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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웅산 박사, 설교의 미련한 것 (고전 1:21): 계시의 변증적 기능과 성령의 역할

강웅산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4. 3. 20.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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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웅산 박사, 설교의 미련한 것 (고전 1:21): 계시의 변증적 기능과 성령의 역할
 
김순정 기사입력  2014/01/17 [11:27]

이 글은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강웅산 교수의 논문으로 한국복음주의신학회(2013)에서 발표한 글이다. 현대는 설교의 홍수 가운데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는 것이 설교라고 오해하는 풍조가 들어가고 있다. 성경은 설교는 미련한 것이라고 한다. 재미없다. 그러나 이 설교를 통해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난다. 강웅산 박사는 설교의 기법, 기술이 아닌 설교를 통해 계시를 변증하고 성령이 역사하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논문을 요약하여 소개한다.

 

 

 

본 논문은 오늘날 설교자들이 설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설교 사역에 대한 조직신학적-변증학적 기대를 바로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것은 설교는 계시(특별계시)를 다루는 것이고, 그 계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계시의 소통은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신학적 확신을 말한다. 소위 형식과 내용의 구도에서, 설교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고전 2:2)가 결정하고, 형식은 성령의 소통(고전 2:10-16)에 의해 지배된다. 이 강조가 새삼 중요한 이유는 이에 대한 확신이 설교자를 오해된 설교문화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는 애초부터 세상의 지혜의 관점에서 볼 때 효율적이지 못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바울도 설교를 미련한 것(고전 1:21)일 뿐만 아니라, 설교는 듣는 청중을 걸려 넘어뜨리는 불편한 돌(고전 1:23)이라고도 평하였다. 불편한 현실 속에서 설교가 해야 하는 기능은 계시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변증적 기능에서 기인한다. 계시는 타락한 인간의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을 하였고, 어느 때고 그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교자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명이란 점에서 계시의 기능과 소통의 방법에 종속된다.

본 논문은 우선 개혁신학 전통 안에서 계시의 변증적 기능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본 논문의 주된 논지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다룬다. 카이퍼를 중심한 암스텔담 학파와 워필드를 대표로 하는 구 프린스톤 학파 간의 입장의 차이를 살핀 후, 반틸로 대표되는 웨스트민스터 학파의 입장이 말하는 계시의 변증적 기능을 들어본다. 즉, 계시(특별계시)는 그리스도에 초점을 둔 변증적 기능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전통에 부합하는 것임을 확인한다. 다음 작업은 고린도전서 1:18 이하 2:16까지 본문을 통해서 계시의 소통을 위해서는 성령의 사역이 반드시 있어야 함을 입증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주해 작업을 통해 성령이 어떻게 계시의 소통에 관여하시는지를 알게 된다. 마지막으로 본 논문은, 실천신학은 조직신학에서 나와야 한다는 확신에 따라, 이제까지의 논의에 근거하여 설교에 대한 실천적 제언을 한다. 이 부분은, 설교의 형식으로 말한다면, “적용”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다.

세상의 지혜의 관점에서 보면 미련하고 불편한 방법이지만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성령의 소통에 의존하는 방법만이 하나님의 지혜의 방법임을 믿는 설교만이 설교자와 청중을 피차에 대해 잘못 설정된 문화로부터 벗어나게 하리라고 확신한다.

 

1. 들어가는 말

우리가 늘 듣는 담임 목사의 설교가 아닌 초청 강사의 설교를 들을 때, 왠지 낮 설고 익숙지 않은 것은 왜 일까? 신학적으로 달라서 일까, 다른 복음을 전하기 때문일까, 성령을 믿지 않아서일까, 성경관이 달라서 일까? 그런 것들이 이유가 아니라, 이미 설교라는 매체를 통해 설정되어 있는, 또는 공유되던 “문화”(요즘 유행하는 말로 “코드”라고 해도 될 것 같다)에서 이탈되기 때문일 것이다. 대체로 한 교회를 오래 다니는 사람은 담임목사의 설교에 적응을 하게 되고, 그 적응은 피차간에 어떤 기대치로 작용하게 되는데 필자는 이것을 “설교문화”라고 명명하고 싶다. 책을 읽을 때도 어떤 장르의 책을 들었느냐에 따라 독자의 반응은 이미 독자가 받아들인 장르에 지배를 받듯이, 설교에 있어서도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 공유되는 문화가 있고 그 문화에서 이탈되는 설교에 대해서 청중들은 어색해 할 뿐만 아니라 노골적으로 불편해 하기도 한다.

한 편의 설교에서 청중들이 찾고자 하는 것이 각기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표적”을 구하고, 어떤 이들은 “지혜”를 구한다(고전 1:22). 성공적인 또는 살아남는 설교는 어떤 면에서 청중들의 욕구를 가장 큰 공통분모로 충족시키는 설교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설교 문화란 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 기대치에도 불구하고 설교자와 청중이 피차에 대해 익숙해져 있는 내용과 수사(형식)가 아닐까? 전통적인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우선 내용 면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장 큰 공통분모가 된다. 그리고 청중은 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잘 정제된 설교자의 수사에 젖어 있다. 솔직히 내용이 불충분해도 자신들에게 익숙한 수사(형식)가 사용될 때 오히려 안도감을 갖는 것 같다.

그러나 소통(communication)의 관점에서 볼 때, 과연 설교가 얼마큼 성공할 수 있을까? 더욱이 빠르고 강렬하고 자극적인 오늘날의 매체에 익숙한 청중에게 설교는 하기도 전에 역부족이라는 한계를 절감하게 한다. 과연 소통으로서 설교가 승산이 있나? 그래도 위로가 되는 것은 설교자의 절망감이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신약시대는 그 시대대로 설교를 한다는 것이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상대적으로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의 청중에게만 나타나는 문제가 아니라, 그때도 설교는 어리석고 미련하고 효율적이지 못한 소통의 방법(형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설교가 가능하며 계속해서 사용되는 것은 설교가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찾고자 하는 기대치에 대해 가장 큰 공통분모가 되는 설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그 설교가 들려지는 것은 성령의 소통(형식)을 믿으며 모두에게 필요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내용)를 전하는 설교가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인 것이다.



2. 문제 제기: 고린도전서 1:21의 변증적 사명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전 1:21, 개역개정). 한글 성경에서 흔히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번역되는 이 부분은 “설교의 미련한 것”(h/j mwri,aj tou/ khru,gmatoj)으로도 가능하다. 바로 앞에 있는 전치사 “디아”(dia.)를 포함하여 번역하면 “설교의 미련함을 통해서” 또는 “설교라는 미련한 방법을 통해서”라고까지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설교가 왜 미련한 것이 되는가? 설교가 어리석은 방법이 되는 것은 세상의 지혜의 관점에서 본 역설적 수사라고 할 수 있다. 1:21 전후 문맥은 설교에 대한 이중적 특성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혜의 관점에서 보면 설교는 “능력”이지만(18절), 세상의 지혜의 관점에서 보면 “미련한”(18, 21, 23절) 방법이다.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설교라는 방법은 효과적이지 못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법이 아니며, 설득력이 약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설교를 그리스도를 전하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능력의 방법으로 삼으셨다. 설교를 통해 두 종류의 지혜가 대조되고 있다.

1:18이하의 문맥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비시키고 있다. “총명”(19절), “지혜자”(20절), “선비”(20절), “변론가”(20절), “문벌”(26절), “강한 자들”(27절), “있는 것들”(28절) 그리고 2:1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세상에서 지혜로 간주되고 있다. 반면에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것들로서 “십자가의 도”(18절) “전도의 미련한 것”(21절), “하나님의 어리석음”(25절), “하나님의 약함”(25절), “세상의 미련한 것”(27절), “세상의 약한 것”(27절), “세상의 천한 것”(28절), “세상의 멸시받는 것”(28절), “세상의 없는 것”(28절), 등이 언급되고 있다. 1:21에서 “설교”가 “미련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18절의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변증의 기능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2:2에서 내용(그리스도)에 대한, 2:4에서는 방법(성령)에 대한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밝히고 있다. 한 마디로, 설교는 그리스도를 내용으로 성령을 소통의 방법으로 하는 변증의 작업이다. 바울에 의하면 미련한 방법일 수밖에 없고, 재미없는 방법일 수밖에 없고,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방법일 수밖에 없는 그런 설교를 하나님은 그리스도(내용)를 전하는 방법으로 삼으셨다는 것이 고린도전서 1:18 이하 2:16까지의 내용이다. 여기에서 본 논문이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이 설교의 기능이 계시(특별계시)의 목적과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 때에 성령의 소통으로 계시가 증거하고자 하는 그리스도가 증거된다는 것이다. 계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능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고 그것이 바로 계시의 변증적 기능이다.

본 논문은 (1) 계시의 변증적 기능의 정당성, (2) 계시의 그리스도 중심적 변증, (3) 계시의 증거 속에 성령의 역할, 마지막으로 (4) 설교자의 사명에 대해 논하는 순서로 개진해 나갈 것이다. 설교자가 계시의 그리스도 중심적 변증적 기능과 약속되어 있는 성령의 소통을 믿을 때에 비로써 설교의 미련한 방법이 하나님의 지혜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3. 계시의 변증적 기능

계시의 변증적 기능을 말하는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불편한 말일 수 있다. 계시는 그 자체가 계시일 뿐, 변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계시는 선포하는 것이지 스스로를 증명하거나 인간을 설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예를 들어,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지 않는다. 창세기 1:1은 태초부터 하나님이 존재하셨다고 선포하고 있고,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다고만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는 전제의 문제이며 증명을 초월한다. 그래서 이 전제는 오직 믿음으로만 수용할 수 있는 문제이지 어떤 이성적 방법으로도 증명 되지 않는다. 또한 변증이란 말이 마치 중립(neutrality)을 전제로 진행되는 인간의 노력으로 오해될 수 있다. 중립이 보장되어야 변증의 작업이 객관적이고 설득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변증의 역할이 무엇인지, 특히 계시와 변증은 어떤 관계에 있는지 궁금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점에 대해서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19세기 후반부터 화란의 암스텔담과 미국의 프린스톤 사이에 변증에 대한 견해차가 있었다. (그 자체가 충분히 별도의 주제로 다루어질만하나, 본 논문의 논지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우리의 논의에 필요한 만큼만 언급하려 한다.) 앞서 이 논문의 입장을 밝힌다면, 변증은 신학의 지배를 받으며 변증이 신학의 작업이라는 점이다. 변증을 통해 신학의 기반이나 전제(예, 하나님의 존재, 성경의 권위, 등)를 먼저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 위에서 변증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학적 전제가 변증을 가능케 할뿐만 아니라 변증의 사명(예, 설교)을 충족시킨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변증은 인간의 타락과 죄성에 거슬리는(against) 작업이므로 성경 계시의 기독론적 성질과 그 계시의 소통을 위한 성령의 개입을 동반하는 일이다. 우리는 본 논문의 논지를 개진해 나감에 앞서, 개혁주의 전통 안에서 붉어졌던 계시의 변증적 기능에 대한 이해차이에 대해 침묵하고 지나칠 수 없어, 간략하나마 언급만 하려 한다.

 

1. 암스텔담 학파 (Amsterdam School)

카이퍼(Kuyper)를 필두로 바빙크(Bavinck), 볼렌호벤(Vollenhoven), 도이베르트(Dooyeweerd), 스토커(Stoker) 등의 암스텔담 학파는 카이퍼의 백과사전식의 지식체계에서부터 출발하여 계시, 철학, 신학, 변증에 대한 이해를 결정하였다. 역사를 거슬리는(anachronistic) 일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카이퍼의 백과사전식 지식체계와 방법이 도이베르트에 의해 이론지식(theoretical thought)-선이론지식(pre-theoretical thought)의 구분으로 구체화 되었다고 판단하고, 도이베르트의 이론-선이론 지식 구분이 카이퍼 철학과 신학을 이해하는데 유익하다는 생각이다. 암스텔담 학파는 계시와 신학을 지식체계의 분류에 따라 구분한다. 도이베르트 구분으로 말하자면, 계시는 선이론지식에 해당되고 신학은 이론지식이므로 신학이 계시를 직접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 암스텔담 학파의 방법론적 특징이다. 그리고 변증은 신학이라는 결과물을 불신자들에게 설득하는 작업이라고 보기 때문에 계시로부터는 좀 거리감이 있어 보인다. 이것은 나중에 지적 되겠지만, 프린스톤의 워필드(Warfield)가 변증이 신학의 전제를 결정짓는다고 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기에서 성경의 권위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암스텔담 학파에 대해 철학이 마치 중립적(neutral)-자율적(autonomous) 입장에서 계시를 판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질 수 있다. 지나친 기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퀴나스의 전통은 철학과 신학을 구분한데 반해, 어거스틴 전통은 신학과 철학을 동일시하였다는 도이베르트의 말이 이 점을 인정하는 듯 들린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는 도이베르트도 암스텔담 학파가 아퀴나스의 전통과 그리고 벤틸 학파가 어거스틴 전통과 연속성을 잇고 있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카이퍼의 학문 간의 백과사전식의 구분이, 의도되지 않았더라도, 성경 외의 어떤 범주나 전제에 중립적인 사고의 출발이 있는 여지를 만든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암스텔담 학파는, 결론을 내리면, 계시가 변증적 기능을 하지 않는다고 본다. 계시는 변증 없이 그 자체가 성령에 의해 소통될 뿐이다. 계시의 소통을 위해 성령의 필요성을 강조한 점은 높이 살 부분이다. 도이베르트의 말을 빌리면, “이 기본적인 영적 모티브는 그 정교한 의미가 성령의 교통을 통해 우리의 열린 마음에서 작용하시는 성령에 의해 전적으로 설명되기 때문에 모든 신학 쟁론 보다 높은 위치에 있어서 신학적 주해를 필요치 않는다.” 창조-타락-구속의 선이론지식이 영적으로 철학자의 마음에 형성된다는 이해가 말씀의 “의미”(meaning)와 “본문”(text)이 분리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경우에는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거나 신비주의로 오해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갖게 된다. 신학자들의 “열린 마음”과 성령의 역할의 관계가 너무 열려 있는 듯하다.

 

2. 구 프린스톤 학파 (Old Princeton School)

구 프린스톤의 변증학에 관한 입장은 대표적으로 워필드를 통해서 잘 나타나는데, 워필는 신학에 앞서 변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 원인을 굳이 추적한다면, 찰스 핫지에서부터 나타나는 특징인데, 이성에 대한 강조와 연관이 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구 프린스톤 전통만큼 높은 성경관을 추구했던 전통이 없었으면서도, 동시에 구 프린스톤 신학자들은 이성의 중요성을 어느 누구 보다고 강조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때때로 그들의 이성의 강조가 불신자와의 접촉점을 가능케 하는 중립적에 해당하는 선이론지식으로 나아가는 구조인 반면, 반틸이 말하는 초월적(transcendental) 논증은 간접적 방법(indirect method)으로 불신자와의 대화에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존재와 계시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무의미한 공방만 지속될 뿐이라는 차이가 있다. “반드시 그는[신학자는] 성경 안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확실하게 세워야 한다 . . . [믿음은] 바른 이성 위에 있다.” 이성은 계시를 수납하는 도구로서 하나님은 합리적인 인간에게 이성의 소통 없이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마치 “바른 이성”(right reason)이 중생하지 않은 자들에게도 가능한 것 같은 오해를 주어, 이성의 권위에 의해 계시가 판단되고 그리스도가 소개되는 것처럼 보일 소지가 있다. 물론 핫지나 워필드가 성령의 중생함 없이 이성의 권위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기에 정당한 대변을 위해서는 속단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필드의 주장이 좀 더 정교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으며, 그래서 그가 자연인의 능력에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한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변증의 힘을 너무 이성에 많이 실어주었다는 비난은 피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의 계시를 통해 들어나는 진리와 변증의 작업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반틸의 분석에 따르면, 구 프린스톤과 암스텔담은 대조적인 차이를 보인다. 워필드는 변증학이 조직신학을 위한 전제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카이퍼는 조직신학이 말하는 것을 궁극적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대조를 보인다. 워필드가 볼 때 카이퍼의 문제는 먼저 신학체계를 만들고 나서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는 우를 범하는 격이고, 카이퍼가 볼 때 워필드의 문제는 변증학이 신학의 전제를 만드는 것은 전적타락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자연인에게 너무 많은 능력을 부여하는 잘못이 된다. 그러나 반틸은 변증학이 카이퍼의 말처럼 신학 이후의 방어 작업일 수도 있고, 워필드처럼 신학의 전제를 만드는 일일 수도 있다며, 변증학과 조직신학은 상호 의존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정리하였다.

결론적으로, 구 프린스톤 학파는 계시의 변증적 기능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한 것은 사실이지만, 변증의 작업이 마치 성경을 벗어나서, 성경의 권위에 힘입지 않고도, 이성의 힘으로 가능한 것 같은 오해를 주고 있다. 변증의 작업에 있어서 이성의 중요성이 강조된 만큼,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교통에 대한 강조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암스텔담 학파와 구체적인 전제는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신학과 변증을 구분한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반틸은 이 점에 대해, “모든 학문은 반드시 하나님을 전제해야 하고, 동시에 전제야말로 최상의 증명이다”고 밝히고 있다.

 

3. 웨스트민스터 학파 (Westminster School)

웨스트민스터 학파의 변증학적 입장은 보스(Geerhardus Vos)와 반틸에 의해 대변된다. 보스는 구 프린스턴 교수였지만, 그의 계시관은 웨스트민스터의 반틸의 변증학과 존 머레이(John Murray)의 조직신학에 의해 계승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보스와 반틸의 공통된 입장은 계시는 그리스도의 성취(fulfillment)에 초점을 맞춘 변증적 기능을 한다는 것이고 그 변증의 방법이 계시에 의해서 결정지어진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반틸은 변증의 작업과 조직신학의 작업 그리고 기독교 철학과 더 나아가 전도와 선교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서 각기 다른 강조와 접근을 하는 차이일 뿐이라고 한다. 웨스트민스터의 계시의 변증적 기능에 대한 입장은 보스의 계시관에서 출발한다. 보스의 계시관의 특징은 모든 신학적 논의와 활동은 계시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보스는 인간이 하나님을 신학의 주제로 삼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 주시는 주체가 되실 때만 가능하기 때문에 계시가 신학의 원리(principium theologiae)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 신학의 원리는 피조물의 두 가지 특징과 연관이 있다: (1) 창조주와 피조물의 존재론적 구분(Creator-creature distinction), (2) 죄로 인한 타락의 결과(Effect of the Fall). 이 특징은 반틸의 변증학에서 또한 중요한 두 원리로 작용한다.

계시가 신학을 지배하는 것은 계시가 그리스도 중심적인 변증적 기능을 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보스에게 있어서 계시가 그리스도 중심적 것은 계시의 역사성을 통해 나타난다. 구속(redemption)은 역사 속에서 진행되고, 계시는 이 구속을 해석(interpretation)하고 있다. 때론 역사가 계시의 구현(embodiment)이기도 하다. 구속, 계시, 역사의 상호 유기적 관계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과 성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렇기에, 계시의 해석의 원리는 계시의 무오성(inerrancy)에 종속된다. 이 말은 유신론적(Theistic) 논증의 필연적 귀결이다. 계시가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인격적인 자기계시이기에 그 계시는 무오하다. 고로 완전(plenary) 축자(verbal) 영감만이 하나님의 주권적-인격적 계시의 방법이 된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계시의 성질과 목적은 그리스도에 맞춰있기에 계시의 기독론적 특징은 계시의 영감(inspiration)과 해석(hermeneutic)을 결정짓는다. 즉 완전 축자 영감이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계시의 방법이다. 성경의 역사(영감)는 그리스도를 증거(변증)하는 목적을 갖고 있고, 성경의 해석은 이를 반영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해석학과 신학은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고 있는 계시의 기독론적 변증의 기능을 충실히 반영하는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에겐 이 말이 성경에 신학이 있느냐는 질문으로 재해석 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백과사전적 지식체계에 따른 철학적 전제를 따르는 전통에서는 성경(선이론지식)에 신학(이론지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신학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보스-반틸 학파, 더 거슬러 올라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전통은 성경과 신학을 대립되는 구도로 보지 않는다. 성경에 신학이 있다는 입장은 그들의 성경의 자증(Self-Attestation of Scripture)의 원리에 의한 귀결이다.

 

4. 정리

정리하면, 반틸은 자신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카이퍼와 워필드 사이를 중재하며 보다 개혁주의 원리에 더 충실한 사고를 하려고 노력하였다. 카이퍼는 신자와 불신자의 지식 사이에 서로 섞일 수 없는 반립성(antithesis)을 강조한 반면, 워필드는 “바른 사고”(right reason)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워필드는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바른 사고”를 통해 계시(구체적으로는 일반계시)에 대한 바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워필드는 심지어 영감의 문제도 기독교의 가장 우선적인 문제가 아니라 최종적인 절정으로 보았다. 합리적으로 먼저 확실성, 역사성, 신뢰성을 얘기하고 나서 영감을 논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반틸은 워필드 보다는 카이퍼쪽으로 기운다. 즉 영적으로 죽은 자와의 합리적 대화는 불가능하다는 카이퍼 손을 들어줬다. 그렇다면 문제는, 반틸이 이미 간파한대로, 카이퍼의 반립적 구도는 설교자와 영적으로 죽은 상태인 청중 사이에 소통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틸이 카이퍼와 다른 것은, 결과적으로 다시 워필드와 가깝게 보이는 것은, 워필드처럼 기독교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비록 영적으로는 죽었지만, 그래서 불신자들은 특별계시가 소개하는 진리를 거부하지만, 지성적으로 전혀 이해를 못 하는 것은 아닌 점에는 반틸도 동의한다. 대신 성령에 의해 다시 살아나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종합하면, 반틸의 변증학은 카이퍼의 신자-불신자의 반립과 워필드의 이성의 중요성을 적절하게 수용하면서, 궁극적으로 특별계시의 소통의 가능성을 성령의 사역으로 돌린다. 고로 반틸에게 있어 설교란 변증의 작업이며 결국 성령의 개입이 필요한 일이다. 성령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와 방법은 비록 죄인이 하나님을 증오하며 거부 할지라로 자신이 계시로 둘려 쌓여 있기에 가능하다.

 

4. 계시의 기독론적 변증

계시의 변증적 기능의 필요성은 인간의 타락한 현실에 대한 성경의 내적증거를 통해 드러난다. 성경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인간의 타락한 인식활동을 잘 알고 있다. 시편 14:1은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고 밝히고 있다. 잠언 1:7에 따르면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고”, 잠언 1:29은 그들이 “지식을 미워하며 여호와 경외하기를 즐거워하지 아니한다”고 적고 있다. 그들은 “불의로 진리를 막고”(롬 1:18) 있으며, 또한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고”(롬 1:21),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셨다”(롬 1:28). 타락한 인간은 자율(autonomy)을 전제로 자신의 지식 활동을 정당화하며 진리를 거슬리고, 결국 하나님과 대등한 입장에 서서 세상, 인생, 진리, 가치, 등의 의미를 결정한다. 계시는 바로 이 타락한 현실과 하나님을 대항하는 인간을 향하여 진리를 드러내고 있다. 성경은 그런 점에 있어서 조금도 양보적이지 않다. 성경의 기본적 입장은 하나님을 전제하는 기독교 진리만이 참된 진리이며 그것을 거슬리는 다른 대안은 있을 수 없다(the impossibility of the contrary)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고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드러내는 계시는 불가피하게 하나님을 부정하고 대항하는 지식체계와 충돌 할 수밖에 없다.

계시는 그런 점에서 철저하게 자기의식(self-consciousness)의 입장에 있기에, 타락한 피조의 특성상, 계시 자체가 변증적 기능을 내포한다. 계시의 변증적 기능은 그리스도 중심적 세계관을 통해 성립된다. 베드로전서 3:15(“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은 변증의 사명이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 데서부터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인식활동에서 세속적 영향과 자율적 도전으로부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는 일관성이 필요하다(고후 10:5). “만물이 다 그[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있고”(골 1:17), 그리스도가 “친히 만물의 으뜸”(골 1:18)이 되시기에 모든 인식 활동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중보 되심은 그리스도가 피조물의 존재와 구속뿐만 아니라 인식 활동에 있어서도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영생의 소망이 없을 뿐 만 아니라, 바른 인식의 활동도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시는 구속의 사역은 마치 우주 어디에서도 찾을 만한 명백한 계시도 없고 그러므로 구원도 필요 없다고 거부하는 불신자들의 적대적 영역에 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이다.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는 자연인은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경을 수용하는 사람만이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게 된다. 즉 계시와 그리스도는 서로를 세워주는 관계이다. 계시의 자기의식과 자기증거는 그리스도를 통해 확인되고, 그리스도는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임을 증거한다.

계시가 그리스도 중심적 변증의 특성을 갖는다면, 우리 또한 일관되게 이 변증적 기능과 사명에 대한 자기인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계시의 특성이, 방법론에 있어서, 우리의 신학 및 설교를 지배해야 한다는 자연스런 귀결에 도달한다. 고린도전서 1:18-2:16에서 바울의 논의의 근거는 그리스도에 있다. 21절에서 “설교의 미련한 것”(th/j mwri,aj tou/ khru,gmatoj)의 23절에서 다시 “거리끼는 것”(ska,ndalon)과 “미련한 것”(mwri,an)으로 반복된다. 여기에서 “거리끼는 것”과 “미련한 것”을 별개의 것으로 다룰 필요는 없다고 판단된다. 오히려 “미련한 것”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그것이 “거리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문맥상에 나타나는 바울의 의도를 바르게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스도를 설교하는만이 그가 바른 인식의 활동을 가능케 하는 근거이다. 참고로,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 불신자들에게 그들을 걸려 넘어뜨리게 하는 돌이기에 미련한 것으로 경멸시 되고 있다. 여기에서 바울이 “미련한 것”을 “거리끼는 것”과 등치시키는 데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교하는 것은 불신자들에게 단지 미련한 것이라는 조소와 조롱 꺼리가 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거리끼는 것”이 성경 전체의 문맥에서 갖는 의미를 상기시킴으로써 거기에는 조소와 폄하 이상의 의도가 담겨있음을 암시한다고 보여진다.

시편 118:22는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한다.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는 반전을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21:42 등에서 예수께서 이 구절을 인용하셨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흥미로운 것은 신약은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버린 돌에 대해 기독론적 해석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누가의 인용은 그리스도가 그 돌이 되시는 것에 변증적 의미를 더하고 있다.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눅 20:18). 그리스도가 돌이 되시는 것은 좋은 의미만이 아니라 충돌과 저항을 예측케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깨어지고 가루로 만드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인용은 구체적인 해석을 곁들이고 있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벧전 2:7). 그리스도가 돌이 되심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에 전혀 상이한 결과의 차이가 발생함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에게도 같은 잣대를 들이댄다.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tw/| li,qw| tou/ prosko,mmatoj)에 부딪쳤느니라”(롬 9:32). 고린도전서의 문맥을 벗어나도 그리스도가 거리끼는 돌이 됨을 기독론적 사명, 즉 불신과 거역의 세대를 향한 변증적 기능의 관점에서 보려는 의도는 분명하다. 신약에서 “거리끼는 돌”은 폄하의 수준을 넘어 변증적 기능을 한다는 것이 일관된 증거이다. “거리끼는 돌”의 변증적 기능은 구약도 기대하는 바다.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 이 그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덫에 걸려 잡힐 것 이니라”(사 8:14-15). 칼빈은 로마서 9:33과 베드로전서 2:4을 근거로 이 구절에서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종국적으로 그리스도라고 본다. 그리스도는 성소와 피난처가 되시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걸려 넘어지고 깨뜨리는 돌이 되신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의미가 다윗에 의해 시편 118:22에서 피력되고 있다고 보며 그리스도께서 이 구절을 인용하며 자신에게 “돌”의 의미를 적용하고 있다고 본다.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다가올 심판 사이의 긴장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점차 고조되어 그리스도의 도래에 집중되고 있다.

다니엘의 꿈 해석은 우선적으로는 장래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지만, 그 꿈에서 돌이 깨부수는 기능은 변증적 기능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또 왕이 보신즉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그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단 2:34-35). 구속계시의 성취는 한 마디로 “거리끼는 돌”의 변증적 기능의 성취였다. “거리끼는 돌”(고전 1:23)은 걸림돌, 부딪치는 돌, 깨뜨리는 돌, 함정과 올무, 미련한 방법, 불편한 방법, 거부하고픈 방법, 아픈 방법이고 세상의 패러다임과 세계관을 깨뜨리는 돌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일에 이 기능과 사명이 있어야 한다는 기대감을 생각할 수 있다. 설교라는 미련한 방법을 통해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다(고전 1:21). 바로 그 설교가 “거리끼는 돌”이 되어 세상의 패러다임과 세계관을 깨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바울은 그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2:2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바울 자신에게 있어서 최고의 인식론적 근거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설교가 “거리끼는 돌”이 되게 하는 것이 자신(설교자)의 역할이고 거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는 논리이다. 바울이 이 말을 주저함 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작업에 성령이 능력으로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 “내 말과 내 설교가(to. kh,rugma, mou)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 사람(설교자)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고 그렇게 되는 데에 계시의 변증적 기능의 성취가 있다.

 

5. 계시와 성령의 사역

계시가 변증적 기능을 한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내용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중심이고 방법에 있어서는 성령의 소통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흔히 계시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할 때, 성부가 계시의 주체가 되시는 것만을 생각하기 쉬우나 계시 사역에는 삼위가 관여하신다. 마태복음 11:25-27(참고. 눅 10:21-22)은 계시 사역에 그리스도가 중보가 되심을 말하고 있다. 25절 이하에서 계시의 주체가 성부이심이 확실하다. 그러나 아버지의 계시 사역에 아들이 관여하신다는 말씀이 나온다. 즉 아버지는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w-| eva.n bou,lhtai o` ui`o.j avpokalu,yai)에게만 계시를 하신다.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계시 사역에 중보 되심을 말하는 중요한 구절이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이 구절은 바른 인식(지식)의 활동을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중보가 되어야 함을 뒷받침하기에 또한 중요하다. 고린도전서 2:10-16에서 우리는 성령이 계시 사역에 관여하심을 보게 된다. 성경에서 유일하게 계시의 소통이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짐을 말하는 중요한 본문이다. 이 본문은 1장에서부터 대두되고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의 대립구도를 정황으로 하면서, 지혜에 대한 재평가를 하고 있다. 그것이 바울의 직접적인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이 본문은 앞서 언급한 마태복음 11:25-27(누가복음 10:21-22)에 대한 주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와 “어린 아이들”의 대조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로 대비되고 있다. 세상의 지혜로 볼 때 미련하고 약한 것을 취하여 지혜롭고 강하게 하시는 반전의 힘이 계시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과 연관이 있다. 바울의 논리의 힘은, 앞서 계시의 그리스도 중심적 변증의 기능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는 데서 온다. 2:10은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고 있는 계시의 사역에 성령이 관여함을 말하면서 구체적으로 성령의 어떤 특성 때문에 성령이 계시의 사역에 관여하는지 말하고 있다. 우선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아시는” 분(knower)으로 소개되고 있다. 10절에서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와 그 이하 “성령은 모든 것을 안다”는 사이에 전치사 gar가 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gar를 살려서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왜냐하면 성령이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로 번역을 할 수 있다. 우선 성령이 계시의 사역에 관여하게 되는 이유를 하나님을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에 대하여(about)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이”(ta. ba,qh tou/ qeou/)를 직접적으로, 일차적으로,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이다. 이 점은 11절 이하에서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의 대비로 구체화 되는데 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존재론적 불연속성에 근거한 결정적인 차이로써 바울이 대비시키고자 하는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의 구체적인 근거가 된다. 성령의 통달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무궁한 지식세계를 향한 통달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이 아니라 위한 것이다. 계시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기능을 하는 일에 성령이 관여하는 것을 밝히는 바울의 입장은 그 초점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또한 성령은 하나님을 아시는 분이신 동시에 계시의 전달자 또는 소통자(communicator)의 역할을 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즉 성령 자신이 지식의 근원(source)이면서 지식의 소통(communication)이 되신다. 12-13절은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분별한다”며,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므로” 가능하다는 논리다. 영적인 방법이 아니고는 영적인 일에 대해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부정과 배타적 의미가 강하다. 참고로 12절에 “세상의 영”(to. pneu/ma tou/ ko,smou)은 신약성경 중 여기에서만 유일하게 사용되는 낮선 표현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이원론적 도식으로 그것을 사탄이나 악령이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 그 표현이 여기에서만 사용되는 만큼 바울의 의도가 이 문맥 속에 있을 것이다. 바울은 1장에서부터 “세상”과 “지혜”를 함께 사용하면서 시대정신(cf. Gemeingeist), 풍조, 방식, 가치관, 등을 함축하고 있다. “세상의 영” 역시 같은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판단이다. 고로 “세상의 영”은 “세상의 지혜”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서 바울에게는 “세상의 지혜”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진행하기 위한 중간적 장치라고 할 수 있겠다.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짝을 이루는 대비처럼 “세상의 영”과 “하나님의 영”을 대비하고자 하는 의도적 표현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계시의 소통은 “세상의 영”으로 집약되는 세상의 지혜와 인간의 방법 대신 “하나님의 영”으로만 가능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인 것이다. 바울의 논리는 계시의 기원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있듯이 소통의 방법도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이 문맥(고전 2:10-16)에서 바울은 성령이 전달하시려는 계시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밝히려는 것보다 오히려 전달하는 방법, 즉 성령에 의한 방법만이 계시의 소통 방법이라는 점에 무게를 두고 있는 편이다.

계시의 소통이 “세상의 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되는 것이라는 바울의 논리는 이제 14-16절에서 자연인은 하나님의 것들에 대해 알 수 없고 영적인 일들은 영적인 방법 즉 성령에 의해 가능하다는 말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 말은 곧 계시의 소통에는 포괄성과 배타성이 있다는 논리로 나아가기 위함이며 인식론적 차원에서 계시의 변증적 기능을 지지하는 또 다른 근거가 된다. 계시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 중의 하나, 즉 오직 수락과 거부만 있을 뿐 중립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에서 읽을 수 있는 논리이다. 이 차이를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yuciko.j a;nqrwpoj)과 “신령한 사람”(o` pneumatiko.j)으로 구분하였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육에 속한 사람”은, 문맥을 통해 볼 때, “영적인 사람”의 반대로, 한 마디로 성령이 없는 사람이다. 바울신학에서 흔히 이 표현은 죄의 부패와 타락의 지배를 받는 사람을 의미하는 sarkiko,j와 동의적 의미이며, 앞서 마태복음 11:25-27(눅 10:21-22)의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어린아이들”과 평행한 대비이다. 14절은 “육에 속한 사람”을 “성령의 일들을 받지 못하고”, “그것들을 알지 못하고”, 고로 그런 것들을 “어리석게 본다”고 정의하고 있다. 육의 사람에게 계시의 소통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로, 성령의 부재와 인식론적 소통의 불가능을 들고 있다. 성령의 사역이 없이는 계시는 거부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5절에서 “신령한 자”는 12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은” 자로 주해된다. “신령한 자”란 인간의 잠재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재하며, 새롭게 하며, 다스리며, 밝히시며, 도우시는 자이다. 이 “신령한 자”에 대한 결정적인 차이는 “육에 속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데 있다. 즉 여기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시의 배타성의 문제가 등장하는데, 그 배타성의 성격이 “육에 속한 자”와 “신령한 자”의 대조로 결정지어 진다. “신령한 자”와 “육에 속한 자” 사이의 배타성을 한 마디로 반틸 변증학의 핵심 개념 중의 하나인 “반립”(antithesis)으로 표현할 수 있다.

비록 일반은총의 작용에 의해 불신자가 조금은 덜 악하고 신자와 더불어 함께 살아갈 정도가 되었다 하더라도 “신령한 자”와 “육에 속한 자” 사이의 “반립”의 실재성은 전혀 완화되지 않았다. 인식론적 관점에서 불신자가 안다는 것은 반립을 전제한 활동이다. 즉 불신자는 계시로 둘려 쌓여 있어서 알기는 하나, 성령의 중생 없이는 바른 지식을 갖지 못 한다. 계시와 인식론의 관계에 있어서 배타성의 문제는 15절에서 신령한 자가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포괄성과 짝을 이룬다. 이 말은 결코 신자가 모든 것을 안다는 뜻은 아님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15절의 “모든 것”(pa,nta)은 10절의 “모든 것”(pa,nta)과 연관이 있다. 즉 신자가 모든 것을 아는 것은 근원적으로 성령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아는 것에서 기인한다. 즉 성령의 소통이 있는 영적인 사람만이 모든 것에 대해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모든 것”은 영적, 종교적 영역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포함하는 포괄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계시 즉 성령을 통해 전달되는 지식은 모든 것(포괄성)에 대해 참 지식이 가능하게 되는 인식론적 근거이다. 성령의 구원 사역 속에서 참된 인식의 활동이 가능하다. 성령은 구원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참된 인식론적 활동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성령의 소통을 통해서만 참 지식이 가능한 배타성과 성령의 소통이 모든 지식의 영역에 근거가 된다는 포괄성이 동시에 성립된다.

바울은 계시의 소통과 관련한 배타성과 포괄성의 문제를 15절에서 영적인 사람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말로 동시에 입증한다. 이 말이 영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평가로부터 초월적 위치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인식의 활동에 있어서 성령이 아닌 다른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성령에 의해 전달된 지식(계시)만이 인식론적 근거이기에 당연히 다른 인식론적 판단을 부인하는 논리이다. 배타성과 포괄성이 성령의 개입으로 인해 동시에 성립된다. 16절은 바울의 강력한 논조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사야 40:13을 인용하며 성령만이 여호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성령을 가진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우리는 만물을 가진 자가 된다. 그리스도의 마음(성령)을 가진 자에게만 계시가 소통되는 배타성과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모든 것을 가진 포괄성의 의미가 확인된다.

고린도전서 2:10-16을 통해서 성령이 계시의 사역에 어떻게 관여하시는지 살펴보았다. 성령은 계시의 근원, 전달, 접수, 이해, 해석, 설교의 모든 과정에 관여하신다. 우리의 신학활동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학활동에 통일성이 있는 것은 한 성령이 우리에게 신학의 원리(principium theologiae)를 주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감동으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시고 끝나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계시의 소통 사역을 하시는 분(agent)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히 4:12) 것은 성경의 저자들에게만 작용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시는 성령을 통해서 소통된다는 의미이다. 이것만이 우리의 설교 사역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6. 설교에 대한 실천적 제언

고린도전서 1:18-2:16에서 바울은 설교라는 미련한 방법이 하나님이 택하신 지혜인 것은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만을 증거하는 설교 속에(2:2,4) 성령의 소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 우리는 이제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설교의 사명과 역할에 대해 몇 가지 실천적 제언을 내리고자 한다.

첫째로, 가장 우선적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은 설교자가 다루는 것이 계시라는 점이다. 설교자가 성경을 다룬다든지, 성경을 설교한다든지 하는 말이 때로는 성경이라는 고문서(古文書)를 다루는 식인 경우가 있다. 설교가 마치 화석화된 문서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말이다. 때로는 흩어져 있는 공룡 뼈 몇 조각을 찾아서 어마어마한 공룡을 그려내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다 보면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서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설교자는, 신학을 하는 사람도 물론, 계시는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는 것임을 깊이 인지해야 한다. 존재론적으로 우리는 계시를 다룰 수 없는 한계에 있다는 장벽에 부딪혀야 한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계시가 지금도 살아서 우리에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설교자는 그것을 믿는 믿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론적 한계와 성령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다. 성경이 지금도 살아있는 계시인 것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고 전제의 문제이며 고로 믿음으로 수용해야만 하는 문제이다. 계시가 신적 영역의 것이라는 고백은 신적 개입이 없이 인간의 방법만으로는 소통과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고백이기도 하다(“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한다”, 고전 2:13). 계시이기에 성령의 소통이 없이는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바울의 논리이고 그 방법이 하나님이 정하신 지혜라는 것이다.

둘째로, 설교자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설교를 듣는 청중이 죄인이라는 점이다. 물론 역사적 개혁신학 전통에 있는 설교자가 인간의 전적타락을 의도적으로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가 이것을 망각한 채,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청중들이 갖고 있는 기대치에 부응해야 하는 부담을 가질 때가 있다.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듣는 청중에게 마치 스스로 계시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있는 것처럼 그들을 높게 생각할 수 있다. 청중들이 구하는 것은 다양할 수 있다(고전 1:22). 그리고 설교를 듣는 청중이 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설교를 듣는 중에도 언제든지 죄성에 의해 선포되는 계시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점도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그런 청중들에게-중생한 자들을 포함해서-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거리끼는 돌”이 되어 그들이 그 돌에 부딪치고 깨어지는 결과를 낳아야 한다(고전 1:23). 설교가 “거리끼는 돌”이 되어야 바른 설교 사역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설교란 계시의 연장선상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설교자는 계시가 어떤 소통의 방법을 통해 전달되는지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필요하다. 즉 계시의 증거는 성령의 개입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신학적 확신을 말한다. 이미 고린도전서 2:10-16을 통해서 설명되었듯이 성령만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고 성령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계시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시는 전달자이시다. 설교자는 성령에 의존하지 않고는 설교 사역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설교하는 중에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성령에 의지하며 설교할 때 설교자가 비로써 설교의 부담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많은 경우에 인간의 슬기와 지혜로(예, 예화나 인용을 통해) 청중들에게 감동을 주려고 할 때, 그것은 매번 설교자에게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설교자 자신이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충성되게 설교를 준비하였다면, 소통은 전적으로 성령께 맡겨야 한다. 그 때 비로써 설교자가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스러울 수 있다.

넷째로, 설교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계시의 변증적 기능에 종속되어야 한다. 계시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듯이, 설교 또한 마치 모든 사람을 만족시켜야 할 것 같은 부담을 져서는 안 된다. 설교의 미련한 방법이 오히려 여전히 세속주의와 인간의 자율에 메여 있는 사람들이 걸려 넘어져야 할 거침돌이 되어야 한다. 늘 잘 되기만을 기원하는 설교는 청중을 안일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넘어지고 깨어지는 경험은 누구에게도 유쾌한 일이 아니지만 그리스도가 거침돌이 되어 걸려 넘어지고 깨어지는 일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가 기존의 세계관이 깨어지지 않은 채 그 위에 기독교를 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세속주의 젖어 있는 사람이 기독교를 아무런 거부감이나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그 복음제시 자체가 잘못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가 전해졌을 때 상당한 저항과 반발이 있을 것은 이미 계시가 예측하고 있는 바다. 계시를 증거하는 사역을 하는 설교는 이 점에 있어서 계시의 변증적 기능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런 거부와 저항을 감당하는 것이 설교자의 몫일 것이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설교할(고전 2:2) 수 있는 확신에 찬 용기가 필요하다.

다섯째로, 설교는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대결하는 장이다. 설교가 과거 책이나 신문이 귀하던 때는 설교 고유의 말씀선포 기능 외에도 지식과 시사 그리고 심지어 엔터테인먼트의 역할을 겸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설교가 대중 매체나 엔터테인먼트의 역할을 하는 시대가 아니다. 청중들은 더 생생하고 빠르고 재미나는 볼거리, 들을 거리들을 얼마든지 선택하여 즐길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세상의 지혜의 관점에서 볼 때, 설교는 더 이상 청중들의 구미를 만족시킬 수 없다. 안타까운 것은 여전히 설교를 세상의 지혜의 잣대로 평가하고 접근하는 설교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설교가 더 미련스럽고 바보스럽게 그리스도를 전하는 방법이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겠는가! 세상의 지혜에 익숙한 청중들을 하나님의 지혜로 깨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고전 2:5) 아니겠는가! 설교는 계시의 선포의 장이면서 동시에 변증의 현장이기도 하다.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충돌하는 싸움터이라는 말이다.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 중 어느 한 쪽으로 승리가 돌아갈 것이다. 성령의 소통을 믿고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설교가 될 때 승리의 영광이 하나님의 지혜로 돌아가는 길이 될 것이다.

 

7. 나가는 말

논문을 시작하면서, 설교는 하나의 문화라는 말을 썼다. 긴 시간에 걸쳐 설교자와 청중이 피차간에 익숙해진 내용과 형식이 만들어 진다. 설교자는 각기 다른 청중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세상의 지혜를 동원하고, 청중은 설교자가 제공하는 세상 지혜의 맛에 길들여진다. 그러다 보면, 악순환은 계속되고, 교회는 생명력을 상실해 가기 마련이다. 비극은 어느새 교인들이 세상을 이길만한 힘이 없는 병약한 존재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이다. 세상의 지혜를 쫒아가는 설교문화가 낳은 결과이다. 설교는 애초부터, 세상의 지혜의 관점에서 볼 때, 효율적이지 못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바울도 설교를 “미련한 것”(고전 1:21)일 뿐만 아니라, 듣는 청중을 걸려 넘어뜨리는 “불편한 돌”(고전 1:23)이라고도 평하였다. 불편한 현실 속에서도 설교가 감당해야 할 사명은 계시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변증적 기능에서 기인한다. 계시는 타락한 인간의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을 하였고, 그러나 어느 때고 그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교자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명이란 점에서 계시의 내용과 소통의 형식에 종속되는 것이 맞다.

이런 취지하에 본 논문은 계시에 대한 조직신학적-변증학적 기대를 바로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확신에서 출발하였다. 그것은 설교는 계시(특별계시)를 다루는 것이고, 그 계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계시의 소통은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신학적 확신을 말한다. 설교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고전 2:2)가 결정하고, 형식은 성령의 소통(고전 2:10-16)에 의해 지배된다. 설교자와 청중이 오해된 설교문화에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실천적 효과를 위해 우리는 계시(내용)와 성령(형식)의 관계에 대한 변증학적 담론에서부터 출발하여 계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변증적 기능을 하고 그 소통은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논지를 입증하였다. 설교자 청중 모두 그릇된 기대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과거에는 교인들이 두 시간 이상이 되는 딱딱한 설교를 들을 줄 아는 시절이 있었다. 그것이 피차에게 용납되는 문화였다. 언젠가부터 설교가 짧아지고, 재미있어야 하고, 들려지는 설교여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설교자와 청중은 어떤 관계에서 만났고, 서로에 대해 어떤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 바른 것인지 정립이 필요하다. 교인들이 할 일이 아니라, 설교자가 할 일이다. 반발이 많을 것이고,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혹 교인들이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설교자와 청중 피차간에 각인되어야 한다. 설교는 미련한 것이고, 성령이 아니고선 소통되지 않는다는 분명한 이해를 공유하는 설교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을! 세상의 지혜의 관점에서 보면 미련하고 불편한 방법이지만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성령의 소통에 의존하는 방법만이 하나님의 지혜의 방법임을 믿는 설교만이 설교자와 청중을 피차 잘못 설정된 문화로부터 자유케 하리라고 확신한다.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이사야 55:10-11).

 

 

 

http://www.reformednews.co.kr/sub_read.html?uid=3039§ion=sc8§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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