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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고백록 / 어거스틴의 은혜론

문정식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2. 8. 25. 19:23

본문

어거스틴의 『고백록』(크리스챤다이제스트刊)

- 문정식 목사(열린교회)

I. 고백록의 전체구조

어거스틴은 자신의 고백록 전체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충만하심을 드러내어 찬양한다. 그러면서도 그 신앙고백을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며 기술한다. 이를 정리해보면,

⑴서론

⑵유아시절(I.6~8),

⑶소년시절(I.9~20),

⑷청년시절-

①Ⅱ.1~Ⅲ.3:16~19세,

②Ⅲ.4~Ⅴ.11:19세 이후 마니교와의 갈등,

③Ⅴ.12~Ⅷ.11:암브로우스를 만남,

④Ⅷ.12:회심을 체험

⑸회심 이후-

①Ⅸ.1~6:세례받음, Ⅸ.11: 모친의 죽음,

②Ⅹ.1~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음을 고백, 22.복된 자의 삶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임을 알게 됨, 40.영혼의 유일한 안식처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함, 43.하나님이자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알게 됨.

③Ⅺ.3~XⅢ.33.하나님의 창조와 말씀의 관계를 생각하고,이를 복음, 진리와 참된 지식으로 연결한다.

④XⅢ.34~38창조주하나님 안에서의 안식

⑹결론

※참조: 버논 J. 버르크가 쓴 서론에서는, 고백록의 구조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1권부터 9권까지는 어거스틴의 과거에 대한 기억과 회상으로, 인간의 죄와 그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관용에 관한 내용이고, ⒝10권은 두 번째 부분으로 어거스틴의 영적 현재상태를 묘사해주고 있는데, 그가 고백록을 기록할 당시 주교로서의 양심에 대한 문제를 술회하는 내용이며,⒞제3부 11권부터 13권까지는 하나님의 창조계획과 목적으로 비추어볼 때, 인생의 궁극적 의미에 관해 미래지향적으로 기록되고 있는 내용이다.

II. 고백록의 주제

고백록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안식”이다.

⑴ 먼저 어거스틴은 이렇게 이야기하며 자신의 인생에 대한 신앙적 고백을 전개해간다. “누가 나를 주님 안에서 안식하게 하리이까? 누가 주님을 내 마음에 보내어 그것을 사로잡아 내 죄를 도말하시고 내가 나의 유일하신 선(善)이신 주님을 안게 하리이까?주님은 내게 어떤 분이시니이까?내가 말할 수 있도록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I.5.)

⑵ 그러면서 어린시절 겪은 일들 가운데서도 분명하게 알게 된 사실이 다름 아닌 하나님께만 완전한 안식이 있다는 고백을 한다. “그렇게 꼬이고 얽힌 매듭을 풀 수 있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나는 모든 덕스러운 눈에게 그토록 아름답고 고우시며 의와 순결이신 주님을 갈망하나이다. 채워질 수 없는 만족으로 주님을 갈망하나이다. 주님께는 완전한 안식과 변함없는 생명이 있나이다....”(Ⅱ.10) 하지만 그렇게 일시적인 앎이 있어도, 자신의 죄됨이 삶을 더 힘든 고통과 번민 속에 이끌어갔던 것을 어거스틴은 계속해서 고백한다. 아니, 자신 안에 포기되지 않은 죄된 본성으로 인해 계속해서 채워지지 않음으로 인한 방황을 더욱 극심하게 하게 된다.

⑶ 그러나 회심을 체험하고 세례를 받으며 모친의 죽음을 접하고 나서는, 온전한 안식에의 고백을 하기 시작한다. “불의한 자에게는 허락되지 아니하고 감사함으로 주님을 경배하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기쁨이 있음이옵나이다. 그리고 주님은 정녕 이 기쁨이옵나이다. 복된 삶은 바로 이것이옵나이다. 주님께, 주님 안에서, 주님을 위하여 기뻐하는 것이옵나이다. 복된 삶은 오직 이것이옵나이다.”(Ⅹ.22).이렇게 깨닫고 나자, 이러한 진리 안에서와 그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을 계속되이 찬양과 고백으로 터쳐 나온다. “내가 주님께 여쭐 때에 살피는 이 모든 것에서 나는 여전히 주님 안에서가 아니면 내 영혼을 위한 안전한 곳을 발견하지 못하였나이다. 주님 안에서 나의 흩어진 모든 것들이 함께 모일 수 있으며 나의 어떤 것도 주님으로부터 피하지 못하나이다.”(Ⅹ.40).

⑷ 이러한 깨달음은, 그 어떤 것이든 하나님이 없으면 그것은 영혼에게 결코 안식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시켜준다. “천사들이 타락했고 사람의 영혼도 타락하였나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에게 심연의 깊은 어둠을 가리켜 보여주나이다. 모든 순종하는 정신이 주님의 천상도성에서 주님께 매달리며 모든 가변적인 것 위에 불변적으로 운행하시는 주님의 신 안에서 쉬지 않았다면, 심연은 어둠 가운데 여전히 모든 영적 창조물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옵나이다...이는 주님의 빛의 옷이 벗겨져셔 자신의 어둠을 드러내는 타락한 영들의 불안한 비참상태에서도 주님은 이성적 창조물을 얼마나 고상하게 지으셨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때문이옵나이다. 그것의 안식과 지복을 위해서는 주님 밖에는 족하게 없나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지복을 위해서 충분치 못하나이다.”(XⅢ.8)

⑸ 그러니 이는 종국에는 가장 중요한 결론이자 핵심에 도달하게 되는데,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참된 안식이 그것이다. “아주 좋았던 모든 창조활동이 끝난 다음, 주님은 일곱째 날에 쉬셨나이다. 물론 주님은 부단한 안식 가운데서 그 모든 것을 창조하셨나이다. 그리고 주님의 책에 나오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선물이므로 아주 선한 우리의 활동을 마치고 우리가 영생의 안식 가운데서 주님 안에서 쉴 것임을 예언하나이다.”(XⅢ.36)

한분 선하신 하나님이여, 주님은 결코 선하지 않으신 적이 없나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선한 선물들에 의하여 선을 이루었으며, 그것들이 영원하지 못하여도, 여전히 여기서 그것들을 좇아서 주님의 위대한 성화(聖化) 가운데서 우리의 안식을 발견하고자 하나이다. 그러나 주님은 선이시며 다른 선한 것이 필요없으시며, 언제나 안식하시니 주님 자신이 주님의 안식이심이니이다.”(XⅢ.38)

⑹그렇다. 주님 당신이 주님 자신을 위한 안식이시라면 우리가 안식을 위해 무엇을 찾고 어디를 헤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직 주님 안에 있는 안식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면 된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자신의 고백록을 이러한 말로 마친다. “이것을 깨닫도록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사옵나이까? 그리고 어떤 천사가 다른 천사에게 그것을 깨우칠 수 있나이까? 아니면 어느 천사가 그것을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나이까? 우리는 주님께 이것을 여쭈어야 하나이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이것을 찾아야 하나이다...”(XⅢ.38)

※참조: 부록으로 주어진 이석우교수(경희대 사학과교수)의 해설은, 고백록이 드러내는 또다른 중요한 주제를 제시해준다. 바로 고백록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중심메세지”라는 의견이다. 이석우교수는 말하기를, ‘그의 고백의 목적은 과거의 자기 잘못을 낱낱이 고발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함과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말하려는데 더 중점을 두고 있다.’(p.423)

이를 조금 더 강조하여, ‘죄에 대한 고백은 의사에게 상처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건강(치유)에 대한 감사를 드린다’는 점에서 사실 어거스틴 고백록의 일차적인 목적은 하나님 찬양에 있는 것이다..고백록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분위기는 찬양과 감사, 그리고 용서받음에 대한 기쁨과 진리탐구의 열정이다.‘라고 하는 이교수의 의견은 우리로 고백록은 보는 다른 견해를 제공해준다.

어거스틴의 『은혜론』(생명의말씀사刊)

- 문정식 목사(열린교회)

I. 책의 전체내용에 대하여

⑴ 영(靈)과 의문(儀文)에 대하여 (412년, 고후3:6)

⑵ 그리스도의 은혜와 원죄에 대하여 (418년, 롬5:15)

⑶ 은혜와 자유의지에 대하여 (426-7년, 갈2:20)

⑷ 성도의 예정에 대하여 (428-9년, 롬8:30)

⑸ 견인의 은사에 대하여 (428-9년, 롬8:35~39)

이 책은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해, 펠라기안신학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며 참된 신학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낸 5개의 논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역자는 서문에서 이 책에 대해 “무엇인 참 기독교인가 하는 기독교의 본질론”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합당하다 여겨진다. 이는 또한 일견 1613년 Dort 회의에서 제정한 칼빈주의 5대교리와 비슷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물론 외면적으로 순서와 표현의 유사성은 아니고 본질적인 내용과 그 신학에 있어서의 유사성이다.

(1) T- 인간의 전적타락 (Total Depravity)

(2) U- 무조건적 선택 (Unconditional Election)

(3) L-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4) I-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5) P-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이러한 유사성을 발견하면서 느끼는 바는, 이 둘의 시간차이가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 논쟁했던 412~429년으로부터, 개혁주의자들이 알미니안들과 논쟁했던 1613~1615년과는 장장 1,200년 가까운 간격이 있음에도불구하고, 결국 바른 신학은 언제나 동일한 진리를 드러내게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어둠이 깊어도 반드시 빛은 존재하여 마침내 빛의 찬란함과 능력으로 인해 어둠이 물러가게 됨을 생각케 된다.

II. 책의 각 논문들에 대한 배경적 설명

⑴첫권인 《영과 의문》에 대한 논문은 412년에 쓰여졌는데, 역자에 따르면 이 논문을 받은 사람은 아르리카 교회 내의 분열에 대한 문제를 처리하도록 보냄받은 로마황제의 특사였다고 한다.

⑵두번째인 《그리스도의 은혜와 원죄》에 대한 논문은 418년에 쓰여졌으며, 그 안에 ①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주제와 ②원죄에 대한 주제를 각각 다루고 있다. 이 논문의 증정자는 로마 귀족 출신으로 젊은 시절 자기 모든 토지자산을 다 팔아 빈민들에게 주고 부부가 함께 수도의 길을 걷는 사람이었다.

⑶세째권인 《은혜와 자유의지》에 대한 논문은 426~7년에 쓰여졌는데, 이 논문은 한 수도원장에게 주어졌는데 그가 이미 펠라기우스 신학이 이단으로 정죄되었음에도불구하고 그 신학을 여전히 붙잡고 있던 여타 수도사들을 지도하기 위한 신학적 정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⑷넷째권인 《성도의 예정》에 대한 논문은 ⑸다섯 번째권인 《견인의 은사》를 속편으로 하는 원작으로, 어거스틴이 소천하기 얼마 전인 428~9년에 쓰여졌는데, 수도사인 프로스페스와 힐라리우스가 자신이 섬기던 수도원의 원장이 펠라기안 신학을 배척하면서도, 그 신학의 오염된 사상인 공로사상에 집착하였기에 이에 요청하여 받게 된 논문이었다.

III. 이 책의 논박대상인 펠라기우스의 신학과 그에 대한 지적

⑴ 영국출신으로 추측되는,엄격한 경건생활을 추구하던 수도사였던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354~430)과 동시대 사람으로 지식계층과 상류계급을 대상으로 사역하였다. 당시 교회 안의 신자들이 도덕적 생활에 있어 나태함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하나님의 계명에 더욱 충실한 것을 권고하는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⑵ 그가 시대를 깨우고 교회를 각성시키려하면서 사용하게 된 신학적 내용들은, 인간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본질적 진리를 오해한 바 잘못된 가르침을 펼치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심은 우리에게 그것을 능히 행할 능력이 있다는 전제하에 자신의 신학을 전개해나갔다. 그러다 보니까 인간의 죄된 본성과, 역자의 지적처럼 “인간의 성격이 죄를 거듭함으로써 비뚤어지며 병들어가는 사실을 무시했다.”

⑶ 그 결과 그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핵심적인 내용인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단절시켜버림으로써, 성도 혼자 독단적으로 신앙을 영위할 수 있는 독립적 인간관을 창조해내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기독교신앙의 핵심이요 구원주로신 성자 그리스도 예수는 그의 사상 가운데 그저 모범적인 인간상의 한 인물에 불과하게 만들어져 버렸다. 여기서 펠라기우스에 의해 뒤틀려버린 기독(基督)교를 보게 된다. 즉,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곡해되고,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무시하게 되니까 결국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로 외적인 자유를 얻은 듯보이지만 내면적이고 영적인 버림의 자리에 이르게 되어버렸다.

⑷ 이러한 펠라기우스 신학의 오류에 대해, 어거스틴은 인간의 부패와 타락에 대해 분명히 지적하고, 이를 구원할 수 있는 근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이라고 역설한다. 그 은혜의 징표가 그리스도 예수요 그 은혜의 지속적 방편이 성령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면서, 정리하기를 죄성을 타고난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믿음과 사랑과 성결과 소망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이라고 어거스틴은 정의한다.

⑸ 오류의 바른 교정을 담고 있는 어거스틴의 은혜론은, 그러므로 고대기독교와 종교개혁 후 기독교를 이어주는 사상적 연결점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종교개혁 사상의 근본적 모본을 보게 해주는 신학의 보고(寶庫)이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자기 주관적 신앙, 즉 펠라기우스적인 생각을 마음 속으로부터 제거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리게하는 참된 신학의 수작(秀作)이라 하겠다.

IV. 각 논문의 세부적 요지와 내용들

논문《영(靈)과 의문(儀文)》

-요지: 율법에는 선하고 거룩한 교훈이 가득하여도, 하나님이 율법을 주심은 우리가 의를 행하도록 도와주심을 의미함이 아니라 선행에 불가결한 우리의 의지를 성령을 통하여 도와주심으로 의를 행하게 하신다는 내용이다. 핵심은 인간 스스로는 결코 불가능하기에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만 의를 행하게 되는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내용: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인자베푸심의 이유가 다름아닌, 불경건한 자들이라도 은혜를 입어 자신들의 교만을 벗고 하나님께서 생명의 원천임을 알게 되도록 인도하시기 원함이라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의로운 일을 하려면, 부족함이 없는 생명의 저 원천에서 그리고 변함도 없으시고 그림자도 없으신 저 광명에서 받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I.11 선행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어거스틴은 또한 16장 ‘율법은 의인을 위하여 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뜻’에서, “은혜에 의해서만 사람은 율법의 명령들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은혜주심의 이유가 선행을 할 힘을 주시기 위함이며 율법을 완수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라 말한다(I.16). 또한 22장 ‘행위로 의롭게 되는 사람이 없음’에서 의롭게 하심을 얻음은 행위의 법이 아닌 믿음의 법에 의해서요, 문자가 아닌 영에 의해서요 우리의 행위의 공로가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의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한다(I.22)

논문《그리스도의 은혜와 원죄》

-요지: 본 논문은 펠라기우스가 인간의 본성과 자유의지 또는 율법과 교훈이 곧 은혜라고 하는 잘못된 주장에 대해, “은혜는 사람의 타고난 능력과 지식에 하나님께서 진정한 사랑을 부어넣으셔서, 바른 행동을 하도록 도와주시는 것”이라는 왜곡된 은혜이해에 대한 교정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자기 스승인 암브로시우스의 가르침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바른 이해를 소개한다.

-내용: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자유의지와 율법 및 교훈으로 이해하였으며, 그 결과 하나님을 우리가 무엇을 행할 가능성만을 돕는분으로 여긴다. 이를 어거스틴은 기능론이라 정의하였다(II.3~4). 그런데 이러한 그의 주장은 사도 바울과 전혀 다른 것임을 어거스틴은 밝히는데, 사도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가능성만을 주신다 하지 않았고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분명히 말함으로써(빌2:13),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역사하셔서 의욕과 행동 모두를 두시는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다고 주장한다(II.6). 이에 조금 더 나아가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강조하기를,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일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선택이나 선천적 능력으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친히 하나님의 은혜로 실현”하는 것이라 한다(II.31). 따라서 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 말한다(II.34).

논문《은혜와 자유의지》

-요지: 본 논문은 어거스틴의 6가지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데, ①자유의지와 은혜 모두 인정할 것,② 은혜가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음,③하나님의 은혜는 공로에 주어지는 것이 아님,④은혜는 율법준행을 가능케 하고, 본성을 죄의 속박에서 해방함,⑤계명을 바륵 지키려면 반드시 사랑이 있어야 함,⑥거저 주시는 은혜의 예가 바로 유아의 세례받음과 구원받음이다.

-내용: 어거스틴은 이 논문에서 어떤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옹호하면서 사람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거나, 혹은 은혜를 옹호하면 자유의지가 부정된다고 생각하는데 대하여 반박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와 동시에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예로, 먼저 하나님께서 모든 계명을 지켜 행하라고 하시는 구절이 많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증표라 말한다(III.4).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자유의지를 발휘하며 선한 일을 행할 수 없음도 언급한다(III.7). 이를 조화있게 설명하는 10장은 눈여겨볼만한 내용인데, “하나님께서 ‘너희는 내게 돌아오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슥1:3)고 말씀하실 때에,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문절은 분명히 우리의 의지에 관한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아오시겠다고 약속하는 문절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것입니다.‘(III.10)

그러면서 이러한 구체적인 예들로 사도 바울인 면류관을 얻기 위해 우선 은혜를 받음을 언급하고(III.14), 의롭다하심이 전적인 은혜요 영생이 상과 은혜이기에 그 영생은 실상 은혜 위에 주시는 더 큰 은혜임을 지적하며(III.20-1), 심지어 계명을 지키는 사랑도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임을 강조한다(III.34-7). 그러면서 이런 말로,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규정합니다. “만일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고 사람에게서 온다면, 펠라기우스파가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온다면,그때에는 우리가 펠라기우스파를 이겼습니다...”(III.37)

논문《성도의 예정》

-요지: 이 논문은 어거스틴이 준(準)펠라기우스파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예정과 은혜를 변호하는 글로써, 믿음의 성장뿐 아니라 출발 자체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준 펠라기우스파들은 하나님의 예정을 반대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이 확실하지 않으므로 의지않고 싶다고 하며, 도리어 하나님의 강력한 약속보다 자기들의 약한 힘을 의지하겠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네가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는 말씀을 자기들의 신앙의 근거로 악용한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차라리 유아들의 구원이 이들의 주장에 반하여 은혜와 견인의 진리가 빛을 발하는 예라고 말하며, 예정된 이들은 은혜에 의해 선택을 받은 자로 하나님의 특유한 방법으로 확실히 소명을 받으며 천지창조 전에 선택받았음을 강조한다. 예정과 은혜의 가장 현저한 예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내용: 어거스틴은 예정의 문제를 풀려는 의도로, 가장 우선 믿음의 시초가 하나님이시고 바로 그분의 선물로 우리가 믿음을 가졌음을 언급한다. ‘우리의 믿음의 시초를 하나님께 돌립니다.그 위에 하나님이 다시 보충해주시며, 그 밖에도 우리가 믿고 구하는 것을 더해주시는 것입니다.(IV.3).그러면서 인용하기를 롬11:36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의 말씀에 따라 다른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할 때 이 믿음의 시작도 제외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IV.4).

그래서 사람이 선택을 받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서 오는 것이요 전혀 공로에서 오지 않음을, 롬11:5~6을 따라 주장한다,“그러즉 이와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례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IV.11). 이에 모든 사람에게 믿음을 주지 않으신 이유를 말하며 이 예정과 선택을 더욱 강조하기를, ‘그이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의 말씀을 인용하며 선택받음에 있어 자기의 공로를 자랑치 못하고 오직 그 은혜만을 찬미케 하기 위함이라 한다(IV.16)

그러면서 이렇게 예정과 은혜의 상관관계를 논하기를, 예정은 은혜를 위한 준비며 은혜를 주시는 일 그 자체이다고 말한다(IV.19).그리고는 바로 이 은혜와 예정의 현저한 실례가 바로 유아들이며 그리스도임을 밝히는 것으로 어거스틴은 자신의 주장을 이어간다(IV.23~31).왜냐하면 이처럼 인간의 공로가 하나님의 은혜보다 먼저라고 하는 의견들을 공허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예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러므로 믿음의 시초는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의 은사임을 그들도, 우리도 결코 부정할 수 없다(IV.39~40).

논문《견인의 은사》

-요지: 어거스틴은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일은 그러므로 사람의 의지나 공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로써의 견인(堅忍)과 인내(忍耐)라 말한다.

-내용: 어거스틴은 논문의 서두에서부터 분명하게 말하기를, 신자가 그리스도안에서 나중까지 참고 견디는(막13:13,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 견인은 오직 하나님의 은사라 말한다(V.1). 그러면서 어거스틴은 견인교리를 주기도문과 연결시키며 기도의 중요성과 실제성을 강조한다. “지금 여기서는 끝까지 유지해야하는 견인에 대해 말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성도들도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때에 확실히 이 견인을 구합니다...땅에서 이미 받은 성결에서 끝까지 겨인하지않고서는 아무도 하늘에 있는 저 최고의 행복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V.6)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6:11)라고 기원할 때에, 그들은 직접 하나님에게 견인을 구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견인을 얻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에서 분리되지 않으며, 그들을 분리시킬만한 죄를 일체 용인하지 않는 성경생활을 계속하고자 하는 것입니다.”(V.7) 이 부분에서 어거스틴은 그의 일관된 은혜론을 드러내기를, 사람이 하나님께 가는 것과 그에게서 떠나지 않는 것(견인-堅忍) 모두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 말하며(V.14),그러기에 견인이 오기를 바라며 기도를 놓지 않도록 기도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V.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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