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과 ‘개혁파 목사’
이승구 목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1. 우리는 과연 개혁파 목사인가?
개혁파 목사(reformed pastor, presbyterian pastor)란 무엇이고, 무엇이 어
떤 이를 개혁파 목사가 되게 하는가? 특별히 신학을 처음 하는 이들은 대개
어떤 동기로 신학교와 교단을 선택하는가? 현실적으로는 특별히 개혁파 목사
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신학교에 오는 이들은 드물다고도 할 수 있다.
상당히 많은 경우에는 어릴 때부터 다닌 교회가 장로교회이므로 장로교회의
목사가 되겠다고 하고서 자신이 속해 있는 교회의 신학교를 찾거나, 그런 여
러 신학교들 가운데서 그중 나은 신학교가 어딘가를 물어 찾아 온 것일 것이
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 목사가 되었을 때 이를 개혁파 목사라고 할
수 있는가?
또 다른 예를 들어서, 어떤 이가 어릴 때에 출석한 교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
인 경우, 그가 주님을 섬기는 여러 방도 가운데서 말씀을 전하는 일과 성도
들을 섬
기는 일에로 자신을 주께 드리고자 할 때 그는 자연스럽게 천주교회
의 신부가 되기 위해 천주교 신학교에 입학하기를 청원하려고 할 것이다. 그
가 그렇게 하고자 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반응을 나타내 보일까?
칼빈 자신도 한 때 천주교회의 성직록을 받았던 것을 말하면서 일단은 천주
교의 충실한 사제가 된 후에 성경을 깊이 숙고하고 과연 어떤 그리스도인과
성직자가 될 것인지를 후에 선택하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가 잘 예상하다시
피, 칼빈과 제네바의 목회자들은 이런 식으로 권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
려 주님을 사랑하는 그 젊은이를 연민에 가득찬 눈길로 바라보면서 어떻게
하면 그가 천주교의 미망에서 벗어나 복음에 대한 밝은 이해에 근거해서 참
된 복음의 사역자가 되도록 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면서 때로는 찬찬히, 때로
는 파렐(G. Farel) 같이 격분한 태도로 그를 설득하려고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예를 너무나 분파 의식적인 생각을 촉진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
을까? 종교개혁 시대에는 그런 것이 가능했지만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적
인 시대, 모든 것의 해체를 말하는 포스트-모던적 상황에서도 그런 교파 의
식
을 부추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바로 여기, 이와
같은 정황이 오늘 우리의 주제를 설정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원주의적
시대에 우리는 왜 개혁파 목사가 되려고 하는가? 이에 대해서 의식적이고 깊
이 있는 논의가 제시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저 상황에 따라 일을 하려는 이
들이지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개혁파 목사가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닐 것이
다.
그러므로 이 땅의 목회자들이 참으로 진지하게 이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한 후
에, 또는 그 대답을 추구하면서 개혁파 목사의 역할을 감당하기 원하면서
이 질문을 제출하고 나름의 대답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과연 우리는 왜
개혁파 목사가 되려고 하는가?”
우리가 개혁파 목사가 되기를 소원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개혁신학
(reformed theology) 자체의 매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개혁신
학은 가장 성경적이며, 가장 공교회의 신조에 충실한 신학이기 때문이다.
2. 개혁신학은 참으로 성경적인 신학이기를 추구하는 신학이다.
이 때 성경적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종교 개혁 시기에 모든 개신교도들에
의해서 강조된 “오직 성경”(s
ola Scriptura)의 원리와 특히 개혁파 신학자
들에 의해서 강조된 “전체 성경”(tota Scriptura)의 원리에 충실하려고 한
다는 의미로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구두 전승을 기록된 전승과 동일시하거나 더 높이는 천주교회의 신학적 입장
에 반해서 개혁주의는 성경만이 우리의 믿는 바와 삶의 문제에 대한 최종적
권위임을 강조하였다. 이점에 있어서는 모든 개신 교회의 신학이 (그것이 개
혁신학이든지, 루터파 신학이든지, 침례교 신학이든지, 성공회신학이든지,
감리교 신학이든지, 후의 오순절 교회의 신학이든지를 막론하고) 공동의 입
장을 취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신학을 함에 있어 ‘오직 성경의 원리’에
과연 충실한 신학이 과연 어떤 신학인가를 우리는 깊이 물어야 한다.
개혁신학은 이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리에 그 어떤 신학보다
더 충실할 뿐만 아니라, 그것에 함의된 것으로 또는 그와 함께 성경 전체
(tota scriptura)의 원리에도 충실해 왔다. 이는 루터파의 일종의 정경 가운
데서 정경(canon in the canon)을 찾는 태도에 대립하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개혁신학은 성경의 전체적 가르침에 충실
하려고 하는 신학이었
다. 물론 이는 지금까지 나타난 개혁신학의 예들이 모든 점에서 자장 성경적
이며,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충실했다는 말이 아님에 유의하라. 개혁신학이
추구하는 바가 그런 것이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개혁신학 내에는 아직 성경의 원리에 충실하지 않거나 성경
의 가르침 전체에 충실하지 않은 것들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 인정
에 기초해서 우리는 지금까지의 개혁신학을 좀더 성경적인 방향, 즉 참으로
성경의 가르침에만 근거하게 하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충실하려고 하는 방
향으로 고쳐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개혁된 신학이 항상 개혁되는 구
체적인 방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분위기 가운데서 이는 개혁신학이 성경의 궁극적 조화
(harmony)를 추구한다는 점을 말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에는 성경 각 부분
의 독특한 가르침에 유의하자는 운동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참으로 유의하자는 좋은 측면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 그러
나 각 부분의 가르침에 유의하면서 그 전체 사상의 통일성을 참으로는 인정
하지 않은 채 성경 자체가 다양
한 사상을 용인하고 있다는 식으로 인도해 가
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 태도인지를 우리는 심각하게 질문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각 부분의 독특한 가르침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인 후
에는 그 각 부분의 사상을 어떻게 조화로운 전체로 설명할 수 있는지의 문제
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바로 이것이 성경 계시의 역사적 진
전을 살피는 성경신학적 과제이며, 이 모든 것에 근거해서 작업하는 성경적
조직신학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궁극적 조화 문제에 무관
심한 신학은 좋은 성경신학도 아니고, 성경적인 조직신학도 아닌 것이다.
3. 개혁신학은 공교회의 신조에 가장 충실한 신학이다.
이는 공교회의 신조가 성경에 근거한 믿음의 내용을 표현해 보려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개혁신학의 태도를 반영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은 사도
신조와 325년의 니케아 신조,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신조, 그리고 451년의
칼시돈 신조 등의 공 교회의 신조가 말하는 바에 가장 충실해 보려고 하는
신학이다. 이는 이 신조들이 공교회의 신조들이기 때문이 아니고, 이 신조들
이 표현하려고 하는 바가 성경
의 가르침을 잘 표현해 보려고 했다는 것을 인
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말하자면 이 두 번째 요점은 첫째 요점
과 다르지 않은 것이며, 첫째 요점의 논리적 함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신조, 즉 우리의 믿는 내용을 정확히 규정하는 일을 중요시하
는 개혁신학은 과거에 이런 신조 작성의 전통 위에 서서 개혁파 그리스도인
으로서 우리가 성경에 근거해서 믿는 바를 정확히 표현해 보려는 노력에 앞
장섰었다.
제 1 스위스 신조(Confessio Hevetica Prior, 1536), 칼빈이 제네바에서 사
용한 Confession de la Foy(1537), 칼빈이 작성한 제네바 요리 문답(1542
년), 프랑스 신앙고백서(Confessio Fidei Gallicana, 1559), 제 1 스코트 신
조(The First Scotch Confession, 1560), 벨직 신앙고백서(Confessio
Belgica, 1561), 하이델베르크 요리 문답(The Heidelberg Catechism,
1563), 제 2 스위스 신조(Confessio Helvetica Posterior, 1566), 제 2 스코
트 신조(The Second Scotch Confession, 1581), 도르트 신조(The Canons of
the Synod of Dort, 1619),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The Westminster
Standards, 1647) 등이
모두 이런 신앙의 내용을 분명히 하려는 노력들이었
다고 할 수 있다.
개혁신학이 이렇게 가장 성경적이려고 하면서 공교회의 신조에 충실하려고
하였다는 하나의 예를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개혁 교회의
이해를 다른 신학들의 이해와 비교할 때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성과 신성이 한 인격 안에 있음을 성경에 따라서 그리고 과거의 정
통 신학과 함께 잘 이해하면서, 개혁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은 인성과
연합한 후에도 그 성격이 도무지 변화하지 않으므로 성육신 후에도 성자께서
는 그 신성으로 그 신성이 가지고 있었던 우주적인 기능, 즉 온 우주를 유지
하시며 다스리시는 섭리 사역을 계속해서 하고 계신다고 확언했었다.
개혁신학이야말로 신학의 원리(principia theologiae)에 가장 충실한 신학이
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개혁신학에서는 존재의 원리(principium
essendi)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외적 인식의 원리(principium
cognoscendi externum)로서 계시를, 그리고 내적 인식의 원리(principium
cognoscendi internum)로 신앙을 말하여 왔고 이에 충실한 신학을 하려고
해 왔
었다.
그리고 그런 신학은 주의 계시를 믿으며, 계시에 따라서 하나님의 생각을 따
라서 사고하는(think after God's thought) 신학인 것이다.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 유비적(analogical)이기 때문이다. 이를 우리 선배들
은 계시 의존 사색(啓示依存思索)이라고 역술하였거니와 이런 계시 의존 사
색을 하는 계시 의존 신학(啓示依存神學)이 우리 개혁신학이 처음부터 추구
해 온 신학인 것이다.
개혁신학은 처음부터 삼위일체 하나님께 충실한 신학, 계시를 성문화하여 오
늘 우리에게 있어서는 특별 계시의 유일한 전달체요 유일한 특별 계시인 성
경에 충실한 신학, 그리고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관여하는 신
앙의 신학을 하려고 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없는 신학은 적어도 개
혁신학의 입장에서는 신학이 아니고, 계시와 성경에 충실하지 않은 신학도
신학이 아니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인정하지 않는 신학도 신학이 아
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참된 개혁주의자 참된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을 뵈온 이”이
며, 개혁신학과 칼빈주의는 정상에 이른 기독교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벤자
민 월필드
의 말은 아주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개혁신학은 가장
정상적인 신학, 가장 바른 신학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런 매력적인 개혁신학 때문에 우리는 개혁신학을 공부하고 이에 충실한 개혁
파 목사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4. 마치는 말
바라기는 이 땅의 모든 목사님들과 신학생들이 과거의 개혁 신학적 선배들
에 잘 제시한 그 놀랍고 귀한 신학과 교회와 사역에 대한 이상에 따라서 이
땅의 교회를 바르게 섬겨 나감으로 우리들의 교회가 진정 바른 교회로 이
땅 위에 나타날 수 있기를 원한다.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 우리는 이 땅에서 개혁파 신학을 하고, 개혁파 신학
을 공부하여 개혁파 목회를 하는 개혁파 목사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
런 상황에서 우리는 카이퍼(R. B. Kuyper)와 함께 우리는 우리의 신학과 교
회 제도와 목회에 있어서 참으로 “개혁파이려고 하는가, 아닌가?” 하는 질
문을 진지하게 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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