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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105:16-19, 고난-거룩을 이루는 보편적인 방편

박홍섭목사(부산)

by 김경호 진실 2012. 6. 24.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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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16-19, 거룩을 이루는 보편적인 방편, 12.3.4, 박홍섭 목사

 

제가 목회자이다 보니 성경에 대한 의문사항이나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그 중에 하나 빠지지 않는 질문이 바로 욥기에 관한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단 앞에서 욥을 칭찬했을 때 사단은 그가 왜 까닭 없이 신앙을 지키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모든 산업을 풍부케 하시고 형통케 하시니까 그렇지, 그렇지 않으면 그가 왜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오히려 욕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렇다면 네가 한번 그렇게 해보아라고 사단이 욥을 시험할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알듯이 사단이 욥의 모든 재산과 소유를 쳐서 하루아침에 집안이 몰락하고 자녀들이 다 죽고 욥 자신은 육체의 질병에 시달리는 엄청난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사단과의 내기 때문에 욥의 인생과 영혼을 이런 식으로 다루어도 되는가? 하는 혼란을 느낍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 것인가? 욥은 무엇인가? 욥으로 대변되는 우리의 인생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우선, 사단이 욥에게 악한 일을 행할 때에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스스로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욥이 당하는 모든 재난과 어려움이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단의 단순한 내기나 자존심 싸움이 아니라 그 고난과 어려움이 욥에게 필요했기 때문에 허락된 것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욥 정도의 사람에게 굳이 고난이 없어도 거룩하고 신실한 믿음의 자람과 성숙이 가능할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중에 보면 욥이 그 고난을 통과하면서 자신 안에 얼마나 연단되어야 할 점들이 많으며 버려야 할 자기 의와 교만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그 고난을 통해 욥은 고난 받기 전보다 몇 배의 축복을 받습니다. 물질이나 자식의 축복 이전에 내가 전에는 하나님께 대해 귀로 듣기만 하였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뵙니다.”라는 고난을 통과하지 않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축복을 염두에 두고 사단과의 내기 아닌 내기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지난주에 심방이 끝났습니다. 매년 생각하는 것이지만 성도들의 가정을 일 년 만에 돌아보면서 느끼는 점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가정들이 다 기도의 제목들을 가지고 있으며, 크고 작은 문제들을 갖고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의 제목들과 문제들을 빨리 해결해주시지 않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내린 결론이 욥기의 내용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어려움과 고난이 하나님의 허락 아래 일어난다는 사실이며 그러하기에 그것은 우리가 편안하고 형통할 때에 이루지 못할 영적인 성숙과 거룩의 진전을 위해 허락된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그것을 본문을 통해 확인해보겠습니다. 본문은 요셉이 당한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요셉이 10대 후반기인 청소년시기에 하나님이 주신 꿈을 꿉니다. 그러다가 형들에게 미움을 당하고 구덩이에 빠져 죽을 뻔 하다가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그 와중에 보디발 부인의 유혹을 거절해서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30살에 바로의 꿈을 풀고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때까지 노예와 죄수로 보낸 기간이 십 수 년인데 본문은 그 세월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는 표현은 단지 요셉이 받은 육체적인 고난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요셉이 얼마나 큰 혼란과 고통을 겪었는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이 주신 꿈을 통해 모든 고난과 어려움을 믿음으로 잘 극복했다고만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우리말로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고 번역했는데 히브리 원어는 혼이 쇠사슬에 매였다는 의미입니다. 혼이 쇠사슬에 매였다는 것은 그만큼 정신적으로 힘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힘든 세월을 보낸 것을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고 했고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요셉을 통해 야곱의 가족을 구원하시고 애굽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를 조성하실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의 시간을 요셉이 보내었다는 말입니다.

 

사실 성도의 인생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당하면 우리의 소원을 이야기 하고 필요한 것을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그 많은 기도의 제목들 중에 이루어진 것보다는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훨씬 많은 것이 대부분의 보편적인 성도의 삶입니다. 아픈 것을 금방 낫게 해주시거나 없는 돈을 왕창 주시거나 자녀나 남편이 하루아침에 변화되는 그런 일들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어려움이 면제되고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을 기대하지만 현실은 늘 그만저만 하며 이런 저런 문제들 속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과 별 다름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내가 예수 믿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 것인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고 약속을 받았는데도 형들에게 미움을 당했고 종으로 팔려갔고 거기에 더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으면서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살면서 누명을 쓰는 것처럼 처참하고 억울한 일이 없습니다. 요셉도 얼마나 억울하고 힘들었으면 혼이 쇠사슬에 매였다고 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의 인생은 그 억울함 속에서 힘들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때가 되어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나중에 그를 죽이려 했고 노예로 팔았던 형들이 그 앞에 와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요셉이 압니다. 하나님이 왜 자신을 그렇게 억울한 세월 속에서 힘들게 답답하게 살아오게 하셨는지를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현실도 대부분 그러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족족 다 응답되어서 매일이 기쁘고 신나는 생활이 아니라 어쩌면 억울함과 답답함과 혼란스러운 나날들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욥과 요셉에게 허락된 것처럼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통치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단련임을 믿어야 하고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는 믿음의 성숙과 하나님의 뜻을 통로와 수단으로 허락된 시간인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존재입니다. 문제가 없고 억울함이 없고 답답함이 없으면 우리는 절대로 스스로 하나님의 계획과 거룩과 영광을 위한 자리로 우리 인생을 몰아가지 않습니다. 너희도 거룩하라!” 올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이 복된 자리로 스스로 자기를 몰아가는 사람은 단언컨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연초에 확인한 것처럼 거룩의 방편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우리는 거룩해집니다.(딤전4:5)

 

그런데 그냥 두면 아무도 거룩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그런 본성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때로는 어려움이란 차꼬에 채우시고 문제의 쇠사슬에 매십니다. 그래서 그 기간을 통해 답답함과 어려움 속에서 기도와 말씀의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내시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게 만들고 다른 것으로 만들 수 없는 거룩함을 만들어 가십니다.

 

요셉이 그랬고 욥이 그러했습니다. 요셉이 혼이 쇠사슬에 매일 정도로 정신적으로 힘들어했고, 욥이 욥기 전체에서 자신과 갈등하고 친구들과의 논쟁을 통해 고통당했던 것이 바로 말씀 앞에서 자신의 답답하고 어려운 현실을 달아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싸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의 말씀으로 그들의 인생을 고난 속에서 단련해나가 마침내 크고 위대한 믿음의 고백들을 이끌어내시고 만대에 남은 신앙의 교훈을 전수해주셨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어렵게 하실 때에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의 고달픔과 억울함, 힘든 형편들과 조건들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형통함보다 더 복된 하나님의 간섭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인생에 응할 때까지 단련될 것이며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로 자라나서 고난 속에 있는 많은 인생들을 권면하고 축복하고 위로하는 거룩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제가 우리 교인들을 볼 때 어려움과 답답함 속에서 그와 같이 자라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명예와 권력과 인기와 안락함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본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편안하고 형통했으면 절대로 자라지 못할 영적인 깊어짐과 성숙함의 진전이 어려운 문제들과 아픈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는 그 답답한 시간들을 통해 교우들 속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저는 보게 됩니다.

 

말씀을 맺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들을 거룩과 영광의 자리까지 내다보시면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어려움과 고난 속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그것이 스스로 거룩해지지 않으려는 죄의 본성을 가진 우리를 거룩으로 이끌어가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단순히 어려움을 면하고 짐을 벗어버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리는 쪽으로만 기울어지지 않고 져야 할 짐을 지고 당해야 할 훈련을 당하면서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거룩함으로 진전되어 가는 그런 신앙이 되기를 바랍니다.

 

욥의 처참한 시간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고, 요셉의 억울함과 고난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었듯이 저와 여러분들의 운명도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음을 믿고 어려움과 고통으로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이 인도하는 거룩한 삶을 향해 믿음으로 비상하는 한우리 식구들 되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한우리성경강해
글쓴이 : 한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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