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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은혜와 바른 신학

김병훈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3. 12. 5.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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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은혜와 바른 신학

 

< 김병훈 목사, 화평교회, 합신 조직신학 교수 >

(요약 /문민규,  김성한 목사)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6:12-14)

 

교회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은 누구나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과거와 같지 않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성장은 멈춘 것 같습니다. 교회의 수는 날로 감소하고 있습니다. 그 여파로 목회자들이 어렵고 지금까지의 관행이 바뀌어야 한다는 요구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그대로 있을 것인가, 아니면 바뀔 것인가, 진리를 전하는 목회자에게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은 커다란 숙제와 도전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합니까? 그 말은 복음의 진리를 바꾸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은 곧 세상이 교회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그것이 너무 가슴이 아프고 괴롭고 눈물이 난다. 교회가 윤리성을 잃어버렸다는 비판의 목소리입니다.

 

세상이 교회에 윤리적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윤리성을 믿지 못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사례들을 가지고 교회를 공격하는데,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안타깝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윤리 문제로 비판을 받는 것은 단순히 윤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곧 경건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누가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겠습니까.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도전적 질문 앞에서 맞다라고 말하는 것과, 교인들이 그처럼 비윤리적으로 살아도 되겠는가라고 물을 때 안 된다고 말하는 것과 형식적으로 같아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경건의 엎드림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가 윤리적 문제를 비판 받는 것은 놓친 경건, 잃어버린 경건, 신앙의 양태와 본질, 믿음의 이해, 종교생활의 각성 등 이 모든 것의 초점이 경건인데 그 경건이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경건의 회복, 그것을 찾지 않으면 기독교는 일반 종교일 뿐입니다. 제종교의 길을 가는 하나의 종교 집단일 뿐입니다. 이것은 경건이 윤리를 뛰어 넘는 문제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1. 경건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경건을 잃어버린 것을 가리켜 우리가 신앙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교회가 잘못 가르쳤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이신칭의자체의 문제인가요? 곧 신학 자체의 문제인가요? 혹 우리가 개혁신학을 잘못 적용하고 잘못 가르쳤나요?

 

본문을 보면, 경건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 윤리적 문제는 마땅히 드러난다는 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해야 할 목적은 무엇인가요?

 

경건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죄인들의 두려움이고 경외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경건은 그 내용을 체험하는 것이며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각성입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우리들에게 일어날까요? 경건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6:12-14)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6:3-4).

 

2. 경건의 토대는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

 

경건은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룰까요? 세상은 지금 우리에게 윤리가 없다고 말하는데, 우리에게는 경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믿음으로 주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에 대한 고백, 우리에게 다른 의지할 것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고백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어떻게 알까요? 내가 연합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요? 성령님께서 우리와 연합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고백하게 하심으로써 구원에 참여하게 하시고 교회의 회원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교회는 불신자, 외식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교회는 모두 성직자요, 선택자요, 모두 신실한 자요, 믿는 자요, 구원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교회 회원은 오직 택자들뿐입니다.

 

성령을 주셔서 믿음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사람, 그가 바로 교회 회원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해서 성령으로 열매는 맺는 것입니다. 믿음을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고, 고백하게 하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경건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그 시작과 열매도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심어 주시고, 연합에 이르는 몇 가지 정해진 방식이 있습니다. 곧 은혜의 방편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과 성례입니다. 말씀을 방편으로 성령께서 일하십니다. 말씀과 관계없이 성령께서 일하신다는 것은 개혁주의에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말씀은 의식적 자백이고, 이성적 사고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눈을 뜨게 하셔야 말씀을 들으므로 말씀 이전에도 역사하시지만 말씀을 듣는 심령을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시고 믿음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학의 시작이고 뿌리입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성령님

 

우리의 경건의 문제는 믿음을 고백하게 하시고 그것으로 성령께서 일을 다 하셨다고 잘못 생각한 것에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죄를 깨달아 회개하는 자에게 깊은 각성과 소망을 하나님 나라에 두게 하십니다. 믿음의 고백이 회심과 선한 성령님의 영향력이 없으면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믿음을 주시는 것과 거룩하게 살게 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신학적으로 구별할 뿐, 성령의 관점에서는 한 가지 일입니다. 믿음을 고백하는 자에게 경건한 마음이 없다면, 애초부터 성령께서 사역이 없는 것입니다.

 

루터는 칭의와 성화를 인과관계로 보았습니다. 칼빈은 성령님을 하나님의 두 가지 은총으로 보았습니다. 곧 애초부터 믿음을 주신 성령께서 거룩의 열매를 맺는 목적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학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때문에 복음을 행위로 변질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곧 교양과 절제 훈련을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영생도, 구원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인간의 노력을 무력케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살도록 주장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한 가지 사역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에게 거룩이 나타나지 않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보통 어떻게 해야 하는가, 뭘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세상이 하는 말은 한 가지입니다. 교회가 경건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자들을 보면서, 교회를 보면서 경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말하는데, 왜 그런지 설명해 봐라. 증인된 증거의 삶을 좀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발 윤리적으로 좀 살아라. 교회를 보고 신자들을 보면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경건의 모양과 믿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충고를 합니다.

 

4. 교회는 신자들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

 

잘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는 신자들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입니다. 그 말 속에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곧 교회는 영혼을 낳고, 기르는 양육에 온갖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인내와 눈물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신자들을 먹이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먹이는 것은 말씀의 젖을 먹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신앙의 지식이 오히려 사람들을 교만하게 만든다고 하는데, 그러나 사랑, 기도, 지식, 인내가 있다면 왜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의 문제를 타개하는 요소입니다.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적용과 실천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오늘의 합신을 생각해 보십시다. “내가 합신에 진학했을 때 너무 좋았다. 이 교단과 학교에, 그리고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이구동성으로 정암을 이야기하고 경건을 이야기 했습니다. 교세를 자랑하지도 않았고, 강단에 서는 모든 사람들은 경건을 말했었습니다.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생활을 항상 강조했었습니다.

 

바른신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학입니다. 그것은 개혁신학입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신학입니다. 곧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며 이것이 겸손을 낳습니다. 이처럼 경건은 겸손이었습니다.

 

바른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 교회가 바른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외에는 교회가 서 있을 토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간적으로는 개인적 구원이 먼저이지만 사실 신학적으로는 교회가 먼저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바른 교회를 세우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바른생활은 성령에 충만한 생활입니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다 아는 말입니다. “합신은 신학교에서는 개혁신학을 너무 잘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런 합신이 뭐가 다르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에는 신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굉장한 자부심과 소망이 있었습니다. 합동측 교단이 너무 부패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학이 같은데 분리한 것을 계속 유지하려고 했던 것은 제한적, 한시적 허용이었습니다. 본래는 하나였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교단 분립이 한시적,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면 그것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교단이 계속되어야 하는 한 가지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합신은 그 정신이 안보입니다. 정암은 잊혀지고 있습니다. 정암의 경건을 함께 나누려는 의지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정암을 생각하고 목회하는 목회자들도 별로 많지 않습니다. 우리의 그 목표가 사라진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우리도 한국교회의 문제를 똑같이 가지고 있습니까?

 

마치는 말

 

첫째, 우리가 신학을 잘못 적용한 것이 아닐까요?

 

바른신학과 바른생활은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다른 교단을 지적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이를 비판하면 우리 영혼이 병들게 됩니다. 정죄는 영혼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배운 것은 용서, 관용, 인내입니다.

 

바른신학은 우리를 향하는 것입니다. 남이 틀리고 자기가 옳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합신은 너무 좋아서 남을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잣대로 나를 보니까 죽겠더라는 것입니다. 더 큰 허물이 드러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바른 신학은 나를 향하는 것입니다. 적용은 자기에게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세기도 안 되어서 이미 힘을 잃어버리고, “그때와 뭐가 다르냐?”고 하면서 우리끼리도 정죄하고 있습니다.

 

합신 이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때 우리는 형편없는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교회에서도 성도들을 낳고 계십니다. 우리는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겸손이 필요합니다.

 

둘째, ‘바르게 가르치지 않는가?’ 돌아봅시다.

 

목회를 해보니까 신학이 목회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결국 신학이 아닌 방법론의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버리고 방법론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방법론이 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른신학을 주장하는 목회자들을 정죄합니다. 신학교를 향해 교회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른 신학의 줄기를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신학보다 그리스도가 위에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것보다 더 높은 것은 없습니다.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따뜻하고 겸손하게 목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입니다. 신학이 있어야 방법론도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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