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가운데서 확인되는 보편적 교회의 특성
고린도후서 1장 1-6절
송영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시작하는 말
에베소에서 있었던 성공적인 복음 전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심한 비탄에 잠겨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울이 심혈을 기울였던 고린도 교회와 에베소 교회가 바울에게는 심각한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고린도에서는 고린도 교회를 세운 바울을 비판하고 거절하는 일들이 발생했다. 에베소에서는 바울의 사역을 반대하는 범 도시적인 폭동이 일어났다. 바울은 이 일로 살 소망이 끊어질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고후 1:8). 동시에 고린도 교회에 대한 근심으로 인하여 마음의 평안을 잃을 정도였다(고후 7:5).
결국 바울은 AD 55년 초에 에베소를 떠나 드로아로 갔다. 드로아에서는 여러 가지로 상황이 좋아서 성공적으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지만 여전히 바울의 마음은 편지 않았다. 얼마 전 디도 편으로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 즉 '준엄한 편지'에 대한 결과 때문이었다. 때문에 바울은 드로아에서 여유롭게 디도를 기다릴 마음이 아니었다. 바울은 초조한 마음으로 디도를 만나기 위해 마게도냐로 가서야 디도를 만날 수 있었다.
디도가 가져 온 소식은 고린도 교회에 대한 바울의 근심을 해소해 주었다. 디도는 바울이 보낸 '준엄한 편지'에 대하여 고린도의 교인들이 순전한 마음을 받아들이고 대다수 성도들이 바울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울은 마음 속에 담겨 있던 불안한 짐을 덜게 되었다(Chrales Hodge).
바울은 기쁜 마음으로 고린도 교회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이 편지가 일명 '화해의 편지'(고후 1-9장)이다. 하지만 이 편지를 보내기도 전에 또 다른 소식이 바울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온 방문자들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중상모략을 하면서 고린도 성도들을 미혹하여 다시 바울에 대해 반기를 들게 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로 인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 봉사는 사도권의 진정성(고후 10-13장)을 다시 첨부해야 했다. 1-9장과 10-13장 사이에서 어조와 말투가 급격하게 변화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순종 잘 하고 사랑이 많으며 잘못을 뉘우치는 교회로 대할 때는 그의 어투가 한없이 부드럽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에서 바울이 바라는 것은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시적인 불화를 해소하고 바울의 마음이 전적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함이었다. 반면에 진리를 왜곡하는 대적자들을 향해서는 엄중하게 다루고 있다.
고린도후서 1장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근심으로 방문한 이후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를 밝히고, 바울이 왜 고린도에 바로 가지 않고 '준엄한 편지'를 쓰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기로 한 약속(고전 16:5-6)을 이행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몇몇 사람들이 바울을 비방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1. 고난으로부터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
1) 사도 바울의 위치
바울은 고린도전서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관습을 따라 편지 첫 부분에 자신의 이름과 호칭을 쓰고 있다. 일반적으로 당시 서신의 형식은 인사말에 이어 수신인의 선의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감사 그리고 본론에 이어 인사와 축복으로 서신을 맺고 있다. 바울은 이러한 서신의 형식에 따라 자신을 그리스도의 한 사도로 소개하며 '하나님의 뜻'으로 이 영예를 차지했음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고린도후서는 고린도전서와 다른 상황이었다. 그것은 고린도 교인의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은 고린도를 방문한 유명한 사도들 중 하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아볼로와 게바는 어떤 이들에게는 바울보다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결과 교회 내에는 그들의 분파를 만들 정도였다(행 18:24-19:1; 고전 1:12; 3:5; 9:5; 16:12).
최근에는 그들의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예루살렘에서 한 무리의 방문자들이 도착했고 그들은 바울의 복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도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고후 2:17-3:1; 10:12; 11:4-5, 12-14, 20-23). 이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사도권이 있다고 주장하며(고후 11:13) 바울보다 우월한 은사들을 가지고 있다고 과시했다(고후 11:5-6; 12:11-12). 이로 인하여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는 바울이 자기들과 특별한 관계를 주장하는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Paul Barnett).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유명한 사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도 자신을 음해하고 반대하는 자들과 무엇인가 다르다는 점을 부각시켜야 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고전 1:1)이라고 소개한 것과 마찬가지로 고린도후서에서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고후 1:1)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사도로서 가지는 권위의 원천이 그리스도이며 자신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라는 점을 강하게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바울이 가지고 있는 사도직의 근거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졌으며 특별히 다른 사도들과 달리 이방인을 복음화하라고 위임하셨다(행 9:15; 22:21; 26:17). 이 사실에 대해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사실을 뒷받침함에 있어 거짓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비적이고 기적적인 요소들을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희생에 근거한 자신의 삶과 사역에 깊이 새겨져 있는 죽음과 부활의 흔적을 통해 증거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인사말에 이어 자신이 받은 고난과 환난을 나열하고(고후 1:8-9) 고린도 교회 성도들 역시 그 환난에 함께 참여한 증인들이며 그 고난으로부터 함께 그리스도의 위로를 받았음을 제시하고 있다(고후 1:5, 10).
2) 고난에 함께 참여하는 교회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어떤 종류의 환난을 함께 겪었는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서로 다른 상황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겪는 환난의 원인으로 그들이 고백하는 신앙의 대상이 동일하다는 점에 있다. 이 사실을 증거할 수 있는 증인으로 바울은 '형제 소스데네'(고전 1:1)를 내세울 수 있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소스데네는 유대교 회당장이었다. 그는 유대인들 편에 서서 소요를 일으켜가면서 아가야 총독으로 부임했던 갈리오(Lucius Junius Gallio, AD 51-53년)에게 바울을 고발했던 장본인 중 하나였다. 그 일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 틈만 나면 핍박을 하고 있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역시 유대인들의 핍박 아래 놓여 있었다(F. F. Bruce).
좀더 최근에는 이방인 우상 숭배자들로 인하여 박해가 더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바울이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들을 가리켜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8:2)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당시 하나님의 교회들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로부터 임하는 박해 아래 노출되어 있었다.
따라서 의례적으로 보일 수 있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후 1:1-2)는 바울의 축복은 결코 예사롭게 넘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어서 바울이 그 축복의 근원으로 모든 고난으로부터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을 높이 들어 찬양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후 1:3-4).
여기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과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은 과거 하나님 앞에 총회로 모인 이스라엘 백성을 연상케 한다(삿 20:2; 대상 23:8). 바울에게 있어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하나님의 얼굴 앞(coram Deo) 에 나아온 하나님의 백성임을 의미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 믿음으로 헌신함으로써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특별한 존재로 여기시는 거룩한 존재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의 깊은 곳에서 성령님의 역동적인 임재를 통해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심으로써 적극적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만드신다(롬 12:12; 고후 3:18)(Paul Barnett).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라고 찬송하고 있다.
3)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위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들과 성도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대상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그들의 마음 속에 참된 평화가 있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도들의 아버지이시며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주가 되시기 때문이다(Chrales Hodge).
하나님은 만물의 아버지이시며 그의 영으로 거듭난 성도들을 자녀로 삼으셨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대상이 되며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이다. 그리고 성도들과 같이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성도들의 절대적 주권자이시며 구세주로서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고귀한 피를 흘려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구속함을 받은 백성과 맺은 관계를 통해 교회들과 성도들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아울러 교회들과 성도들은 그들의 아버지이시며 주님이시며 그들 안에 임재하심으로써 거룩한 백성으로 장성케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성도들이 성삼위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위로해 주시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모든 고난과 고통을 인내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위로와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난과 환난을 극복하는 그 덕목(德目)은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돌려야 한다(J. Calvin).
4) '약함과 강함'의 역설(paradox)적 관계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고후 1:5)는 말에서 바울은 성도들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부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난은 저주의 상징으로 인식된다. 사실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과 비참함은 하나님의 진노와 범죄한 아담의 운명에 동참하는 것이며 영혼을 낙심케 한다.
그러나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며 자신들의 몸 속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흔적을 지님으로써 그리스도의 생명이 앞으로 그들 속에서 드러나게 하는 씨앗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고 말하고 있다.
같은 의미에서 바울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고 말한다. 여기에서 고난은 당연히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다. 그렇지 않은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J. Calvin).
이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에 성도들도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와 같이 되기 위해 그 고난에 함께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 20:22)고 하시면서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신 바 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마지막 유월절 잔치를 행하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 22:19)라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은 단순히 성만찬을 행하는 것으로 기념하는 것에 그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말씀하신 것처럼 십자가를 통한 자기 희생에 성도들이 친히 참여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0-12)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반면에 그리스도와 분리될 때는 고난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지 못하며 위로받을 수 있는 유일한 원천으로부터 끊어질 뿐이다. 하나님은 자비와 위로의 원천이시며 그리스도는 이러한 것들이 성도들에게 오는 통로가 되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경험하는 '약함과 강함'이라는 역설적 관계를 주장하고 있다. 모든 신자들은 바울 및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되신 그리스도를 섬기기 때문에 환난에서 오는 연약함을 경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은 신자들이 그것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의 자비와 위로 가운데서 충만하게 임한다. 때로는 자신의 연약함을 크게 느낀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그보다 더 크게 임하기 마련이다(Paul Barnett).
2. 고난의 의미에 대한 바울의 이해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약함과 강함'의 역설적 관계는 바울로 하여금 기꺼운 마음으로 교회를 위한 고난에 참여하게 만들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는 바울의 환희에 가까운 선언도 같은 의미이다.
1)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고난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골 1:25)는 말과 같이 바울은 오로지 복음 전파를 통해 교회를 세워나가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 교회의 일꾼으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 이렇게 바울이 환난과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함이라는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6)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맺어져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는 환난과 고난에 참여하는 그 일 자체가 곧바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하는 일로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당하는 환난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위로와 격려로 고통 가운데 짓눌려 죽을 것 같은 바울의 마음을 새롭게 소생시키심으로써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힘과 용기를 얻고 있으며 그의 모법으로부터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고난들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환난을 감수해야 하는 성도들을 위로하는 위치에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것은 일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이 당하는 고난을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고난을 무용지물로 만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환난과 위로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함께 동참해 주리라는 소망도 잃지 않았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는 바울의 말과 같이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고 그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성도들을 결코 잊지 않고 위로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위로는 곧 교회의 성도들이 받는 위로와 직결된다.
여기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과 같이 고난에 참여한다면 그들도 바울과 같은 위로를 받게 될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지금 그들이 겪고 있는 고난을 마침내 이기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심어주고 있다.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6절)는 바울의 위로는 곧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위로에 근거해 있다.
2) '이미-아직'의 긴장 속에 있는 고난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 1:7)는 바울의 확신은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에 맺어진 연합을 재확인하고 있다. 앞서 고린도전서에서도 바울이 누차 강조했듯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유기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하나의 지체임을 보임으로써 함께 고난을 극복하고, 함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가야 한다는 교회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자신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얼마나 극심하였던가를 말하고 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바울이 당했던 환난은 일차적으로 사도행전 19장 23-41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하지만 누가는 바울이 당했던 환난에 대해 다 기록해 놓지 않고 있다. 누가는 에베소에서 데메트리우스가 소동을 야기시킴으로써 결국 바울이 에베소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점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바울은 에베소에서 야수들과 싸우도록 던져지기도 했었다는 사실을 말한 바 있다(고전 15:32).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기도 하였다(행 20:3). 바울은 동족들의 위험과 이방인들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고후 11:26). 이것은 마치 사형 선고가 내려졌지만 아직 집행되지 않은 것과 같은 위기감을 바울에게 가져다 주었다. 바울은 언제든지 동족들이나 이방인들에 의해 생명을 빼앗길 수 있는 상황에 놓여져 있었다.
이러한 환난들에서 바울은 생명의 위험에 처해져 있었으며 죽음의 목전에 섰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바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구출을 받았다. 이러한 위기 의식은 바울로 하여금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도록 만들었다. 죽음에 대한 위기 의식이 강해질수록 하나님에 대한 새롭고 깊은 신뢰를 가지게 만들었다(Paul Barnett).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신뢰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9절)의 능력에 근거한다. 바울이 의지하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며 지금도 계속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주 예수를 다시 살리셨으며'(과거) 성도들을 다시 살리실 뿐만 아니라(미래) 또한 계속해서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으로(현재) 언제든지 그의 백성을 절박한 환경에서 구원해 내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바울의 사상은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에 그 신학적 기초를 두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권능있는 부활(과거)과 그의 백성에게 약속된 부활(미래) 속에서 지금 여기에서의 고난과 고통(현재)을 정면으로 맞서나갈 비밀을 발견하고 있다. 바울은 아브라함을 가리켜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미-아직'의 긴장 관계 안에 있는 지금의 상황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기꺼이 죽음을 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도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도 죽음으로부터 건져내시는 분이심을 선언하고 있다. 이 사상은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 16:10)고 찬양하고 있는 시편 기자에게서도 발견된다(Nicholas T. Wright).
3) 고난 가운데 확인되는 교회의 보편성
바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현재의 죽음으로부터 건져냄을 받기를 원하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다. 바울은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모두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19-20).
오히려 바울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 큰 영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환난과 고난이 지속되는 현 세상에서 기꺼이 바울이 죽음보다는 살아있는 것에 소망을 두는 것은 전적으로 교회의 유익을 위함이었다.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빌 1:23-26).
바울은 도처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지금까지 생명을 보존받았고 앞으로도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서 지키실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영광과 그 목적을 위하여 부르시어 사용하신다면 그 목적이 모두 달성될 때까지 그 생명을 지키실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바울은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을 자신의 구원자로 바라보고 그 날에 모든 위험한 인생의 여정에서 자신의 위대한 보호자였음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Albert Barnes).
마치는 말
이상의 논증을 통해 바울은 자신이 당한 환난에 대해 고린도 교인들이 앎으로써 한 몸이 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도 기꺼이 환난을 극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견고하게 세워나가기를 소망하고 있다(10절). 아울러 바울은 이 모든 영광과 기쁨을 고린도 교회가 누리고 있는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들도 함께 누려야 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고린도 교회도 바울과 같이 이 일에 함께 참여해야 한다.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회가 기도로써 함께 참여할 것을 권하고 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1:11).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중보 협력이 사도 바울뿐 아니라 다른 교회들과의 관계에서 더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환난과 위험 속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함으로써 자기 백성을 하나로 연합시키는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함께 구원을 이루어 가는 일에 동역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돕는 데 있어서 한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하신 만큼 바울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릴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J. Calvin). 이러한 결과는 한 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지는 교회의 보편성을 보다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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