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 시간을 주시오"하고 누군가가 말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 모든 얘기는 복잡하고 어렵소, 사실 너무나 어렵소.
그렇게 열심을 가져야 한다면 나는 빠지고 싶소. 내가 왜 그래야만 하는지 적절한 이유를 말해주시오."그의 이말은 정당한 발언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해야할 적절한 이유들이 몇가지 있다.
첫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해서 각 개인은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에 들어갈 수 있기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기도하실 때 이에 대해 말씀하셨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언뜻 보기에는 "영적이지 못한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도록 원하게 만들기위해
그로 하여금 어떤 희생을 치르게할 정도로 이 말이 충분히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영생에 대해 알지 못함으로해서 그는
자신이 무엇을 놓쳐버렸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훌륭한 음악을 감상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가 싫어한다고 해서 음악이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에게는 악을 감상할 만한 적절한 바탕이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제안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부족한 것을 깨닫고 평가할 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한 자들이다. 성경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하고 말하고
있다.
그러한 자들에게 영생에 대한 약속은 또한 완전한 인간으로써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약속이라고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될 지 모르겠다. 이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영생은 이것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새로이 살게 된다는 것 뿐만이 아니라
영원히 산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26)하고 말씀하실 때 의미하는 바는 이것이다.
두번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가 애초에 지적햇듯이
우리 자신들에 대해서 아는 것을 필연적으로 수반한다. 우리 시대에는 정신병 의사와 심리학자들이 많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알고자,
또한 그들이 정신 문제를 해결하고자 매년 수백만 달러를 그들에게 소비하고 있다. 그리고 정신의학에 있어서 특별히 기독교 정신의학에 대한 필요성이
분명히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의미에서 그런 방법들이 각 개인들의 가치와 실패요인만을 평가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아니하다면 적절하다고 볼 수가 없다.
한편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아는 것은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며 뿐만 아니라 그 분과 같이 되지 못한다. 그분은 거룩하시나 우리는 거룩하지 못하며, 그 분은 선하시나
우리는 선하지 못하며, 그 분은 지혜로우시나 우리는 어리석으며, 그 분은 강하시나 우리는 연약하다. 그분은 사랑이시며 은혜로우시나 우리는
미움으로 가득차 있고 이기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이사야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보았음이로다"(사 6:5)하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하고 말한 대로 우리 자신을 보게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위안을 주고 만족을 주는 지식을 갖게 된다. 그 이유는 우리가 무엇이 되든간에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창조물이고 그분의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성경이 우리들에게 주는 최고의 위엄을 어디에서건 찾아볼 수 없다.
세번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에게 또한 이 세상에 대한 지식을 가져다 준다. 즉 이세상의 선과 악, 과거의 미래, 이세상이 만들어진 목적과 하나님이 친히 내리시는
심판과 같은 것에 대해 알게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금방 언급한 이야기의 연장이 된다. 만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우리들 자신에 대한
지식을 준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세상에 대한 지식을 우리에게 준다. 왜냐하면 세상은 각 개인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세상은 하나님의 목적의 매체로서 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기지로 세상의 죄와 반역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가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으로부터 왜 그가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게 했는지를 배우게 될 때까지는 세상은
우리에게는 혼란스러운 곳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중요한 네번째 이유는 오직 그것에 의해서만 개인적인 경건을 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욕망은 영적이지 못한 인간은 거의 바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무지하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죄 지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선을 원하지 않으며 심지어
선함이 우리게 유익을 줄 때라 할지라도 그것을 싫어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르게 한다.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같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 가장 중요하게
말하고 있는 자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의 옛 선지자인 예레미야인데,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슴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9:23-24). 예레미야는 또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그분을 알게 될
그 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31:34).
마지막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 교회와 교인들이 겅건해지게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우리 자신들은 연약하나 다니엘 말한 것처럼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며 용맹"을 발할 것이다(단 11:32). 오늘 날 우리의
교회는 강하지않을 뿐더러 강한 그리스도인들도 많지 않다. 우리는 그 원인을 건전한 영적 지식의 심각한 결여상태에서 찾을 수가 있다. 교회는 왜
약해졋는가?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연약한 것인가?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이 시대정신"에 부응하고 있기 때문이며, 기계적이고 불경스러운
사고방식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그 분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하신 그분의 약속을 망각하고 있다. 보통의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물어보라, 그들의 대답을 들으면, 우리는 그의 신이 우유부단한 감정을 지닌 신이라는 거의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가 말하는 신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나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의 신은 악을 억누르고 싶으나 그일은 그의 신의 능력 밖의 일임을 알게된다.
그래서 그는 뒤로 주춤 물러나 할아저지가 주는 것과 같은 충고를 자손들에게 기꺼이 주려고 하나 대분분의 경우 그의 자손들이 위험한 환경 속에
길러지도록 내버려두는 결과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신은 성경에서 말해지는 하나님과는 다르다. 자신의 하나님을 아는 자들을
이상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고 사고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안다. 성경의 하나님은 연약하지 않고 강하신 분이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그의
허락이 없이는 또는 그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은 심지어 악이아라 할지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분을 혼란시키거나 당황시키는 것이란 없다. 그분의
목적은 언제나 성취되어진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그분을 올바르게 아는 자들은 용감하게 행동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속에 그분이 의도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들과 함게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우리는 필요한 예를 다니엘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경건치 못한 고대 바벨론에서 경건한 삶을 살았었다. 그들은 노예였으나 충실하였기에 궁정에서 일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알고
예배드리던 참 하나님의 명령에 거스리는 어떤 일에 복종하기를 거절했을 때에 어려움을 겪었다. 느부갓네살이 세운 신상에 엎드리어 절하는 명령이
내려졋을 때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이를 거절했다. 또한 심십일 동안에 다리오 왕 이외에 누구에게든지 기도하며 사자굴에 던져넣기로 했을 때에도
다니엘은 그가 항상 해왔던대로 했다. 그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 앞에서 하루 세번씩 하나님께기도했다.
이들은 어딘가가 잘못된
사람들인가? 그들은 어리석게도 그 결말을 알지 못했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알려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것인가? 그것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들은 모든 결말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그들이 사자굴이나 불구덩이에서 구원이 되건
파멸이 되어지건 상관없이 그들의 길을 가면서 강해질 수 있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연약한 신은 강한 인간을 만들어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섬김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다. 그러나 강한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은 그분을 아는 자들의 힘의 근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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