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Andrew McGowan (하일랜드 대학교 총장)
번 역: 박 양수 목사
교회 개혁운동은 헨리 8세의 통치기간 동안에 많은 투쟁이 있은 후, 에드워드 6세와 메리 여왕과 그리고 에리자베스 1세 때 영국에서 결정적으로 일어난 신앙운동이다.
필자는 청교도 운동이 일어난 역사적인 배경을 연구 고찰하려고 한다. 여기서 헨리 8세나 에드워드 6세에 관하여 말하려면 너무 길기 때문에 말하지 않겠으며 메리여왕의 즉위에만 말하려고 한다. 영국 교회는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에 의하여 한층 더 개혁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메리왕의 즉위로 갑자기 모든것이 변하고 말았습니다.
1. 메리여왕(1553-1558)
메리는 1553년 왕위에 올랏을 때 그녀는 모질게 화나 있었다.
그녀는 헨리 8세에 의하여 자기 어머니가 고통스럽게 죽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화가 나있었다. 영국 교회는 에드워드 6세가 통치하는 동안에 개신교가 매우 우세했다. 그녀는 이런 일을 매우 못 마땅하게 여겼다. 그녀가 미사를 계속 원하는 일로 인하여 중요한 다툼이 일어났고, 그녀를 설득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노여움을 격발했다. Chadwick은 "메리는 카토릭에 광신적인 열심에 사로잡혀 성장했다"고 말했다. 그런 성장 배경 때문에 의심 할 여지없이 그녀는 개신교를 미워하고 왕궁에서 개신교를 쓸어내어 버리려는 결연한 의지를 가졌다. 그녀가 37세에 권력을 잡았을 때 아직 미혼이였다.
그녀는 스페인왕 챨스 5세의 아들 필립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했다. 그러나 ?결혼은 성공적인것도 아니고 행복하지도 못했으며 어쩐 일인지 그녀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특히 이들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그녀는 왕위에 오르자 즉시 개신교를 박해하는 일을 행동에 옮겼다. 에드워드 6세의 통치 기간에 개신교를 보살폈던 5명의 주교를 이동 시키고 그녀의 주위에 대 주교와 관원들을 불러모아 로마 카도릭과 교황의 권세를 강화했다.
이때 에드워드 6세의 통치 동안에 중심부에 서있던 개신교 지도자들인 후퍼와 커버데일, 라티머, 리이들리, 그란머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었다. 메리에 의해서 잡혀 온 많은 개혁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카토릭에 항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했다. 메리의 박해에 못이겨 대륙으로 떠났던 성직자들이 죽을 결심을 하고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필립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 일로 박해는 더 심하게 가해지는 상황 이였다.
Chadwick의 말에 의하면 메리는 1553년 10월 대관식 때 궁안에 있는 성물을 잘 보관 할것을 약속했고, 의회는 에드워드 6세의 통치기간 동안에 제정된 성직자들의 결혼과 모든 기도 책들에 조례를 취소했다. 그리고 화체설을 결정했다. Canterbury의회는 공포의 상황에서 천주교의 권위를 복귀 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메리는 자기의 계회에 반항하는 것을 묵과하지 않았다. 그녀는 의회의 권위를 침해했고, 과도한 세금을 요구했다. 나라 안의 많은 지令湧?그들의 땅이 케도릭에 의해 다시 점령 당하고 압류 당하는 것을 두려워 했다. 만약에 이들의 땅이 헨리 8세가 교회 땅을 팔아 넘길 때 사 들인 땅이라면 더욱 빼앗길 것을 두려워 했다.
그녀가 즉위한 후에 바뀐것은 성찬식과 교회의 장식물있다. 교회들이 개혁하는 동안 이루어놓은 업적을 약탈하고 파괴 할 것을 명령했다. 그때 로마 교황은 그의 사절단으로 Reginald Pole을 보내어 메리가 천주교를 수립하기 위하여 일을 수행하는데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Chadwick은 다시 말하기를 1554년 11월 30일 영국 의회의원 500명은 영국 왕실의 분열과 면죄부 판매와 Te Deum이라는 구전으로 내려오는 노래를 예배드릴 때 부르는 것을 금지 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의해 소집 6일 후에 의회의원들을 굴복시키고 유사한 면죄부 판매를 받아드리기로 했다.
2. Reginald Pole
여기서 Reginald Pole에 관하여 한두가지 말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고, Pole의 마음을 아는데 단서가 될것이다. 그는 영국 사람이였고, 옥스퍼드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는 1532년 영국을 떠났다. 그가 떠나게 된이유는 헨리 8세의 이혼을 만류하다가 영국을 떠나게 되었는데, 원래 그는 1530년 두 교구의 관활 구역(요크와 윈체스터)의 주교로 임명 받은 이래 그의 생각은 매우 분명했다. 그는 보통 사제가 아니였다는 점이 흥미로운 것이다. 그는 왕의 혈통을 가졌기 때문에 그의 신분은 확실했다. 그의 어머니는 에드워드 6세의 조카 딸이 였는데 나중에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였으며, Pole은 유죄 판결을 받고 영국을 떠나 완전한 곳에서 책을 출판하여 헨리 8세의 왕권에 도전했다. 나중에 교황은 교회를 수립하는 일로 내부사정이 매우 복잡한 상황에서 그를 사절로 사용했다.
Pole은 빠른 승진으로 교회의 수장이 되었고 그를 가장 높은 곳에 올려 놓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그는 1549년 교황에 입후보 했다. 그러나 그는 당선되지 못했다. 그가 제일 높은 곳에 도착한 곳은 켄터버리 대 주교 였다. 그는 크랜머가 화형 당하기 전 어느 날 성직에 임명되었고, 크랜머가 화형 당한 후에 캔터버리 대 주교로 임명을 받았다. 그는 늘 암암리에 그를 지지하는 메리와 함께 있다가 메리가 죽은 후 12시간 후에 그도 죽었다. 캔터버리 대 주교는 여왕을 위해서 깨끗한 길을 가지 못했다.
Pole과 메리는 돈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목적이 많이 쇄퇴해졌다. 그래서 토지법을 만들어 땅을 개간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고, 그 땅을 매입했다. 수도원을 보수하고 집들을 매입했다. 이는 그들의 음모를 입증한다. 장애물속으로 달려가면서 카토릭은 다시 재건되어 갔다. 그러나 아무도 프로테스탄트의 박멸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법규에 대항하는 일로 3년동안에 300백명이 불에타 목숨을 잃었다. 나라안에는 죽은 사람들에게 동정심이 형성되고, 사람들은 점차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황권이 다시 강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왕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에 교황권이 강화되는 쪽으로 흘러갔다. 민심은 여왕을 반대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그녀를 조언하는 작은 모임들도 그녀에게서 돌아섰다. 실로 그녀는 1558년 11월에 죽었다.
3. Elizabethan1세 즉위(1558-1603)
에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자 그녀는 즉시 자기가 원했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즉위한지 한달만에 미사를 추방했다. 영국의 최고의 법정인 의해는 개신교를 보증하는 일정한 법을 제정하고 3월에 해산했다. 에리자베스의 결심은 개신교를 다시 일으키는 것은 나라안에 어려움이 많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메리처럼 주교와 자기를 도와줄 동지들을 그녀 주변에 모이게 했다. 그러나 충분하지는 못했다. 그당시 프랑스는 스코틀랜드 메리여왕을 영국의 왕으로 세울것을 주장했고, 네델란드에는 스페인 군대가 있었고, 스페인은 에리자베스 1세가 필립 2세와 결혼 할 것을 원했다.
에리자베스가 아버지인 헨리8세처럼 종교의 자유를 확립하기를 원한다고 말했을 때 많은 호평을 받았다. 그녀로 말미암아 로마 카토릭 교황의 권위가 추락한것은 의심 할 여지가 없다. 그녀는 왕의 권위가 교회위에 있다고 확실히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왕권을 성취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1559년 교황의 권위는 완전히 뒤짖어 졌고, 왕의 권위가 다시 살아났으며, 1559년 이래 오늘날까지 이 상황이 명확하게 성립되어 내려오고 있다. 군주의 권위는 영국 교회위에 있고 대 주교와 주교를 임명할 책임이 있다고 했으며 모든 교회의 법을 제정하는 것을 왕이 승인했다. 에리자베스는 어쩌든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에리자베스 시대의 국력은 분산되었고, 국고는 거의 바닦이 났다. 그 결과 그녀는 타협을 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여왕을 영국교회의 수장이라 불렀고, 모든 사람을 소송 할 수 있는 영국 교회의 최고 통치자라는 명칭을 가졌다. 1552년에 제정된 기도책을 영국에서 다시 사용하는 법을 제정하고 다른 한편으로 성직자들은 전통적인 성직자 복장을 입는 것과, 교회들은 성물과 의식을 기존방식되로 계속하는 것으로 교회개혁시대의 종지부를 찍게했다.
회유와 타협의 정책에 강요당하여 Matthew Parker는 캔터버리 대 주교에 임명되었다. 다음에 그에 대하여 더 언급하게 되겠지만 그는 백성들의 추앙을 받는 온건한 사람이며, 어렵게 중도의 길을 걸어간 학자였음을 충분히 임증해준다.
과거에 메리가 임명한 성직자들은 새로운 여왕에게 계속해서 반항하다가 결국 그녀를 출교시켰다. 일이 그렇게 된것을 괴로워 하는 두명의 주교가 있었는데, 그중에 문제의 한 사람은 유럽의 개혁주의 자들의 사상을 접하고 국외로 추방당했다 돌아온 프로테스탄트 였다. 이들은 1552년 출판된 기도책이 성찬식과 성의에 관련하여 실제로 개혁적인지 아닌지를 의심하면서 질문을 했다. 그들은 더 철저한 개혁을 지지하고 압박했다. 대 주교는 헨리8세 때 이루어놓은 개혁보다 더 개혁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도에 멈춰있었다. 1559년 에리자베스는 영국에서 개신교를 설립하는 것을 확실히 정착시켰다. 그러나 진정한 개혁교회가 스위스, 네델란드, 독일등에서 성공한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영국에서 자리를 잡은 교회들은 행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교회 개혁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뺑났도湧? 알았기 때문이다.
4. 청교도
영국의 개혁주의 신학을 취급하여 기록한 Peter Toon은 "에리자베스1세의 통치기간에 영국 교회의 최초의 청교도 운동은 전반적으로 칼빈?聆퓔? 사용하여 교회개혁을 하였??. 그들은 희생과 개혁된 삶을 강조하고,이 땅에서는 순례자로 ?≠런竪동? 엄격한 도덕성을 강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 아는 바와 같이 에리자베스 1세는 1559년에 타결책을 썼지만 교회개혁에 여러가지로 미흡했다. 확실히 말해서 우리가 다른 나라에서 성취한 교회개혁을 비교하여 본다면, 루터의 교회개혁 결과로 독일에서 세워진 교회와 칼빈의 교회개혁으로 스위스에 세워진 교회와 영국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으로 세워진 영국교회는 형식이 전적으로 달랐다.
영국 교회는 중세 카토릭 사상이 외형으로 많이 남아있는데, 예배의식과 교회치장과 성의 착용과 사제들의 몸에 걸치는 긴 까운등이 그렇다. 박해를 피해 해외에서 해를 보낸 사람들은 활력이 넘치는 개혁자들과 교제했다. 그들이 각각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심히 불행했다. 이들은 1559년에 제정한 법을 반대했고, 카토릭의 흔적과 복장과 의식을 없애고 낡은 모든 것으로부터 교회를 깨끗이 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말씀을 실천하며 청빈하게 사는것을 강조했기 때문에 청교도라고 불렀다. 1559년부터 1662년까지 청교도가 존재한 이래 두법사이에 있었는데, 즉 신학과 교회의 법 사이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칼빈계열의 청교도들은 교회개혁은 요원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교회개혁의 모델은 제네바에서 가져왔고 그들 중에 다수는 장로교 정치와 교회제도를 전수 받기를 원했다.
그들의 믿음의 기초는 성경의 권위에 두었고, 그들은 작은 일도 성경에 비추어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에 기초하여 만사를 결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교회에서 교회의 지도자를 선출하고 교리문제를 결정하고 이런 일을 반복적인 훈련을 했다.
5. Hampton Court Conference(햄튼 회의)
청교도들은 스코트랜드의 제임스6세(1603-1625)가 영국의 왕으로 겸임하여 즉위 할 때(이를 제임스1세라 함) 영국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회의 소집청원서를 제출했다. 이 청원서는 천명이 서명하여 제출했기 때문에 천인의 청원서라고도 한다. 청교도들은 온건한 개혁주의자들이요, 육신의 욕망을 채우지 않는 청빈한 사람들이였다. 이들의 불평과 설득으로 1604년 햄튼 왕궁회의가 열리게 되였다. 회의의 의장은 영국 교회를 대표하는 제임스1세 였고 영국의 교회를 대표하는 사람들과 청교도들이 모였다. 회의는 1월에 열려 4일간 진행되었고 많은 청중들은 교회를 청교도주의로 바꾸기위하여 손을 들어주었고, 다른 사람들은 왕의 의견에 동의하여 손을 들어 주었다.
그 결과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경을 영어로 새롭게 번역하는 일만 결정하고 회의가 끝났기 때문에 청교도들에게는 만족함이 없었다. 성경 번역이 실행되어 1611년에 출판되었다. 이 성경이름을 킹 제임스 번역이라 칭한다.
청교도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보다 청빈하고 깨끗한 사람들은 영국 교회의 혼합주의를 싫어서 뉴 잉글랜드로 떠났다. 그들은 뉴 잉글랜드 메사츠세츄에서 영국 교회의 개혁을 창출해낸 사람들이였다. 후일에 이들은 크롬웰을 중심으로 의회와 영국 청교도들의 결정적인 힘이되었다. 영국 청교도를 절정에 이르게 한것은 여러가지 표준 문서를 제출한 웨스터민스터 회의(1643-1647) 였
다. 이 회의에서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했다. 챨스 1세가 처형(1649)당한 후에 청교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 장로파 독립파등으로 갈라졌다. 이 비 국교도 운동은 지금도 존재한다.
결론으로 그당시 청교도들은 영국 국 교회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대신 그들의 힘이 밖으로 뻣어나갔다. 영국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100인의 청교도 설교자들이 한결 같은 능력을 발휘 할 때 1662년에 위대한것이 완성되었다. Peter Toon의 말에 의하면 "청교도 정신은 부분적으로 분산 되었지만 개개인의 가슴속에 계속되고, 이상적인 국가의 개혁에 청교도와 청교도 교회는 언제나 앞장서 나간다"고 말했다.
***역자 註***
영국 청교도 운동은 헨리 8세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이유 보다는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이유로 영국 교회개혁을 주도했다. 그이 첫번째 아내 캐서린과의 결혼은 무효라고 주장하는 교황을 도전하여 국회(1534)를 열고 로마 교황의 권세로부터 독립했다. 이 국회는 종교개혁 국회(The Reformation Parliament) 인데 여기서 국왕은 영국 교회의 최고 수반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교회 개혁과는 거리가 멀었다. 드디어 에드워드 6세 때 와서 정치적으로 개신교 쪽으로 기울어졌다. 에드워드가 죽고 메리가 왕이되어 교회 개혁자들이 수없이 죽고 핍박을 받았다 메리가 죽고 에리자베스 1세가 왕이 되었다. 에리자베스 1세는 1559년에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만들고 수장령을 선포했다. 끈질긴 청교들의 설교와 성경을 삶에 일치시키는 청빈한 생활과 아름다운 모습으로 감동을 시켜 드디어 1662년에 개신교자유을 얻어냈다. 꼭 128년만에 청교도들의 승리를 얻어냈던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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