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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들은 신실한 말씀의 종이었다

쯔빙글리

by 김경호 진실 2014. 1. 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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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들은 신실한 말씀의 종이었다

김진흥 교수, TULIP 컨퍼런스에서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를 주제로 강연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루터나 칼빈에 비해 비교적 덜 부각되어 있는 인물이다. 대개는 성찬론에서 루터의 공재설의 대척점에 있는 기념설을 주장했던 인물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츠빙글리는 종교개혁의 역사에서 신학과 경건이 출중한 인물로서 매우 중요하다. 성찬에 대한 입장에서도, 말년의 츠빙글리는 개혁파 성찬론의 입장에 가까웠다.

 

▲ 김진흥 교수가 TULIP 컨퍼런스에서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지난 88(), 수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88-10일 간 열린 개혁주의 청년수련회 제4TULIP 컨퍼런스에서 김진흥 교수(고신대학교 교양학부)개혁신학자 츠빙글리의 신앙과 성경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츠빙글리에 대해 조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 교수는 츠빙글리를 조명하며 츠빙글리를 포함하여 루터, 칼빈 등 모든 개혁주의자는 말씀에 대한 사랑이 컸던 말씀의 종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오늘날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말씀이라는 기본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김 교수의 강연을 따라 츠빙글리를 조명해 보았다.

 

츠빙글리는

 

츠빙글리는 칼빈보다 앞선 세대의 사람으로 바젤의 외콜람파디우스, 스트라스부르크의 마틴 부처와 동시대 사람이다. 불링거, 칼빈, 베자 등이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은 후계자다. 츠빙글리-불링거로 이어지는 스위스 개혁주의 전통은 루터의 독일 프로테스탄트 전통과 뚜렷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인다.

 

중세의 사고방식

 

종교개혁자들의 배경인 중세는 오늘날과는 매우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계몽주의자들에 의하면 중세는 이성이 극단적으로 퇴화하고 왜곡된 암흑시기다. 그러나 이런 계몽주의적 시각을 벗어나 중세 자체를 보면 오늘날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영성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죽음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흑사병이 창궐하던 중세 말 시기는 죽음이 아주 일상적이었고 비참함을 당연한 숙명으로 느끼며 살았다. 이런 배경 하에서 로마 카톨릭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행태로 비참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착취하였다. 당시 교회가 독점적으로 발행했던 면죄부는 죽음 이후의 삶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위약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종교개혁을 일으키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을 새롭게 깨닫게 하는 은혜를 주셨다.

 

츠빙글리의 탄생과 초기사역

 

148111일에 태어난 츠빙글리는 비엔나와 바젤에서 수학한 후 글라루스 시의 종군신부로 청빙되어 용병 전쟁에 종군하였다. 종군신부는 용병의 고해를 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당시에 스위스에서는 용병 사업이 성행했다. 츠빙글리는 전쟁의 비참함과 더불어 용병 사업이 스위스인들을 얼마나 비윤리적인 일에 빠져들게 하는지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츠빙글리는 용병 사업에 대해 항의하였다. 하지만 글라루스 시민들은 이런 츠빙글리의 설교를 싫어하였고, 결국 츠빙글리는 글라루스의 종군 신부직을 사임하게 된다.

 

이후 아인지덜른으로 이동한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가 출판한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구해 탐독한다. 원전 신약성경을 직접 필사하며 읽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츠빙글리는 점점 복음적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리고 교부들과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교황의 권위에 대한 깊은 비판의식을 갖게 되었고, 1518년 스위스에서 면죄부 판매가 시작되자 이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이 시기에서 특이한 점은 당시 츠빙글리는 사제의 독신 서약을 깨고 비밀리에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츠빙글리 자신은 그 비밀 결혼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간주하였다.

 

▲ 컨퍼런스가 진행되고 있다.

 

 

취리히에서의 츠빙글리

 

1519년 츠빙글리는 취리히의 설교자로 취임하였다. 여기서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설교하였고, 교회 절기에 따라 정해진 특정 성경구절들을 매년 반복하여 가르치던 기존의 방식 대신에 성경 본문을 책별로 강해하는 새로운 방식의 설교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츠빙글리의 설교는 사제들의 전통적인 방식과는 달랐다. 설교할 말씀을 원전으로 읽고, 청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통역한 이후 본문에 대한 명료하고 유창한 해설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말씀의 교훈을 구체적으로 적용하였다.

 

츠빙글리가 취리히 사역을 시작한 직후인 1520년에 지역에 흑사병이 발발하였다. 도시 인구의 1/3이 사망하였다. 츠빙글리 자신도 병에 걸려 수 개월 동안 생사를 넘나들었고 친동생이 안드레아스는 병마로 숨을 거두었다. 츠빙글리는 병마로 고생하고 회복하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에 대한 깊은 체험을 한다. 이 체험은 츠빙글리에게 깊이 있는 내면적 신앙으로 자리잡았다. 츠빙글리는 자신의 목숨이 하나님께서 다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1520년을 기점으로 취리히는 종교개혁적 개혁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프랑스 왕과 교황을 위한 용병 봉사가 금지되었고, 공개토론회를 통하여 음식과 결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공개토론회를 위해 츠빙글리가 작성한 “67개 조항을 보면 츠빙글리가 복음의 주요 내용이, 하나님의 참된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을 알려 주시고 자신의 무죄함을 통해 우리를 죽음에서 해방시켰으며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는 점,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의 길이자 유일하고 영원하신 대제사장이라는 점, “미사가 아니라 단번에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가 모든 신자들의 죄를 속하기 위한 지속적인 희생이라는 점,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의라는 점,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 또한 금하지 않으신 것은 합법적인 일이라는 점, “성경은 연옥에 관하여 전혀 말하지 않는다는 점 등이 드러나 있다. 결국 1524년 취리히의 교회에서 성장, 제단이 제거되고 교회개혁에 발맞추어 복장이나 사치 제한, 빈민 돌봄 및 교육 등 사회적 개혁도 뒤따랐다.

 

오직 성경으로의 원리에 충실했던 츠빙글리

 

츠빙글리는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개혁의 원리에 충실했다. 종교개혁 초기에 바덴(1526)과 베른(1528)에서 개최된 천주교와 개혁주의 개신교 사이의 종교적 토론은 오직 성경으로의 원리에 관한 이해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츠빙글리가 직접 참여하지 못한 바덴 논쟁에서 외콜람파디우스는 이 원리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천주교 신학자 요하네스 에크에게 패하게 된다. 이후 베른 논쟁에는 츠빙글리가 직접 참여하였다. 여기서 츠빙글리는 교회가 성경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 위에 교회가 세워진다, 즉 모든 신학적 사안을 결정하는 최고의 권위로서의 성경의 위치를 확고하게 옹호하였다. 베른 논쟁은 개혁파의 승리로 끝나고 베른은 종교개혁 진영에 가담하게 된다. 이 두 논쟁을 거치며 오직 성경에 대한 이해가 명확해지게 된다. 그 어떤 위대한 교부의 가르침이라도, 그 어떤 유명한 공의회의 결정이라도 그 권위는 모두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원리가 성경의 어느 한 부분만을 문자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전체 성경의 원리와 함께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문자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삼위일체, 유아세례도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부흥, 말씀을 아는 지식과 순종이라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김 교수는 하나님께서 종교개혁자들을 들어 쓰시며 개인과 사회를 바꾸셨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성경에 충실했다는 것이다.” 라며 강연 내내 성경 말씀에 충실할 것을 강조하였다. 김 교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수종드는 종의 설교를 들으면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예비해 두셨다. 오늘날 모든 성도들이 반성해야 한다. 목사들은 성경 전체를 공부하지 못하고 있고 성도들은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없다.” 라며 오늘날 교회 현실에 대하여 비판하기도 했다.

 

아울러 김 교수는 오늘날 어게인 1907’을 외치지만 과연 변화가 있는가. 한국교회 초기 세례교인의 신앙 수준은 매우 높았다. 성경 전체를 최소 한 번 이상은 읽어야 했고 삶의 개혁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이런 세례교인이 교회에 많아지도록 늘 기도하였다. 오늘날에는 이런 역사를 모르고 부흥만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들어 쓰시지 않는다.” 라며 말씀에 대한 사모함과 더불어 이 사모함은 순종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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