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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대한 리델보스의 이해

이승구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5. 5. 18.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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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대한 리델보스의 이해

이승구 박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헤르만 리덜보스의 신학을 전반적으로 검토한다는 것은 짧은 시간과 지면 하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이번에 우리는 그의 신학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성에 대한 그의 견해를 검토하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그의 가장 공헌 중의 하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공관복음서의 이해를 정리한 것이고, 바울의 사상을 정리하는 교회의 의미를 밝혔다고 사료되기 때문이다. 먼저 그의 하나님 나라[天國] 이해 가운데서 우리들에게서 동안 간과된 측면을 지적하고, 그의 교회 개념을 살핀 , 천국과 교회 관계에 대한 그의 입장을 정리하고, 비판적인 검토를 하도록 것이다.


1. 하나님 나라[天國] 이해

공관복음서의 하나님 나라 개념을 정리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그는 "공관복음서에서 우리에게 전승된 예수의 메시지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 나라, 또는 마태복음서에서 주로 표현된 대로 하늘 나라[天國] 도래이다"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제는 너무 알려져서 일반화된 (그러나 이에 충실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리덜보스의 논의를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핵심은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국은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와서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은 영적인 실재로 진행하여 가다가, 예수님의 재림 때에 나라의 극치에 이른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리덜보스의 가르침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측면들만을 가지 언급하려고 한다.

첫째로, 리덜보스는 하나님 나라[天國] 대한 이해를 추상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곳에서 이를 아주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통치에 관한 일반적 무시간적 진술의 문제가 아니라, 특히 언젠가 보게될 그것의 구속사적 실현의 문제(its redemptive-historical effectuation)이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개념은 주로 하나님의 왕적 자기 주장의 개념, 당신님의 왕적 엄위와 능력과 옳음을 계시하기 위해 당신님께서 친히 세상에 오신다는 개념이다. 예수님의 선포의 일반적 목적에 대한 바른 통찰을 얻기 원한다면 우리는 천국의 절대적으로 신중심적인 개념을 항상 유념해야만 한다(Coming, 19).

구절은 리덜보스의 천국 이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라고 있다. 구절에 의하면,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의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의 세상에서의 실현과 관련된 것이다. 리덜보스는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인 하나님 나라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 그는 단지 하나님의 주권이 시행되는 곳이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을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었으므로 하나님 나라가 "온다" 말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리덜보스는 막연히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은 하나님 나라, 천국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리덜보스에 의하면, 땅에로 하나님의 통치가 구속사적으로 실현되는 것이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천국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왕국은 구속을 의미한다" 말하기도 하며(Coming, 20), "심판을 의미한다" 말하고, 나라를 "구속과 심판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으로 이해하는 것이다(Coming, 55). 그래서 그는 " 나라의 도래는 무엇보다도 신적 영광의 증시, 땅에 온전한 의미의 하나님의 권세가 다시 주장되고 유지되는 것이다"(Coming, 20f.)라고 말하기도 한다. , 그는 땅에서 시작되는 구속과 그로 말미암은 땅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의 증시에서 하나님 나라를 찾는 것이다. 왜냐 하면 그는 하나님 나라를 "당신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와 관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Coming, 23). 그러므로 나라는 구속사적으로 실현된다. 따라서 예수 안에서 이미 임하여온 "천국의 도래는 종말 역사의 드라마의 초기 도입 단계(the initial stage of the great drama of the history of the end)" 이해된다(Coming, 27). 그리고 리덜보스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과 관련하여 천국의 관계성을 "성취와 극치"(fulfillment and consummation)라는 용어로 정리한다(Coming, 516-23). ,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하나님 나라, 천국이 땅에 실현되었고, 성취되었다(fulfillment).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은 성취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Coming, 520).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천국이 것이다"(Coming, 95). 그러므로 " 안에서 것은 사물들의 마지막(the end of things)이다"(Coming, 526).

천국의 현재성에 대한 논의와 관련한 리덜보스의 공헌의 하나는 '하나님 나라'(ֿ) '아들의 나라'(ֿ) 또는 '그리스도의 통치'(Regnum Christi, 메시아 왕국) 대한 지나친 구별을 피하고, 그런 구별을 시사하는 견해들을 주해적으로 비판하면서 본질상 아들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 천국인지를 주해적으로 밝혀 놓은 점이라고 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에 근거하고 승천으로부터 효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왕국(Regnum Christi) 시작되었고, 종국의 투쟁 후에 아들이 왕국을 아버지께 바치면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다고 논의하는 오스카 쿨만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리덜보스는 " 내용에 관한 그리스도의 나라는 아버지의 나라와 나뉘어 없는 것은 마치 성자와 성부가 나뉘어 없는 것과 같다" 강하게 논의하고 있다(Coming, 96). 더구나 이런 식의 생각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전에 하나님 나라의 임함에 대한 말씀을 순전히 예기적(proleptically) 생각하게 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충실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그러므로 "왕국의 임함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오심, 그의 성육신에서이다"라고 주장하면서(Coming, 96), "복음서는 말로나 사상으로나 쿨만의 구별을 알지 못한다"(Coming, 97) 확언한다. 왜냐 하면 논의의 마지막 부분에서 리덜보스가 말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사역 안에서, 그것을 통하여 때로부터 하나님 나라는 실현되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Coming, 97).

그러나 마지막의 극치(consummation)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니, "인자가 권능으로 임할" 때에야 극치에 이를 것이다. 물론 극치는 성취의 극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미 시작하신 그의 성취의 사역을 마치시는 일을 분명히 하실 것이다(Coming, 518). 그러므로 이미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땅에 임하여 천국의 극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parousia)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리덜보스는 "극치라는 주제는 미래에 대한 예상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전체 가르침에 대해서도 아주 중요하다" 강조한다(Coming, 45).

그러나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로 이미 땅에 실현되어 가고 있다는 , 아니 미래에 대한 모든 것은 성취가 이미 왔다(the fulfillment has come) 것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다는 (Coming, 520) 또한 그의 강조점이다. 예수님의 선포 가운데서는 "성취의 요소가 기대의 요소만큼이나 놀랍고 본질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Coming, 520). "[예수] 안에서 선지자들의 미래가 현존하는 성취(the present fulfillment) 되었다"(Coming, 55).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고 이에 대한 선포인 천국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 세상 안으로 천국이 들어오는 "(the entry of the kingdom of heaven into this world, Coming, 334) 리덜보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결과로 우리가 세상 안에서 이미 천국 안에 있다(being in the Kingdom) 표현이 사용될 있는데, 때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시작된 구원의 성취에 참여한다는 "(the participation in the fulfillment of salvation that began with Christ's coming)이다(Coming, 34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파루시아 사이의 기간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잠정적으로(provisionally) 실현된 성취의 사실에 의해서 규정되고 질이 결정되는 것이다"(Coming, 520).

둘째로, 따라서 리덜보스는 천국 복음의 의미와 선포를 강조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리덜보스에게 있어서 복음은 천국 복음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천국이 땅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형태들 중의 하나는 복음의 선포"라고 한다(Coming, 334). 그러므로 리덜보스의 이해에 의하면, "천국 복음의 선포는 한편으로는 천국이 이미 도래하였음에 대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선포되는 것은 단지 말이 아니라 행위이며, 소리가 아니라 실재이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의해서 지지되고, 그의 사역, 특히 그의 수난과 죽음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Coming, 185). 그러므로 천국 복음의 선포와 수납을 통해서 이미 여기서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편으로 복음의 선포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천국 도래의 서언적(preliminary)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 복음의 선포에 있어서도 도래한 천국의 '이미' '아직 아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리덜보스는 천국 복음이 깨어질 없는 단일체를 형성하고 있는 부분으로 구성된다고 옳게 지적한다(Coming, 186). 부분은 복음에서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은혜와 관련된 것이고, 부분은 명령으로 표현되는 요구와 관련된 것이다. 천국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우리는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깨어 있고 신실해야만" 한다(Coming, 518). 이는 우리들의 모든 삶을 규정 짖는 것이다. 신자들의 윤리적인 삶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사역의 태도가 속에 함의되어 있다고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신자들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사역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덜보스는 "모든 민족들에게로 선교사들을 보내는 것은 극치에 이르도록 하는 신적 사역 안의 단계이다"라고도 말할 있었다(Coming, 520).

그렇다면 리덜보스는 신자들의 중간 상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왜냐 하면 한국 교회에서는 신자들의 중간 상태를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것과 같은 용어로 부르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일단 리덜보스는 바울이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ՓײՍ ԷՑՉՓՔٍ ՅסՍՁՉ) 말은," 여러 주석가들의 다른 의견들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 바로 후부터 부활 전까지의 구체적인 내용을 지니는 것임이 분명하다" 말한다. 그는, 게르할더스 보스에게 동의하면서, 바울은 부활의 궁극적 소망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죽은 후의 잠정적인 지복의 상태도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공관복음서에서도 부활 이전에 이미 합당한 자로 여겨진 자들에게는 "복된 중간 상태"(an intermediate state of bliss) 있음이 약속되었다고 한다. 리덜보스는 특히 23:42, 43 16:19-31 근거하여 복된 중간 상태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죽음 이후 부활 이전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상태는 "바울의 서신들에서 부활이 가진 것과 같이 온전한 구속적 의의(the full redemptive significance) 지니고 있지는 않은 것이 분명히 참되다" 말한다. 그것은 아직 영광스러운 안에 있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우리에게는 생각 없는 양태의 인간 존재이다. 물론 신자의 중간 상태는 주와 함께 있는 상태( 1:23)이고, " 이상 지상적인 안에 있지 않은 상태이며, 따라서 모든 불완전과 , 그리고 안에서 겪는 어려움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리덜보스는 이를 언젠가는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게 천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취어진 존재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이는 바울이 강조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8:35, 38ff.). 그러나 상태도 아직 미완의 상태이며, 기대의 상태이고, 잠정적 축복의 상태라고 요약하고 있는 안토니 후크마의 요약은 리덜보스의 견해도 드러내고 있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과 같이 논의하는 리덜보스는 한번도 성도의 중간 상태를 지칭해서 the kingdom of heaven으로 부르는 일이 없음에 유의해야 한다.


2. 교회 이해

리덜보스는 교회를 "(천국)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공동체에 연합하게 사람들을 지칭하는 이름"이라고 정의한다(Coming, 343). 리덜보스는 이런 의미의 교회 개념과 용어가 이미 예수님 자신에게서 분명히 기원하였으며, 용어가 공관복음서에서 나타나고 있는 마태복음 16장과 18장의 해당 부분이 분명히 예수님에게서 기원하였음에 대해서 강한 논증을 한다(Coming, 334-42, 347-48, 367). 그는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것은 에수님께서 그의 교회와 그의 사후에 있게될 교회의 형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Coming, 369). 그에 의하면, 마태복음 16장은 "교회에 대해 정교하게 문자화된 계획안은 아니어도, 교회의 헌장"(the charter of the church)이다(Coming, 367). 따라서 리덜보스는 "교회 개념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자기 계시의 범주에 있어서 아주 본질적인 요소"라고 결론 내린다(Coming, 347). 그리하여 리덜보스는 교회는 그저 우연히 나타난 카리스마틱한 현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경험적인 실재(empirical one)이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심으로 교회 조직이 시작되어졌고,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복음이 선포되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Coming, 342, 367).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교회의 조직은 직임과 기능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Coming, 367).

리덜보스는 이렇게 예수님에게서 나온 교회 개념의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질문을 하고, 다음 가지 제안들에 대해서 깊이 있는 논의를 하고 있다.

(1)
교회(ecclesia) 개념을 다니엘서 7장의 인자와 함께 언급되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 연관시키며 설명하는 카텐부쉬(F. Kattenbusch). 카텐부쉬에 대해서 리덜보스는 "교회"(ecclesia)라는 용어와 개념의 진정성을 드러내려는 그의 노력을 높이 사면서도(Coming, 339-40, 347), 카텐부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로부터 교회 개념이 기원하였을 같지는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라는 백성이 복음서에서 한번도 그와 같이 불려진 일이 없으므로 특히 다니엘 7:47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선포에서의 교회 개념의 출발점으로 생각하는 일의 정당성을 부여할 없다고 생각한다"(Coming, 347f.).

(2)
기본적으로 카텐부쉬를 따르면서, 그러나 그보다 폭넓은 하나님의 백성 개념을 생각하면서 '교회(ecclesia) '남은 '들에 대한 (이사야 10:22ff. 같은) 구약의 자료들의 연속성에서 생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뢰게(G. Gloege). 글뢰게의 주장에 대해서 리덜보스는 구체적인 해석이 실제적으로 옳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지할만한 복음서 내의 근거가 없음을 지적한다. 복음서에서 어디서도 말하고 있지 않은 '남은 '에게 집중하는 글뢰게의 견해는 예수님께서 친히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신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충분히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Coming, 348). 대표적인 반응의 하나로 리덜보스는 글뢰게의 해석을 "환상적인 구성"(fantastic construction)이라고 말하는 불트만의 비판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리덜보스는 글뢰게 처럼 남은 사상에 근거해서 교회 개념이 나타났다고 보기에는 복음서의 증거가 약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3)
기본적으로는 이들에게 동의하면서도 예수님의 교회 개념은 단순히 다니엘서나 남은 개념에서 것으로 생각하기보다는 구약의 일반적이고 중요한 개념인 하나님 백성 개념이 신약 교회 개념의 토대라고 보는 외프케(A. Oepke). 리덜보스는 복음서에 구체적인 설명의 근거가 없으므로, 글뢰게와 같이 구체적인 설명을 찾으려고 하는 일은 불필요하므로, 일반적인 외프케의 설명에 동의한다고 한다(Coming, 348). 그런 구체적인 설명보다 하나님 백성 개념이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아적 선포에 훨씬 일반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4)
카텐부쉬를 따르면서, 아람어적 논의를 하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에 대해 일반적인 용어였던 '콰할'(kãhãl)이나 '케할라'(kehãla)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구체화된 회당 모임(synagogue assembly) 의미로 사용되던 '케니쉬타'(kenischta) 사용하셨으며, 이는 예수님께서 그의 추종자들을 참된 하나님의 백성 자체를 나타내는 확신 가운데 사는 특별한 회당 모임으로 구체화하기를 원하셨음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쉬미트(K. L. Schmidt). 이는 외프케의 견해를 좀더 특수하게 발전시키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있다. 리덜보스는 교회 개념의 진정성을 드러내려는 쉬미트의 일반적 작업에는 동의하고 높이 사지만(Coming, 341), 이런 구체적 설명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특히 Coming, 356). 그는 쉬미트와 카텐부쉬의 '케니쉬타' 말하는 견해와 이외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생각하는 '콰할'이나 '케할라' 어떤 것이 사용되었던지 기본적인 개념은 신적 언약 백성의 모임(the gethering together of the people of the divine covenant)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Coming, 354). 쉬미트 등은 '에클레시아' 구약적 '콰할'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한다(Coming, 392, n. 66). , 그는 교회(ekklesia) 유대 공동체 전체 내에서의 예수의 제자들의 구별된 조직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16:18 관한 , 그런 구별된 공동체가 실제로 있었는지가 의심스러우며, 따라서 쉬미트가 호소하는 언어학적 용례가 분명히 수립되지 않으며, 에클레시아가 '케니쉬타'이고 그것이 특별한 회당이라는 구체적 설명의 사실적 근거를 찾을 없다는 것이다(Coming, 356). 또한 교회는 한번도 자신들을 유대교 안에 수립된 회당 공동체로 생각한 일이 없고, 오히려 자신들을 백성을 대치할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이해하고, 실제로 대치했던 것이다(Coming, 357). 이런 논의에 근거해서 리덜보스는 "마태복음 16:18 '에클레시아' 70인경에서 거의 항상 '에클레시아' 번역하고 있는 구약의 '콰할' 유비를 따라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해야만 한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결론 내린다(Coming, 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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