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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 전통론(한스 큉의 교회관을 중심으로) -최덕성

최덕성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3. 1. 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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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협의회의 전통론

—한스 큉의 교회관 이야기와 더불어—

 

최덕성

 

 

세계교회협의회(이하 WCC)는 ‘전통론’(傳統論)이라는 것을 고안하여 로마가톨릭교회를 인정해 주고 그 교회와 함께 가시적 교회일치를 추구해 왔다. WCC 관계자들은 이 전통론이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들 간의 해묵은 교회론 논쟁을 가라앉혔다고 자찬한다. 성경과 교회의 전통(전승, 유전)이 병립되는 두 개의 실체가 아니고, 모두 하나의 복음 전통(Tradition), 기독교 전체로서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면서, 모든 역사적 교회들—전통들(traditions)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주지하다시피, 로마가톨릭교회는 성경만이 아니라 성전(聖傳)이라고 일컫는 ‘기록되지 않은 하나님의 계시’를 가졌다고 한다. 사도직 계승과 함께 전승되는 성전은 교계제도, 교황의 수위권, 교황 무류(無謬) 교리, 그리고 개신교회들을 참 ‘교회’가 아니라고 하는 배타적 교회관의 토대이다.

WCC는 몬트리올보고서(1963)를 통해 로마가톨릭교회 이른바 성전을 인정하고 그것을 토대로 하는 교회 교리들을 인정 또는 묵인했다. ‘전통론’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가지적 교회일치를 위해 고안한 것이다. 이 이론은 아이러니하게도 개신교 성경관과 교회관에 충실한 복음주의 개신교회와 일치가 어렵게 만들었다. 개신교 신앙의 근간인 ‘오직 성경’을 포기함으로써 ‘루비콘 강’을 건너버렸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로마가톨릭교회는 WCC와 함께 가시적 교회일치 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나 교황청은 2007년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종래의 교회관을 바꾸거나 바꿀 의도가 없었다는 성명을 발표하여 로마가톨릭교회만이 유일무이한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천명했다. WCC의 ‘구애’를 거절했다. 이미 주어진 교회의 일치성을 가진 교황좌 아래로 ‘갈라진 형제들’이 귀정(歸正)하는 것만이 유일한 일치의 길이라는 해묵은 말을 반복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WCC의 전통론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 성경과 초기기독교공동체의 가르침에는 무관심하고, 오로지 가시적 교회일치를 위한 의견수렴에만 연연하던 WCC의 행보는 ‘멧돌 잡으러 갔다가 집돌 잃는다’는 속담을 연상시킨다.

로마가톨릭교회의 비평적 신학자 한스 큉(Hans Küng, 1929-)은 종래의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회 교리를 비판한다. 성전, 사도직 계승, 로마주교의 수장권, 교계제도, 교황 무류 교리를 부정한다. 특히 교황 무류 교리가 역사적으로나 성경적으로 신빙성이 없고, 입증 불가능함을 증명한다. 큉은 초대기독교 복음과 그 공동체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교회개혁(ecclesia reformanda)을 촉구했고,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로마가톨릭교회의 중심에 두고자 했다.

큉의 관점에서 보면, WCC식 접근방식으로는 개신교회들과 로마가톨릭교회의 일치가 실현되는 것이 어렵다. 개신교회의 정박지를 떠나 로마가톨릭교회와의 ‘오직 일치’에 전력투구해 온 WCC의 가시적 교회일치 노력은 출범부터 잘못되었다. ‘전통론’으로 로마가톨릭교회의 존재와 성전교리를 포함한 교회론을 인정 또는 묵인하는 것은 큉이 바른 길, 성공 가능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교회일치 모습과 상반된다. 큉은 교회가 초기기독교 복음과 그 공동체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서 하나 되기를 원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큉의 주장은 개신교답고, 개신교 단체로 출발한 WCC의 성전론은 로마가톨릭교회에 바짝 다가갔다.

큉은 당당하게 진리 편에 서서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회론에 문제제기를 했다. 학자다운 결기, 희생, 용기를 가졌던 그에게 돌아온 것은 가톨릭신학 교수직의 피탈과 따돌림이었다. 튀빙겐대학교에서 함께 교의학을 가르치던 동료 교수 조셉 라칭거(Joseph Razinger, 1927-, 현 교황 베네틱트 16세)는 신학 태도를 바꾸어 교황청 실세 편으로 돌아서고 그 덕분에 교권과 종교재판소를 장악했으며, 교황좌에 등극했다. WCC와 로마가톨릭교회 신학자들이 보여준 대조적인 행보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 다르며, 신학자에게도 이상과 현실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1. 로마가톨릭교회의 ‘성전’

 

‘성경과 전통’의 문제는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넘을 수 없는 루비콘 강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이 신앙과 교회에 구속력이 있다는 진리를 규명했다. 성경적 진리에 상반되는 그릇된 교회전통에 대항하면서, 성경만이 하나님의 특별계시이며 신앙과 교회생활의 최후의 척도라고 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기록된 성경만이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교회의 전통(유전, 전승)이 계시이며, 기독교 신앙에 대한 구속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교회 초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가르침과 실천적 관행을 일컬어 ‘성전’(聖傳)이라고 한다. 이것은 방치되지 않고 사도직 계승이라는 방법으로 살아 있는 계시가 되었다. 기록된 성경은 기록되지 않은 ‘성경’인 전통과 병립되지 않는다. 성전, 성경, 교도권은 교차 관계에 있다. 성전은 사도직 계승과 직결되어 있으며, 교계제도, 교황수위권, 교황 무오 교리를 포함한 로마가톨릭 교회론의 바탕이다.

트렌트공의회(1546)는 ‘성경과 전통’을 모두 하나님의 계시라고 천명했다. “진리와 규범이, 기록된 책들뿐만 아니라 사도들이 그리스도 자신의 입에서 받아들이거나 혹은 사도들로부터 성령의 영감을 받아 손에서 손으로 전달된 기록되지 않은 전승들 안에도 보존되어 있다”고 했다. 개신교회가 위경이라고 일컫는 책들을 포함 총 73권을 정경으로 확정했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1870)도 이와 마찬가지로 “초자연적 계시는 기록된 성경과 기록되지 않은 전승에 담겨 있는데, 이 전승은 그리스도 자신의 입으로부터 나와 사도들에 의해 수용되었거나 성경의 영감에 의해 그 사도들이 손에서 손으로 전수하여 우리에게까지 전해 진 것이다”라고 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계시헌장>(1965)은 복음과 전통에 대하여 WCC의 몬트리올보고서(1963)가 말하는 것과 비슷한 것을 지술한다. 기독교 전체인 하나인 복음 전통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전통과 성경은 밀접히 같이 매여져 있고, 서로 공통된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곧 성전과 성경은 하나님의 꼭 같은 샘에서 흘러나오며 […] 같은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기 때문이다.”

위 문서는 동시에 “오로지 성경으로만 모든 계시 진리에 대한 확실성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성전과 신구약 성경은 거울과 같아서 하나님을 참모습 그대로 얼굴을 맞대고 뵈올 수 있을 때까지 지상에서 순례하는 교회는 그 안에서 하나님을 관상하며 그분에게서 모든 것을 받고 있다”고 한다. ‘성경과 성전’은 교회의 교도권과 분리할 수 없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전승되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전 모두가 하나님의 계시이며, 이것들을 올바로 해석하는 직무가 베드로의 열쇠를 가진 로마의 살아 있는 교도권에만 맡겨져 있다고 한다. 성경의 독립성과 성경의 완전성과 충족성을 부정하고, 성경과 전통과 교도권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한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가 ‘전통들’이라는 복수 용어를 사용한 것과 달리,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전통’이라는 단수용어를 사용했다. WCC의 신앙직제위원회가 몬트리올보고서(1963)에서 기독교 전체를 일컫는 ‘전통’을 강조한 것과 같은 표현이다. 그리고 성전과 성경이 각기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샘에서 흘러나온다고 선언한 것은 진일보한 신학적 표현이다. WCC의 몬트리올보고서가 전통(Tradition)에서 성경과 전통들(traditions)이 나왔다고 하는 것과 일치한다.

계시의 영역이 둘인가 하나인가 하는 주제는 기독교 신앙의 ‘권위’ 문제에 해당한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기독교 전통이 진행되고 진화되는 과정에서 성경이 만들어졌고, 정경 여부를 판단하는 권한이 사도직의 계승과 성전을 가진 자신에게 있다. 성전과 성경이 동등한 중요성을 가진다. 전통의 산물인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고 현실화시키는 데는 성전이 필수적이다. 성전과 성경을 분리하거나 독립시키면 성경이 갖는 본래의 가치와 생명력을 상실하게 된다. 성경은 항상 살아 있는 전통 안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한다.

 

2. WCC의 전통론

 

WCC 신앙직제위원회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대회에서 작성한 “성경, 전통, 전통들”(Scripture, Tradition and Traditions, 1963)은 계시의 유일한 원천인 하나의 복음 전통(Tradition) 또는 기독교 전체로서의 전통에서 성경과 전통들, 곧 각 교회들의 전통들(traditions)이 나왔고 한다. 세세대대로 전달되어진 복음 그 자체를 의미하는 전통과 그 하나의 전통에 대한 교회들의 다양한 표현들을 의미하는 ‘전통들’을 구분한다. 계시의 원천이 복음 전통이라고 하면서 그것에서 성경과 여러 교회들의 전통들이 나왔다고 한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하나님의 계시의 전통(the Tradition of his revelation)을 등장시켰고, 그것에서 여러 유형의 교회 전통들이 파생했다는 것이다.

WCC에 따르면, 복음전통(대문자 T)은 한꺼번에 확정되어 한 세대에서 그 다음 세대로 전수된 가르침들(tenets)의 총화(總和)가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의 살아 있는 전수과정이다. 전통은 계속 전개되어 나가는 복음 자체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 내용인 복음 선포(kerygma)의 연속이다.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 존재한 이 전통에서 성경이 만들어졌다. 성경은 전통의 일부이며 그것에 추가된 것이다.

WCC의 전통론은 프로테스탄트와 로마가톨릭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권위’의 문제를 이중의 제한가정(制限假定)이라는 다리로 연결시킨다. 첫 번째 가정은 ‘오직성경’이라는 종교개혁 신앙 원리는 성경이 전통의 한 부분이고, 또 성경이 전통 안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전제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언제나 새로운 상황에서 올바르게 해석됨으로써 살아 있는 전통이 된다. 두 번째 가정은 계시의 원천인 전통(대문자 T)이 성령의 조명 아래서 그 신뢰성이 검증되어야 하는 전통들(소문자 t) 안에서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케리그마의 전통(the paradosis of the kerygma)에서 성경이 만들어졌고, 각 교회 전통이 파생되었다고 한다.

 

과거에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가 오늘날에는 오직 전통(소문자 t)을 수단으로만 접근이 가능하다. 전통(대문자 T)은 성경에 선행(先行)한다. 성경과 전통은 두 개의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하나로 얽혀 있다. 그 중 어느 하나도 그 자체로는 권위를 가질 수 없다. 성경과 전통들을 동등 선상에 있다. 성경은 전통의 초기단계의 산물이다. 이 전통에서 성경과 각 교회들의 전통들(소문자 t)이 생겨났다. 계시의 원천인 전통(대문자 T), 곧 구원사의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전달과 계승 과정에서 로마가톨릭교회, 개신교회들, 정교회, 영국국교회 전통들이 생겨났다.

 

WCC 신학자들에게는 16세기 종교개혁기로부터 쟁점이 되어 온 성경과 전통의 관계, 그것에서 발견되는 모순과 불일치는 하나의 주변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정작 진지하게 추구되어야 할 문제는 기독교 안의 전통들(소문자 t)과 유일한 복음 전통(대문자 T)을 구별하는 것이고, 이 두 가지의 관련성을 탐색하는 작업이다.

다양한 교회 전통들(소문자 t)이 표현하는 기독교 전체로서의 복음 전통(대문자 T)은 어떻게 식별되는가? 교회가 신약성경을 정경으로 확정한 순간에 진정한 전통을 판별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등장한 것이 전통(대문자 T)이다. 그 척도가 발견되고 제시되자마자 교회는 이 성경을 어떻게 올바로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성령의 인도만이 바른 해석을 성공하게 하는 데는 개신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 양편 모두 이의가 없다. 그러나 각 서로 다는 성경해석 문제가 대두된다. 여기에서 에큐메니칼 성경해석학이 등장하고, 모든 교회 전통들의 성경 해석을 존중하라고 한다. 성경이 명백하게 제시하는 진리도 의심의 해석학으로 접근하여 상대화 한다.

WCC의 전통론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계시헌장』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전통과 성경이 “동일한 신적 원천에서 솟아나와 […] 같은 목적을 지향한다”고 한다. 계시인 전통과 성경이 하나의 원천—복음전통(대문자 T)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그리고 전통(소문자 t)과 성경이 전통(대문자 T)의 산물이라고 한다. WCC의 전통론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의식하여 작성한 것으로, 제1차 바티칸공의회가 규정한 ‘성전과 성경’의 관계에 대한 교리와 비슷하다. 신앙직제위원회 몬트리올 대회에 참석한 로마가톨릭교회의 옵서버들과 정교회 신학자들이 WCC의 전통론 고안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개혁신학도 성경이 기록되기 전까지 구전과 전승의 과정을 거쳤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은 단순한 문학서나 역사와 같은 형태의 전통(전승)의 산물이 아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계시의 산물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성경 기자들을 영감하여 복음진리를 기록하게 했다. 성경 기자들이 전승을 참고하여 성경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간섭했다. 기자의 성장 환경, 성격, 성품, 지식, 사회조건 등을 유기적으로 사용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기록이다. 성경 저작 과정에는 전통을 포함한 인간적인 면만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의 영감과 특별계시라는 측면이 있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 24:44)고 했다.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을 알고 있었다. 구약성경 39권을 포함한 성경 66권은 하나님의 인도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정경으로 수납되었다. 교회는 성경에 의해 양육되었다. 영지주의와 몬타누스주의와 마르시온주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신앙의 권위에 대한 문제가 부각되자, 교회는 어느 것이 정경인가를 확인했다. 그러나 정경 여부를 결정한 적은 없다.

전통 가운데는 신빙성이 있는 것들도 있지만(살후 2:15; 고전 11:23; 고전 15:3-11), 그렇지 않은 장로들의 것들(마 15:2-3, 골 2:8)도 있다. 장로들의 유전인 손 씻는 규례, 할례, 철학, 신화, 민담을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과 동격(同格)의 권위를 가진다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없다. 전통과 성경의 권위는 동등하지 않다. 하나님은 성경해석을 독점할 권위를 가진 교회를 이 땅에 주신 적이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성경을 해석하는 정확 무오한 법칙은 성경 그 자체이다. 새로운 계시나 또는 인간의 전통 등 그 어떤 것도 성경에 첨가될 수 없다.

WCC의 전통론은 기독교 신학과 교회일치 운동에 몇 가지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문제를 초래했다. (1)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교회라는 인간 제도의 전통(소문자 t)과 대등한 위치에 둠으로써 특별계시의 결과인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2) 종교개혁운동이 강조한 ‘오직성경’ 원리를 버렸다. (3)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성경해석 원칙을 절대적인 것으로 이해하거나 단순하게 반복 되풀이 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독교 전통과 다양한 관점들과 해석을 긍정적으로, 상호 보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면서, 성경이 분명히 제시하는 것도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4) 로마가톨릭교회와 그 ‘성전’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사도직 계승, 교황 수위권, 교계제도, 교황 무류성 교리, 그리고 교황 중심적, 법률적, 패권주의적 로마가톨릭교회 전통을 인정, 묵인한다. (5) 로마가톨릭교회가 가경들을 정경에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없게 되었다. 로마가톨릭교회만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그리스도의 가르침들(요 21:25)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미해결 과제로 남긴다. (6) 기독교회가 성경과 초대기독교공동체의 고백으로 돌아가고, 그 토대에서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길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3. 로마가톨릭교회 신학자 한스 큉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로마가톨릭교회 안에는 중세기 교회의 영광과 특권을 되찾으려고 하는 복고파와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교리를 쇄신시키려고 한 쇄신파가 대립해 왔다. 교황청은 복고파 신학자들이 장악해 왔다. 실세 신학자들의 의견과 불일치하는 주장을 펼치는 신학자는 미움을 받고, 왕따 당하고, 피눈물 나는 고통을 당했다. 교수직을 해임되고 유배되기도 했다. 정치적 실세 편에 줄을 서는 신학자들은 권력의 비호를 받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은 계시의 영역이 하나인가 둘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도 대립을 보였다. 계시 영역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이지 둘이 아니라고 외치고, 냉랭하고 스콜라적인 종래의 계시관을 버리고, 성경에 특별한 존경을 표하는 ‘갈라져 나간 형제들’의 입장도 참작해야 한다는 주교도 있었다. 독일 쾰른의 대주교 프링스(Frings)는 계시 영역이 둘이 아니라고 했다. 둘이라고 진술한 공의회 초안이 갈라져 나간 형제들에게 공격적이며 학문연구의 자유를 해치는 요소가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대주교 리터(Ritter)는 초안을 ‘치워버려라’고 외치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는 태도가 너무 부정적이며, 성경에 대한 사랑을 고취시키기 보다는 노예적 공포심을 부채질하며, 비현실적이며, 성경을 배반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의장석에서 사회를 하던 프랑스 추기경은 마이크의 스위치를 꺼 계시의 두 영역을 길게 설명하는 신학자의 발언을 중단시켰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한 주교 상당수는 계시 영역이 오직 하나, 곧 하나님의 말씀—성경이라고 보았다.

큉은 스위스에서 태어나서 로마와 파리에서 공부를 하고 파리대학교(솔본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32세에 1960년 독일 튀빙겐대학교의 가톨릭신학부의 교의학 교수로 부임했다. 1962년 교황 요한 23세로부터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신학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큉의 종교다원주의와 보편구원주의 경향, 역사-비평방법과 종교간 대화에 대한 견해는 WCC의 진보계 신학자들의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교회관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큉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회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성전, 사도직 계승, 교계제도, 교황의 수위권, 교황 무류교리를 비판한다. 특히 교황, 주교단, 공의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참되게 보존하고 그르치지 않게 해석할 수 있는 무류의 교도권을 부여받았다고 하는 교리가 역사적으로나 성경적으로 증명 불가함을 입증했다.

큉은 로마가톨릭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이해한 ‘교회’의 기준에 합당하게 전폭적으로 개혁되고, 로마가톨릭교회의 울타리 안에 개신교 신앙을 중심으로 두고자 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다양한 그룹으로 나뉘어져 각개전투를 하는 형태가 아니라, 단일화 되기를 희망했다. 교황은 절대적인 지배권자가 아니라 목회적 통일성 유지하는 상징적 직책 정도로 여겼다.

큉은 로마가 절대군주제 형태의 교계주의 교회관과 교황 무류성 교리를 포기해도 하나님의 백성은 진리 안에 부족함이 없이 머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성경과 초기 기독교공동체의 복음 신앙으로 돌아가고, 교회론 패러다임을 성경과 역사 사실에 부합되게 개혁하여 ‘로마가톨릭의 넓이 안에 개신교적 중심에 두는’ 일치 모델을 구상했다. 큉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전제군주형태의 교회론과 배타적 교회관 그리고 사도직 계승, 교계제도, 교황좌 권위의 근거인 성전 교리를 사실상 부정했다.

교황청은 1979년 12월 15일에 큉의 가톨릭 신학교수직(missio canonica)을 박탈했다. 교황 무류성 교리에 의문을 제기하고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도직을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었다. 큉이 저술한 책의 내용이 “가톨릭의 온전한 신앙진리에서 벗어나 있다. 따라서 그는 가톨릭 신학자로 가르칠 자격이 없으며, 또한 가톨릭 신학자로서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고 했다. 큉이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저술하고 강의한 것’에 근거한 결정이라고 했다. 큉이 ‘이단자’로 공식 정죄되지는 않았으나 이단자와 다르지 않은 취급을 받았다.

큉의 『교회』(Die Kirche, 1967)는 개신교회의 교회관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성경에 기초하여 현 시대에 대한 책임감을 가진 교회 이해를 촉구한다. 교황청과의 논쟁을 촉발시킨 이 책은 교회론의 기준이 로마가톨릭 전통-이른바 성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기준으로 설정한다. 신약성경의 교회가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제도화 되고, 처음의 봉사적 성격을 상실하고 지배적인 계급체계로 발전해 온 것을 지적한다. 본래의 교회제도는 현재의 교황제도가 아니라 만인사제직에 더 가까우며, 교회 직무의 다양성은 계급질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은사에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교회의 사도적 본질이 특정 제도의 계승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세계를 섬기는 것에서 실현되므로, 성전이론을 뛰어 넘어 기독교의 근원의 빛에 따라 단호하게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한다.

 

4. 교황 무류 교리에 대한 역사의 반증

 

큉은 교황의 무류 교리를 공박하는『무류성?』(Unfehlbar?, 1970)에서 로마교회의 역사에 나타난 오류들, 교황제도의 폐해, 교황, 공의회, 주교단이 저지른 오류들을 지적했다. 성경의 그 어느 본문도 교황 무류 교리를 뒷받침하지 않는다고 했다. 교회와 교황의 무류 교리가 역사적으로나 성경적으로나 입증 불가함을 증명했다. 이 교리가 로마가톨릭교회의 울타리 바깥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며, 울타리 안에서도 의심스럽고 모호한 교리로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교황의 교도직 수행도의 오류와 어두운 면들과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고 지적한다.

1) 제9세기의 교황 니콜라오 1세(Nicolaus I, 858-867 재위)가 동서방교회의 분열의 책임자로 매도되어 온 포티우스(Photius)를 파문한 것은 오류였다. 이 파문을 추인한 제4차 콘스탄티노플공의회(869-870)의 결정은 오류였다. 1054년에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미카엘 세룰라리우스를 파문하고 정교회를 일방적으로 정죄한 것은 교회(교황, 공의회, 주교단)의 오류였다.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을 금했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여러 차례 타협 후에 교회의 교도권을 가진 자들이 마음을 바꾼 것도 오류였다. 교황이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를 단죄한 것도 오류였다. 교회가 인도, 중국, 일본에서 새로운 형태의 예배 형식과 조상제례를 둘러싼 갈등을 비난하고 정죄한 것은 가톨릭 선교를 실패하게 한 아주 큰 규모의 실수였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 때까지 로마가 시행한 정죄 또는 출교 결정권은 교황의 중세기적 지상통치권을 떠받쳐 온 수단이었다. 교회는 20세기 초에 성경의 각권 저자들에 대한 비평-역사 방법론을 사용한 신학자들을 정죄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역사와 문학 장르 연구를 단죄했다. 교의학의 현대적 발전에 이바지한 학자들을 처벌했다. 금서목록을 만들고 그 내용을 정밀 조사했다. 이것들은 모두 교황의 오류였다. 이 과정에서 신학은 교권을 도왔고, 교권은 신학에 도움을 주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 가운데 하나가 교황 무류성 교리이다.

교황들이 회칙과 교령을 빌미로 많은 신학자들을 처단한 것은 교황의 무류성 교리의 성립 불가능성을 반증한다.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850년경에 프랑크 지방 주교관의 문서고에서 발견된 ‘이시도리아 법’(Pseudo-Isdorian Decretal)이라는 위서(僞書)를 가지고 로마교회 주교의 수위권(Supremacy)을 증명하는 데 사용한 것은 교황 무류성 교리가 정당화 될 수 없음을 입증한다. 이 위서의 내용은 교황 수위권에 대한 것으로, 교황이 홀로 공의회를 소집할 수 있고, 최고의 판단자이며, 교황의 동의 없이는 아무도 주교를 파면할 수 없으며, 전 세계에 권한을 행사한다는 등이었다.

2) 인공 피임법을 불허한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인간생명』(Humanae Vitae, 1968)은 교황 무류성 교리의 성립 불가능성을 입증한다. 교황청은 시기를 조절하는 자연적인 피임법이 ‘자연법’에 부합한다는 이유로 허용하면서도 인공적 수단을 사용하는 피임법은 불허했다. 교황의 가르침은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스토아주의-고행주의에 바탕을 둔 중세기 발상이며, 성(性)에 대한 인간의 생물학적 책임을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인의 경험과 사상에 불일치한다. 기독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마니교적인 유산이다. 350년 전 갈릴레오 정죄 사건을 재현한 것이다. 교황청이 인공 피임금지를 명하면서 이를 교황의 그르칠 수 없는 ‘특별한 직무’(magisterium extraordinarium)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그르칠 수 있는 ‘일상적 직무’(magisterium ordinarium)의 권위로 지시한 오류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고 무죄한 자를 살해하는 행위를 잘못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특별한 직무에 속한다. 그러나 산아제한 문제는 일상적 직무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현장』 25항이 명시한 주교직의 ‘특별한 직무’에 대한 정의와 불일치한다.

공의회의 『교회헌장』은 “각각의 주교들이 무류성의 특권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25항)라고 한다. 주교들이 사도들의 계승자라면, 그리고 무류성 교리가 정당하다면, 그들은 개인적으로 그것을 즐겼을 것이고, 오류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위 25항은 “베드로의 후계자와 친교의 유대를 보전하면서 신앙과 도덕의 사항들을 유권적으로 가르치는 주교들이 하나의 의견을 확정적으로 고수하여야 할 것으로 합의하는 때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오류 없이 선포하는 것이다”라는 진술로 연결된다. 인공적 피임금지가 정당화 되려면 자연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성경)에 부합해야 한다. 성경은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사실상 장식 기능의 역할(decorative role)을 할 뿐이다. 모세오경에 자연법이 포함되어 있다는 논리로 산아제한을 금지한 회칙은 성경이 주장하는 결혼의 존엄성과 불일치한다.

3) 제1차 바티칸공의회가 선포한 교황 무류성 교리는 신학적 논의를 거쳐 결정한 것이 아니므로 신빙성이 없다. 강압 분위기에서 중세기적 교황 권력에 매력을 느끼며 옛 로마가톨릭 영광을 회복하려는 열정을 가진 교황 비오 9세가 정치적 동기로 결정한 것이다. 공의회가 모이기 전, 반계몽주의와 반합리주의적 낭만주의 정신을 가진 복고파 운동이 광범위하게 교회와 교회론을 지배하고 있었다.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통치 동안 혼란을 겪은 유럽은 평화와 질서를 바랐고, 정치적 종교적 안정을 유지한 기독교 중세기를 그리워했다. 교황보다 그것을 더 그리워 한 사람이 있었겠는가?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은 전통주의에 강한 매력을 느꼈다. 성직주의는 반성직주의를 부추겼다. 성직자들은 신학자들의 과학 방법론 도입과 쇄신파 운동에 변증적 자기 방어 자세로 대응했다. 교황 무류성 교리는 이러한 강압적 정치적 풍토에서 만들어졌다. 교황은 교도직을 잘못 사용했다.

 

5. 교황 무류 교리에 대한 성경의 반증

 

1) 교황 무류 교리는 성경이 보증하지 않는다. 무류 교리는 ‘교황의 그르칠 수 없는 교도직’이라는 가정(假定)에 근거해 있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한 교황, 주교들, 신학자들은 성경이 아니라 당대의 일반 문화에 적합한 진리의 이성적인 표본에 따랐다. 로마가톨릭교회도 개신교회처럼 성경을 신앙의 규범으로 여긴다. 그러나 성경이 제공하지 않는 것은 전통—성전이 제공한다고 본다. 가톨릭교회 전통을 계시에서 파생된 성경과 동등한 계시 영역으로 간주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성경, 전통, 교도권의 불가분의 관계를 말한다. 공의회는 교회의 갱신을 위한 궁극적인 규범, 수위적 규범(supreme norm)이 무엇인가를 논의했고, 새로운 공적 계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고 명시한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와 마찬가지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도 교황 무류성 교리를 진지하게 논의하지 않았다. 성경적 근거를 명확히 제시하거나 밝히지 않았다.

2) 교황 무류 교리는 주교들만이 사도직의 계승자들이라는 가정(假定)에 기초해 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무류성을 주장하지 않았다. 사도단이든지 사도 개인이든지 그 어떤 형태든지 간에, 어느 누구도 오류 불가능성을 말한 바 없다. 사도들은 기본적으로 복음을 설교하는 자로 보냄을 받았다. 그들은 무류성을 선언할 만큼 영웅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들, 연약한 인간, 보배를 가진 질그릇(고후 4:7),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요 15:5)라고 했다. 공관복음서들은 바울과 요한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이 부활 전과 후에도 연약하고, 어리석고, 인간적이며, 실수 많은 사람이라는 특징을 예증(例證)으로 삼고 있다. 베드로는 실수가 많았다. 신속하게 시행해야 할 사도적 임무수행(mission)을 지체하게 하는 실수를 범했다. 사도들이 인간 그 이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바울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서 형제들에게 위로와 중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교회의 기초를 놓은 사도들(엡 2:20; 고전 12:28; 계 21:14)은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인 의미에서든, 직무상으로든 무류성을 말한 바 없다. 자신들의 실수, 오류 불가능성을 언급한 적이 없다.

3) 로마가톨릭교회의 주교가 사도직의 계승자라는 교리는 성경적으로 입증될 수 없다. 사도들의 직접적이고 배타적인 의미의 계승자들이라는 근거가 없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자들이었고, 그리스도의 대사들이었다. 그들은 계승자들로 대체될 수 있는 직임을 가진 자들이 아니었다. 교회의 설립자들은 사도들이었지 주교들이 아니었다. 사도들의 과업과 임무는 사도적 선교와 사도적 봉사(ministry)였다. 이 과업은 기본적으로 전체 교회에 의해 계속되었다. 사도적 증언, 사도적 신앙과 고백의 계승, 사도적 봉사와 삶을 위해 분투노력하고, 조화를 이루고, 이를 계승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사도들의 계승자들이며, 사도직을 계승한 자들이다. 사도성의 계승은 하나님 백성 전체가 한 것이지 특정 지역의 주교에 의해 계승된 것이 아니다.

4) 성경은 교황의 수위권을 보장하지 않는다. 교회의 지도력이 사도들과 그들의 카리스마 사역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는 복잡한 역사적 발전이 개입되어 있다. 성직자와 평신도가 구분되고, 목회자단이 구성되고, 교회가 넒은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장로가 회중과 전 교회 영역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 후에 오늘날 개념의 주교가 등장했다. 주교 개념이 발전하여 주교단이 만들어졌고, 로마의 주교, 곧 교황으로 연결되었다. 주교는 장로와 달리 더 광범위한 교회 지역을 관할했으나, 목회자인 장로보다 위계적인 우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주교와 장로의 계급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5) 주교가 교회의 교도직임을 맡은 유일한 사람이라는 교리는 입증 불가능하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선포하도록 부름 받았다. 바울은 사도, 선지자, 교사를 통합하는 단일화 경향을 공박했다(고전 12: 28). 제1차 바티칸공의회가 교황 무류성 교리를 정당화 하려고 내세운 성경구절들은 로마가 베드로 교구의 법적 수위권의 근거로 삼는데 무리하게 사용해 온 것들이다. 그 성경구절 가운데 그 어느 하나도 베드로의 계승자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거나 로마교회의 주교—교황 직의 무류성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 성경구절들은 법적 지위의 계승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성전 교리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성경은 오로지 복음의 영(靈) 안에서 이루어진 목회와 교도(敎導) 활동의 연속성을 말할 뿐이다. 로마 주교가 아니라 베드로 개인의 영적, 카리스마적 사역을 말한다. 로마가 가지고 있는 문서 그 어느 것도 교황 무류성을 말하지 않는다. 로마가톨릭교회 바깥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황 무류성 교리를 확신시킨 로마가톨릭 신학자는 없다.

6) 로마주교—교황의 수위권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 교회가 출범한 첫 두 세기 동안에 만들어진 기독교 문헌 그 어느 하나도 마태복음 16장 18절과 그 이하 본문을 로마의 주교와 관련시키지 않는다. 베드로 개인과 관련시켜 언급할 뿐이다. 로마 주교직이 역사의 무대에서 중요하게 대두된 것은 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 몬타누스주의와 관련된 세례문답과 신약성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로마 주교직은 3세기 중반에 사이비 사도들과 사이비 기독교인들을 정죄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은 4세기까지도 로마 교구의 우선권(primacy)을 주장하는 데 사용되었을 뿐이다. 로마 주교직의 수위권(supremacy)이나 무류성을 주장하는 데 사용된 적이 없다. 동방의 정교회도 마태복음 16장 18절을 베드로라는 한 개인의 우선권과 관련시켜왔다. 그러나 동방교회나 서방교회 그 어느 편도 마태복음 16장 18절(이하)이나 누가복음 22장 32절을 로마 주교의 무류성과 관련시킨 적이 없다.

 

5. 반응과 대응

 

큉의 교회관에 대한 로마가톨릭 신학자들의 반응은 찬반으로 첨예하게 나뉘어졌다. 칼 라너(Karl Rahner)는 큉이 과연 로마가톨릭교회의 신자인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역사적 사실을 잘 모르는 신자들에게 호소하는 미봉책을 쓰고 있으며, 도발적 자세로 반로마, 반주교, 반교권, 반가톨릭신학을 부르짖어 그리스도교 안에서 유명해지기를 원하는 것 같다고 했다.

큉 사건에 관한 논평들은 거의 예외 없이 교권당국이 매우 유감스런 과오를 지적했다. 큉의 교회론 주장과 논증을 설득력 있게 반박한 신학자는 없다. 큉의 ‘자기 파악,’ 곧 그가 정말 로마가톨릭 신학자인지 아닌지가 중요하며, 격렬한 논쟁 양식(樣式)이 문제라고 지적되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난과 교황 절대주의에 거슬리는 강력한 논법을 함께 묶어 신학적 문제로 과감히 제기하지만, 진리가 역사적인 만큼, 나중에 정정되고 보완된 교회의 선언들을 오류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서두른 주장이라고 했다. 교회의 불행한 과거사를 들추어내는 것이 로마가톨릭 신학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며, 옛 부스럼을 들추어 오류의 증거로 내세우는 사제의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받기도 했다.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중세기 ‘이단자심문소’의 후신이며 ‘종교재판소’라고 불리다가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신학과 교리 문제를 다루고 통제하는 기구이다. 신앙교리성은 큉이 『교회』(1967)를 출간한 이듬해인 1968년 5월에 큉에게 로마로 출두하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큉은 불응했다. 큉은 오히려 로마가톨릭교회의 이른바 ‘성전’과 ‘사도직 계승’을 부정하는 교황 무류성 교리를 본격적으로 비판하는 『무류성?』(Infallible?, 1970)을 출간했다. 이에 신앙교리성은 1973년에 큉을 로마로 소환한다고 통보했고, 큉은 불응했다.

왜 절대복종 서약과 함께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가 교황청의 소환에 응하지 않았을까? 첫째, 경직성 때문에 진정한 대화가 사실상 불가능하며, 그러한 상태의 대화나 토론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둘째, 신앙교리성의 수장이며 중세 ‘망딸리떼’의 상징인 ‘항상 그대로’(semper idem)를 표방하는 복고파 거두 추기경이 종교재판소의 이단 심문석의 칼자루를 쥐고 있었다. 셋째, 교황 무류성 교리의 부당성에 대한 자신의 논증이 명료하며, 교회론 체계의 그릇됨을 지적하는 자신의 논리성에 훈수(訓手)를 둘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다. 넷째, 사고의 패러다임이 다른 사람들과의 토론이나 논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다.

1971년에, 독일주교단은 큉의 저작물이 로마가톨릭교회 신앙과 교계질서의 기본 원칙에 위반된다고 비판했다. 진리 판단의 권위는 신자 다수의 동의에 달려 있지 않고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주교들의 공의회에 주어져 있다고 했다.

교황청은 “교회에 관한 현대 오류를 반박하는 가톨릭 교리 선언”(1973)을 발표하고 교황 무류성 교리를 재천명했다. 큉이 문제 삼는 교회론 명제들을 간추려 반박했다. 갈라진 교회들(정교회, 영국국교회)과 교회 공동체들(개신교회들)의 총합(總合)이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주교들이 단체적으로 그들의 수령인 교황과 함께 어떤 교리를 정의할 때, 로마 교황이 ‘성좌’(聖座)에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전체 교회가 믿고 지킬 것이라고 정의할 때 무류성이 작용한다. 모든 계시 교의, 곧 성경과 성전은 동일하게 신적인 것으로 믿어야 한다. 처음에는 불안전하게 표현되었다가 후대에 더욱 완전하게 표현되는 교의가 있을 수 있다. 신학자들의 학문의 자유는 교회의 가르침에 종속된다고 했다.

로마가 큉에게 제시한 것은 단 하나의 선택 곧 ‘올바른 신앙으로 돌아오라’는 것 뿐이었다. 이에 큉은 “교회-진리 속에 머물었는가?”(1979)와 “어떻게 교황이 무류성을 갖게 되었는가?”(1979)라는 글로, 교황 무류 교리의 성립 불가능성을 재차 논증했다.

큉의 가톨릭 신학교수직 피탈 사건은 약 12년 동안 뜨겁고 절실한 신학 논쟁과 격론을 불러 일으켰다. 로마가톨릭 신학도들은 열띤 토론을 했고, 사제들은 자주 회의를 열었다. 찬반양론과 감정의 돌풍이 휘몰아쳤다. 튀빙겐 시내에서는 항의 횃불행렬이 있었고, 퀼른대교회당 앞에서는 모형 이단자 화형식이 있었다. 교회의 결정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사람, 애석하게 여기고 우울해 하는 사람, 교회에 대해 씁쓸한 환멸을 느끼는 사람, 반가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중에 교황이 된 라칭거가 핵심 역할을 하는 교황청 신앙교리성은 큉의 목소리를 제거하려 했고, 개명한 식자층으로부터 어용신학의 요람이라는 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교회는 신학이라는 학문과 그 일에 전념하는 신학자들이 필요하다. 학자에게는 학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교사’가 다루는 신학은 구속력을 지진 교회의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교회로부터 가르침을 위임을 받은 교수는 교회가 믿고 고백하는 것을 존중할 의무가 있다. 신학자는 교회의 수임(受任)으로 직무를 수행한다. 신학교수에게 책임성-충실성이 결여 되면 신자들의 신앙이 손상을 입는다. 신자들은 교회를 통하여 신앙을 고백하며 왜곡되지 아니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권리를 가지며, 위험한 오류들에서 자기들을 보호해 주기를 기대한다. 이런 마당에서 큉은 ‘교회의 교사’로서의 의무와 학자로서의 자유 사이에서 진리를 위한 자유를 선택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와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가 불가분의 관계임을 보여주었다.

 

6. 역사와 계시의 관계

로마가톨릭교회 교회론의 핵심인 ‘성전’과 그것과 직결된 사도직 계승, 로마 주교—교황의 수위권, 교계제도, 교황 무류 교리 등은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알지 못한 것들이다. 기독교 역사가 상당히 오래 진행된 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 교회 교리들은 모두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것들이다.

중앙집권적, 제국주의적, 관료주의적 로마가톨릭 교회론은 장구한 역사를 거치면서 서서히 얼개 짜였다. 5세기에 서로마제국이 몰락할 때까지도 ‘로마의 주교’는 현재의 교황과 동일한 개념이나 권위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5세기부터 교황들은 위조된 문서들을 가지고 자신들의 권력을 확대시켰다. 첫 천년 동안 어느 누구도 교황의 결정이 오류에서 자유로운 무류성을 가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현대 개념의 최초의 교황은 신학자, 법률가, 설교자, 목회자, 정치가인 레오(Leo I, the Great)였다. ‘로마적’ 가톨릭교회가 형성된 것은 오순절 날로부터 600년의 시간이 경과된 뒤였다. 중세기 교황 인노세트 3세의 통치 아래에서, 교회의 로마화는 그 정점에 이르렀다. 오늘날의 로마가톨릭교회의 제도는 중앙집권화, 법제화, 정치화, 군사화, 교권주의화가 상호 중복되는 과정을 거쳐 중세 후기에 완성되었다. 12세기까지도 로마교회가 법적인 의미의 교도권(magisterium)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베드로와 바울의 무덤이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서서히 로마에 종교적 권위를 부여했다.

로마화 된 가톨릭교회는 이단성이 명확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 순수한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을 처형했다. 신앙과 도덕에 관련된 오류의 결정이었다. 교회는 리용의 부유한 상인 발도(Waldo)를 중심으로 일어난 왈도파 사람들에게 이단파문 법을 적용했다. 성경을 읽으며 회심체험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곳저곳에서 설교하던 사람들을 이단자로 간주한 것은 오류였다. 종교개혁자 얀 후스를 화형에 처하고, 콘스탄스공의회가 성만찬 때 평신도들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하지 말라고 결정한 결정한 것은 오류 등을 생각할 때, 교황, 공의회, 주교단의 무류성 교리가 성립될 수 없다.

큉은 가톨릭교회의 위압적인 통제와 엄숙한 미사 의식 이면에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결여된 종교가 숨어 있었다고 했다. 상급자에게 굽실거리는 성직자들은 불행한 종교계급사회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별세한 교황 포르모수스(Formosus)에 대한 종교재판을 거행하려고 그의 시신을 파헤친 끔찍한 사건을 상기하는 것만으로, 또는 교황 세르기우스 3세(Sergius III)의 정부이며 교황 요한네스 10세(Johannes X)를 살해한 자이며 자기의 사생아를 교황 요한네스 11세(Johanness XI)로 등극하게 한 마르지아(Marzia)의 치마폭에 휩싸인 교황청의 결정들은 과연 교황 무류 교리를 정당화 할 수 있는가?

로마가톨릭 교황은 2000년 3월 1일에 교회가 과거에 저지른 흉악한 잘못과 잔인한 행위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기억과 화해: 교회의 과거의 과오들”(Memory and Reconciliation: The Church and the faults of the Past)라는 장문의 참회고백문과 더불어 동서방교회의 분열, 십자군운동, 종교재판, 이단사냥, 마녀화형, 유태인 학살에 침묵하여 도덕적으로 실패한 잘못 등 교회와 교황의 오류들을 참회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고백성사’를 받기만 했다. 그러나 제3 천년기를 시작하면서 ‘그리스도’와 ‘베드로’가 세상을 향해 용서를 빌었다. 교황 무류성 교리와 상반되는 행동이었다.

큉은 자신의 지적 패러다임이 로마가톨릭교회의 패러다임, 곧 중세기적 사고방식과 크게 다르다고 말했다. 추기경 라칭거(현 교황 베네틱트 16세)와 함께 같은 교회에 속해 있지만 서로는 매우 다른 총체적 사고구조를 가지고 있고, 정신적으로 다른 세계, 다른 시간, 다른 사고구조, 다른 패러다임 안에 살고 있다고 했다. 큉은 자신이 하인리히 덴칭거(Heinrich Denzinger)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를 놀랄 만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기독교 원전(原典)에서 손쉽게 검증하지 못할 그 어떤 교의나 그 어떤 해석도 존재하지 않는다. 학문 기량을 배양하려고 7년 동안 교황청 소속 엘리트 학교에서 라틴어로 공부를 했다. 교황청이 운영하는 그레고리안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로마에서 오직 분명한 개념, 정의, 논증만이 요구되는 주제에 대해 함부로 조잘거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큉은 자신이 건강에 장애를 받을 정도로 피곤한 신학논쟁을 거듭한 것은 로마가톨릭 신학 체계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었고, 신스콜라주의 체계가 더 이상 지지받을 수 없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1차 바티칸공의회를 주도한 교황 피오 12세와 그러한 부류의 교황이 거의 매일 공표하는 신앙과 교리에 관한 것들에 과연 오류가 없는가? 교황의 말을 공적으로 반박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은 상황에서 교회의 ‘권위’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 것은 모든 것을 각오했기 때문이다. 큉은 교황의 이름으로 공표된 여성 성직임명 불허와 관련하여 교황과 주교들의 일상적 직무(magisterium ordinarium)와 교황의 공식 발언이나 공의회 결정의 특별한 직무(magisterium extraordinarium)가 교황 무류성 교리의 성립 불가능성을 반증한다고 말한다.

큉은 로마가톨릭신학과 종교개혁신학을 배워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다. 자기 신학의 중심(中心)은 바꾸지 않으나 지평(地平)은 항상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신교회 목사처럼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 든 학자이고 싶어 했다.

큉이 로마가톨릭 교회론에 문제제기를 한 것은 개신교를 편들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로마가톨릭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개신교를 끌어 들일 에큐메니칼 모델을 만들고자 했다. 스위스 개혁교회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교의학의 거대한 건축미에 감탄하면서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인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를 심리학과 종교사(宗敎史)로 해소할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준 신학자가 우리 시대에 왔다는 사실이 나를 지탱해 주는 매우 든든한 밑받침이었다”고 말한다. 죄인이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은 행위나 신학 행위 때문이 아니라 신앙 때문이며, 흔들림 없는 신뢰 때문이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큉이 제2의 요한네스 될링거(Johannes Dollinger, 1799-1890)가 될 것이라고 걱정했으나 사제직은 박탈당하지 않았다.

큉의 문제제기는 반골 기질을 가진 한 지식인의 단순 반항이 아니었다. 결코 그냥 넘길 수 없는 중대한 문제를 깔고 있다. 교황 무류 교리와 종래의 교회론의 옳고 그름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이해하는 계시와 ‘성전’의 관계에 대한 것으로, 교회의 교의(敎義) 규정은 제도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교리에 대한 것도 예외 없이 무릇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다는 사실이다. 성경적 근거가 없고 역사적으로도 입증될 수 없는 공의회와 교황의 신앙과 교리에 대한 선언과 판정은 교황 무류 교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WCC는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 연구 방법을 적극 지지해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방법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회론 연구와 몬트리올보고서의 전통론에 피할 수 없는 과제를 안겨주었다. 현대신학의 갈등과 불행은 역사-비평 연구 방법에 근거한 성경 주석의 결과와 전수된 교리 간의 균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이 균열을 극복하지 못하면서도 성전, 사도직 계승, 교황 수위권, 교계질서, 교황 무류 교리, 그리고 연옥설, 화체설, 희생제사론, 마리아론을 붙잡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 사이에는 가로놓인 루비콘 강은 다름 아닌 ‘성경과 전통’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계시 그 자체에서 나온 것이 ‘성경과 전통’ 둘인가 아니면 ‘오직 성경’인가 하는 것이다. 로마는 성전을 성경과 더불어 하나님의 계시의 연장으로 본다. 그러나 불트만학파가 비신화화라는 이름으로 제기한 비평학의 물음은 로마가톨릭교회가 계시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성경과 전통’에 대한 교의를 시험대 위에 올려놓았다. 전통을 계시의 연장으로 보는 정교회에도 똑같은 부담을 던져주었다. 복음주의 개신교회는 성경이 완성된 후에 등장한 제도와 전통이 계시성을 가진 신앙규범이라고 믿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조건화된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회관은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개신교는 규정된 규범이 아닌 규정하는 규범(norma normans non normata), 곧 성경만이 복음 계시의 영역이라고 고백한다.

로마가톨릭 신학자 플라테는 큉 사건에 대한 글에서 ‘성전’ 교리와 교황 무류성 교리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스콜라주의 풍의 교의실증주의이건 해석학적인 것이건 이제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 인간의 현대적 자아해석의 주관성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체 이해에 하나의 근본적으로 새로운 상황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런 여건 하에 언어적 전승이란 무의미하다. 계시의 본질적 내용이란 서양 형이상학의 언어를 빌린 고정된 신앙공식을 통해서 건져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퀑이 보는 바로는 그 돌파구가 하나 밖에 없다. 곧 더 이상의 교의표현의 묵은 정형(定型)에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신학적 발언의 본질적 내용은 무오한 표현양식 저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큉의 노력과 플라테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로마가톨릭교회는 계시와 전통 그리고 교회관에 대한 교리를 바꾸지 않았다.

큉은 교회가 타협이나 망설임 없이 기독교 본래의 메시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바로 대면해야 한다고 했다. 교회의 제도, 교리, 판결, 의식, 전례 등을 본래의 기독교 복음과 일치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황청의 법률주의, 성직자주의, 패권주의는 근대적 의상으로 새롭게 단장하고서 공의회의 ‘아죠르나멘토’ 정신에 복수의 칼을 들이대면서 되돌아왔다. 큉이 신학교수직을 상실하자, 그와 함께 복고파를 성토하던 신학자들은 비정하게도 등을 돌렸다.

 

7. 큉과 라칭거

 

큉과 라칭거는 1966년부터 3년 동안 튀빙겐대학교의 가톨릭 신학부에서 교의학을 가르치는 동료 교수였다. 비슷한 시기에 신학을 공부했고,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사제가 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교황청의 권위주의를 비판했다. 라칭거는 큉이 여러 신학자들과 더불어 교황 무류성 논쟁의 비판적 공헌을 표방한 “신학의 자유를 위하여”라는 선언서에 서명을 하기도 했다.

라칭거는 큉이 교회론의 문제제기를 할 때 태도를 바꾸어 교황청의 실세 편에 가담했다.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재직하면서는 복고파를 주도했다. 1968년에 미국 콜럼비아대학교에서 시작된 학생운동과 마르크스주의 좌파신학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신(神)의 ‘로트와일러’(독일산 명견)라 불릴 정도로 가톨릭 전통주의 정신에 충실한 인물로 변신했다. 사회주의 신학의 폐해를 목격한 뒤부터는 더욱 태도를 확고하게 바꾸었다. 라칭거는 WCC의 세계교회들의 ‘보편공의회’를 추구에 대해 “그리스도교의 통일이라는 개념은 ‘베드로 원칙’이 없이는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꿈일 뿐이다”고 말했다. WCC가 마르크스주의 혁명을 지원했다고 비난했다. “WCC가 정부 전복운동을 강력히 지원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개탄”하기도 했다.

라칭거는 1981년에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직을 맡으면서 과거에 교황청을 공격한 자신의 저서를 수정하여 출간했다. 큉의 가톨릭신학 강연을 전면 금지시켰다. 2002년에 추기경단의 수석 추기경이 되었고, 2005년에 교황좌에 등극했다. 2007년에는 로마가톨릭 교회론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 상태로 되돌려버렸다. 상당수의 로마가톨릭교회 신자들은 라칭거가 교회개혁을 방해하고, 교회론 문제를 해결하는 지평을 가로막으며, 교회의 현대화와 대중화를 가로막는 시대착오적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라칭거는 교회의 정치권력과 실세에 순응한 덕분에 제265대 교황이 되었다. 온 몸을 던져 진리를 말하고 교회를 성경과 초기기독교 공동체의 가르침에 부합하게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외친 큉의 신학교수직을 박탈하고, 학문적 주장들을 배척했다. 큉의 학문적 탁월성은 신학교수직 박탈이라는 화살로 바뀌어 되돌아 왔다. 학자다운 용맹성과 결기와 희생은 자기 시대에 충실한 교회의 교사, 절조 있는 분석가, 양심을 가진 신학자, 미래지향적이며 자기반성적인 학자라는 높은 평판을 이끌어냈다. 진리를 위해 삶의 모든 것을 내던진 큉과 교회권력과 실세에 순응한 라칭거의 삶은 매우 대조적이다.

큉의 학문과 견해에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그에게 교회를 떠나라고 했다. 한 편에서는 로마가톨릭교회라는 울타리 밖에서 학문작업을 더 잘 수행할 수 있으며 구태여 딱딱한 교계제도 안에 머무는 것은 시간과 정력 낭비라고 했다. 다른 한 편에서는 교회를 비판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제는 교회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큉은 (1) 사람이 자기 가정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처럼, 태어난 신앙공동체를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교회를 비판하면서도 머물러 있는 것은 그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2) 민주주의가 잘못되고 남용되어도 그 제도에 등을 돌릴 수 없듯이, 교회의 잘못과 제도와 법을 비판하지만 그 교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3) 교회와 교회 관리자는 구분된다. “우리가 교회이다.” 구성원으로서 교회의 잘못과 그 역사를 비판하는 것으로 충성하고 싶다. (4) 교회를 떠나는 것은 나약함과 실패와 무조건적인 항복 행위이다. 교회의 쇄신과 개혁에 동참한 사람들을 실망시키거나 아픔을 주고 싶지 않으며, 또 쇄신과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싶지도 않다. (5) 분열은 개인의 고립이나 새로운 제도화에 이바지할 뿐이다. 유토피아적인 교회를 꿈꾸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류투성이 교회에서 아직도 성경적인 메시지들이 들려온다. (6) 로마가톨릭제도가 무자비하다는 것을 직접 경험했지만, 그 교회와 그 신앙 공동체는 오늘날까지도 ‘영적인 고향’이기에 떠나지 않는다.

나관중의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유비 장군이 여포에게 쫓기다가 조조에게 찾아가는 길에 유비를 존경하는 유안(劉安)이라는 사람의 집에 들렀다. 유안은 전란과 기근이 겹친 탓으로 대접할 것이 없었다. 음식거리를 장만하기 위해 들판을 헤매다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와 젊은 아내를 죽여 허벅지와 엉덩이 살을 도려냈다. 그것을 삶아 유비에게 먹으라고 올렸다. 유비는 뒷날 아침에 시신을 보고서야 자신이 배불리 먹은 것이 인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의 갸륵한 정성에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현실주의 사상가 마키아벨리(N. Machiavelli 1469-1527)는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거리가 멀다고 했다. 탁월성을 발휘하려면 동료들의 살인적인 시기와 질투의 화살을 막아낼 방패를 먼저 마련하라고 했다. 무슨 일이든지 옳음을 추구하고, 선(善)을 행하는 것밖에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가면을 쓴 나쁜 인간들 속에서 파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의(大義)를 위해 자기와 가족을 희생하고 정의를 외치다가 수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없지 않다.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아내나 자식들을 죽음보다 더 고통스런 처지에 빠뜨리는 사람도 있다. 자유 평등 진리 또는 민주화 정의 진실이라는 대의에 몸 바친 사람들과 그들의 처자가 겪어야 할 고통은 순간적인 죽음 뒤에 그 시체의 허벅지살 몇 근이 도려내진 유안의 아내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는다.

큉은 사제이기에 책임져야 할 식솔이 없다. 튀빙겐대학교의 에큐메니즘 연구소 책임자로 재직했고, 교양과정 과목을 개설하면서 신학연구에 전념했다. 로마가톨릭 신학생들이 그의 강을 수강하고서도 학점을 인정받지 못했다. 튀빙겐이 그에게 은퇴할 때까지 육신적 정신적 안식처를 제공한 것은 큰 위안이었다. 큉은 신학교수 사역 20년 후 가톨릭교회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변두리 직인 연구소 소장으로, 교양학부에서 강의를 개설하는 것으로 씁쓸한 30년여 년의 세월을 보냈으면서도, “살아가는 것과 신학 하는 것은 언제나 내게 즐거움을 줍니다. 그리고 오래 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라고 말한다.

 

맺음말: 성공 가능한 교회일치의 길이 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지구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절대군주제 조직체이다. 수많은 군주제도들이 막을 내렸지만 로마의 교황제는 지속되고 있다. 큉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강한 조직에 대항하여 장기간 외롭고도 힘든 싸움을 했다. 큉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역린(逆鱗)을 건드렸다. 그 위험한 작업은, 실상 하나님이 그 시대의 신학자에게 부여한 중요한 과제였다. 큉은 자기의 시대의 교회가 요구하는 과업을 충실하게, 용감하게 감당했다.

큉이 로마가톨릭교회의 이른바 성전과 그것에 직결되어 있는 사도직 계승, 로마주교—교황의 수위권, 교계제도, 교황과 교회의 무류 교리가 역사적으로나 성경적으로 그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힌 것은 결과적으로 WCC의 가시적 교회일치운동의 허구성을 밝힌 것이고, ‘전통론’을 반박한 것이 되었다. 로마가톨릭교회 교회관에 대한 큉의 문제제기는 WCC 전통론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기도 했다. WCC가 추구해 온 형태의 가시적 교회일치운동, 진리성이 결여되어 있는 단일화의 꿈은 처음부터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말한 것이기도 하다.

큉의 관점에 따르면, 성공 가능한 교회일치의 길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버려야 할 것은 과감히 버리고, 초기 기독교공동체가 가졌던 복음 메시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대면하는 형태의 교회개혁이다. WCC가 추구하는 방식으로는 가시적 교회일치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제군주제도 형태의 관료기구를 세우지 않았다. 교회의 지도자가 전제국가의 독재체제와 같은 권위를 가졌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스도가 화려하게 치장한 교황의 모습으로 바티칸에서 설교를 하거나 미사를 집전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바티칸에 나타나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옹호하고, 그 위계 구조 안에서 주교와 대주교와 교황이 집전하는 예배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WCC가 진리는 외면하고 의견수렴에만 열성을 다하는 방법으로 일치를 도모하는 것은 실패를 전제로 하는 수고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은 제도나 전통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자기희생을 무릅쓰고 빈 마음으로 성경과 초기기독교 공동체가 고백한 복음신앙으로 돌아가는 교회를 원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며 봉사하는 하나의 교회—신앙고백공동체를 세웠다. 반석과 같은 베드로의 믿음과 신앙고백은 교회의 변하지 않는 사도적 기초이다. 기독교 신앙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가운데 하나는 위계(hierarchy)이다. 위계조직 형태의 전통과 제도는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다. 사도직은 신앙고백공동체 전체가 계승했다. 사도직 계승과 전통에 근거하여 사제의 머리 위에 안수를 하는 전승의 고리를 역사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리는 의견수렴이나 포용주의로 규명되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 계시의 유일한 원천인 성경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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