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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원죄와 후손 <제6장 3항>

김병훈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5. 1. 13.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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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원죄와 후손 <63>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63: “그들은 모든 인류의 뿌리였기 때문에, 이 죄의 죄책은 전가되었으며, 죄로 인한 같은 죽음과 부패한 본성이 보통의 출생을 통해 그들에게 태어난 모든 후손들에게 전달되었다.”

본 항은 아담이 범한 죄로 인하여 그것이 아담의 후손이 짊어져야 했던 원죄에 대해서 두 가지를 교훈합니다. 하나는 아담의 죄책이 아담에게만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들에게도 돌아간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죄로 인하여 아담이 죄로 인해 겪게 되는 죽음과 동일한 죽음, 그리고 본성의 부패가 아담의 후손들에게 전달이 되었으며, 전달의 방식은 보통의 자연적인 출생에 의한다는 사실입니다.

1. 아담의 죄책의 전가

이것은 아담이 범한 죄와 그 죄책이 단지 아담과 하와 개인의 탓만이 아니라 또한 그 후손 모두의 탓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또한 성경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이 됩니다.

예를 들어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의 말씀이 그러하고,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는 말씀이 또한 그러합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와 그의 주장을 따르는 자들은 이 사실을 부인하고 앞서 보았던 성경의 구절들을 모방에 의한 것으로 해석을 합니다. 즉 죄를 지은 아담을 보고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의 죄 지은 행동을 따라 죄를 지으므로 후손들도 아담처럼 죄를 지게 되었고, 그 결과 아담이 죽는 것처럼 자신들도 죽게 되었다고 주장을 합니다.

소시니안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재침례파와 항론파도 아담이 범한 죄의 책임이 그의 후손에게도 돌아간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부인합니다. 이들은 모든 인류가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된 것은 아담의 죄책이 그들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된 자의 후손으로 출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형식적으로는 아담의 죄책이 전가된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전가의 이유와 관련해서는 하나님의 의지의 탓으로 돌립니다. 아담이 범한 악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서 출생한 후손들도 동일하게 담당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여 놓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아담의 죄책이 후손들에게 전가 되는 사실에 대해서는 형식적으로 인정을 하고 있지만 전가의 이유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말하며 사실상 부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들의 오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죄책의 전가의 이유를 아담과 그의 후손의 관계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죄는 아담이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 죄책이 아담뿐만 아니라 아담의 후손에게도 있는 까닭은 아담과 후손의 관계가 아주 특별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그의 후손에게 있어서 아버지이고 그의 후손은 아담에게 대하여 자녀입니다. 아담은 정치적이며 법정적인 의미에서 그의 후손인 전 인류에 대하여 머리이며 왕입니다. 아담이 그의 후손에 대하여 아버지로서 자연적 관계를 갖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담이 정치적이며 법정적인 의미에서 그의 후손의 머리인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그의 후손의 머리로 하여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언약으로 인해 그가 죄를 범할 때 한 개인의 자격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공적인 대표적 지위로 행한 것입니다. 아담이 얻은 이익은 다 후손의 것이 되고, 아담이 잃은 손실도 또한 다 후손의 것이 되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마치 아담의 후손인 우리가 아담과 똑같은 처지에 있었더라면 우리도 아담처럼 죄를 범하였을 것이므로 우리도 아담의 죄책을 동일하게 받는다고 설명하는 것이 아님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단지 아담의 죄책이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까닭은 단지 우리가 아담과 똑같은 처지였다면 우리도 범죄 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아담이 우리의 언약의 대표자라는 데에 있습니다. 죄책의 전가란 아담이 우리의 언약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아담이 범한 실제적인 죄가 우리에게도 전가되었으며 그래서 우리 모두도 죄에 대해서 책임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책을 후손의 탓으로 돌린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지 아담의 후손이 죄책이 실제로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들이 죄를 범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담이 범한 죄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들 모두가 그 죄에 대하여 아담과 다를 바가 없이 똑같이 책임을 짊어지며 죄에 대한 형벌을 또한 받아야 할 만큼 그렇게 아담의 후손이 아담의 죄책에 대해 실제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죄를 범하지 않으셨지만 우리가 범한 불의에 대해 실제로 책임을 지시며, 우리는 의가 없지만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 공로가 실제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앞서 살펴 본 성경 말씀에 이어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는 로마서 5장에서 확인됩니다.

여기서 성경은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을 모든 인류의 머리이며 뿌리로 삼으시므로 아담의 죄가 또한 그의 모든 후손의 탓이 되는 것처럼,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께서 선택을 받은 택자들의 머리이시므로 그의 공로가 다 택자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제시한 바와 같이, 순종하지 않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순종하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다는(5:19) 말씀 그리고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의 말씀은 이러한 원리를 명확히 보여 줍니다.

여기서 죄책의 전가와 관련하여 짚어야 할 중요한 논점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말씀이 뜻하는 바가 아담의 범죄가 원인이 되어 온 세상에 죄가 퍼져서 그 결과로 모든 후손들이 죽게 되는 효과가 나타났다는 유효적 원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죄책이 후손들에게 실제로 주어져 그 결과로 모든 후손들이 죽게 되었다는 공로적 원인을 뜻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사는 것이 살리시는 영이신 성령의 유효적 원인으로 인한 것이면서도 또한 그리스도께서 그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시는 공로적 원인 때문인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2. 아담의 죄로 인한 본성의 부패는 모든 아담의 후손들에게 전달됨

둘째로 신앙고백서가 본 항목에서 고백하는 것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본성의 부패가 모든 아담의 후손들에게 전달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죄책의 전가를 사실상 부정하였던 펠라기우스파, 소시니안파, 라코비안파 등은 내적인 본성의 부패와 같은 원죄의 유전을 또한 부정합니다. 이들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후손들에게 미치는 본성의 부패성과 같은 원죄란 없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여전히 자유선택의 능력이 손상되지 않았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는 내적 부패성이 보통의 자연적인 출생에 의하여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달이 된다는 교훈을 분명하게 고백을 합니다. 그 까닭은 성경이 교훈 하는 바에 따릅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바대로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6:5)는 말씀과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8:21)는 말씀은 사람의 본성의 부패성을 말해주며, 또한 그 부패성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어떻게 이렇게 부패한 본성이 보편적으로 전달이 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대답은 아담은 백 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5:3)에서 찾아집니다.

아담은 타락한 이후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을 그대로 받은 자신의 후손들을 낳습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5:1)과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를 받은 아담은 진리와 거룩함과 의로 지음을 받았으나, 아담의 모양 또는 형상대로 출생하는 아담의 후손들은 부패성을 가지게 됨을 암시합니다. 아울러 다윗은 범죄한 이후에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1:5)고 참회한 고백은 최초의 범죄로 인한 원죄가 모태에서부터 전가됨을 지지합니다.

신약에서도 바울이 말한 바,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는 말씀은 이러한 죄의 오염의 전달을 교훈합니다.

타락 이후의 아담의 후손들은 흙에 속한 형상, 곧 첫째 아담의 형상을 따라 흙에 속하며 썩어질 자들인 반면에,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은 하늘에 속한 형상, 곧 둘째 아담의 형상을 따라 하늘에 속하며 썩지 않을 자들이 됩니다.

아울러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3:5,6)의 말씀,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2:3)의 말씀도 본성의 부패성을 증거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어린아이들을 가리켜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발견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무죄한 피 곧 그들의 자녀의 피를 흘려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제사하므로 그 땅이 피로 더러워졌도다”(106:38)는 말씀이나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4:11)는 말씀이 그러합니다.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어린아이들을 가리키며 그것이 선악 간에 어떤 죄를 분변하기 이전을 말하며 따라서 무죄한 상태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들은 원죄의 유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표현은 성인들의 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그러하다는 말씀일 뿐입니다.

바울 사도가 동일한 어머니에게서 쌍둥이로 출생한 자에게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구분을 교훈하는 곳에서 본성의 부패성은 잘 드러납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9:11). 여기서 쌍둥이가 아직 나지도 않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는 자범죄를 범하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선택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택을 받은 자나 그렇지 않은 자나 모두 죄 중에 잉태된 부패한 자들임을 유의해야 합니다. 바울은 토기장이 비유에 빗대어 이르기를 선택은 선택된 자의 선함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임을 말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11:21). 선택되기 이전에 모든 사람은 다 동일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단 진흙 한 덩이일 뿐입니다. 본성이 부패한 진노의 진흙 덩이일 뿐입니다.

신자의 자녀들은 거룩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전 7:14).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거룩은 그 자녀들이 내재적으로 본성상 거룩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거룩은 교회와의 연합에 의한 것이며 언약적 의미에서 거룩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죄책이 사하여질 경우 그 죄책이 자녀들에게 전가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죄의 오염은 계속 전달이 됩니다. 할례자라 할지라도 그 자녀들은 할례를 받아야 할 자로 출생을 하는 것이며, 중생한 신자가 비록 새 마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자녀는 옛 마음과 부패성을 가지고 출생합니다. 새 마음은 은혜로 얻는 것이며, 옛 마음은 자연의 출생을 따라 전달이 됩니다.

결국 아담에게 있어서는 아담이라는 사람의 범죄가 인성을 부패시켰으며, 이제 후손들 가운데서는 부패한 인성으로 인하여 후손들도 죄를 범하는 일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오염된 본성이 어떻게 전달이 되는 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신앙고백서가 교훈하는 대로 보통의 출생방식을 통해 흙의 형상을 전달한다는 사실은 바른 신앙으로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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