 녹스(John Knox)의 설교를 흠모하였고 제네바에서 살기도 했던 부유한 과부였다. 청교도 학자인 패트릭 콜린슨(Patrick Collinson)은 데링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청교도의 원형이다. 그의 생애와 사역은 그의 뒤를 따를 17세기 후배들에게 삶의 모델이 된다. 그는 청교도 정신의 긍정적인 자질들이 어떤 것인지를 가장 훌륭하게 예시한다.

 

데링은 케임브리지의 크라이스트 대학(Christ's College)에서 공부하였다. 이때는 메리 여왕의 통치 초반기였는데 케임브리지가 청교도의 묘판이었다. 데링이 동역자들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 그는 복음주의 신앙에 불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주된 신학적 관심은 죄로부터의 구원이었다. 즉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 신앙을 통해서 대심판날에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신자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분을 보장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데링은 당시의 가장 우수한 헬라어 학자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1564년 케임브리지 대학을 방문했을 때 헬라어 연설자로 선정되었다. 그는 대주교와 친분이 있어 중요한 행사에 설교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1570년은 그의 경력에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는 국교회의 사역 수준이 너무도 저질인 것에 크게 분개하였다. 그의 친구들에 의하면 데링은 이러한 감정을 그의 설교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1570년 2월 25일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채플에서 설교했는데 여왕을 대놓고 면박하였다. 그는 여왕이 무가치한 교회 사역자들을 제거해야 할 의무를 게을리 한다고 꾸짖었다. 그는 그런 자들을 '놀고 먹는 자, 사기꾼, 기회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런 목사들은 '눈 먼 길잡이며 짖지 않는 개들'이라고 혹평하였다. 데링의 질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여왕의 면전에서 책임 추궁을 하였다. "이러한 우상 숭배가 자행되고 있는데도 당신은 가만히 앉아서 방관만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휫기프트(Whitgift, 나중에 대주교로 승격됨)라는 사람은 여왕 앞에서 설교할 때가 되면 이를 여왕에게 잘보이려는 기회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데링은 휫기프트와는 달리 여왕의 큰 권력에는 그에 비례하는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키길 주저하지 않았고 그런 지적으로 받게 될 결과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마 그는 자신이 결핵으로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야심이나 자신의 유익을 따르는 유혹에서 자유로웠을지 모른다. 사실상 그는 결핵으로 일찍 죽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설교치고 데링이 여왕의 책임에 대해서 견책한 담대한 설교보다 더 많이 인쇄된 메시지가 없다.

 

목회자들의 한심한 영적 상태를 노출시킨 이러한 용기 있는 설교들은 캔터베리의 대주교인 파커(Parker)와 엘리자베스 여왕의 대신이었던 세실(Cecil)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데링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데링은 런던의 감독인 샌디즈(Sandys)의 신임을 받아 런던의 세인트 폴(St. Paul) 대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이곳에서 데링은 심도 깊은 감동적인 히브리서 강해 시리즈로 당대의 최대 설교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1570-2년까지는 카트라이트, 필드, 윌콕스 등의 글로 인해 야기된 교회 정치에 관한 논쟁이 극심하였다. 데링은 소화되어 이들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라는 요구를 받았다. 데링은 퍼킨스와는 달리 조직적인 신학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교회 정치에 대해서 그다지 투명한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대적자들은 데링이 누리는 특권과 직분을 박탈하려고 결단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관들과 친분이 두텁고 그들의 보호를 받고 있어 제거하기가 어려웠다. 그의 입을 막으려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데링을 침묵시킬 뿐만 아니라 강의도 못하게 막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것마저 성공하지 못하였다. 여왕의 대리자들 사이에서 데링을 고발할 죄목을 작성하는 문제를 놓고 의견의 합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데링의 사역에서 편지 쓰기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는 높은 신분과 영향력이 큰 귀부인들의 영적 상담을 위한 편지들도 썼다. 청교도 사역을 가장 열심히 지원한 사람들은 흔히 여성들이었는데 이것은 청교도 운동의 한 특징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종교개혁에 깊이 헌신된 자들이었으나 그들의 남편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였다. 데링의 서신 수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허니우드(Honywood)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구원의 확신 문제로 몹시 시달렸다.

 

그녀는 한때 존 폭스에게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유리잔처럼 확실히 정죄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잔을 마룻바닥에 내던졌다. 놀랍게도 그 유리잔은 깨어지지 않고 그대로 되튕겨졌다고 한다!

 

데링은 36세로 죽을 때 동료 사역자들이 둘러서서 그의 임종을 지켜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데링의 마지막 말들을 기록하였다. 그는 청교도 운동에 귀중한 공헌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

 

http://cafe.daum.net/wordlife66/Hdcu/10?docid=pbcK|Hdcu|10|20070107211553&q=%BF%A1%B5%E5%BF%F6%B5%E5%20%B5%A5%B8%B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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