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훈 박사, "복음서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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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을 교수하고 있는 김창훈 박사가 「신학지남」 2014년 가을호에 기고한 논문이다. 현대는 흔히 설교의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성경적인 설교를 듣고 싶어 갈급해 하는 성도들이 많다. 이런 의미에서 김창훈 박사의 복음서 설교에 대한 논문은 한국교회에 바른 설교, 성경적 설교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것이다. 이에 요약하여 소개한다. 들어가는 말 아마 복음서는 그동안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설교해 온 본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복음서는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가장 효과적으로 소개할 수 있고, 복음의 본질과 핵심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본문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복음서가 바르고 온전하게 해석되어 설교되지 못하고, 왜곡되거나 미흡하게 해석되어 설교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판단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복음서가 바르고 온전히 설교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사항들 또는 필요한 지침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I. 복음서의 본질 성경의 모든 부분과 같이 복음서 설교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서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잘 드러내는 것이다. 필자는 그것을 ‘하나님 중심적 접근(설교)’이라고 명명한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의도된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바르고 온전히 설교하기 위해서 복음서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1. 해석된 역사로서 복음서 복음서는 네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은 전체적인 구조와 내용이 비슷하기 때문에 ‘공관복음서(The Synoptic Gospels)’라고 불린다. 그런데 문제는 공관복음서들의 순서나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 다른 점들이 많다는 것에 있다. 물론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여러 가지 비평적 접근들을 통해 공관복음서의 차이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지금까지 모든 사람이 동의할 만한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힘들 것이라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비평적 연구들을 통해 도출된 제안이나 결과들은 모두 가설(hypothesis)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한 권만 있어도 될 것 같은데, 왜 유사한 복음서가 세 권이나 되는지, 또한 왜 그 복음서들 안에 해결하기 쉽지 않는 차이점들이 있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복음서를 온전히 설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공관복음서의 차이점들을 설명 또는 해결하기 위해 복음서의 기록 목적 또는 장르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다시 말해, 복음서 기자들은 현대 과학적 의미에서 예수님의 전기를 쓰려고 하거나 또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사실(史實)들을 그대로 재생하여 보고하려고 복음서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접근과 견해에 동의한다. 필자는 복음서 기자들이 특별한 공동체를 대상으로 특별한 환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과 삶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와 교훈을 전하고 가르치기 위해 복음서를 썼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복음서 기자들은 각각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의 생애와 삶과 사역과 관련하여 구전되거나 단편적인 자료들을 선택하여 정리하거나 수정하거나 해석하여 복음서를 기록하였던 것이다. 한 마디로, 복음서 저자들은 ‘신학자’요 ‘설교자’로서 ‘해석된 역사’로서 복음서를 쓰고 전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셨음을 필자는 믿는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생애와 삶과 사역을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성령께서 복음서 저자들에게 역사하셨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도 예수님의 생애와 삶과 사역의 의미를 더욱 풍성하고 완전하게 가르치고 전달하는데 네 권의 복음서 모두가 다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네 권의 복음서 모두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Burridge는 사 복음서를 네 방향에서 그린 예수님의 ‘네 개의 초상화’로 비유하였고, 양용의는 사 복음서를 예수님에 대한 아름다운 하모니를 보여주는 ‘사중창의 노래’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복음서는 역사적으로 정확하고 신뢰할만한 저작이라는 것이다(참고. 눅 1-4). 복음서는 결코 복음서 기자들이 지어낸 가상의 이야기(fiction)가 아니다. 물론 복음서의 역사적 정확성과 신뢰성은 오늘날 우리의 과학적 기준이 아니라 복음서가 쓰여 질 당시의 기준으로 접근해야 한다. 다시 말해, 복음서의 역사적 정확성은 연대기적 또는 역사 기술적 또는 문자적 정확성을 의미하기 보다는 ‘수사학적 정확성’을 의미한다. 2. 복음서의 기록 목적 성경의 모든 부분을 설교할 때와 마찬가지로 복음서를 바르고 온전하게 해석하고 설교하기 위해서는 ‘복음서의 기록 목적’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 복음서의 기록 목적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20:31에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 아들19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복음서의 저작 목적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복음서의 기록 목적은 마가복음 1:1에도 잘 나타나 있다. 우리말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동사가 없다. 영어로 번역하면,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Jesus Christ, the Son of God’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1:1을 좀 더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해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보건데, 마가복음 1:1은 단순히 마가복음의 한 구절이라기보다는 마가복음의 타이틀(제목)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타당하고, 또한 이 타이틀은 마가복음의 주제와 목적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면 마가복음 1:1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예수님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과 동격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또는 선지자나 교사)이 아니고, 구약에서 계속 예언되었던 그리스도(메시아)시요,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과 하나님 되심’이 마가복음의 주요한 관심사요 기록 목적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마가복음 1:1은 마가복음이 ‘복음의 시작(The Beginning of Gospel)’에 대한 책임을 말한다. 그러면 ‘복음의 시작’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격이고, ‘복음의 시작’에서 소유격은 구문론적으로 ‘주격(기원)’을 의미한다고 판단된다. 그러니까 ‘복음의 시작’은 ‘복음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시작’ 또는 ‘복음 되신 예수님을 통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시작(αρχη)’은 창세기 1:1의 ‘태초’를 헬라어(70인경)로 번역할 때 쓰였던 단어이다(참고. 요 1:1). 이것은 예수님을 통한 복음의 새로운 시대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와 같은 또 한 번의 새로운 시작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강조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참고. 고후 5:17). 결론적으로, 마가복음 1:1에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주제와 목적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즉,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마가복음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와 같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여신 사실이 책의 주제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책의 주제와 목적이 마가복음 안에 실제로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공생애가 끝나갈 무렵에, 그러니까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실 것을 본격적으로 말씀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주는 그리스도 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였다. 그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본격적으로 드러내놓고 자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얼마 후에 공생애를 마치셨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그 때까지 예수님의 공생애의 모든 사역과 가르치심의 핵심 그리고 목적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리스도 되심의 고백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음을 보여준다. 이상의 논의에 동의한다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생애와 삶과 사역과 말씀을 복음서의 기록 목적인 예수님의 하나님이심과 그리스도이심에 초점을 맞추어 접근하는 것이 설교자의 의무일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한센 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한 사건을 보자(마 8:2-4, 막 1:40-45, 눅 5:12-16). 많은 설교자들은 단순히 한센 병에 걸린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가 병 낫기 위해 한 일을 본받자고 설교한다(이러한 접근을 흔히 ‘인간중심적 설교’라고 한다). 그러나 설교자는 이 사건에서 한센 병 걸린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되고 우선적으로 이 사건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리스도 되심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연결고리를 발견해야 한다. 필자는 이 사건의 핵심이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을 통해 복음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이제 이스라엘의 특권적 위치가 없어지고 혈통적이고 민족적으로 제한되었던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열리게 되는 복음의 새로운 시대 또는 새로운 언약 공동체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사건이 이렇게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마태복음에서는 산상수훈 바로 다음에, 마가복음에서는 첫 번째 공개적인 치유 사건으로, 누가복음에서는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신 사건 바로 다음에 언급하고 있다. 또 하나의 예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보자(마 9:1-8, 막 2:1-12, 눅 5:17-26). 이 사건도 역시 많은 설교자들이 본문에 등장하는 인간들을 중심으로 접근하여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의 믿음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사건 역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 자체에 의미와 목적이 있지 않다.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신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선생이나 선지자가 아니고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메시아 관을 가지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서기관들과 바리세인들 앞에서 죄의 문제로 어려움 가운데 있던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심으로 그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것을 확인시켜 주셨던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주해와 설교에 있어서 그 부분에 우선적인 관심과 강조를 보여주어야 한다. 요약하면, 복음서를 주해하고 설교할 때 설교자의 일차적인 관심과 초점은 복음서의 기록 목적을 기억하여 본문이 어떻게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리스도 되심을 드러내는가?’에 모아져야 한다. 3. 복음서의 핵심 주제: 하나님 나라 복음서 설교에 있어서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복음서 전체의 핵심 주제에 대한 것이다. 전체 복음서의 핵심적인 주제가 하나님 나라(또는 하늘나라)라는 것에 대한 학자들의 일반적인 동의가 있다. 실제로 공관복음서에서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하늘나라(Kingdom of Heaven)’ 또는 ‘그 나라(The Kingdom)’라는 용어는 76번의 상이한 문맥들(병행구 문맥을 합할 경우 103번) 속에서 나타나고(마태복음 50번, 마가복음 14번, 누가복음 39번), 요한복음에서는 5번 나타난다. 횟수 뿐 아니라 마가복음 1:15에서는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를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고 요약하였다. 또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셨다고 직접 말씀하셨고(눅 4:43), 복음서 기자들도 예수님의 사역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기록하였다(마 4:23, 9:35). 그리고 복음서를 보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복음 되신 예수님을 믿는다’ 또는 ‘영생(생명)을 얻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예수님과 부자 청년의 만남에서 그 청년은 영생에 대해서 물어보았는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로 바꾸어서 설명한다(마 19:16-30, 막 10:17-31, 눅 18:18-30).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통해 임한 새로운 복음의 시대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설명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주 비유로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셨고, 사도행전 1:3에서는 부활하신 다음에 40일간 이 땅에 머무시면서 가르쳤던 핵심적인 내용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었다고 말씀한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가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도 일반적 동의가 있다. 먼저 하나님 나라는 현재와 미래의 양면성이 있다. 그러니까 한 편으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역사 안에 이미 임했고 지금 우리가 누릴 수 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역사의 마지막 날에 완성된 형태로 임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주된 초점이 장소(또는 공간)라기보다는 다스림 또는 통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었고, 예수님의 오심이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면 복음서를 바로 해석하고 설교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하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설교해야 한다. 예를 들어, 복음서의 많은 부분에서 예수님의 치유 사역과 축사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설교자들은 그러한 사건들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육체적 병 고침이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적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왜곡되게 전할 수밖에 없다. 병 고침과 귀신을 쫓아내신 사역들은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결과들이다. 또한 병고침은 포괄적으로 육신의 연약함에서 회복됨을 의미하고, 귀신을 쫓아냄은 본질적으로 모든 얽매여 있는 것(물질, 명예, 정욕 등)에서 해방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면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가 극복되고, 또한 우리가 얽매여 있는 것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와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은혜와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음을 말씀한다. 그것은 ‘믿음과 회개’이다(마 4:17, 막 1:15). 이것은 요한복음 20:30-31의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리스도 되심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와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서 믿고 회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의 개념에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믿고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아들여 하나님(예수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삼고(믿음), 하나님께로 신앙과 삶의 방향을 바꾸어야 된다(회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항상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또는 복음을 통하여) 오는 놀라운 복과 풍성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인정하여 주인으로 모시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사람이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믿고 회개하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제시하셨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부자 청년과의 대화에서 나타난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신다(마 19:16-22, 막 10:17-31, 눅 18:18-30). 그 때 천국을 경험할 수(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명령한 것을 일반화시켜서는 안 된다. 그 부자 청년에게는 재물이 아킬레스건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부모와 형제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마 10:37, 눅 9:24).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경험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는 신앙과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말씀하신 것이다. 요약하면, 복음서를 바르고 온전히 설교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다시 말해, 복음서를 설교할 때 기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특징이 무엇인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 경험하게 되는 은혜와 복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풍성히 경험할 수 있는지를 자세하고 분명하게 설명해야 하고, 또한 그 관점에서 예수님(복음)을 전해야 한다. II. 복음서의 주해 본문을 주해할 때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많다. 일반적으로 문맥, 단어, 구문론 그리고 역사적/문화적/지리적 배경 등이 본문을 주해할 때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소들로 간주된다. 물론 본문의 장르나 성격에 따라 주해할 때 강조되는 부분은 약간씩 다를 수 있다. 지면이 한정된 본고에서 복음서 주해를 위해 필요한 모든 부분들을 논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필자가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몇 가지만을 논의하고자 한다. 1. 차이점(다양성)에 대한 관심 앞에서 우리는 복음서는 네 권으로 구성되어진 해석된 역사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특별한 목적과 상황을 고려한 해석된 역사로서 네 개의 복음서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생애와 삶과 사역을 다양한 관점에서 보게 하는데, 설교자가 각 복음서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바르게 설교하기 위해서는 복음서 간의 차이점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복음서 간의 차이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내용상의 차이이고, 다른 하나는 구성(순서)상의 차이이다. 먼저 내용상의 차이를 보여주는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마태복음(5:3)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누가복음(6:20)에는 그냥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한다. 마태복음 5:40에서는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했는데, 누가복음 6:29에서는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라고 말씀함으로 겉옷과 속옷의 순서가 바뀌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의 사건에 대해서 마태복음(4:1-11)과 누가복음(4:1-13)은 순서를 바꾸어서 기록하였다. 예수님을 찾아 왔던 부자 청년에 대한 기사에서 마태복음(19:16-30)과 마가복음(10:17-31)은 그 청년이 현장을 떠나간 다음에 예수님께서 재물과 하나님 나라에 대해 교훈하신 것으로 기록하였는데, 누가복음(18:18-30)에서는 그 청년이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재물에 대해 교훈을 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물론 이 외에도 일견 잘 이해되지 않는 많은 차이점들이 복음서 사이에 나타난다. 또한 구조(순서)적으로도 차이나는 부분들이 많다. 예를 들어, 공관 복음서에서 베드로 장모 치유와 제자들을 부르심과 나병 환자 치유의 순서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에는 제자들을 부르심-나병환자 치유-백부장 하인치유-베드로 장모 치유의 순서대로 기록되었는데,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을 부르심-베드로 장모 치유-나병환자 치유의 순서대로 기록되었고, 누가복음에서는 베드로 장모 치유-제자들을 부르심-나병환자 치유의 순서대로 기록되었다. 또한 마태복음에서는 주님을 따르는 자의 자세에 대한 교훈-바다를 잠잠케 하심-귀신들린 두 사람 치유(8:18-30)-가족 만남(12:46-50)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고, 마가복음에서는 비유로 가르치심-바다를 잠잠케 하심-귀신들린 사람 치유(4:33-5:20)의 순서로 나타나는데 누가복음에서는 가족 만남-바다를 잠잠케 하심-귀신들린 사람 치유(8:19-39)의 순서로 나타난다. 이러한 복음서 간의 차이점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목적 때문이다. 하나는 복음서의 통일성에 근거한 조화와 보완을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각 복음서의 다양성에 근거한 복음서마다의 독특한 의미와 메시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삶과 사역의 조화만을 위해 차이점들에 관심을 갖는다. 물론 그러한 접근도 중요하고 또한 필요하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다른 관점에서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기술함으로 내용적으로 상호보완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교자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목적과 상황을 고려한 해석된 역사로서 네 개의 복음서를 주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 복음서 간의 내용이나 전개가 다른 본문들을 다룰 때 무조건 통일을 추구하거나 억지로 꿰맞추기보다는 여러 가지 요인들을 고려해서 각 복음서 간의 차이 가운데 드러난 신학적 의미와 메시지를 파악하고 필요하다면 드러내어 설명해야 한다. 그 때 각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생애와 삶과 사역의 의미가 더욱 풍성해 질 수 있다. 물론 설교 때에 복음서의 차이점들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나 혼란을 주는 불필요한 설명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설교자가 본문을 연구하는 단계에서 복음서 간의 차이점들을 살피고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더 깊은 의미를 파악해서 필요하다면 그 부분을 부각시켜 설교하는 것도 중요하고 필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Robert L, Hubbard, Craig L. Blomberg 그리고 William W. Klein의 주장은 인용할만하다. 복음서 내의 주어진 한 본문의 해석과 적용은 이 본문을 다른 병행구절들과 즉시 연결시킴으로써 본문의 독특성을 흐리게 하기 보다는 본문이 속해 있는 복음서의 특정한 강조점을 부각시키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은 복음서의 조화를 영감 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네 개의 구별된 것들을 영감 되도록 선택하셨으며, 우리도 우리의 해석을 통해 하나님의 선택을 손상시키기 보다는 이를 존중해야 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복음서 간의 차이점들과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복음서 간의 대조를 보여주는 자료를 참고해야 하며, 또한 각 복음서의 핵심 주제, 역사적 사회적 특징 그리고 기록 목적 등을 알아야 한다. 2. 문맥에 대한 관심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문맥을 고려하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서도 예외는 아니다. 문맥은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1) 가까운 문맥 모든 본문의 이해에서 가까운 전후 문맥의 중요성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다. 때로는 본문의 의미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가까운 전후 문맥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복음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0:1-16의 소위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살펴보자. 이 비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는데 혹자는 이 비유에서 한 데나리온은 구원을 상징한다고 하면서, 언제 믿어도 같은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혹자는 뒤에 온 사람은 앞에 온 사람보다 더욱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같은 상급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의 핵심 주제는 문맥을 보면 분명해 진다. 마태복음 19:27이하를 보면, 부자 청년은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을 듣고 근심하며 가버렸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미 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기 때문에 일종의 ‘우월감’ 또는 ‘우쭐함’을 가지게 되었다(마 19:27). 그렇게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헌신하였기 때문에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더욱 겸손하게 그리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봉사하고 섬기라고 교훈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 비유의 앞뒤에 예수님께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1, 20:16)”는 경고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결국 가까운 문맥을 통해서 볼 때, 이 비유는 구원이나 동일한 상급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 겸손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자세에 대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보자.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건이 두 번 기록되었다(막 8:22-26; 10:46-52). 그런데 특별한 것은 그 두 사건이 십자가에 대한 설명(막 8:27-10:26) 바로 전후에 언급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복음서 저자가 아무 의도 없이 이렇게 배열하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복음서 저자는 제자들이 십자가에 대한 본격적인 가르침 전에 그리고 가르침 후에도 여전히 주님의 사역과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특히 십자가 사건을 설명한 후에 소경에게 하신 질문과 바로 앞에서 제자인 야고 보와 요한에게 한 질문이 같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또는 너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막 10:36, 51)”고 질문하셨다.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할 때 제자들은 책망을 들었고 그 소원이 성취되지 못하였으나, 소경은 믿음의 칭찬을 받으면서 그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제자들의 소원은 인간적인 욕심에 끌려 자신이 높아지려는 것이었지만, 소경의 소원은 삶의 절박한 문제를 가지고 자기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 결정적인 차이였다. 그러니까 소경이 고침 받은 두 사건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이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복음서 저자)께서는 예수님께서 소경을 고치는 사건들을 통해 당시의 독자(또는 청자)들과 오늘날 독자들에게 십자가를 통해 임하는 예수님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영적인 눈의 회복이 필요함을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복음서를 설교할 때는 전후 문맥과 관련하여 특별히 고려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각 복음서는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같은 사건이라고 해도 같은 관점에서 일반화하여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문맥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여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른 복음서들과는 다르게 마가복음에는 세례 요한의 순교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막 6:14-29)를 주님께서 제자들을 전도하도록 파송하고 돌아오는 이야기 사이에 위치시켰다(막 6:7-13, 30-31). 이것은 마가복음의 저작 의도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마가복음은 고난과 핍박과 심지어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제자도에 대해 강조하는 책인데, 이러한 배열은 그것을 확인시켜 준다. 이러한 특별한 문맥을 고려하여 설교하는 것이 저자의 의도를 온전히 드러내는 설교이다. 또한 마가복음 4:35-6:6에는 네 기적(바다를 잠잠케 하심, 귀신들을 돼지 떼에 넣으심, 혈루병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치료하심)이 시리즈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리즈가 다른 복음서와는 약간 다르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막 4:26-34) 바로 다음에 등장한다. 거기에 저자의 의도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건들을 전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임함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하나님(저자)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경 전체의 문맥 한 본문을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주해와 설교의 기본이다. 그런데 특별히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을 기록한 복음서는 성경 전체(특히 구약)의 빛 아래서 볼 때 온전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이 모두 구약을 배경으로 행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예수님께서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고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마 15:11, 막 7:15-16)” 이라고 선포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을 포함한 무리들은 그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막 7:17-18).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서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지 못하는 음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철저하게 이 규례를 지켜 왔다. 그리고 초대교회 상황을 보면 이러한 삶의 형식이 얼마나 그들에게 뿌리 깊게 박혀 있었는지를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다(참고, 행 10장, 15장). 그런데 음식에 대한 규례는 모든 민족이 다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에게만 준 명령이다(신 14:2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 법을 주신 것은 그들이 음식의 구별된 섭취를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민족임을 늘 기억하고 다른 이방 민족들과 구별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 음식에 대한 규례는 구원사적으로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시적으로 주신 것이지 영원하고 우주적인 계명으로 주신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음식이 사람을 정하게 하고 부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고 모든 식물은 깨끗하다(막 7:19)고 말씀하심으로 음식법의 해체를 선언하셨던 것이다. 요약하면, 예수님의 이러한 음식 법에 관한 해체의 선포는 단순히 정결과 부정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 중에서 이제 이스라엘의 특권적인 위치가 사라지고 모든 민족을 포함하는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예수님을 통해서 도래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원리가 예수님께서 한센 병자를 고치고 혈루병 걸린 여인을 고치는 사건에서도 보여 진다. 레위기 11-15장을 보면 정결과 부정에 대한 세 가지 실례가 언급된다. 그것은 음식법, 한센병 그리고 유출병에 관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센 병이나 유출병에 걸린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분리시켰고, 또한 그들과 접촉하는 것도 부정하게 여겼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한센 병자를 친히 만져서 고쳐 주셨고, 유출병 걸린 여인을 치료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사건들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을 통해 구원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한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 주신 것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 ‘안식일’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께서는 당시 파격적으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주어졌고, 또한 안식일은 선을 행하는 날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2:1-14, 막 2:23-3:6, 눅 6:1-11).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고 충격적인 선포였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에서의 안식일의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한다. 출애굽기 16:22-30, 20:8-11; 23:12; 31:12-16 등에는 안식일의 의미와 안식일을 지키는 구체적인 방법이 기록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조 후에 쉬셨기 때문에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며 철저히 쉬면서 안식일을 지켜야 했다. 어떤 노동도 해서는 안 되었고 심지어는 손님이나 기르는 가축까지도 쉬게 해야 했다. 그와 같이 지키지 않으면 죽이라고까지 명령하셨다. 그런데 이 안식일의 개념이 구속사의 진전에 따라 발전적으로 변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애굽기에서는 창조를 기념하기 위해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했는데, 신명기 5:12-15에서는 안식일을 지켜야 할 이유를 ‘창조’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으로 바꾸어서 말씀한다. 그러니까 안식일은 창조의 구원을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진정한 쉼과 회복을 경험할 수 있는 은혜와 복의 날이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안식일을 인간에게 족쇄를 채우는 날로 만들어 버렸다. 사실 안식일에 대한 문제는 율법 전체에 대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율법에 있어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산상수훈에서도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율법을 곡해 하고 있었다.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주고 그 안에서 그들과 하나님과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주기 위한 일종의 선물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율법을 짐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선포를 하심으로 안식일 그리고 더 크게는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 주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창조주요 구원의 주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음식법의 해체에 대한 말씀이나 한센병과 유출병 걸린 사람을 치유하신 것은 단순히 먹는 문제나 병 치료가 아니라 구원과 관련한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또한 안식일에 대한 문제는 단순히 율법의 의미를 바르게 설명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이시오 구원자로서 예수님 자신에 대한 언급이다. 이와 같이 성경 전체 특히 구약의 빛에서 이 말씀들을 보지 않으면 그 말씀들의 바르고 깊은 뜻을 알 수 없다. 3.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배경에 대한 관심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배경(상황)은 성경을 바르고 깊이 보는데 중요하다. 복음서도 예외는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마 21:18-22, 막 11:12-14, 20-25). 이 말씀은 당시의 상황과 배경을 모르면 오해하기가 쉬운 말씀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본문이 기독교를 부인하게 되는 이유가 되는 본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는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다고 주님께서 저주하신 것은 건전한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의 피상적이고 잘못된 이해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무화과나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팔레스타인에서 무화과나무가 주로 수확되는 시기는 보통 6월부터 7월경이었다. 그런데 열매를 맺기 시작한 때는 보통 3월이나 4월경이었다. 보통 이런 열매들을 대개 ‘푸른 열매,’ ‘이른 열매,’ 또는 ‘처음 열매’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이 무화과나무는 성숙한 열매가 맺을 때는 시기가 아직 남아 있지만 푸른 열매를 이미 맺혀야 했다. 또한 무화과나무의 열매 맺는 과정을 보더라도 나무가 이렇게 잎이 푸르렀기 때문에 당연히 그 안에 푸른 열매가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 나무에게는 이상하게도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열매가 없는 나무에 심판을 선언하신 것은 우발적이고 감정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그 나무를 마르게 함으로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원하셨던 것이다. 이혼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음행한 연고 외에 이혼하는 것은 간음이라고 하시면서 이혼은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선포하신다(마 5:31-32; 마 19:1-9, 막 10: 1-12). 그런데 구약에서는 수치 되는 일이 발견되면(수치 되는 일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이혼 증서와 함께 이혼을 할 수 있도록 말씀하였다(신 24:1-4). 이러한 말씀들을 보면 일견 이혼과 관련하여 율법과 예수님의 말씀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말씀들을 바로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배경과 상황을 알아야만 한다. 먼저, 구약에서 이혼을 명한 시대적 배경이다.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여자들을 마치 노리개나 노예와 같이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여자를 바꾸었다. 그리고 여자들은 집에서 쫓겨난 후에도 법적으로 한 남자의 아내로 계속 남아 있어야 되었고, 만약 결혼하게 되면 그 사람은 사회에서 소외되어 창녀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혼 증서를 주라고 한 것은 먼저 이혼 증서를 줌으로 이혼 문제에 대해서 신중함을 기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래도 증서를 주기 위해서는 한 번 더 생각하지 않겠는가? 다음으로, 이혼 증서를 줌으로 이혼 당한 여자들이 거리낌 없이 재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볼 때 모세의 명령은 이혼을 찬성하거나 조장시켰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혼을 억제시키며 아내들이 남편의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신약 시대의 시대적 배경을 아는 것도 필요하다. 예수님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구약의 말씀을 악용하여 이혼 증서만 주면 되었기 때문에 조그마한 일에도 꼬투리를 잡아서 이혼을 하였다. 예를 들어, 당시에 진보주의자들이었던 힐렐(Hillel) 학파에서는 신명기 24:1에서 이혼 사유로 말씀하는 ‘수치되는 일’을 넓게 적용하여 이혼을 아주 쉽게 생각하였다. 아내가 접시를 깨트리거나 자신의 아내보다 더 훌륭한 여인을 만나도 이혼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인 결혼 제도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아주 강력하게 음행의 연고 없이는 이혼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한 것이다. 결국 이렇게 역사적 문화적 배경 하에서 이혼에 관한 문제를 살펴볼 때,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말씀과 전혀 대립되지 않는다. 율법의 명령과 예수님 말씀은 모두 결혼 제도와 관련하여 당시 잘못된 관행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악용되는 것을 바로 잡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III. 복음서의 적용 이상에서 우리는 복음서를 바르고 깊게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점검해 보았다. 그러면 그러한 주해에 근거하여 복음서에서 어떤 적용을 제시할 수 있는가? 물론 적용은 본문의 주해에 따라 바르고 자연스럽게 제시되어야 하는데, 필자는 복음서는 크게 네 가지 관점에서 적용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복음 제시 무엇보다도 설교는 복음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설교의 중심에는 항상 복음이 있어야 하고 또한 복음이 바르고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강단에서 복음이 왜곡되게 선포되는 상황에서 복음서는 어느 성경보다도 적용의 관점에서 복음의 본질과 핵심을 제시하기에 자연스럽고 적실한 본문이다. 어쩌면 여기에 복음서 설교의 당위성과 우선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설교를 통해 복음이 제대로 선포되고 설명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만약 복음서를 설교하면서 신앙과 삶에 관한 적용이 아무리 효과적으로 제시된다 할지라도 복음이 온전히 선포되지 않는다면 복음서 설교의 특권과 유익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복음서 설교를 통해 바른 복음을 제시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위에서 우리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과 삶의 초점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리스도 되심을 드러내는데 있고, 또한 예수님 말씀과 사역의 중심 주제가 하나님 나라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복음서의 거의 절반가량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이나 예수님께서 행하신 병 고침이나 기적들을 피상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선택된 본문의 의미와 의도를 바르고 깊게 파악해서 전하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지 않을 수 없고 복음의 본질과 핵심이 전해지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설교자는 복음서를 바로 주해하여 복음을 올바로 그리고 분명하게 제시함으로 청중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한 복음의 본질과 핵심을 제대로 알아서 복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는 것을 복음서 설교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2. 복음이 요구하는 신앙과 삶에 대한 적용 복음의 제시와 함께 반드시 동반되는 것은 복음이 요구하는 신앙과 삶에 대한 부분이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설명하시면서 자주 그것이 요구하는 신앙과 삶에 대해 말씀하셨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믿음과 회개를 말씀하셨다. 부자 청년에게 영생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따르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부모와 형제와 자식과 전토를 버려야 한다고 하셨다. 예수님 자신의 고난과 십자가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고난과 핍박 심지어 죽음까지 각오하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용서 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섬기는 것이 예수님 자신을 돌아보고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다. 이 외에도 복음이 요구하는 신앙과 삶에 대한 많은 말씀들을 하셨는데, 이러한 명령들을 보면, 예수님 요구의 대부분은 보통 사람의 이해와 상식을 뛰어넘는 아주 강력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다(마 13:44-46). 따라서 설교자는 복음서를 통해 복음의 본질과 핵심을 설명하면서 본문에 언급되어 있는 대로 세상 사람의 기준을 훨씬 뛰어 넘는 복음이 요구하는 신앙과 삶에 대해서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고 강력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적용을 제시해야 한다. 3. 예수님의 사역과 삶의 적용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구원자이시지만 예수님의 사역과 삶의 많은 부분들은 우리 신앙과 삶에 교훈을 준다(참고. 빌 2:5-11). 따라서 복음서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과 삶의 모범을 청중에게 적용으로 제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마가복음 1:9-13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마귀에서 시험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필자는 이 두 사건은 예수님 공생애 전체의 밑그림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사건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죄가 있는 인간이 되셨음을 보여준다. 또한 세례를 받은 후에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은 성육신한 예수님의 생애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생애라는 것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신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이 궁극적으로 사단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또한 사단의 시험에서 승리하심으로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것을 보여주셨다.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과 연결하여 다음과 같이 두 가지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예수님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신앙생활을 하자. 다음으로, 예수님처럼 우리도 주님을 의지함으로 마귀와 싸워서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자.” 또한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바쁘신 사역 가운데서도 새벽 미명에 습관을 쫓아 기도하시고, 또한 전도에도 열정을 보이신 것을 알 수 있다(막 1:35-39, 눅 4:42-44). 설교자는 이 말씀을 근거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또한 예수님께서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전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전도해야 한다고 적용을 제시할 수 있다. 4. 모범적인 적용 복음서를 하나님 중심적으로 설교할 때 우리가 빠지지 말아야 할 함정들이 몇 개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간중심적 접근이다. 인간중심적 접근은 복음서를 이해하고 설교할 때 예수님이 아니라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위에서 우리가 살펴본 대로 한센 병자를 치료한 사건의 구속사적 의미는 전혀 부여하지 않고 단지 한센 병자를 주인공으로 삼아서 적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접근이다. 그러나 그 사건에서 구속사적 의미를 드러낸 다음에 복음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범적인 신앙과 삶을 적용의 측면에서 교훈으로 제시할 수 있다. 이것이 모범적인 적용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한센 병을 치료한 사건을 보자. 설교자는 그 사건의 구속사적 의미를 설명하고, 한센 병에 걸렸던 사람의 모범적인 측면을 적용할 수 있다. 다음은 그러한 접근의 요약이다. 한센 병자의 치료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으로 인해 복음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보여주셨다. 또한 예수님을 통해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와 복이 모두에게 열려있음도 보여주셨다. 따라서 혈통, 민족, 사회적 신분에 제한 없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와서 복음의 새로운 시대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러면 주님께서 여신 새로운 시대의 은혜를 누리는데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센 병자의 믿음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1) 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다. (2) 가장 낮고 겸손한 자세로 주님께 엎드리는 것이다. (3) 조금도 의심치 않고 신뢰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IV. 복음서의 설교 형식 바울 서신과 같은 소위 ‘강화체(discourse)’ 형식의 본문과 복음서와 같이 내러티브 형식이 주를 이루는 본문의 설교 형식과 전개 방식은 기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강화체 본문은 논리적으로 내용이 전개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본문의 논리 전개를 따라 설교를 작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반면에 내러티브는 논리의 전개라기보다는 플롯에 의해서 본문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플롯을 고려하여 설교가 전개되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설교자들이 문학 장르와는 상관없이 내러티브도 강화체와 같이 본문을 논리적으로 분할해서 각 단위마다 주제를 정하고 설교를 하곤 한다. 심지어 내러티브 전체의 주제를 크게 고려하지 않고 한 절씩 읽고 설명하고 적용하는 경우도 있다(runningcommentary preaching). 이러한 접근 방법은 본문의 의도와 핵심 주제를 놓치기 쉽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내러티브 본문의 설교는 그 장르에 맞게 반드시 ‘이야기 형식(Narrative Preaching)’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것도 전적으로 옳지 않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면에서 설교의 형식은 본문보다도 설교의 주제나 설교를 듣는 청중의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복음서도 다른 본문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형태로 설교될 수 있지만, 크게 네 가지 방식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먼저는 ‘내러티브-강해 설교(Narrative-Expository Preaching)’이다. 이것은 본문의 플롯에 맞추어 설교를 진행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그동안 설교학계에서 별로 소개되지 않았는데, 제대로만 사용하면 본문의 의도와 의미를 살려주면서 동시에 설교의 긴장감을 높일 수 있는 탁월한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한센 병자를 치료하신 사건은 다음과 같은 플롯을 가지고 있다. 1) 발단: 문둥병자의 나옴과 간구. 2) 전개: 예수님의 치유. 3) 해결: 제사장에게 입증하라 하심. 4) 결과: 그 사람이 예수님의 소문을 온 동네에 퍼트림. 설교자는 이 플롯을 따라 본문을 주해하고 구체적으로 적용하면서 설교를 전개할 수 있다. 다음으로, 귀납적-연역적 방법이다. 이것은 본문을 설명하면서 이야기의 핵심 또는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귀납적으로 함께 결론에 도달한 다음에, 그 결론 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을 연역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내러티브 뿐 아니라 설명형으로 되어 있는 본문(예를 들어, 마태복음의 다섯 가지 주제의 강화)에도 적합하다. 세 번째는 ‘이야기식 설교(Narrative Preaching)’이고, 마지막이 ‘일인칭 설교’ 이다. 큰 범위에서 일인칭 설교도 이야기식 설교에 속하는 것인데, 설교자가 등장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일인칭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식 설교나 일인칭 설교는 일반적으로 본문의 의도가 왜곡되거나 미흡하게 드러나고, 또한 적용이 거의 없거나 충분하지 못한 것이 특징인데, 그것은 보완되어야 한다. 나가면서 오늘날 복음서 설교는 많이 행해지고 있으나 제대로 된 복음서 설교는 찾기 쉽지 않다. 따라서 본고는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바르고 깊게 드러내는 복음서 설교를 위해 필요한 부분들을 논의하고 제안하였다. 무엇보다도 복음서가 바르게 설교되기 위해 설교자는 복음서의 본질을 기억하여 그 관점들을 가지고 복음서에 접근해야 한다. 또한 바르게 주해하여 적실하고 효과적인 적용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청중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한 복음의 본질과 핵심을 바로 이해하여 복음에 합당한 신앙생활과 삶을 살아가도록 변화시켜야 한다. 그것이 복음서를 설교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자 목적이다. 아무쪼록 필자는 이 논고를 통해 복음서 설교가 바르고 능력 있게 행해지길 바란다.
http://www.reformednews.co.kr/sub_read.html?uid=3509§ion=sc8§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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