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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인 예배를 위하여

예배학

by 김경호 진실 2015. 5. 29.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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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인 예배를 위하여

 

이승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는 그 어떤 시대, 그 어떤 장소에서 보다 예배가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많은 예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많은 우려를 한다.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되고 예배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하겠다는 데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목회와 신학> 지난호인 374호 (2012년 4월호)의 특집 논문들과 컨퍼런스 보도 등이 이를 여실(如實)히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이 땅의 예배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이멀징 예배(emerging worship)를 포함한 여러 대안 예배에 대해서도 개방적이고, 또 한편으로는 루터파적인 모델을 활용한 성찬 예배 등에 대한 그 제안들을 따라 갈 때 한국 교회의 예배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할 때에 또 심각한 걱정이 들게 된다. 아마도 함께 제시된 여러 사진들이 주는 인상이 이런 걱정을 더 부채질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러 독자들의 걱정이 편집자들로 하여금 또 다시 예배에 대한 제언을 하도록 하게 하였다. 여러 필자들과 또 여러 독자들과 함께 한국 교회의 예배 개혁이 있어야 한다는 것에 충심으로 동의하면서 과연 어떻게 나아가야 우려할만한 제안을 벗어나서 우리들의 예배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 갈 수 있는 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예배 개혁의 기본적 원칙: 진리와 영 안에서의 예배를 위하여

 

예배개혁이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였다는 것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내용이다. 종교개혁이 이루어졌을 때 가장 처음 느낄 수 있는 것은 예배가 개혁되었고, 그렇게 개혁된 예배 방식을 따라 예배하면서 앞으로는 그 이전에 예배하던 방식으로는 예배할 수 없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가장 큰 결과[산물] 중의 하나가 예배의 개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와 함께 교회 전체의 개혁이 나타났고, 그에 따라 삶의 개혁과 문화의 개혁이 나타났지만 말이다.

개혁자들은 무엇보다도 “성경에 따른 예배”를 하기 원했다. 그러므로 예배 개혁의 기본적 원칙은 성경에 따라 예배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종교 개혁 정신에서는 전통을 따라 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물론 개혁자들이 전통적인 것 가운데서 성경적인 것은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중요시하고 그것을 바꾸어 가지 않으려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이 그랬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성경의 원칙을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도 예배를 개혁한다고 할 때 이 원칙이 천명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의 예배가 성경에 따른 예배가 되어야 한다. 개혁자들과 그들의 후예들은 이를 “진리 안에서의 예배”(worship in the truth)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또한 이렇게 진리 안에서, 진리를 따라하는 예배는 반드시 성령님 안에서의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들도 우리들이 하는 예배가 성령 안에서의 예배(worship in the Spirit)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개혁자들과 그들의 후예들은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과 진리 가운데서 예배하는”(요 4:24) 것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배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특히 예배의 개혁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우리들도 참으로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도록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2. 개혁자들의 모범

 

이 원칙에 따른 예배 개혁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가장 쉬운 방식은 일단 개혁자들(reformers)의 모범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물론 개혁자들의 작업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과 다 달랐고, 역사의 과정을 걸쳐 가면서 성경에 덜 충실한 예를 제시한 이들도 있었고, 좀더 성경에 충실한 예배방식을 제시한 이들도 있었다. 이런 다양성이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 후대라는 유리한 역사적 고지에 서 있는 사람들로서 우리들은 여러 개혁자들 가운데서 가장 성경에 충실한 예를 제시한 이들이 어떤 분들인지를 생각할 수 있고, 이에 근거해서 우리들 나름대로 성경에 충실한 예배의 방식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도 앞서 말한 것이 큰 원리로 작용해야 한다. 즉, 여러 개혁자들의 제시 가운데서 어떤 것이 가장 성경에 충실한 것인지를 찾아야만 한다.

일단 이 모든 일이 진공 상태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신약교회의 예배가 유대교 회당 예배를 기초로 해서 신약적 변화를 의식하면서 회당 예배를 변용하여 초대교회의 예배방식을 찾아 예배해 갔던 것과 비슷하다. 이것은 주어진 신약 계시에 따라서 예배 방식이 변화해 나간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주께서 주신 계시는 우리의 예배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이다. 구약적 제사로부터 감사의 예배에로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중세 천주교회의 방식대로 예배하던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에 따른 예배로 개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도 성경계시를 따른 예배 변혁의 하나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현대 천주교의 예배도 어느 정도는 그와 연관될 수 있는데) 중세 천주교의 예배는 예배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점에서는 개신교의 예배와 같으나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예배에 유용할 것 같은 요소들은 다 넣어 사용하는 형태의 예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때 특히 구약의 성전 예배의 요소들을 가져 온 것이 많이 있다. 성소에서 등대가 빛을 비취는 것과 같이 예배 때에 빛을 비취는 촛대를 동원하고, 성소에서 특별한 향을 피웠던 것과 비슷하게 예배 때에 향을 피우기도 하고, 시편에 나오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을 따라서 여러 층계송(올라가는 노래) 등을 사용하고, 이런 것의 가장 핵심적 요소로서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을 사제(司祭), 즉 제사장(祭司長)이라고 여기면서 예배를 하여 그가 하는 행위가 “제사”(“피 없는 제사”)가 되도록 한 것이다.

개혁자들은 본래 천주교도들이었으므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오랫동안 예배하던 사람들이었다. 루터는 그런 방식으로 제사를 집례하던 사제(priest)였다. 그러다가 자신들의 오랜 예배를 신약 성경의 빛에서 검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모든 것을 검토하고 바로 잡는 모범이 주어진 것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와 그런 일을 시작한 개혁자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해 오던 것이므로, 또는 그냥 은혜가 되니까, 또는 아무 생각 없이 이전의 예배 방식에 따라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계속하려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루터는 신약의 예배는 “제사”(sacrifice)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교회의 바빌론포수>(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에서부터 루터는 성찬이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반복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단번에 자신을 드리셔서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을 생각하면(히 10:12), 더구나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고 말하는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이 제사의 영원한 효과를 생각하면, 그 결과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8)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에 동의하면서 기쁨으로 우리를 위해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그리스도께, 그리고 함께 이 일을 이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해야지 결코 제사를 드릴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개혁자들의 예배 개혁은 이와 같이 예배가 “제사”(sacrifice)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임을 강조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 거룩한 산제사를 드리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에 근거해서 주께 드릴 진정한 제사 행위라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제사장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루터는 예배당 안에 수많은 성상(聖像)들이 있는 것은 “상(像)을 만들어 그 앞에 경배하지 말라”는(출 20: 4-5; 신 5:8-9)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라는 것을 천명하면서 예배당 안에 상(像)들을 제거하도록 했다. 이를 가장 급진적으로 실현한 시민들은 쯔빙글리(Zwingli)에게서 비슷한 설교를 들은 스위스 츄리히(Zurich) 시의 성도들이었다. 말씀에 따르는 즉각적인 반응의 대표적인 예가 그런 예가 아닐 수 없다. 이전까지 수많은 상(像)들이 있던 바로 그 예배당에서 계속 예배하면서 그 예배당 안에 있던 십자가상을 비롯하여 여러 상(像)들을 다 제거해 보리는 것이 예배의 개혁이었다.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지를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그러나 루터는 그 나머지는 이전에 해 오던 대로 예배하도록 했다. 그래서 예배 때에 촛불도 켜고, 향도 피우고, 이전에 천주교에서 하던 것을 그대로 유지하게 했으니 이와 같은 것들은 성경이 명확히 규정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는 문제 즉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문제라고 한 것이다. 제사(sacrifice)와 상(像) 문제를 제외한 예배와 관련된 나머지 문제들은 아디아포라의 문제라고 루터는 생각한 것이다. 오늘날까지 루터파 교회는 이와 같은 입장에서 예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예배 때에 촛불도 켜고, 향도 피우고, 사순절도 지키고 한다. 상당히 많은 성공회 교회들도 이와 같이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성공회 교회들 가운데서 특히 예전을 중요시하는 소위 고교회(高敎會, high church)에서는 그리하는 것이다. 이들은 개신교 예배 이기는 하지만 개신교 예배 같지 않은 모습들이 많은 형태의 예배를 하는 것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성찬 때에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무릎을 꿇고 받도록 (또는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서 무릎을 꿇고 받든지 서서 받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찬의 두 요소(elements)인 떡과 포도주 모두를 주는 점에서 또한 화체설(化體說), 즉 집례자의 축성(祝聖) 때에 떡과 포두주의 본질(essentia)은 그리스도의 몸과 필로 바뀐다는 설을 주장하지 않는 점에서 개신교 예배이다. 그러나 그것을 집례하는 방식과 태도에 있어서는 마치 종교개혁 하다가 중단된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개혁파는 루터파적인 예배도 더 성경적으로 개혁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향과 촛불 켜는 것, 예배 중에 무릎 꿇는 것, 특히 성찬을 받을 때에 무릎을 꿇는 것, 예배당 안의 십자가 상, 사순절 등은 신약 성경 가운데서 예배에 대한 지침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으로 여겨서 예배에서는 모두 제거하였다. 그들은 신약 성경에서 제시된 요소들만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원했으니, 예배와 같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지침을 내려주지 않았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예배에 대하서도 명확한 가르침을 주셨다고 했고, 그렇게 성경 가운데서 주신 예배에 대한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에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했다. 칼빈은 “명령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우리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단언했던 것이다. 사실 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넘어서 교회가 어떤 새로운 규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거부했다. 사람들과 교회의 “자의적인 주권의 주장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침해이다.” 칼빈은 예배와 관련해서도 “나는 성경에서 도출된, 따라서 전적으로 신적인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한 제도들만을 시인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칼빈의 후예들에게 있어서는 “명령되지 않은 것은 금해진 것이다”는 원칙이 준수되었다.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서 정하지 아니한 어떤 다른 방법으로 예배하는 것”도 금해진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러므로 개혁파 교회들은 성경에 있는 요소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 하려고 하는 열심에서 천주교 예배 중에서 성경적 근거, 특히 신약 성경적 근거를 가지지 않은 것들은 모두 제거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기를 원했는가를 잘 나타내어 보여 주는 것이다.

 

 

3. 우리들의 현실과 예배와 관련하여 할 일들

 

오늘날 우리들의 예배는 과연 어떤 정황 가운데 있는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이 마땅히 하나님께 예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소위 교회 공동체의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우리가 예배하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또 많은 사람들은 그냥 예배하면 되었지 무엇 신경 쓸 것이 있느냐고 생각하면서 그저 예배 의식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사람이 드문 상황 속에 잇다는 것이 우리들이 처한 상황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자신들이 바로 그런 상황 속에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하나님과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에 근거한 예배를 하나님께 하길 원했다. 그 결과 예배의 개혁이 일어난 것이다. 우리들도 같은 일을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 예배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바꾸어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 하는 사람들로 만드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일의 하나는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도록 만들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께 바르게 예배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첫째로 할 일은 “복음”을 순수하고 바르게 선포하는 일이다. 개혁자들이 바로 그렇게 하였다. 구원 얻는 것이 (천주교회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공로에 더하여 주께서 주신 은혜에 근거해서 인간이 행하는 선행의 공로를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에서 발견한 개혁자들은 오직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속에 공로(solus Christus)를 받아들이는 믿음으로만(sola fide), 그러므로 은혜+인간의 행위가 아직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오직 성경에서 발견한 개혁자들은 예배를 비록해서 삶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최종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개혁하기를 원했고, 그 결과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soli deo gloria)을 위해 예배하고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메시지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방도라는 것이 온 세상에 널리 울려퍼지고, 그 구원의 감격 때문에 이 일을 이루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예배의 다른 동기가 일소(一掃)되고, 오직 우리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사람들로 세우신 것에 대한 감사 때문에만 예배할 때에 바른 예배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복음에 근거한 구원적 감격에 근거한 예배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개혁자들이 성경에서 발견한 순수한 복음이 다시 이 땅에 강하게 선포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 안에 이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복음에 대한 왜곡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바른 예배를 방해 하는 일이라는 각성이 크게 일어나야 할 것이다. 이신칭의의 복음이 우리 가운데서 바르게 이해되고 선포되고 믿어질 때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 대한 바른 예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 다원주의자들과 함께 하는 예배가 과연 하나님께 제대로 된 예배가 될 수 있는지, 구원이 오직 하나님 홀로 이루시는 것임을 제대로 믿지 않는 예배가 과연 바른 예배가 될 수 있는 지를 숙고해야 할 때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른 복음을 순수하게 선포하는 것을 교회의 근원적 표징으로 말한 이전 교회의 강조점을 따르는 교회가 되는 일이 먼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참 교회이어야 참된 예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참된 교회가 아니라면 아무리 장중한 예전이 집례 되어도 그것은 바른 예배를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순수한 복음을 제대로 선포하는 바른 교회 되는 일은 참된 예배의 선결 조건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우리들의 교회가 과연 바른 교회인지를 심각히 물어야 한다.

둘째는, 이 복음에 근거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성령님 안에서 예배하는 일이 회복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공로에 의해 예배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성령님에 의해서 십자가에 공로에 의지하여 창조와 구원의 주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참된 경배는 영적인 경배요, 바르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은 신령한 일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성령님께 의존하며, 성령님께 순종할 때에만 우리의 예배가 바른 예배가 되는 것이다.

셋째로, 그 결과 성령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대로 성경이 가르치는 방식을 따라서 예배해야 하겠다는 의식이 계발되도록 해야 한다. 진리의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셨으니(요 16:13), 우리가 예배해야 할 바른 방법에로 우리를 인도하여 가실 것임을 믿으면서 성경 진리에 따라서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해야 한다.

 

 

4. 구체적 제안들

 

이 모든 논의에 비추어서 오늘 우리 상황에서 우리가 특별히 유념해야 할 점들, 특히 예배 갱신이나 예배 개혁과 관련하여 새롭게 제시되는 것들과 관련하여 조심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간단히 나열만 한다고 해도 다음 같은 점들을 말해야 할 것이다.

(1) 예배가 의식화(儀式化)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예전이 복잡해지고, 예전화할수록 타락한 예배라고 했던 우리 선배들의 조언을 잘 들어야 한다. 우리들은 오직 신약 성경에 있는 요소들만 가지고 예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2) 말씀과 성례 중심의 예배라는 것은 개혁자들이 항상 강조해 온 것이다. 종교개혁파 교회는 항상 말씀과 성례 중심의 예배를 하여 왔다. 그러나 이때에도 성례는 항상 말씀을 필요로 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례는 복음을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나타내고 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씀과 성례를 다 중요시하나 더 근원적인 것은 항상 말씀인 것이다. 복음이 가리워지면 아무리 성례를 열심히 해도 그 공동체는 교회가 아닌 것이다.

(3) 그러므로 성찬을 행할 때에 무릎을 꿇는 순서 같은 것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논의는 정말 꿈도 꾸 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선배들이 성경과 성령에 의존하여 피 흘려 가면서 폐지한 것을 되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4) 마찬가지로 성찬의 떡과 잔을 높이 치켜드는 것도 피해야 할 일이다. 중세 때에 이런 상징적 행위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the elevation of the Host와 관련한 많은 논의를 보라). 성찬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할 수 있으나 특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요소들을 “높이 드는 것”(lifting them up)도 “성례의 성질에 반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제정에도 반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으므로(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9장 4절) 이점은 매우 주의해야 할 것이다.

(5) 예배당 안에 성찬상이 마치 제단과 같은 의미를 전달하는 형식으로 중앙에 있는 것, 성찬 상에 촛불이 있는 것 들은 모두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 우리 선배들이 피흘려 가면서 폐지한 것들이 아무런 역사 의식(意識) 없이 도입되는 것은 무시무시한 일이다. 예배당 앞 부분을 제단이라고 말하는 것도 없애야 할 잘못된 습관이다.

(6) 예배당 안의 십자가가 있는 것도 심각한 문제로 여겨야 한다. 선배들이 말씀에 대해 회개하면서 말씀을 따라 반응하면서 폐지한 것들이 슬그머니 들어오도록 해서는 안 된다.

(7)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님 등이 예배를 위해 독특한 복장을 하는 것이나 가운을 입는 것도 심각하게 재고(再考)되어야 한다. 될 수 있는 대로 평상복을 입고 예배를 인도해 온 방식을 따르는 것이 좋고, 특별히 일상생활에서도 목사들이 독특한 성직자복을 도입하는 것은 애를 써서 성직자복을 폐지한 선배들의 노력을 무위화(無爲化) 하는 것이 된다.

(8) 예배 순서 가운데 예배에 적합한 찬송을 골라 부르며, 하나님께 경배하는 태도와 마음으로 잘 연습해서 찬양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대표로 기도를 인도하는 분들이 대표로 하는 것이기에 우리 모두가 속으로 같이 기도하는 것이며, 특송을 하는 분들도 우리가 주께 드리는 찬송을 대표로 드리는 것이기에 우리가 같이 하는 마음으로 같이 찬송을 드려야 한다. 따라서 대표로 찬송한 후에 박수를 친다든지 하는 것은 함께 찬송 한다는 의식이 결여된 것이라고 여겨야 한다. 예배 중에는 사람에게 박수를 치는 등 사람을 높이는 일을 피해야 할 것이다.

(9) 예배 순서 가운데 성경을 연속해서 읽는(lectio continua) 순서의 부활이 필요할 것이다. 개혁자들은 중세부터 있었던 교회력에 따라 선택 된 본문을 읽는 읽기(lectio selecta) 따르지 않고, 오히려 성경을 차례로 읽어 가면서 공부하고 생각하는 계속적인 읽기(lectio continua)와 강해를 강조해 왔다. 오늘 우리 상황에서 교회력을 강조하는 것은 이런 점에 대한 의식이 없는 것으로 지적될 수도 잇다.

(10) 공예배에 모든 교우들이 다 참여하도록 하는 일에 대한 강조가 절실하다. 주일 아침예배, 주일 저녁 예배, 수요 기도회 등에 모두가 참여하도록 하고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않도록 하는 애씀이 필요하다. 예배가 문화적 적응을 해야 한다는 명목하에 이상한 것으로 변질되거나 사실은 점차 사라지도록 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문화적 요소를 너무 생각한 나머지 참된 예배가 사라지는 현상을 목격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을 다 말한 후에 우리들이 다시 강조해야 할 것은 참된 경배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해서 성령님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다해 예배하는 일에 힘썼고, 놀랍게도 예배하는 일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고, 그 힘에 의존해서 매일 매일을 예배한 사람으로 살아갔다. 우리들이 그런 귀한 선배님들을 따라서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한다. 한국 교회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성령과 진리 안에서의 예배의 회복이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께 경배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것이다(요 4:23).

 

 

 

2014. 6. 19 개혁파신학연구소 정기신학강좌애서

 

 

 

 

 

 

http://blog.daum.net/bujachon/7073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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