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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 신학자를 기념하면서" 김재성교수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by 김경호 진실 2014. 1. 3.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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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신학자를 기념하면서"    

                                                          김재성 교수 (국제신학대학원, 부총장)

 

 

역사는 진리의 어머니다고 마틴 루터가 1519년 라이프찌히 논쟁에서 말했다. 나는 루터의 이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내가 칼빈과 종교개혁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역사적 교훈을 되새기며 연구를 거듭하는 것은 바로 역사로부터 배우고자 함이다. 지난 날에 대한 연구나 학문이나 개인의 기록은 사람의 삶 속에서 중요한 교훈과 가르침을 주며, 활력을 회복시켜 준다. 역사는 사람이 치매환자처럼 살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각종 기념일과 기념식에 참석하는 이유도 지나간 교훈을 되새기고자 함이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삼대 절기를 중심으로 해마다 성전에 모이게 하였고, 매 주마다 안식일을 지키게 한 것도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살게 하려는 반복적인 신앙교육을 주려 함이었다.

신약시대 교회에서도 안식 후 첫 날, 곧 주일날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된 것도 역시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하였다. 우리는 해마다 고난절과 부활절과 성탄절을 지키면서 교훈을 되새기고 있다. 이렇게 신앙은 하루 하루 쌓여서 오늘의 문화와 기독교 교회를 통해서 세워지고 있다.

지금부터 450년 전, 우리 모든 개신교 성도들이 은혜를 받게 되는 문서가 독일에서 채택되었다. 1563년에 발표된 하이! 델베르그 요리문답서는 유럽 여러 나라의 개혁교회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한 신앙의 표준 문서로 사랑을 받아왔다. 올 해 전세계에서 이 문서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모임들이 개최되고 있다. 이 문서를 작성한 우르시누스와 올레비아누스는 20대 후반의 청년들로서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정리하여 만들어 냈던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는 129개 항목으로 정리된 개신교 개혁교회의 기본선언이다. 나는 이번에 한국에서 열리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서 450주년 기념대회 논문을 준비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이 문서를 작성한 우르시누스에 대한 놀라운 찬사들을 찾아보면서 많은 교훈을 얻게 되었다. 한마디로 우르시누스는 자기를 잊어버리는 겸손과 만나는 모든 사람을 향한 친절로 가득했다는 것이다. 천성적으로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친절하고 진지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신앙으로 살아있는 속마음을 느끼게 해 주었다. 추천서를 써 준 멜랑톤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적인 능력을 부여받았으며 올바르고 점잖은 기품을 지녔고 모든 선한 이들의 사랑과 칭송을 받기에 합당한 보기 드문 젊은이다. 우리 학교에서 7년가량 생활했는데, 그의 건전한 학식과 하나님을 향한 ! 진지한 경건으로 우리들 모두에게서 사랑을 받았다.” 이 젊은 인문학 초보 학자는 스승 멜랑톤의 기대 이상 성장하여 중요한 신학체계를 완성하였다.

우르시누스는 1534년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나서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루터의 후계자 멜랑톤에게 교육을 받았고, 나중에는 스위스에 내려와서 여러 종교개혁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개신교회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지는 루터파와 개혁파의 신학을 공부한 후에, 개혁신학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루터가 사망한 지 어느 덧 20년이 지나고 있었으므로 독일루터 교회 내부는 상당히 복잡하게 흐르고 있었다. 루터교회 내의 강경파들이 보기에 우르시누스가 발표한 이 교리문답서는 독일 전체가 따르는 루터주의를 위협할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성만찬에서 루터의 공재설을 따르지 않았다.

우르시누스는 루터의 본고장에서 우수한 학자로 성장했지만, 스위스 개혁교회에서 피터 마터 버미글리로부터 더 많은 감동을 받아서 포괄적으로 보면 개혁신학자가 되었다. 독일 루터파 정통주의자들과 멜랑톤을 따르는 자들이 스위스 개혁교회에서 나온 칼빈주의자들의 문서라고 공격하였다. 루터파 정통주의자인 틸레만 헤수스와 플라키우스 일리리쿠스가 비방과 욕설을 퍼부었다. 개혁주의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던 프레데릭 군주는 1564410일에서 16일까지 아울브론 회담을 열어서 이 새로운 신앙고백서에 대한 해명에 나섰다. 루터파에서는 튀빙겐 대학교 제임스 안드레아스가 대표로 나섰고, 하이델베르그 쪽에서는 우르시누스, 올레비아누스, 보껭 등이 개혁신앙의 가치와 성경적인 정당성을 옹호하였다.

우르시누스는 지칠 줄 모르고 수고한 탓에 급속히 건강이 악화되었다. 게다가 자신을 지원해주던 군주 프레데릭 3세가 서거하자, 그의 아들 루이스가 집권하면서 유배지로 쫒겨 났다. 루이스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개혁파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을 다 해임시키고 루터파 목사들을 임명했고, 예배 방식을 다 바꿔버렸다. 공식적인 기독교 예배와 체제가 루터파로 복귀하고 말았다. 사망한 프레데릭 선제후의 둘째 아들 카시미르 공작의 도움으로 노이쉬타트 대학에서 교수 생활에 전념하다가 158336, 49세의 나이로 조용히 생애를 마쳤다.

친구였던 프란시스 유니우스가 장례식 설교를 통해서 우르시누스의 업적과 능력에 대해서 안타까운 찬사를 토로 했다. 살아 생전에 얼마나 그가 위대했던가를 서술해 놓았다. 탁월한 지적인 신학적 능력과 훌륭한 교육자로서의 업적에다가, 성품이 온화하고 훌륭한 도덕성을 보여준 위대한 사람이요 동시에 선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스위스 로잔에서 큰 교회에설교자로 초청이 왔을 때에, 우르시누스는 교회 강단이 자신의 적절한 사역무대가 아니라고 사양했다. 자신의 ! 스타일이 강단에서 쓰임 받기에는 너무나 강의식이라고 겸손히 거절한 것이 다.

시끄러운 소리나 과장된 몸짓이 전혀 없이, 질서정연하고 고요하며 사색이 충만했던 학자로서, 언제나 명확하게 논리적으로 신앙의 주제들을 풀이하고자 하였다. 우르시누스의 근면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그는 시간을 황금같이 소중하게 여겼다. 자신의 방에 찾아와서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친구여, 짧게 하거나, 아니면 돌아가게. 그것도 아니면 나의 일을 도와주게라고 써놓았다. 시간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학자의 의무였고, 자신의 재능과 학문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며, 자신은 오직 신실하게 섬기는 것 외에 그것들을 소비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신실한 유니우스는 우르시누스에게서 단 한마디도 하찮은 한담을 들은 적이 없다고 추모했다.

우르시누스. 그는 자신의 생각을 통제하고 혀를 제어하는 데 주의를 기울이면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이름을! 떨치거나 잘난 체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항상 겸손하였고 친절하게 대하였다.

우리가 떠난 후에, 소천한 사람을 기념하는 날이 된다면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평할 것인가? 어떤 찬사가 더 이상 필요할까.





 

출처 :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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