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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대하여(존 위클리프)

존 위클리프

by 김경호 진실 2012. 8. 6.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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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에 대하여(존 위클리프)

(마 8:24)“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지라”

이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바다 위에서 행하신 기적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들을 믿을 경우 그 기적들은 무식한 사람들에게 거룩한 교회의 신앙을 확증시켜 주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다와 육지에서 기적을 행하신 것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사를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영혼을 건강케 해 주실 수 있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다처럼 불안정하며,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육지처럼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불어넣어 주신 지식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다. 그런 종류의 신앙에 확고히 서 있는 사람들은 천국에 이르는 길로 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 뒤를 따라 배에 탔습니다. 그때 갑자기 풍랑이 세게 일어나 배가 파도 속에 함몰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바람과 파도는 그들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때에 자신의 예정하신 대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께 와서 그를 깨우면서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마 8:25)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 8:26)라고 말씀하시고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곧 그것들은 잠잠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이에 놀라 서로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마 8:27)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행위들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만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에 배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이러한 안식은 우리가 마땅히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쉬면서 고요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유익한 말씀을 들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들은 말씀들을 후에 사람들에게 가르쳐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가르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사람들의 칭찬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설교자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커다란 죄입니다.
하나님만이 전적으로 그 모든 감사를 받으셔야 할 분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감사를 가로채는 것은 중죄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주무심은 그의 인간성을 나타내 주는 것이며, 그의 기적들을 훨씬 더 기적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들에게 곤궁한 때에 그에게 기도하고 우리 자신의 믿음의 부족을 염려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무시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오직 우리가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주무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이 곤궁에서 우리를 도우소서"라고 말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의 믿음에서 실패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지 못한 이 사람들처럼 믿음이 없을 때입니다. 이들이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완전히 알았더라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설사 주무시고 계실지라도 그리스도는 이러한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며, 그보다 더한 기적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믿음이 행위 속에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사람에게서처럼 무력할 때 그 믿음은 실패합니다. 성직자들은 그것이 일종의 습관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신앙이 이런 방식으로나 저런 방식으로 실패하지 않는 한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자신의 죄악이 얼마나 나쁜 것이며,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해를 끼치는가에 대한 육체적인 신앙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런 사람은 결코 죄를 짓지 않고, 죄에서 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그리스도에게 자신들의 믿음을 더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컨대 올바른 신앙보다 그리스도에게 더 칭찬 받을 만한 덕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신앙은 모든 덕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에 따라 신앙이 적어질 수도 있고 많아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여러 요소들은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다시 새롭게 오기도 하기 때문에 다양한 상대에 따라 서로 다른 신앙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심들은 옥스퍼드의 학교들에 보내버려야만 합니다. 우리는 한 인간 속에 들어 있는 서로 다른 신앙들 -때로는 이런 신앙 때로는 저런 신앙- 이 그 사람 속에서 하나의 신앙이 되게 한다는 것을 하나님을 통하여 잘 깨닫게 되어야만 합니다. 바로 이러한 한 가지 신앙도 때에 따라서는 왔다 가버리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의 신앙을 더해 주소서!
죄를 지음으로써 우리는 신앙을 약화시킵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가 종종 주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자랑의 바람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적인 해로움을 두려워하도록 만들고 환난의 홍수가 우리에게 닥칠 때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무서워하게 만들며, 그리스도께 우리의 믿음의 실패에 대해 도움을 청하도록 부르짖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를 괴롭힐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한 환난이 우리의 죄 때문에 온 것이라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며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일어날 필요가 있는 것에 대해 우리가 그렇게 당황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없을 때에만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러한 네 가지 태도들 -두려움, 슬픔, 희망 그리고 기쁨은 설사 그가 덕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의지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만일 그가 죄 가운데서 양육되었다면 그것들은 틀림없이 그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을 두려워하며 세상적인 기쁨을 추구하고 하늘의 것들의 상실에 대해서가 아니라 세상적인 것들의 상실에 대해 더 슬퍼하고, 이 세상의 행복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복과도 거리가 먼 것들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그가 하늘의 것들에 마음을 두고 있지도 않으며 적절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의 신앙의 하나님께 근거를 두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 각 사람은 세상적인 것들의 상실을 두려워하는 것보다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상실할 것을 더 두려워해야만 할 것입니다.

신앙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의 상실은 다른 무엇보다도 더욱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상실은 우리에게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많은 해로움을 가져다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것을 두려워해야만 하며, 다른 어떤 사람의 도움보다도 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도움을 바라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자는 인간을 신뢰하는 사람에 대해 저주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들이 마땅히 지니고 있어야만 하는 질서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거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잘 사랑한다면 그들은 지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하나님을 기뻐할 것입니다. 상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만일 그들이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상실할 경우 그들은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상실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상실에 대해 더 슬퍼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실과 더불어 이러한 기쁨은 인간들을 죄에서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적인 재화를 상실하지 않으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으며, 그런 것들의 손실에 대해 슬퍼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세상적인 것들보다 훨씬 더 좋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실하는 것을 세상적인 것들의 상실만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깃들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은 자연의 재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자연의 법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들은 자연의 재화를 잃을까봐 무척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재화들이 우리에게 굴러 들어온다면 우리는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의 재화를 뒷전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사랑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두 가지에 대해 거짓된 태도를 취한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사업 모두가 우리에 대해 부정적인 심판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까? 자연과 이 세상의 재화에 대해서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의 재화에 대해서입니까? 사제는 덕을 지니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만 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인간이 은혜의 재화보다는 세상적인 재화를 더 기뻐하고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재판장은 결국 우리를 정죄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소망과 슬픔도 우리를 심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늘에 대한 소망, 즉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만 할 하늘의 축복보다는 세상의 이익에 대한 소망에 더 몰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축복의 재화를 상실하는 것보다 세상적인 재화를 상실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인생을 역행시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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