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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강의/합신 김성수교수

김성수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5. 9. 12. 08:39

본문

요일 1:1-2:6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사도 요한께서는 본문 서두에서 그가 직접 두 귀로 듣고 두 눈으로 목도한 것, 그가 두 눈으로 똑똑히 주시하여 보았고 두 손으로 만져 보았던 그 무엇에 대해서, 그가 직접 체험해 보았던 그 무엇을 전하려고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가 직접 체험해 보고 말하자면, 직접적인 촉감으로, 감각으로 체험하고서 전파하려고 하는 내용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에 의하면 이 생명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합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 1:2)

사도 요한이 이 생명의 말씀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었던 것은,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셨으며 온 세계의 생명 되신 성자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을 입고,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의 경험영역 안으로 들어오셨고, 우리에게 계시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체험할 수 있었고 그 안에 있는 생명을 받아 누리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나타나시어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경험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셨으나 이 생명의 말씀은 이 세상에 속한, 이 땅에 속한, 이 창조 질서에 속한 무엇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 시요 즉, 피조계에 속한 분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창조하신 창조주시요, 우리가 받아 누리는 생명은 바로 그 성자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우리가 받아 누리는 생명 또 이 생명을 주신 생명의 말씀에 대해서 굳이 너희에게 전파하기를 원하는 이유는 너희들도 우리와 함께 코이노니아, 사귐, 교제를 갖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이 교제는 보통 교제가 아니요 우리가 누리는 생명을, 참된 생명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 교제입니다. 따라서 이 생명에 대해 또 생명의 말씀에 대해 굳이 너희에게 전하려고 하는 목적은 우리가 누리는 이 생명을 여러분도 함께 받아 누리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이처럼 우리가 누리는 이 생명을 너희도 누리기를 원하는가 하는 그 이유는 우리에게 계시된 이 생명은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만인에게 개방되어 있고 가능한한 모든 사람들을 이 생명에 초청하여 누리게 하려는 목적을 위해 주어진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도 요한은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누리는 사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이 누리는 사귐, 여러분들을 초청하여 함께 나누기를 원하는 이 성도의 사귐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이라고 말씀합니다. 말하자면 교회의 사귐, 성도의 사귐은 더 깊은 근원에서 생겨난, 더 깊은 토대 위에 세워진 하나님과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사귐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우선 성도의 교제는 인간적 차원의 사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교를 위한 모임도 아니요, 정치 토론장도 아닙니다. 매력적인 사람들을 만나서 재미있는 이야기와 담소, 우리의 흥미와 관심을 끄는 활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귐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어떤 근본 전제를 가지고 있는 인간적 차원을 넘어 더 깊은 근원과 토대를 가진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그 생명을 전제와 토대로 하는 사귐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받아 누리는 이 생명 - 물론, 이 생명의 성격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 은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는 형식과 틀 안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사귐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날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의 사귐의 토대 위에서 진정한 성도의 교제가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요일 1:4)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수반하는 기쁨 즉, 참 생명을 누리는데서 얻는 기쁨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기록한 목적 자체가 우리의 사귐을 통해 즉,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를 함께 받아 누림으로써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5:13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믿는 자로 하여금 이러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음을 일깨우기 위해서, 그리하여 그 생명을 누리면서 얻는 기쁨이 우리들 가운데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다고 사도 요한은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

5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과의 사귐,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의 특성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우리는 이 생명의 교제의 특성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먼저 이 생명의 사귐의 가장 근본 대상이신, 상대자이신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온전하신 성결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세상 가운데서 계시하신 빛 처럼 밝히 드러내신 하나님의 모습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맞닥뜨리는, 하나님과 만나는 삶의 모든 순간과 장소에서 오직 환한 빛만 볼 수 있으며, 어떤 더듬의 조각이나 그림자도, 티나 주름잡힌 곳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과 만난 순간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는 모든 순간과 삶의 장소에서 하나님은 환한 빛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전혀 없으십니다.
디모데전서 6:15-16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그 귀한 성결의 빛은 너무나 강렬해서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고서 살 자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목도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하고 그는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망하였구나, 모세와 같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하나님과 대화하였던 사람도 오직 하나님의 뒷 모습의 영광만 볼 수 있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죄로 얼룩지고 더러워진 타락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고서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의지하고서만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전에 들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따라서 만일 어떤 사람이 스스로 이처럼 성결한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과 생명의 사귐을, 살아있는 생명의 사귐을 누린다고 말을 하면서도 어두운 가운데, 죄 가운데 사는 자가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말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이 어찌 공존할 수 있으며,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귀는 자가 어찌 그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는 어두움의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저가 빛 가운데에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오직 하나님께서 환한 빛 가운데 계신 것 처럼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할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과 사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빛 가운데 살 때, 거룩한 삶을 살 때 하나님과의 사귐, 그 생명의 교제를 계속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그러나 7절 말씀 중에 한 가지 주의해야할 표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하는 표현입니다. 즉, 빛 가운데 행하며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누리는 성결한 삶이 그리스도의 피로 날마다 정결하게 되는 삶, 용서와 정결의 삶을 수반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매일 용서와 정결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죄와 더러움이 전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매일 용서받고 정결해 진다고 하는 것은 죄와 더러움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앞에 말한 것과 전혀 상반되는 상충되는 말씀입니다. 죄짓지 않는 성결한 삶을 사는 자만이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는다고 해놓고서 이제와서는 용서와 정결이 필요하며 그와같은 용서와 정결이 수반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역설적인 말씀을 다음과 같은 질문의 시각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여기에서 성결한 삶을 사는 자만이, 빛 가운데 사는 자만이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누린다고 해놓고서 왜 그와같은 생명의 교제를 누리는 삶에 용서와 정결하게 함이 수반된다고 이야기하는가? 전혀 앞뒤가 맞지않는 말인 것 같지만 이 역설적인 말씀을 다음의 질문의 시각에 비추어 생각해 봅시다. 예수 믿는 사람은 믿은 후에 전혀 죄를 범하지 않는가? 믿다가 범죄하면 영영 어두움 속으로 떨어지는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단절되는가? 이와같은 질문의 시각에서 앞에 말씀드린 역설적인 말씀을 바라본다면 비록 외관상 역설적인 말씀으로 들릴지는 모르나 이해가 가는 말씀입니다. 적어도 아직까지 범죄할 수 밖에 없는 우리 입장에서는 두 가지 말씀이 다 필요하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8절 말씀은 이와같은 질문에 대해 우리가 죄없다고 함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그 안에 있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앞에서 죄짓는 생활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해놓고서는 여기서는 전혀 뒤집어서 만일 우리가 죄없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은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은 죄인이요, 어떤 의미에서는 신자라고 할지라도 죄를 완전히 피할 수 없다고 한다면 따라서 아무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누릴 수 없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짓는 생활과는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는 것 처럼 죄짓는 생활 가운데에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에 충실하자고, 그러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불신자거나 신자이거나 간에 하나님과의 거룩한 생명의 교제를 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정결하게 하시리라고 하는 이 말씀은 비록 죄인이라 할지라도 거룩한 하나님 앞에, 어두움과 죄와 더러움이 도저히 설 수 없는 그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이 열려있음을 뜻합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의 용서와 정결케하심으로서만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사귐을 계속 누릴 수 있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는 자나 불신자에게나 다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아무도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한 빛 가운데 거하시는 그 하나님, 어두움이 한 조각도 없으신 그 하나님, 그 거룩하심에 접하고서 ‘나는 망했도다’하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그와같은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의 용서와 정결케 하심을 의지하고서만, 우리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과 생명의 사귐을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어 이 생명의 교제로 들어온 신자에게 지금 드린 말씀은 또 다른 방향의 오해를 불러 일으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 그리스도 안에는 죄사함이 있으니 그저 죄짓고 회개하면 될 것이요, 적당히 편리하게 살면되지, 죄짓지 않기 위해서 아둥바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지 않을지라도, 또 스스로 그렇게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래도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남에게도 이야기하고 자기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지만은, 자기 스스로까지 속여서 생각하기를 나는 죄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한다고 하지만은 실제로는 적당주의와 편리주의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 저와 여러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말씀이 경계하는 것은 습관적인 범죄, 6절 말씀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여기서 ‘행하며’라고 하는 말의 원어를 보면 현재 가정법이 쓰였는데 이것은 그저 한 번만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어두운 가운데 거하는 삶을 뜻한다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의지해서 성경이 경계하는 것은 습관적인 범죄, 계속 죄짓는 생활에서 떠나지 않는 경우를 경계한 것이요, 어쩌다가 실수 한 것까지 책망하는 것은 아니니 그저 우리는 계속 죄짓는 생활에만 빠지지 않으면 된다고 편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반역인 만큼 그 죄의 사인이 아무리 가볍고 경미한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어느 것을 택해서 죄쪽을 택한다고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하나님께 등을 돌려대는 일이요,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버리는 일인만큼 그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기 전에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가 손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짓고 나면 마음이 편해요? 죄를 지으면 생명의 교제를 누리는 기쁨이 떠납니다. 따라서 참으로 믿는 자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자라고 한다면 비록 사소한 죄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인 만큼, 하나님을 버리는 것인 만큼 이로 인해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느끼게 되며,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에서 단절된 듯한 죽음과 어두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잃어버린 시체는 아픔을 모릅니다. 칼로 찔러도 때려도 모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도, 생명이 없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들은 아무리 죄를 밥먹듯이 먹고 지어도 아픈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죄가 죄인줄 모릅니다. 자기 입으로는 죄라고 하면서도 마음에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명 있는 몸은 아픔을 느끼듯이 영적 생명을 소유한 자라고 하면, 참 믿음의 소유자라고 하면, 죄로 인한 아픔과 고통을 느끼게 마련인 것입니다. 우리 몸은 여러가지 지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떤 지체는 주사바늘로 찔러도 아프지 않은 둔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우리 눈 처럼 예민한 부분은 조그마한 티끌만 들어가도 견딜 수 없는 아픔을 느끼듯이 예민한 영적 생명을 소유한 사람, 하나님과의 사귐을 더욱 깊이 풍성히 누리는 사람일수록 사소한 죄까지도 주 앞에 마음을 찢으며, 고통을 느껴 괴로와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회개하는 반면, 영적으로 둔한 사람일수록 그 고통이 약한 것입니다. 죄를 짓고도 그 느낌이, 자책의 고통이 점점 둔해진다고 하면 하나님과 누리는 생명의 사귐이 병들었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가슴을 치며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은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1-2)

비록 신자라 할지라도 죄를 완전히 피할 수 없으며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회개하는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사귐을 계속 누리게 하는 그리스도의 용서와 정결케 하심이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이, 결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마음대로 지어도 좋다는 면허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더 나아가서 죄를 가볍게 생각해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이 말씀이 분명히 말씀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죄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죄입니까? 물론 그 객관적인 근거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은 가장 기초적으로 죄를 판별하는 법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조용히 무릎 꿇어 과연 이것이 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까? 그에 대한 확답이 없으면 그것이 죄인 것입니다. ‘과연 주께서 이것을 기뻐하십니까?’ 그에 대한 자신이 없이 행동하는 것이 모두 죄입니다. 아무리 사소한 죄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생명의 교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생명의 교제를 소중히 여기는 자라 그러면 목숨을 걸고 죄를 피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죄를 지은 경우, 범죄한 것이 기정 사실화 된 경우에는 이로써 모든 것이 끝장났다,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이런 죄를 범했으니 어찌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 절망하지 말고 낙담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기억하라, 온 세상 죄를 속죄하고도 남을 구속을 이루시는 그리스도,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실 수 있는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온전케 하실 수 있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3-6)

그러면 우리가 그를 알았고, 그 안에 있고, 그 안에 머문다는 사실 즉, 날마다 끊임없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더불어 생명의 교제를 누리고 있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무엇을 보고 우리가 그와같은 생명의 교제를 누린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는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 그의 말씀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께서 그와 더불어 우리로 하여금 함께 받아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 이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십시다. 성경은 이 참 생명, 영생에 대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것, 또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 하는 등의 표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믿는 것, 아는 것이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무엇에 대해 아는 지식, ‘아! 그렇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은 지식의 내용과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만의 무엇은 아닙니다. 생명의 토대를 둔, 생명과 관련된 지식은 ‘아! 그렇구나’ 하는 바로 그 속에 지식과는 다른 무엇인 생명의 움직임이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갖는 인격을 믿는다고 하는 것, 인격를 안다고 하는 것은 차디찬 비인격에 대해 안다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인격 안에 나 자신을 던져 넣는 것을 뜻하는 것이요, 쉽게 표현하면 그의 품에 안기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수학 공식을 안다는 그 뜻과는 달리 내가 내 아버지를 안다, 내 어머니를 안다고 하는 그와같은 앎인 것입니다.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사귐이라고 하는 형식과 틀 안에서 우리가 받아 누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다는 말씀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 들어가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누린다고 하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날마다 인격적 사귐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는, 그와 하나되어서 누리는 사귐을 통하지 않고서는 생명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은 우리에게 있어서 성령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성령님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성부 하나님과 성자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우리는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가능케하시는 이 성령님의 생명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비록 미약한 신앙이어서 겨자씨 같이 아주 적은 믿음, 미약한 움직임이라 할지라도 참 믿음을 가진 자는 이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움직임이 우리의 인격과 심령과 삶 속에서 역사하는 것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통한 생명의 움직임이, 이 생명의 역사가 우리 인격과 심령과 삶을 변화시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면 그것은 구원얻은 사람이 아닙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요. 10년을 믿어도 좋고 50년을 믿어서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꾸며댈 수도 있고요, 말로는 나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니까 다른 사람은 그 말에 대해 아무도 반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시고 그 사람도 압니다. 과연 내 속에 그와같은 생명의 움직임이 있는지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을, 자신의 심령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믿는 너희로 하여금 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하는 이 말씀은 한편으로 보면 매우 미약한 신앙인 경우, 그 생명의 움직임이 너무 미약해서 감지하기가 힘든 경우,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참되다고 하면, 내가 이 생명을 소유하였다고 하니 비록 미약한 느낌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참 새 생명이구나, 세상이 주는 생명을 내가 밥먹고 사는 그 생명과는 다른 무엇, 어떤 참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확신케 하는, 연약한 믿음을 도우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말한다면 이와같은 생명이 없는 자는, 이 생명의 움직임이 없는 자는 믿는 자가 아니요, 한 때는 믿었다 할지라도, 믿는척 했다 할지라도 그 믿음이 죽은 믿음이라고 하는 무서운 경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내 속에서 성령님의 생명의 움직임이 충만한가 아니면 정말 죽은 믿음 처럼 쓰러져 없어졌는가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말해 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심령을 들고 하나님께 물어보시고 여러분 심령을 스스로 들여다 보시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9:16-26

앞에서 요한일서 1장과 2장을 통해서 신자가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생명의 사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전파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는 공동체, 교회 안으로의 초청이요,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누리는 생명에의 초청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과연 우리 안에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생명의 교제가 있는가 하고 스스로 늘 자문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없는 공동체 안으로의 초청은 영적으로 죽은 일반 세속 단체에의 초청과 다름없는 전혀 무의미한 초청이요, 오히려 이미 생명을 얻은 자로 하여금 함께 영적으로 말라 죽게 하는 단체 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개인 신자도 과연 내가 날마다 하나님과 살아있는 생명의 사귐을 가지며, 내 심령과 삶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살아 움직여 역사하심을 체험하는가를 늘 확인해야 합니다.
두번째로 말씀드린 것은 이 생명의 사귐은 빛이신,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사귐인 만큼 이런 하나님과 날마다 사귐을 갖는 자라고 하면 필연적으로 그 사람의 삶도 빛 가운데 행하는 정결한 삶일 수 밖에 없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죄인인 우리에게 있어서는 아무도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정결한 빛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과의 사귐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무한한 긍휼과 용서하심,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정결케 하시는 성화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나,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자는 그 자신도 거룩하게 사는 자 일 수 밖에 없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결같이 그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빛 가운데 행하는 삶,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거룩하게 사는 성결한 삶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가 계명을 지키는가 아닌가, 그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지 아닌지를 보아서, 그가 하나님을 아는지 하나님과 생명의 사귐을 누리는 자인지를 알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계명 순종의 삶이 하나님과의 사귐의 증거가 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계명 순종의 삶이 하나님과의 사귐의 증거라고 하는 말씀은 어떤 더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말씀인데 즉,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내적 생명의 사귐의 외부적 표현이 곧 계명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누리는 내적 생명의 외부적 표현이요 그 생명의 자기 실현, 자기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표현을 빌자면 계명을 즉, 하나님 말씀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영적 생명이 맺는 결실,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삶을 가리켜 항상 열매맺는 삶, 30배, 60배, 100배 결실하는 곡식과 같으며, 거룩한 열매를 맺는 삶이라고 로마서 6장에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거룩한 삶, 성결한 삶은 생명 누림의 열매이므로 이 성결한 삶이 없는 사람은 생명의 교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만은, 그렇다고 해서 먼저 거룩하게 살아야 참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순서에 대해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먼저 생명을 얻은 자가 그 생명의 열매로 거룩한 삶이 나타나는 것이지 내가 거룩하게 살기 때문에 그래서 생명을 얻어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순서를 뒤바꾸면 절대 안됩니다. 순서를 뒤바꿔버리면 바로 율법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드릴 말씀과 관련이 되기 때문에 여기서 한 번 짚고 넘어갑니다.
그러나 이처럼 계명 순종의 삶이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내적 생명의 사귐의 외부적 표현이요, 결실이라고 하는 사실은 어떤 더 깊은 원리를 그 안에 품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내적 생명의 사귐이 대등한 관계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대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귐이 아니라 명령자와 피명령자, 명령자와 명령받는 자, 통치자와 피통치자,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그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귐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사귐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통치라고 하는 형식 안에서, 그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누리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누리는 생명과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 그리고 그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참 생명은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일부러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오늘 취급할 본문 가운데 이 부분을 밝혀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취급하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세 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에 다 같이 나타나며, 그것도 매우 흥미롭게 세 복음서가 꼭 같이 부자 청년 이야기 바로 앞에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의 경우에는 그 어린아이를 축복하신 사건 앞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어린아이를 안수하시고 축복하신 사건은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는 말씀이 가리키듯 누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가 즉,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고,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세 복음서가 꼭 같이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는 말씀이 가리키듯 영생을 얻는 문제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비유와 사건들이 각각 의, 하나님의 나라, 영생을 얻는 것에 대해서 말하지만 의, 하나님의 나라, 영생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실제에 있어서는 동일한 내용을 뜻하거나 아니면 상호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들이므로 실제에 있어서 이 모든 비유의 사건은 같은 주제 즉,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주제를 다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오늘 취급하는 본문 말씀도 지난번 요한일서에서 취급한 주제 생명,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누리는 참 생명, 영생에 대해서 개괄적인, 서론적인 전체 윤곽을 말씀드렸습니다만은 오늘은 이 생명,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받아 누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영생을 갈구하는 어떤 청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본문 말씀은 이 청년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여러가지 사실을, 정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떤 인물에 대해 이처럼 자세히 묘사하는 것은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 이야기와 더불어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어떤 인물에 대해, 그 사람의 배경에 대해서 그렇게 신상에 대해서 자세히 묘사하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우선 이 청년은 영생에 대한 깊은 관심과 그것을 갈구하며, 소원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영생에 대한 그의 간구가 얼마나 간절하고 진지했는가는 그가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태도를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17에 보면 그는 힘을 다해 달려와서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단맛, 쓴맛, 황금기 다 보내고 늙어 죽을 날을 앞둔 노인이 우리 인생이 결국 이렇게 끝나고 마는가 라고 하는 허무감에 사로잡혀서 어디 영생의 길은 없는가 하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 아직은 살 날이 창창한 이 젊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으니 참으로 훌륭하고 모범적인 청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젊을 때에 늙어 죽을 날이 이르기 전에 조물주를 기억하라고 하는 전도서의 말씀에 철저히 충실한 청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우기 그는 부자였다고, 그것도 어지간한 부자가 아니라 심히 부유한 어마어마한 재산을 가진 자로 성경은 묘사하고 있고, 누가복음에 보면 거기에다가 관원이었다고 하니 돈과 권력을 아울러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웬만한 사람이면 인생경험이 풍부한 노인이라 할지라도 이만한 재물과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면 그저 이 돈과 권력을 가지고 인생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 버리지 영생에 대해서 새삼스런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더우기 젊은 청년이 아닙니까? 한창 인생의 모든 것을 손아귀에 넣고 즐기고 싶은 마음이 섰을 때가 아닙니까? 사실 오늘 우리의 경우를 보아도 생활에 아무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 명예와 지위와 재물과 그런 것들을 다 소유한 사람들은 그들이 그렇게 재미있게 즐기는 이 세상의 생명이 아니라 또 다른 생명에 대하여 이야기해 봐야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그 많은 재산과 권력을 소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것만 가지고서는 안되겠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요, 더 귀한 것, 영생이 있음을 깨닫고 영생 얻기를 소원했습니다. 더우기 혈기방자한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시자, 내가 어려서부터 이런 것들을 다 지켰다고 대답할 만큼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만하면 어느모로 보나 세상적인 안목에서나 신앙적인 면에서나 전혀 흠잡을 데가 없는 모범적인 청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남의 눈에나 자기 눈에 다 같이 육적으로, 영적으로 부유했던, 모자라는 것이 없었던 부자 청년이었지만 막상 자신의 영생문제에 대해서는 남에게 내보일 수 없었던 어떤 내적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그는 영생에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했다는 그런 자신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가 내가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 또는 소유하고 있다고 하는 그런 자신과 확신이 있었더라면, 예수님께 이처럼 급히 달려와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을 했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달려와서 분명히 영생의 길에 대해 가르쳐 줄 수 있는 선생이라고 믿고 꿇어 앉아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이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영생의 길을 물은 그 질문의 성격에 대해서 즉, 그가 왜 예수님께서 영생의 길을 대답해 줄 수 있었다고 생각했는지 말하자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나왔는지에 대해서 잠깐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이 청년이 예수님께 나와서 물은 질문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였습니다. 즉, 그는 자기가 무엇을 행해서 영생 얻는 길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행위에 의한 영생, 자기의 ‘의’, 율법적 ‘의’에 의한 영생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은 결국 자기 행위에 근거한 영생, 자기 ‘의’, 자기가 이룬 ‘의’에 근거한 영생을 염두에 두고 한 질문이라는 사실을, 거의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율법사의 질문인 누가복음 10:25 이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시험하여 가로되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율법 즉,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율법을 행하면 생명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율법사는 자기를 의롭게 보이기 위해서, 자기를 의롭게 하기 위해서, 달리 표현하면 자기가 의롭다고 하는 자기 주장과 자기 확인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환언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의로와지는 길, 그리고 영생을 얻는 길을 고수하기 위해서 ‘내 이웃은 누구니이까 내가 누구에게 더 이웃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부자 청년의 이런 질문 ‘내가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하는 질문은 동시에 그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고 나아왔는지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즉, 부자 청년은 선한 선생,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하여 의로와질 수 있는 인간의 전형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하고 나아온 것입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하여 의로와질 수 있는 길을 말해줄 수 있는 선생이라 생각하고 그 방법에 대해 물은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하여 의로와질 수 있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본 것입니다. 하나의 선한 인간, 그 스스로의 힘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인간의 가능성, 인간의 전형을 본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수수께끼와 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것에 관해서 묻느냐’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유일하게 선하신 분이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대답은 매우 암시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와질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고 즉, 예수님을 선한 인간으로 보고 질문하는 청년에게 ‘어찌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선하시다’고 하는 대답은 예수님은 하나님도 아니시요 선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네가 나를 선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고 묻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노니 하나님 외에 어떤 인간도 선하지 못하다는, 악하다는 뜻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숨은 더 깊은 뜻은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네가 나를 선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고 묻는 질문에 대답하노니 어떻게 인간에게 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느냐,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다. 이 말씀은 오직 하나님만이 선의 유일한 근원과 표준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근원적으로 선하시어서 모든 선의 근원이 되시고,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말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선을 행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의로, 제 스스로 이것이 선이다, 저것이 악이다라고 정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 즉, 선의 유일한 표준과 근원으로서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그의 계명을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스스로 행해서 영생을 얻으려면, 자기 의에 의한 영생을 얻으려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가 영생에 들어가기를 원하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는 말씀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그와같은 말씀에 청년이 그러면 어떤 계명을 뜻합니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열거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부모를 공경하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을 들은 후 청년은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이 계명들은, 이 정도는 어려서부터 항상 내가 지켜왔습니다. 무엇이 더 부족합니까. 누가복음 10장에 나타난 율법사의 경우는 자기를 의롭게 보이기 위해서, 계명을 지키는 일에 관한한 자기가 의롭다고 하는 것을 그 확신과 주장을 고수하기 위해서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물었다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를 알지 못하고 스스로 의로와질 수 있다고, 율법을 다 지켰다고 그 정도는 다 지켰다고 고집하는 청년을 예수님께서는 주시하여 보시면서 사랑하여 말씀하시되 그가 대견해서, 그만큼 율법을 지켰으니 대견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그를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으로 말씀하시되 아직 너에게 부족한 것이, 남은 것이 한 가지 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표현들은 한결같이 너는 다 지켰다고 장담하나 온전하게 지킨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나를 선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고 선한 것에 대해서 물었을 때에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선하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선의 유일한 표준과 근원이시다라고 하는 말의 뜻을 알지 못하느냐, 너는 하나님의 계명을 적당히 네 수준에서 이해해서 다 지켰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네가 보는 선의 표준이요, 네가 생각하는 수준에서 지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선, 의의 표준이 무엇인지 아느냐? 하나님의 계명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 아느냐?라고 하는 뜻이 그 속에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의 수준이 얼마나 엄중한가 하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 그리하여 그 청년이 죄인임을 스스로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청년에게 이웃 사랑을 그럼 한 번 실천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이웃 사랑이란 네가 그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재산을 하나 남김없이 몽땅 팔아서 가난한 사람, 그 재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의를 고집하기 위해서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물은 율법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이웃은 나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사람, 나에게 가깝고, 잘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사마리아인이라고 개 처럼 취급하는 원수 같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곤경에 처해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면 기꺼이 그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는 나를 멸시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원수라 할지라도 그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면 그를 긍휼히 여겨서 그에게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이웃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자기를 온전히 희생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자기 포도주와 기름으로 원수 같은 유대인의 상처를 치료하고 자기 나귀에 태우고 저는 걸어갔으며, 여관에 맡기고 떠날 때에 자기 돈으로 넉넉하게 지불하다 모자라면 돌아갈 때 더 주리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상대방의 필요를 완전히 채워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여러가지 계명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 보라고 하셨는지에 대해서도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가는 계명보다 작은 계명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영적이고, 내적인 만큼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 실천의 정도나 여부를 가늠하기 힘든 반면에, 이웃 사랑은 구체적인 대상을 가지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인 만큼 그 실천 여부를 확인하기 쉬운 사랑입니다. 결국 이웃 사랑을 실천해보라고 한 것은 네가 이 작은 계명도 지키지 못하면서 더 큰 계명,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네 생명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이 작은 계명 하나도 지키지 못함을 네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지 않느냐? 이래도 네가 죄인임을, 네 힘으로는 결코 의로와질 수 없음을 알 수 없는가?라고 하는 뜻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청년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이 심히 많은고로 욕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도 못하면서 그러면서도 자기가 죄인됨을 엎드려 고백하고 회개하지도 못하고 여전히 계명을 지켜서, 선을 행해서 영생을 얻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의를 고집하면서 번민과 고통에 휩싸여 돌아가는 청년을 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청년이 가지고 있는 재물에 대한 사랑, 이 세상 것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장애가 된다고 하는 그런 뜻만이 아닙니다. 무언가 자기 것을 많이 가진 사람, 영적으로 부자인 사람, 자기 의가 많은 사람, 나는 이런 저런 일을 했다고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천국에 들아가는 것이, 영생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매우 의미심장하게도 누가복음을 보면 이 부자 청년의 사건 앞에 어린아이를 축복하신 사건이 나오고 그 앞에 바로 바리새인과 세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서 ‘나로 하여금 영적 부자로 살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식하며, 십일조를 바치며, 남의 것 착취하지도 않고, 사기쳐 먹지도 않고, 간음 죄도 범하지 않고, 의롭게 살게 해 주시니, 나의 의가 이처럼 풍성하도록 살게해 주시니 감사하나이다라고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고, 남을 멸시하는 바리새인은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대신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세리, 민족의 반역자요, 인간 쓰레기인 세리가 오히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전도하면 누구나 다 느끼게 됩니다만은 자기는 양심적으로 산다고 하는 사람 만큼 전도하기가 힘든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는 양심적으로 살아서 나 같은 사람이야 말로 구원받을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만큼 전도하기가 힘든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값없는 사랑이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다른 사람들보다 그래도 조금 의롭게, 양심적으로 살았으니 구원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생각 배후에는 무엇을 행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런 가짜 영적 부자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하나님 표준에 통과되는 의인은 하나도 없고 가짜 쓰레기 같은 의인만이 가득한, 가짜 영적 부자들은 오히려 그 못난, 모자란, 수준 이하의 선행 때문에 천국을, 영생을 소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부유한 이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할만큼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부자 청년의 말을 너무 평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양심, 자기 수준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할만큼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부유한, 저런 청년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듣고 아직도 예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한 제자들까지 과연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일까? ‘저런 영적 부자가 구원을 못얻는다면 누가 도대체 구원을 얻는 것일까?’ 하고 반문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께서는 다 할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영생을 얻는 일은 사람으로는 불가능하고,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선으로, 자기 행위로 들어갈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년에게 이웃 사랑을 명하신 다음에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의 첫째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이웃 사랑을 실천해보라고 함으로써 자신의 죄인된 모습, 이때까지 나는 계명을 다 지켰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계명 앞에서 자신이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원한 것입니다. 나를 선한 인간의 전형으로 보고 너도 나 처럼 행해서 자기 힘으로 구원받겠다고 하는 사람아, 헛된 망상을 버려라. 인간으로서는 생명을 얻을 자가 없고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표준에서는 죄인이어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아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 너와 같은 죄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비록 육신을 입고 죄인의 모습을 취하셨으나 여전히 하나님이신,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나, 내 백성의 영적 가난과 필요를 온전히 채우시 위해서, 그 생명까지 희생한 하나님으로서의 나, 그 백성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원수시하고, 십자가에 못박기까지 한 원수 같은 너희를 사랑하사, 영적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진정한 이웃이 되신 그리스도에서 가능성을 찾으라. 그에게 소망을 두어라.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선해질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된 인간을 의롭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가능성과 능력을 바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27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저희가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이 썩어질 육신의 생명을 위한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에서 이 썩어질 육신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의를 추구하는 삶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영생을 위한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질문했습니다. 영생을 위해 우리가 행해야 할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이런저런 선행을 행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그의 긍휼하심에 나를 맡기는 믿음만이 요구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래에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영생은 ‘하늘로부터 온’ 즉, 하나님으로부터 온 생명의 양식인 그리스도를, 그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믿음으로 그가 이루신 구속을 값없이 받아 누리는 것, 그의 피로 이루신 죄사함을 받아 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은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혈육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혈육에 참여한다고 하는 것은 그와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아담의 혈육에 다 참여한다고 그럽니다. 우리 인간이 태어난 것은 흔히 부정 모혈로 태어난다고 그럽니다만은 모든 인간은 혈연관계로 맺어져 있습니다. 그 혈육에 참여한다고 하는 것, 한 혈육이 된다는 것은 하나됨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아담의 혈육에 참여해서 그와 하나되는 인류가 아담의 범죄와 그 결과인 사망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이 그리스도의 영적혈육에 참여해서 영적으로 그와 하나된 그리스도인들은 그에 의해 참여한 바가 되어서 영원한 생명을 그 안에서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너무 딱딱하게 되었습니다만은 오늘 드릴려고 했던 말씀의 주제 - 우리가 복음에 초청받는다고 하는 것 - 우리가 신앙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사귐을 갖는 것인데, 하나님의 사귐 안에서 영원한 생명 누림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그럼 이 생명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 누릴 수 있는가? 오늘 말씀에서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기를 사람의 가능성, 사람의 능력 밖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제일 위험한 것은 내가 뭘 행해서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 아니라고 말은 합니다. 세례 문답 때 들어보면 ‘어떻게 구원얻습니까?’, ‘믿음으로 얻지요’, ‘믿습니까?’, ‘예’ 합니다만 그 대답하는 신앙고백에 자신이 없고 그와같은 고백 속에 어떤 내적인 감동과 감격이 없는 것은 실제에서는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입만 달작거리지 진심으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무엇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철저히 젖어 있습니다. 태어나서 이때까지 그런 식의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좀 식자층에서 웬만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욕이 뭔가 하면 공짜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의식 속에서는 철저히 공짜를 바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찌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을 준다고 하니까 내가 무슨 보답으로 내놔야 하고, 내가 먼저 값을 치뤄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입으로는 믿으려고 고백을 하는데 속에서는 그것이 정리가 안되어서 실제로는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영생은 하나님이 주시니 아무 말없이 그저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 누리라는 것입니다. 공짜로 받는 것이 민망해서 자꾸만 무엇을 해야한다. 비록 내가 드리는 것이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것도 다 인정하지만 그래도 뭔가를 해야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으면서 내가 뭘 해야 한다. 내가 뭘 갚아야 한다. 또 미리 값을 치뤄야 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윤리 차원에서는, 또 우리 세속적인 인간 표준에서 보면 상당히 신사적이요, 참 좋은 사람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이것은 굉장히 모독적인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우리가 값주고 살 수 없을 만큼 비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어떤 분이 1억원 상당의 선물을 주었는데 받는 사람이 너무 미안해서 10원짜리 사탕을 주었다고 합시다. 그래놓고 나와서는 늘 생각하기를 10원주고 이 선물을 샀다고 하면, 그 선물을 준 사람한테 얼마나 큰 모독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갚을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실제로 따지면 우리는 하나님께 받기만 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걸치고 있는 옷, 여러분이 먹고 사는 것, 그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이 다 뼈빠지게 일했으니까 그것 다 내 손으로, 내 힘으로 받아 누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생명도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 물건 값도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의 주머니 사정도 생각지 않습니다. 무조건 사달라고 그러고, 사주면 뻔뻔스럽게도 고맙습니다란 말 한 마디로 끝이 납니다. 또 어린아이는 물건을 원할 때, 자기가 값을 치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는 내가 필요한 것을 모두 주시는 분이시다는 믿음, 그 하나 가지고 무조건 다 달라고 졸라댑니다. 또한 공짜로 받고 미안하다고 그러지도 않습니다. 비유컨대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받아 누림도 이와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너희가 어린아이 처럼 천국을 영접하지, 어린아이 처럼 천국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천국을 소유할 수 없다는 말씀의 뜻이 이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봅시다. 내가 무엇을 해서, 의를 행해서 영생을 소유해보겠다한 바리새인, 자기의 수 많은 영적 부를 하나님 앞에 자랑했던 바리새인들, 예수님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웃 사랑을 실천해 보라고 그랬는데도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반문했던 율법사, 모두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줘보라 하신 그 말씀 앞에도 고꾸라지지 않는 이 부자 청년은 영생에서 멀어졌습니다. 그저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아무 받을 자격이 없으나 그저 긍휼히 여겨달라고 은헤를 구한 세리와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하니 어린아이 처럼 받아들인 삭개오는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늘 주위로부터 무엇을 받으면, 반드시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그것이 옳은 윤리라고 하는 사상에 찌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도 항상 내가 무엇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린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특히 구원 문제에 있어서는 영생을, 죽은 영혼이 새로운 생명을 얻는데에 있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할려고 들면 받을 수도 없을 뿐더러 이미 공짜로 받아 누려놓고 내가 무엇을 해서 누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적질하는 자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은 결코 진정한 마음에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네가 영생 얻기를 원하느냐? 하나님께서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 보내신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 그것을 받아 누리고, 하나님의 가능성을 바라고 추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드린 말씀의, 부자 청년의 비유에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의 첫번째 뜻인 것입니다.
앞의 말씀에서는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은 부자 청년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신 이 예수님의 대답이 의미하는 첫번째 의미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선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자신도 선을 행하여 영생을 얻기 원해서 선행을 통한 영생을 묻는 청년에게 예수님은 계명 중의 하나인 ‘이웃 사랑을 실천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켰다고 말하는 부자 청년이 실제에 있어서는 지킨 것이 아니요,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불의한 자요,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선행을 통한 영생, 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니 아예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의와 영생의 가능성과 그 근거를 네 자신에게, 인간에게서 찾으려고 하지 말라, 아예 그 생각을 버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 영생의 가능성을 네 자신에게서 발견하려 하지 말고 나에게서,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라 하신 것입니다. 선을 행해서 영생을 얻겠다는 생각을 아예 포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갑없이 의로 주어지는 의와 영생을 그저 받아 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원하셨던 것은 너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이웃 사랑의 계명 앞에서 이제껏 자기의 힘으로 선을 행해서 영생을 얻겠다는 모든 노력이 헛된 노력이었고,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불의한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내가 죄인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오직 주만이 구원과 생명의 길 되심을, 오직 주 안에서 나의 영생이 가능함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을 예수님 품 안에 던져 내 맡기심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임하는 영생의 나라, 천국에 대해서 세례 요한이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되 그 외친 제일 첫 마디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임하는 영생의 나라, 그 영생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되었다,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요, 나에게는 의가 없다’고 시인함으로써 나의 가능성, 인간의 가능성을 철저히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가 이처럼 죄인됨을 고백하고 마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면 회개는 우리에게 절망스러운 것, 죄인이니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기다려야 하는 절망스러운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죄인임을 시인하고 고백하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 하나님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용서하고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바라고 그의 긍휼하심에다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요. 예수님을 만났거나 또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참 믿음의 소유자들의 간구는 ‘주여, 긍휼히 여기어 주십시요’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오니 내 안에서는 더 이상 영생의 구원의 가능성이 없나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하시고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주의 긍휼을 의지하오니 나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이와같은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무릎 꿇는 자는 그 순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며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생명을 받아 누리는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직 이와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고 신뢰하고 그것에 나 자신을 맡기는 믿음으로 우리는 영생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의 특징은 시종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나는 죄인이요, 구원의 가+능성이 나에게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요, 오직 모든 가능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신 긍휼과 사랑에 두고 이를 붙잡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의로운 것이 없습니다. 내가 뭐 받을 만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기 부정의 태도, 자기 의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붙잡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롬 10:3을 보면 바울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습니다. 이 유대인, 구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 이스라엘 사람들, 이 사람들이 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으나 십자가에 못박고 또 그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를 온갖 핍박으로 박해하던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이었습니다. 이 불쌍한 사실을 두고 바울 사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왜 유대인이 이처럼 하나님의 복음에 참여하지 못하는 줄 아는가?’ 그것은 이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안식일에 적군들이 달려와 목을 쳐도 감수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에게는 열심이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하자면 옳은 열심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의 내용을 설명하여 말하기를 ‘자기 의를 고집하다가 하나님의 의를 배척하는 민족’이었다는 것입니다. 제 스스로 뭔가 선을 행해서 영생을 얻었다고 날뛰다가, 정작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민족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망하였다고 바울 사도는 한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의 두번째 뜻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내용에 따르면,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계명 즉, 율법의 말씀은 이 부자 청년으로 하여금 그가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동시에 자신에게는 영생의 가능성이 없음을 깨달아서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려는 즉, 그리스도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의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의 정체를 드러내서,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해서 스스로 정죄받아 나는 구원받지 못할 죄인임을 깨닫게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이웃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신 의도가 그저 네가 죄인임을 깯달아 그리스도를 의지하라 즉, 청년으로 하여금 스스로 죄인임을 깨달아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려는 그런 목적으로만 주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이와같은 계명을 말씀하신 것은, 이웃 사랑을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저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의도뿐이고 실제로 그렇게 행하는 의도는 없는, 그런 시도도 하지 않는 빈말에 지나지 않는 계명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9장 본문 말씀을 주의 깊게 읽으면 누구나 느끼듯이 이 계명은 그저 빈말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죄인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말씀만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그렇게 행하라고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 계명을 말씀하신 의도는 먼저 부자 청년으로 죄인임을 깨달아서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생명을 얻게 하려는 동시에 믿게된 경우, 그 청년으로 하여금 그 계명을 실제로 실천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게 하시려는 이 두 가지의 의도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라’ 이 간단한 말씀 속에 율법의 이중 기능 즉, 하나는 죄의 정체를 드러내어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따라서 나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으니 그리스도를 의지해야겠다는 이런 기능과 동시에, 그처럼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난 다음에는 계명을 실제로 순종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게 하려는 이 두 가지 기능이 거기에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간단한 말씀 속에 이처럼 복잡한 내용이 함축되어 있을 수 있는가? 또 어떻게 그 한 마디 동일한 말씀이 그런 이중적인 뜻을 가질 수 있는가? 의아해 하는 분을 위해서 좀더 구체적인 설명을 하고자 합니다.
로마서 6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은혜가 더욱 풍성하도록 우리가 계속 죄에 머물러야 하겠는가? 그리스도 안에는 무한한 죄사함, 용서가 있으니 이제는 죄짓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서 특별히 마음 쓸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건 그렇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생각은 안해도 되지 않는가, 왜냐하면 죄를 지어도 이미 무한한 용서를 이루셨으니 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것이며, 오히려 죄를 범하면 범할수록 그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상대적으로 더 풍성해질 것이니 오히려 더 좋은 것이 아닌가’ 이와같은 어리석은 가상적인 질문에 대해 바울이 반문하기를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 믿음으로 그와 하나되어 그 안에 있는 영생을 누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냐고 힐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얻는다고 하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곧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요 즉,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던, 계명을 지키지 않던 불순종의 삶과 관계를 끊는 것이요, 거기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새 생명의 특징은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것, 불의의 삶을 청산하고 모든 지체를, 모든 삶을 의를 행하는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 거룩한 열매 맺는 삶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구원 자체가 하나님을 불순종하여 죄와 사망 가운데서 헤매는 상태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서, 하나님을 순종하여 생명을 누리는 새 생명을 얻게하는 것인데 죄를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이 새로 얻는 구원의 생명을 버리고 다시 죄와 사망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니, 기껏 죄와 사망에서 종노릇하는 것을 해방시켜주었더니 다시 죄에게 종노릇하겠다고 부득부득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해내서, 해방시켜서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해 주었더니, 고기가 먹고 싶어서, 죄짓던 생활이 그리워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겟다고 아우성치는 이 이스라엘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된 다스림 안에서 생명을 누리며 사는 이 순종의 삶을 은혜로 우리에게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또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새 생명 즉, 영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기껏 생명을 주었는데 다시 죽음의 상태로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계명 순종과 생명을 누리는 삶이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번에도 거듭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만 우리가 계명을 순종해서 그 보답으로, 그 댓가로, 그 보상으로 생명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계명 순종의 삶과 생명 누림이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생명의 본질이 바로 순종의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새 생명, 영생은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는 형식으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순종의 형식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계명, 율법의 이중 기능 즉, 죄인임을 깨닫게 해서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함으로써 새 생명을 얻게 하고, 또한 계명을 순종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생명의 삶, 계명을 순종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생명을 누리는 이 삶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율법의 이중 기능을 다른 각도에서 한 번 살펴보기로 합시다. 조금 이해를 돕기 위해서 율법의 첫째 기능이 우리로 하여금 죄의 정체를 드러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은 죄다, 가장 큰 죄다. 이와같은 율법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살면서도 죄가 죄인줄 모릅니다. 이와같은 율법이 있으면, 아! 그와같은 것이 죄로구나, 죄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정체를 드러내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이 율법의 첫째 기능 즉, 이렇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뭐 한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말하자면, ‘율법에 비춰보니 아!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로구나’ 하는 이런 깨달음이 있는 자는 그 깨달음 이전에 또 다른 깨달음이 있어야 됩니다.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거룩하고, 신령하고, 선하고, 의로운 계명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어떤 계명을 두고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이요, 이것은 옳고, 선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법에 비추어서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계명에 비추어서 내가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먼저 그 율법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요, 거룩하고, 선하고, 옳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이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사람 즉, 모든 중생자는 이미 하나님의 율법이 선하고, 신령하며, 옳다는 것을 인정한 사람이요, 따라서 모든 중생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하고 그대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다 기초적으로 경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앞에 ‘내가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의 사랑이 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이전에 나를 정죄하던, 나로 죄인임을 깨닫게 하던 그 계명이 나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 계명을 기뻐하게 됩니다. ‘아! 저것이 옳구나, 저렇게 살아야겠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고 하는 소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첫번째 현상입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거듭거듭 말하기를 중생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선하고 신령한 것으로 인정할 뿐 아니라, 그 율법 행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기뻐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생명, 새 생명의 본질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계명, 하나님의 율법이 옳고, 거룩하다고 인정하는 마음이 없다거나, 계명을 기뻐하고 그것을 행하기를 원하는 소원이 없다면 이 사람은 중생한 사람,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시작된 새 생명의 소원보다, 그것이 외치는 소리보다 우리 육신의 정욕이 외치는 소리가 더 커서 거기에 눌려 지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의 이와같은 이중 기능이 가장 아름답게 이루어진 실례를 우리는 삭개오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자기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과 회개하는 세리의 이야기로 시작한 후에 어린아이 안수 사건이 나오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바로 부자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소경의 이야기가 나오고 이어서 삭개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런 순서로 배열된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부자 청년과 삭개오가 이 초두에 있던 바리새인과 세리의 전형, 또는 실례로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자기 의를 고집하던, 자기가 선을 행해서 영생을 얻겠다고 하던 부자 청년은 ‘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이웃 사랑의 계명 앞에서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지도 못하고, 그 계명을 실행하지도 못하고 근심하면서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자타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세리 삭개오는 그저 예수님께서 주신다고 하니 어린아이 처럼 영생을 받아 누렸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저 은혜로 값없이 영생을 받은 삭개오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가진 재산 전부를 남에게 끼친 해를 보상하는데, 그리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데 사용함으로써 그처럼 경건한 부자 청년도 실패한 이웃 사랑의 계명을 이 세리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가 훌륭하게 실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은혜로 받은 영생에 대한 보답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한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누리게 된 영생, 이 생명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그가 얻은 새 생명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처럼 남을 긍휼히 여기는 삶이며, 거룩하고 선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삶인 것을 그는 직감하였기 때문에 그와같은 일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런 일을 행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갖고 있는 오해가 예수 믿어 공짜로 값없이 구원얻어 그 다음에 게명을 순종해서 거룩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구원을 얻었으니 이제 내가 하나님을 순종하므로 보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의무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큰 잘못인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죄에 찌들어서 우리가 원하는 삶이란 너무나도 뻔하잖습니까? 남을 억누르고 남의 것을 빼앗고 착취해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입니다. 내 자식, 내 가족, 내가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참된 삶일까요? 이것이 아름답고 고귀한 삶일까요? 아무도 그렇다고 생각지는 않을 것입니다. 서로 잡아먹고 약육강식하는 그와같은 삶이 결코 고귀한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모든 계명들, 그것이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 같으나,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의 계명대로 그대로 산다고 하면, 그것처럼 고귀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삶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그 삶 자체가 가장 귀한 복입니다. 그것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다고 귀한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여러분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새 생명, 그것은 바로 이와같이 고귀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 계명 앞에서 스스로 죄인임을 깨닫고 나에게로 와서 영생을 얻으며 하나님의 거룩하고 고귀한 계명을 순종하라’는 삶, 그 거룩한 생명의 삶을, 그 생명을 지속적으로 누리며 살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 ‘나를 따르라’는 말씀의 또 다른 뜻은,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게된 자에게 이루어진 삶, 요구되는 삶은 전적 헌신의 삶, 예수 그리스도께 나를 전적으로 드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네 전 재산을 다 포기하라는 말씀을 듣고 재산을 포기하기 보다는 그가 그처럼 갈망하던 영생을 포기하는 이 청년의 행동에서 볼 수 있듯이, 부자 청년에게 있어서는 영생보다 재물이 더 귀했던 것입니다. 영생이 재물보다 더 귀했다면 그는 재물을 포기했겠죠. 또,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재물을 포기하라 한 것은 그저 재물만 포기하라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전부를 포기하라 하신 것입니다. 자기 전부를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따르는 전적 헌신의 삶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과 관련된 19:27의 말씀을 보면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모와 아내와 남편과 자식과 재물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전적 헌신의 삶은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도나 목사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믿는 자에게서 전적으로 헌신을 요구하신다고 말하면, 대개 사람들은 그것은 목사나 할 수 있는 것이요, 특별한 은혜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이것은 대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잘못된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세상 재미도 손에서 놓기 싫고, 구원은 받고 싶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세상 재미도 적당히 보고 구원도 받고 싶고 그래서 주일 날에 열심히 와서 찬송, 기도하고 그 외에 나머지 6일 도안은 제멋대로 적당히 살아 갑니다. 이것은 비유컨대, 생명과 사망 중간 지점에 서 있겠다고 하는 뜻인데, 사람이 죽기도 하고 동시에 살기도 할 수 있습니까? 죽거나 아니면 산 것이지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식물인간 상태라면 모르겠습니다만, 만일 영적으로 식물인간 상태라면 그것은 참 형편없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함께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것은 특별한 사명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는 명령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흔히 열심인 신자들에게 발견되는 한 가지 오해인데,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일, 신앙생활은 교회 내에서 주일날, 수요일, 금요일에만 할 수 있는 것이요,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만 경건한 일이요,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몇 몇 신자들, 교회 직분자들끼리 어울려 다니면서 모여서 하는 일 그것만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어디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모든 인간관계에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부부 간에서, 부모 자식 간에, 직장에서, 직장 동료 간에서 하나님의 뜻, 말씀을 따라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 장소가 어디거나 그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삶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몸 담고 사는 세상 환경은 악하고 일그러져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일그러진 부부 관계, 원수 같은 부모 자식 관계, 시기, 질투, 약육강식의 직장 동료 관게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의 희생하는 사랑을 통해, 하나님 주신 힘으로 그 뜻을 이루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교회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삶, 삶의 모든 부분에서 전적인 헌신,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만을 위해서 사는 삶이 이루어지길 원하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모든 장소에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 순종의 삶이 이루어지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영역에서 전적 자기 부정의 삶, 여기서 자기 부정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위해 사는 삶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 이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말씀들일 것은 이와같은 헌신의 삶,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삶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포기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부자 청년이 슬퍼하면서 돌아가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불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경악했습니다. 심히 놀랐다고 되어 있는데, 그것보다 더 심한 말이 경악했다, ‘shock’를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저런 경건한 사람,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부자인 사람이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과연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주시하면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함이라.
이 말씀의 첫번재 의미는 지난 번 말씀드린 대로 사람이 자기 선행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의와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듣고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물은 이 제자들의 반문에는 또 다른 의미 즉, 영생을 얻기 위해서 부자 청년처럼 그가 가진 모든 것, 그 자신 전부를 포기해야 한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래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는 의미도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인간인데 과연 누가 자신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헌신의 삶을,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순종하며 살 수 있겠는가? 네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네 가진 것을 모두 팔아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런 삶을 과연 누가 살 수 있겠는가? 제자들의 이러한 반문은 당연한 것이었고, 옳은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확인하시기를 사람은, 인간은 할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삶,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되면, 다 행해서 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계명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 영생을 얻은 자가 그 후 날마다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여 사는 삶 안에서 영생을 지속적으로 누리는 것은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신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었지만 구원 얻은 다음부터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보답해서 열심히 내 힘으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보답과 감사의 삶이 당연히 내 힘으로 내 열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잘못된 생각입니다.
로마서 7:14 이하에 보면 바울은 중생한 자에게서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며 그 계명대로 행하기를 원하는 소원이 간절함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백 번이면 백 번, 죄의 힘에 눌려서 패배하며 죄의 노예로, 포로로 사로잡혀가는 것을 봅니다. 자기 힘으로 도저히 죄의 힘, 자신의 부패, 곧 타락한 성품, 자연인 속에서 역사하는 죄의 세력, 육신의 정욕과 싸워 이길 수가 없음을 발견합니다. 도저히 하나님의 계명을 행할 수가 없음을 발견합니다.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여러분께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려고 많이 노력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성공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부자 청년 처럼 ‘난, 다 행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부자 청년 처럼 하나님의 계명을 적당히 할인해서 행한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의 힘으로는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체험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려는 소원은 그처럼 간절한데 내가 아무리 할려고 해도 맨날 죄와 싸워 지니, 그것이 너무 답답하고 비참해서 바울은 탄식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에서 구하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번 더 나 자신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계명을 행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부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계명을 행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부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한 바울 사도께서, 자기 자신에게서는 죄와 싸워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악함과 무력함을 발견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기 자신에게서는 죄에 대한 승리를 확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 8:1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느니라’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연인으로서의 바울에게 있어서는 전혀 불가능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게에게서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부터 해방시켰음을, 자신을 해방시켰음을 발견합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따라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반드시 살리리니, 여기서 영은 성령님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몸의 행실, 육신의 정욕에 따라 행하는 일을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육신의 정욕, 죄의 세력을 죽이시는 능력이 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날마다 받으며, 생명을 누리는 삶이 가능하다고 그는 말씀하십니다. 성령님의 힘주심과 인도하심 안에서 생명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나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받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으며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으며, 이처럼 성령님께서 참된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케 하시려고 날마다 지속적으로 힘주시는 것입니다.
첫 시간 설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귐 안으로 들어가며 그 사귐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 살아 움직이는 생명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시는 무한한 긍휼로 그 아들에게 주사 우리로 하여금 받아 누리게 하신 것이요, 그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구속을 통하여 받아 누리게 하셨고,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사 이 생명의 사귐 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케 하시는 능력이 되사 날마다 이 생명의 살아 있는 움직임, 활동이 있게, 열매가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철저한 자기 부정입니다. 나는 의가 없다, 나는 의로울 수가 없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내 삶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자신의 능력을 부정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것과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의와 생명을 받아 누리며, 그 다음에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성령님의 힘으로 사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사오니 오직 주를 의지하나이다’ 하는 것이 신자의 삶의 기본 태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내어 맡기는 삶, 어떤 사람은 성령님은 능력 덩어리여서 뭘 받아 가지고 내가 그 능력을 가지고 어떻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 꼭 마찬가지로 인격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듯이 우리는 성령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이 자기 부정의 삶과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태도, 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상기하기를 원합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던 부자 청년은 계명 순종에 실패한 반면, 철저히 자기를 부정한 세리 삭개오는 은혜로 영생을 얻고 새 생명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의해서, 성령님의 힘주심에 의해서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계명을 순종하는 삶 안에서 생명을 계속 누린 것을 기억합시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가 예수를 믿을 때나, 이미 그리스도를 믿은 신자에게서나 늘 자기 부정이 요구되고, 자기 부정,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태도가 요구되고, 오직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 그리스도 안에 내 모든 것을 던져 넣는 것,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 그를 따르는 삶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5:1-16

계속해서 같은 주제를 가지고 생각해 볼려고 합니다. 첫번째 시간에는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누리는 생명에 대해 말씀드렸고, 그처럼 하나님 안에서 사귐을 누리면서 사는 삶은 동시에 항상 순종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강조를 하였습니다. 두번째, 세번째 시간에는 우리가 어떻게 영생을 얻으며 계속적으로 그 영생 안에 머무는가, 영생을 누리는가 하는 생명 누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영생을 얻고 그 영생을 누리는가? 한 마디 대원칙을 말씀드린다고 하면, 철저히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안에는 ‘자기’라는 말이 나오면 안되며, 철저히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가능성을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성령님 안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나는 ‘의’가 없으니, 나는 죄인이며 마땅히 죽을 자요, 하나님과 영원히 끊어져 저주받을 수 밖에 없는 자인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부정해야 하고, 나에게 없는 이 ‘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고 의지하므로 우리는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와같이 얻은 생명 누림에 있어서, 생명 누림은 항상 하나님을 순종하여 사는 삶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이처럼 순종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아무리 거룩하고 선하다고 하는 것을 알지만,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계명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내 자신을 부정해야 합니다. ‘할 수 없나이다’라고 나 자신을 부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분을 의지하여 우리가 그 계명을 행할 수 있다 하고 또한 믿으며 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처럼 새 생명을 얻는 것이나 누리는 이 모든 것이 철저한 자기 부정과 그 다음에 우리에게 없는 그 모든 가능성을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 안에서 발견한다고 하는 원칙을 지난 두 번에 걸쳐 말씀드렸습니다. 그와 더불어 우리의 한 가지 주의를 환기시킨 사실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 그가 이루신 ‘구속’, ‘의’를 값없이 우리가 받아 누려서 의인이 되며, 의인으로 인정 받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모든 것을 받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우리에게는 하나님 계명을 순종해야 하는 순종의 삶이 따라오는데 이 두 관계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구원은 값없이 얻되 순종의 삶은 우리가 은혜를 받았으니 마치 은혜를 갚아야 하는 식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해 드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얻은 이 생명 자체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여 사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을 얻은 자가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 순종해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 자체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오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영생은 죄 용서받고 마음대로 즐기다가 죽어 하나님 나라에게 가서 편하게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생명은 온갖 어려운 생활을 하던 데서 돌이켜 하나님 안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께 무엇을 해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하게 사는 그 자체가 생명의 삶입니다. 이러한 참 생명의 삶, 영생의 삶은 나중에 죽어서 재림 후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악된 세상 속에서 사는 신자의 현재 삶 속에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의롭게 되어 새 생명을 얻게 된 이 생명의 본질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라고 지난 번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사람, 참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자연적으로 그 심령이 하나님의 계명을 기뻐한다고 그랬습니다. 물론 우리 속에는 아직도 부패한 육신의 성품이 남아서, 육신의 정욕이 남아서 이것이 항상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지만 또한 이 정욕과 싸워 이길 수가 있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알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성령을 의지해서라는 말, 이 말씀을 깊이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는 삶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은 그 사람이, 물론 무의식적으로 살았으면 모르겠습니다마는 한 번도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누려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어 새 생명을 받아 들이게 하고, 영생을 계속 누릴 수 있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분을 의지해서 사는 법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한 번도 제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이 뭐냐하고 묻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가장 미련한 대답을 한다고 하면,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은 성령님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예언하게 하고, 방언하는 그런 능력으로 잘못 이해하니 성령님을 받는다고 하는 것도, 그 능력을 의지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마는 그러나 그러한 능력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인격이듯이 성령 하나님도 인격이십니다. 우리가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듯이 인격이신 성령님을 의지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참 생명, 영생을 누리며 사는 삶,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사는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서 살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 5장 말씀은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고 외치기 시작하시자 많은 곳에서 사람들이 몰려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연약함과 병과 귀신들을 고치시고 쫓아내심으로 하나님의 나라, 그 복된 나라를 이루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처럼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복된 나라가 임한 것을 보고 그 생명, 그 구원을 받아 누리기 위해 모여 온 많은 사람들, 제자들을 산 위에서 그 앞에 앉혀 놓고 가르치신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5-7장까지를 산상수훈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의 큰 특징은 흔히 하나님 나라의 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법이라고 하는 것은 삶의 규범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법을 통해 그 나라의 모습, 그 나라의 생활상, 삶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의 법이지만 그 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이 무엇인가를 알아 보려는 것이 전혀 말씀의 본 뜻에서 어긋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먼저 말씀합니다. 여기서 가난하다는 뜻은 남의 도움이 없는 상태의 가난을 뜻합니다. 따라서 심령이, 영혼이 가난하다는 것은 그의 영적 상태가 남의 도움이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영적으로 파산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이 ‘복되도다’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우선 이 말씀만 읽으면 매우 이해가 난감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파산한 사람보다 오히려 영적으로 부유하고 경건한 사람이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 마땅한데, 파산한 사람이 어떻게 천국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말씀 같습니다만 그러나 6절까지 계속 읽어 보면, 그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영적으로 파산한 자가 자기의 비참한 영적 상태 가운데서 울부짖고 애통해 하는데 그 사람이 복이 있다고 그럽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위로함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까지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말, 여기에 온유하다는 것은 사람의 성격이 유순하고 온순하다고 해서, 참 칭찬할만한 사람이라고 해서 복되도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겸손하다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하다고 하는 것은 사람 앞에 겸손하다, 윤리 도덕적인 의미에서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을 뜻합니다. 특별히 어원을 따져서 말한다고 하면, 종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바라는 자세라고 풀이할 수가 있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뭘 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종은 그저 주인께 은혜와 긍휼을 바랄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아무 자격이 없으나 그저 주인의 긍휼과 은혜만을 의지하는, 그와같은 자세를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여기에서 어느 정도 뜻이 통하게 됩니다. 왜 영적으로 가난한 자, 파산한 자가 복이 있는가? 왜 그들은 천국을 차지할 수 있는가? 왜 영적 비참한 가운데서 울부짖으며 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을 수 있는가? 그것은 자신의 영적 비참함, 파산한 상태를 인정하고 나는 아무 자격이 없으나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바랍니다라고 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며, 그러한 그들이 그 긍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복되도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줄여서 말씀하시기를 의에 주린 자가 복되도다. 왜냐하면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라고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가난한 상태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라고 되어 있는데 말하자면 의가 없는 상태입니다. 의를 상실한 상태, 또 자기 힘으로는 그 의를 획득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이 말씀이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영적으로 파산한 상태입니다. ‘의’가 없습니다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죄인이 자기 영적 상태를 인정하고 애통해 하면, 또 그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의를 간절히 바라고 목말라 하면, 마치 종이 주인에게 긍휼만을 바라듯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는 그 의를 바랄 경우 그 의로 배부를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한 마디로 3-6절까지 보면 매우 재미있는 생각의 진행이 있습니다. 우선 가난한 상태, 무엇인가 필요한 상태, 굶주린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거기에서 슬퍼하며 그러나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면 무엇으로 끝나는가 하면 배부름으로 끝납니다.
여기에서 보면 결국 3-6절까지 다루는 내용은 영적으로 가난한 자, 파산한 자가 하나님의 긍휼을 바램으로써 영혼의 배부름을 얻는다고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영적으로 가난한 자가 복된가? 그것은 비록 그에게는 의가 없을지라도, 영적으로 파산한 자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지는 의로 배부름을 얻을 수 있는 날이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임했기 때문에, 그런 가능성이 주어졌기 때문에 복되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여러분께서 짐작하시겠습니다만 부자 청년의 경우,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는가 하는 질문과 관련해서 주어지는 대답과 같은 내용임을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청년은 자기가 영적인 부자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 모든 계명을 다 지켜 행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부자 청년에게 바라신 것은 그 자신이 영적 가난한 자인 것을, 영적으로 파산한 자인 것을 먼저 인정하고,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려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을 간구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실패해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삭개오 처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그 긍휼을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영접하였을 때 영혼의 배부름을 얻은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 말씀은 영적 파산 상태, 영적 굶주림의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긍휼하심으로 배부름을 얻은 자는 이제 자연스럽게 내 이웃의 배고픔과 굶주림을 채우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 같이 3-6절까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바래서 영적으로 가난하던 사람이 영적으로 배부름을 얻은 것 아닙니까? 은혜로 배부름을 얻은 자는 이제는 자연스럽게 내 이웃의 베고픔을 채우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7-9절까지 읽을 수가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우리에게 부담과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를 갚으라 하는 빚 독촉과 같은 그런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참 생명을 얻은 자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모습, 말하자면 새 생명의 자연스러운 자기 표현이 열매 맺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 누리는 생명이 그리스도의 생명인 만큼 이 새 생명이 우리 심령과 삶 속에서 역사해서 누구의 모습을 이루는가 하면 바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가 거룩하신 것 처럼 우리도 거룩하게 살게 하시며, 그가 의로우신 것 처럼 우리도 의롭게 살게 하시고, 그가 긍휼히 여기신 것 처럼 우리도 긍휼히 여기는 삶을 누리게 하십니다. 이와같은 과정을 제일 잘 보여 주는 예가 삭개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로운 사람이 되고 난 후, 새 생명을 얻고 난 후에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긍휼로 영혼의 배부름을 얻은 자가 어떻게 이웃의 가난, 그것이 영적 가난이든지, 육적 가난이든지 이웃의 굶주림을 채우는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은 대로 긍휼을 베푸는 삶, 남의 가난과 필요, 굶주림, 그것이 영적인 것이든지, 육적인 것이든지 남의 필요나 가난을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푸는 삶을 산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죄 가운데서, 멸망당해 영원히 죽을 운명에 처해 있는 너희를 하나님께서는 구할 책임도, 의무도 없으나 그저 너희들이 불쌍하기 때문에 긍휼히 여겨 구원하신 것 처럼 너희도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너희가 그 사람에게 빚진 것도 없고, 의무도 없으나 그를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 이웃을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푸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계속 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남을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풀어 이러한 삶 속에서 또한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아 누리는 삶을 가리켜 복된 삶이요, 참 생명의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으면 잘된다고 생각하고 남에게도 그렇게 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 믿으면 돈도 남보다 많이 벌고, 남보다 더 출세하고, 남은 다 죽어도 나는 잘 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세상에 좋은 것 다 긁어 모아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어 천국 가기까지 일도, 수고도 없이 맛있는 생명과실을 따 먹고 놀겠다는 생각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생을 오해해도 한참 오해한 것입니다. 영생의 삶은 남을 불쌍히 여겨 긍휼을 베푸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긍휼을 베풀면 반드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보상으로 받기 때문에그런 것이 아니라 남을 긍휼히 여기는 것 자체가, 남에게 긍휼을 베푸는 삶 자체가 영생의 삶이요, 복된 삶이라 그럽니다. 이것은 세상의 원리와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시비곡직(是非曲直) 다 따져서 다 내가 찾아 먹고, 그것도 모자라서 남의 것을 빼앗아 먹기까지 하는 삶은 흔히 세상의 표준에 따르면, 이것은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의 삶 같으나 실은 이 삶 자체가 지옥인 것입니다.
남에게 시비곡직 다 따지고 경우를 다 밝히다 보면, 우선 내 마음이 완악하고 패역해 집니다. 그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리고 돌아서면 그 사람도 불쌍한 사람인데, 그런 생각이 치밀어서 나의 완악함과 패역한 마음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 그의 생명으로 정결케 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사는 자인 만큼 정결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세상 속에 함께 쾌락을 즐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세상 풍습을 좇지 않고 정결하게 사는 삶이 복된 삶이라고 그럽니다. 어떤 사람은 악한 세상 가운데서 자기를 지켜 정결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크게 해 드리는 것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삶 자체가 복되다고 그럽니다. 성결한 삶을 사는 자는 날마다 하나님을 뵙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누리기 때문에 더욱 복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특히 마음이 정결한 자라고 한 것은 우리의 성결이 겉생활 모습이나 꾸미는 위선적인 성결이 아니라 심령에서부터 시작된 성결이라야 할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우리 심령 깊은 곳까지 침투하는 성결이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겉은 그런대로 봐줄만 하지만 우리의 속은 얼마나 더럽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그 마음에 간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행동만을 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악한 마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성결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보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케 된 자로서 이웃과의 관계에서 화평을 이루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우리와 이루신 화평의 성격을 봅시다. 그것은 원수 간에 이루어진 화평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여전히 거스리고 반역하여 그를 적대시할 때에,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하시사 우리와 화평케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이 원수지간이라는 것은 반목하는 관계이니까 화평이 불가능한 관계입니다. 원칙대로 하자면 원수라고 하는 말 자체가 화평이 있을 수 없는 관계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화평이 있을 수 없는 죄인과 하나님 사이에 자신의 생명, 독생자의 생명을 희생시켜서 화목을 이루셨고 그 화목을 지금 너희가 받아 누린다고 한다면, 너희도 화평이 불가능한 곳에 너 자신을 희생하여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도 되지만은 그리스도로부터 이와같은 생명을 받아 누리는 자의 삶 속에서는 비록 처음에는 매우 미미하고 눈에 띄지 않으나 이런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미워하면 함께 미워하는 것이 상례이나, 그리스도인은 나를 핍박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자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와같은 것이 이미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화평을 이루는 것이 짐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복된 삶이라고 그럽니다.
이 화평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본래 좀 더 포괄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평, 이 평강이라는 것은 온전한 것, 찌그러지거나, 일그러지거나, 상한 것이 없는 온전한 상태를 화평한 상태라고 이야기합니다. 화평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일그러지고, 찌그러지고, 상한 것을 온전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일그러져 있는, 깨어지고, 부스러지고, 한 곳도 온전한 곳이 없는 가정과 사회와 이웃관계에서 자기를 희생하여, 일그러지고, 깨어진 것을 온전케 하는 사람이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것을 유업으로 얻는 아들이 될 것이요,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는 자, 그와 함께 왕노릇하는 자로 부르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매우 재미있습니다마는 성경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한다고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한다고 하니까 남 위에 군림하고, 높임과 섬김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실은 그 반대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가, 모든 것이 일그러져 버린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며 섬기는 삶이었듯이, 그의 통치에 참여하는 우리의 삶도 자기를 희생하여 원수에게 사랑을 베풀며 그 일그러진 것들을 온전케 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한다고 하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왕노릇한다는 것은 남의 섬김이나 받고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우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뜻은 앞에서 말한 삶,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이러한 거룩한 삶은, 이와같은 삶에 따르는 핍박이라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 핍박받는다는 뜻은 하나님의 나라는 죄악 많은 세상 한 가운데서 세워지는 나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 백성인 신자는 천상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까지 이 세상 속에서 살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는 삶, 긍휼과 사랑을 베풀며 거룩하게 사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세상에 의해 배반시당하고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속하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며, 악한 말을 하며, 거짓말로 모함하며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백성으로서 살기 위해 이런 핍박을 당할 때, 그의 이름을 위해 그의 말씀에 순종하며 의롭게 살기 위하여 고난을 당할 때 오히려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의로운 삶, 그 자체가 생명의 삶이요, 복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상 가운데서 거룩하게 사는 신자의 모습은 세상의 죄된 모습, 세상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기에 세상은 싫어하고 미워하나 우리는 하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참 생명의 삶으로 보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즉, 이미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의 참 생명을 받아 누리고 있어서 날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입고 누리며, 하나님을 뵙고, 그 안에서 생명의 은혜를 받아 누리며, 거룩하게 살며 일그러진 것들을 온전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마지막의 날, 하나님의 모든 역사가 완성되는 날, 부활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스러운 무궁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렇게 핍박하였느니라’ 한 마디로 너희가 몸담고 사는 세상에 대한 환상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긍휼과 사랑을 베풀며 거룩하게 살면 세상이 환대하고, 영접하고, 칭찬하리라는 생각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너희들을 핍박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세상은 비록 너희를 핍박하고 미워하고 원수시하여도, 그러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반대하고 미워하는 그들을 썩지 않게 하며 맛을 내게 하는 존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환멸과 절망으로 세상에서 참되게 살아 보려고 하는 희망을 포기하려는 자에게 살 맛을 느끼게 하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존재, 그리스도의 참 생명을 전달하는 사명을 너희가 받았다고 하는 것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산 위의 동네가 숨기울 수 없고,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어서 온 집을 밝게 비추듯이 하나님께서 너희를 불러 생명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신 목적은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살며, 긍휼과 사랑을 베풀게 함으로써 너희의 선한 행실을 보고, 세상이 너희를 통해 그 나라의 복된 모습을 보고, 그 나라의 거룩함과 영광을 너희의 변화된 심령과 인격과 삶 속에서 발견하고, 이런 복된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높이며 그에게 영광 돌리게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과 같이 마치 구약의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과 맞먹는, 하나님 백성이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삶의 모습을 지시하는 내용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와같은 산상수훈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것은 이대로 살라고 주어진 계명이 아니고 하나의 이상이라고 많이 이야기합니다. 누가 그렇게 살 수 있는가? 나중에 나오지마는 살인하는 것만 죄가 아니고 형제더러 ‘라가’라고 병신, 바보라고 욕을 해도 지옥불로 갈 죄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물리적인 폭력만 폭력이 아니라 말의 폭력도 똑같은 죄를 진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음흉만 품어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돌려대고, 5리를 가자하면 10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벗어주고, 원수를 사랑하고,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살라고 주어진 계명입니다.
여러분들은 산상수훈만 이렇게 아주 지나치게 엄격한 윤리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나 서신서에도 똑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은 다르지만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갚아 선으로 이기라고 그럽니다. 악을 선으로 이기라고 그럽니다. 이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과 조금도 다른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느끼듯이 이와같은 계명 앞에서, 이와같이 살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내 힘으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좀 자기도취적인 인물이거나 주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규범 앞에 있을 때에 모든 인간의 반응이,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 앞에서 절망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옳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좇으라는 계명 앞에 그냥 물러간 청년이나,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경악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놀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와같은 계명 앞에 서게 될 때에 흔히 나타나는 잘못된 반응 하나가 어차피 인간의 힘으로는 못하는 것이니 아예 포기해 버리자는 것입니다. 아예 포기해 버리고 적당히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은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거룩한 율법 앞에 행할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한 후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과 기쁨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마는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와같은 계명 앞에서 아예 행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잘못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못하지마는 성령님의 힘으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와같은 삶을 살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변명할 수 없는 잘못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와같은 계명을 받고 나타나는 잘못은 자기 힘으로 해보겠다고 날뛰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이 했던 고백, 여러 세상의 신학자들, 윤리가들이 산상수훈을 듣고 느낀, 정망스러운 느낌이 옳은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밖에 못느낍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여러분 스스로 어떻게 제어합니까? 끝없이 솟아오르는 정욕을 어떻게 제어합니까? 못합니다. 이걸 자기 힘으로 해 보겠다고 날뛰는 사람은 어리석기 한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잘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5장 후반분에 나타납니다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잘못입니다. 이 사람들은 계명을 깎아 내립니다. 할인합니다. 그 수준을 깎아 내립니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고 했을 적에 그것은 형제에게 물리적인 형태뿐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폭력을 가해서는 안된다. 그의 삶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뜻인데 그저 살인만 안하면 되는 것으로, 그가 말로 마음대로 욕하는 것은 괜찮은 것으로 생각하든지, 그저 육체적으로 간음을 범하지 않았으면 마음에 생기는 정욕을 우리가 어쩌랴 하고 그건 죄도 아니다 하고 생각하는 것이든지, 이처럼 적당히 하나님의 계명을 평가절하하게 됩니다. 이것도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의 이와같은 그의 계명을 그대로 받아 들이고 그 앞에서 솔직히 고백하여야 할 것입니다. 나의 무능함, 나는 할 수 없다고 하는 고백을 우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러나 거기에서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성령이 주어졌음을,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을 믿고 그분을 의지함으로, 이와같은 아름답고 고상한 삶이 우리의 심령과 생활 속에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성령님을 의지하고 살면 항상 두 가지 사실을 동시에 느낍니다. 하나는 가면 갈수록 ‘주여, 나는 이것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란 말과 동시에 주를 의지할 때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또한 저는 봅니다. 우선, ‘나는 할 수 없다’라고 하는 사람에게 빌립보서 4:13 말씀을 드릴려고 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조금 문맥과는 동떨어지는 것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 힘으로가 아니라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릴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사람에게는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을 드릴려고 합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어느 사도들보다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되 그러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했다’고 그럽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내가 누구보다 수고했다고 해 놓고 바로 이어서 하는 말씀이, 그러나 내가 한 것이 아니라고 그럽니다.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하여 매일매일 살아가는 사람은 이와같은 역설적인 고백을, 그것이 사실인 것을 매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나, 내가 주의 뜻을 행하나 이것이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 것임을 늘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만 성령님을 위해서 나날이 살아가는 비결을 배우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그리스도께서 누리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시는 분, 그의 생명을 실제로 받아 누리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1-18

앞에서는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새명을 누리는 삶,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굶주린 영혼이 하나님의 긍휼로 배부름을 얻은 후에 이웃의 굶주림과 가난을 불쌍히 여겨 채워주는 긍휼의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의를 성실한 영적 파산자가 하나님의 값없는 의로 배부름을 얻은 후에 의로운 삶을 사는 삶, 남을 긍휼히 여기며 그 안과 밖이 그 마음과 행위가 온전히 성결한 삶을 살며, 나를 핍박하는 원수까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원수까지 사랑하고 그극 위해 기도하며, 그의 어그러진 것들을 사랑으로 바로잡아 온전케 하는 화평의 삶을 살되 이와같은 삶 가운데 끊임없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긍휼과 생명의 교통을 누리는 것, 그리고 우리는 미워하고 핍박하는 세상 가운데서 오히려 세상을 위하는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되며, 하나님 자녀의 의로운 삶의 빛을 비춤으로써 성결과 긍휼과 사랑과 화평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온 세계에 증거함으로써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케 하는 증인의 삶을 사는 것, 이것이 곧 영생의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복된 영생의 삶을 살도록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대개 세상 사람의 표준에 보면 이것은 손해보는 삶이요,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이것이 복된 삶이요, 이것이 행복한 삶이요, 이것이 생명의 삶입니다. 남을 착취하고 짓밟으면서까지 돈벌고, 권리, 명예 차지해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참 복된 것일까요? 아니면 나 자신을 허비하면서까지 죽어가는 사람들, 굶주린 사람들, 스스로의 삶을 망쳐버린 그 사람들을 다시 온전케하는 그 삶이 복된 삶일까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삶, 그것이 참 생명의 삶이요, 복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값없이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의로운 삶을 살 때, 여기서 의로운 삶이라고 하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그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하는 말씀입니다.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의로운 삶을 살 때 당연히 취해야 할 삶의 근본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대원칙으로 6장 1절에 나타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의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사는 의로운 삶, 영생의 삶의 본질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과 사랑을 얻은대로, 성령께서 힘주시는대로 이웃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며, 또한 우리의 성결한 사랑의 삶을 통해서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을 증거하려는 하나님 영광을 위한 삶이요, 이러한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끊임없이 베풀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영생의 삶은 그 동기에서부터, 그 출발점에서부터 과정과 목적과 능력, 그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께 근원을 두고 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더럽고 추악한 자를 생명의 은혜로 간구하게 살려는 동기가 되며, 출발점이 되며, 먼저 나를 불쌍히 여겨 사랑과 긍휼을 베푸신 그것이 나로 하여금 이웃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동기가 되며, 더 나아가서 오직 성령께서 그 능력으로 이런 삶을 살게 하시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신다면 자연히 그리고 당연하게 우리의 시선은 늘 하나님을 향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삶의 근본 자세를 본문 말씀이 거듭거듭 확인하면서 하나의 고정된 형식으로 표현하되, 사람 앞에 보이려고 뭐 어떤 것을 하지 말고 오직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하나님만을 향해서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우선 앞에서 말씀드린 원칙 즉, 무엇을 행하든지 간에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행해야 한다고 하는 이 원칙을 이웃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여기 구제라고 하는 구체적 행위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구제라고 하는 것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서 긍휼을 베푸는 행위인 만큼 이웃 사랑의 대표적 예라 할 수 있기에, 구제라는 한 가지 행위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이웃 사랑의 행위에 다 적용되는 원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구제할 때 이웃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풀 때, 도움을 베풀 때 뭇 사람의 주위를 끌기 위해 나팔을 불지 말라 그랬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나의 선행을 보아주었으면 하고 즉, 사람들로부터 갈채와 칭찬을 듣기 위해서 회당이나 골목 어귀에서,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선을 행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신자가 참된 믿음에서 행하는 이웃 사랑의 동기와 출발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이웃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출발점과 동기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사 긍휼히 여기셨으니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사 긍휼히 여기셨다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이웃 사랑의 출발점과 동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게서 출발한 이웃 사랑은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해주면 저 사람이 어떻게 해 주겠지’라는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었으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남을 긍휼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새 생명이 시키는대로 내 이웃에게 베푸는 이 조그마한 사랑의 행위, 이 일을 통해서, 이 미천한 것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로 기뻐하시기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해 주었으니까 저 사람이 어떻게 해주겠지, 칭찬하리라’는 그런 생각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이웃 사랑의 동기와 출발점이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사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남을 사랑하거나 긍휼히 여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긍휼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가 죄인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망할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니 하나님의 긍휼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호된 시어머니 밑에서 자란 며느리치고 호된 시어머니가 안된다는 법이 없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아이가 사랑을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남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도 선행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을 도와주는 경우도 있고, 좋은 일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긍휼을 베푸신 체험이 없는 사람의 선행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동기와 출발점이 항상 자기에게 있고 자기 자랑에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 가지 좋은 일을 하면 남에게 알리지 않고서는, 나팔을 불지 않고서는 좀이 쑤셔서 못견딥니다. 어떤 사람은 행하기 전부터 이런 일을 하겠다고 먼저 외고 다닙니다. 때로는 마음 속에서 은밀하게 다른 사람이 나의 선행을 알아주기를 바라고, 갈채를 보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걸 어떻게 하느냐 하면 다른 사람이 칭찬해 주지 않으면 우리 마음이 섭섭해지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교만한 바리새인 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의 선행과 경건을 자랑까지 하게 됩니다. ‘하나님 저 이런 것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교회를 섬기지 않았습니까’ 이런 사람은 자기의 선행을 알아주지 않으면 삐뚤어지고 불평불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만일 의로운 삶을 산다고 합시다. 선을 행하는 삶을 산다고 합시다. 그러나 신자가 사는 의로운 삶이 과연 우리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의로운 삶 자체가 은혜로 주어진 것 아닙니까? 더러운 생활하던 자가, 죄를 물 마시듯하는 더러운 죄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운 삶을 살게된 자체가 복된 생명의 삶이요, 그것도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힘 주심으로 살게 되어 있으니 오직 감사할 수 있음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서 겉으로는 경건한 척,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것 처럼 하면서 실속은 자기 영광과 자랑을 위해, 좀더 노골적으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의를 행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오직 성경 말씀 처럼 위선자라고 불려 마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하는 의, 우리가 사는 의로운 삶이라는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당연히 살아야 할 삶이요, 당연히 살아야 할 삶도 내 힘으로 살 수 없어서 하나님의 힘으로 산 것이니, 어떻게 그것을 자랑할 수 있습니까?
또한 만일 사람의 칭찬과 갈채를 바라고 사람 앞에서 행한, 사람을 의식하고 선을 행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사람의 영광과 칭찬을 바라고 행했으니, 그리고 그가 기대했던 사람의 영광과 갈채를 이미 받았으니 그가 받을 것을 다 받은 셈이요, 하나님으로부터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이미 자기 상을 받았느니라.’
사람의 칭찬과 갈채를 바라고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자랑하기 위해 행한 모든 선한 일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오른손이 행하는 선행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은밀하게 하는 선행, 이것은 결코 사람을 의식한, 그들이 보아주기를 바라고 행한 선행은 아닐 것입니다.
너희는 선을 행하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서 행하라. 사람은 몰라도 은밀한 중에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너희 삶에, 풍성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베푸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본문 말씀에서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 이웃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있어서도 그 동기와 목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과정이 하나님을 의식한,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사람끼리나 그저 너와 나 사이에 일어나는 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내 이웃을 대할 때 하나님을 통해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대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으면 결코 원수를 사랑할 수 없고, 내가 손해를 보아가면서까지 남에게 긍휼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물론 충동적으로 동정심이 생겨서 적선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사람 사람끼리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저 사람을 위해 희생해야 하며, 나를 핍박하고 미워하는 저 사람을 내가 왜 사랑해야 하나 그런 의문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오직 동기와 목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과정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이루어질 때,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셨으니’에서 시작하여 ‘이 미천한 것으로 성도의 성결한 사랑의 삶을 살게 하셨으니 감사할 뿐이라,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그것으로 족하옵나이다’라고 끝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또 너희가 기도할 때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앞에서는 이웃과의 관게에서 이루어지는 의로운 삶에 대해 말씀했습니다마는 이 말씀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물론, 우리 모든 삶이 하나님과의 관게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마는 좀더 직접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대해 즉, 기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가장 직접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기도에 있어서는 더더욱 앞에서 말한 원칙,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행하는 행동이어야 한다고 하는 그 원칙이 적용되어져야 합니다. 말하자면 사람 사람끼리의 일어나는 일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의식하고 행동해야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에 있어서는 더더욱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에 있어서까지 사람을 의식한 기도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회당이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 큰 길 모퉁이에 서서 큰 소리로 자기 기도 잘하는 것 자랑해 가면서, 자기 경건을 자랑해 가면서 하는 기도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와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만 저 자신도 때때로 많이 범하는 죄입니다. 사람은 외식하는 기도가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도 골라서 하고, 말을 골라서 한다는 것 자체가 죄일 수는 없으나 하여튼 사람을 생각하고 아름다운 말을 쓰려고 하고,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의식하는 기도가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통성기도하자 하면 제일 큰 소리를 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중심이 뜨거워서 그렇게 기도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마는, 참으로 자신의 경건과 기도의 능력을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다 하면, 자기의 경건을 자랑하려는 마음이 섞여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아니고 사람을 향한 기도가 되니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가장 은밀한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가운데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에 대한 이 말씀을 논의하기 전에 우선 ‘왜’ 하나님과의 관게에서 이루어지는 성도의 삶의 대표적 예로서 기도를 말하였을까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 보십시다. 이 사실은 한 마디로 신자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근본 자세는 기도하는 자세임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도는 살아게신 하나님과의 대화이므로 하나님과의 사귐, 하나님과의 교통의 한 형식이요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가장 절실하게 체험하는 사귐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성을 전제하지 않는 기도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나무나 돌이나 비인격적 물건에 대고 또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는 사람, 자기 사정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만일 이것이 장난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가리켜 정신나간 사람, 미친 사람이라고 합니다. 기도한다는 자체는 인격의 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내가 말한다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도 행위에 있어서 인격이신 하나님을 우리는 가장 깊이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한다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만유를 통치하시는 전능자로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요, 또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필요를 채우시리라는 믿음과 신뢰와 사랑을 고백하는 행위가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의 모든 존재와 삶이 주께 달려있음을, 주께 달려 의존되어 있음을 믿고, ‘주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간구하오니’라고 하는 자세가 기도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살아계신 것과 즉, 살아 역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살아계신 인격으로 우리와 만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요, 그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분임을 즉,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나오는 자에게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고,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시는 하나님임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무릇 자기에게 힘이 없음을, 도움이 필요함을 인정하는 자만이 남에게 무엇을 구한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자기가 다 할 수 있으면 무엇 때문에 남에게 구차하게 이렇게 달라고 구하겠습니까? 무얼 구한다고 하는 자체가 나는 힘이 없고 연약하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필요를 채워 줄 것을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우기 우리가 간구하는 바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한다고 하는 사실은, 결국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삶 속에 역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과 귀함이 얼마나 큰지 말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 신자의 경우 참된 생명의 삶,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순종의 삶을 스스로 힘으로 살 수 없는 만큼, 오직 성령의 힘으로 살 수 있는 만큼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일전에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엇이냐?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은 내어 맡기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만 좀더 구체적으로 성령님을 의지하는 자세에 대해서 말한다면 바로 기도하는 것, 기도하는 자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는 자세의 가장 구체적인 표현을 우리는 기도하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라는 것은 나의 힘없음과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능력 입기를 간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 기도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매 순간을 모든 행동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그 뜻을 물으며 힘주실 것을 간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을 정해놓고, 장소를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은 귀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거기서만 국한되어서는 안됩니다. 삶의 매 순간 순간마다 모든 행동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하며, 힘주실 것을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자기 힘을 의지하는 사람이요, 따라서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그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이요, 성령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기도의 본질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 속에 우리의 마음의 소원과 희망이, 내가 바라는 것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것들 즉, 나의 소원과 희망은 더 근본적으로 그 저변에 깔린 나의 삶의 자세와 삶의 목표를 반영합니다. 따라서 누가 어떤 기도를 하는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가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목표로 하고 사는 사람인지, 그 사람의 신앙의 성격을 대개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가 이처럼 귀하고 중요한 것이니 만큼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하는 것에 더 깊이 있는 교훈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19-34

지난 번 말씀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는 자의 삶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 생명의 삶은 그 출발점이 값없다,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은혜로 시작되고, 그 모든 과정과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만큼 신자의 삶은 늘 그 시선이 하나님을 향할 수 밖에 없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수 밖에 없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비록 사람 사람 간에 이루어지는 이웃관계에서도 결코 사람만을 의식해서 살 수 없고,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마 6:1 이하에서 보면 철저히 하나님을 의식하고 사는 신자의 삶의 자세가 기도하는 자세로 귀결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기도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간구인 만큼 철저히 모든 기도는 하나님만을 향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와 삶이 오직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필요를 간구하는 것이요, 더 나아가서는 우리는 연약하고 무능하여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에게 소망을 두는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과 긍휼을 믿고, 신뢰하며, 나아가는 자의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믿고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도라는 것은 우리의 필요, 우리의 소원을 말씀드리는 것이므로 기도 속에는 우리 삶의 자세와 목표가 반영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본을 가르치시는 주기도문을 본즉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인가를 인간에게 가르치면서, 기도의 내용 즉, 삶의 목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도록 소원해야 하며, 또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서 필요한, 이웃을 용서하는 가운데 일용할 것을 구해야 하며,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입으며, 모든 악과 악한 자에게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사는 것이며, 이 모든 삶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우리가 기도할 내용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마지막 부분 즉, 삶의 목표와 관련해서 더욱 구체적인 교훈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라고 하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매우 피상적인 이해이거나 오해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오늘 본문 말씀은 더 깊고 넓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너희를 위해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에 대해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물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가진 귀하고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내가 가장 귀하고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늘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이 그것에 이끌리고 지배된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어떤 것에 이끌리고, 이끌림을 받고 그것의 지배를 당한다고 하는 것은 좀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마음에서부터 시작해서 즉, 우리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이루어진다고 하면, 우리의 마음이 이끌리고 지배당한다고 하는 것은 실제에 있어서 우리의 삶 전체가, 우리의 모든 행동과 삶이 이것에 의해 지배되고 이끌린다고 하는 것을 뜻하며, 더우기 우리의 마음을 이끌고 지배하는 것이 보물이라고 하면 그것은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이끈다는 무엇 즉, 우리의 삶의 가치, 우리의 삶의 목표를 뜻한다고 하겠습니다.
학자는 학문이라는 보물로, 예술가는 예술이라는 보물로, 돈이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재물로 마치 재물을 쌓듯이 그의 인생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네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하신 말씀은, 네 삶의 목표를 땅에 두지 말고 하늘에 두라고 하신 말씀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은 땅의 삶은 헛된 것이니 땅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말고, 천국만을 생각하고 살라는 것으로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가장 간단히 이 말씀을 말하자면 땅에서의 삶 그 자체를 목표로 삼지말고 오직 하늘의 것, 하나님의 것을 궁극적인 삶의 목표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삶은 언제 어떻게 없어질 줄 모르는 잠정적인 것이요, 불안한 것인 반면에 오직 하늘의 것, 하나님의 것만이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궁극적인 것들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내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이 말씀은 올바른 삶의 목표를 따라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보면 눈이 향하는 곳, 시선이 향하는 곳, 우리의 눈이 보고 인도하는 곳으로 따라 갑니다. 따라서 우리 눈이 건강해서 밝히 보고 우리 걸음을 인도한다면, 우리는 마치 환한 대낮에 큰 길을 걷듯이 문제가 없겠으나 만약 우리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둠 속을 헤매이는 것 같이 방향없이 헤매다가 위험한 곳으로 가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걷다가 필경 상하거나 목숨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육적인, 외적인 경우에도 그 비참함이 이러할지대, 어두운 가운데 헤매다가 결국 크게 상하다가 죽는 불상사를 당할진대, 우리 속에 있는 우리의 성경에는 ‘네게 있는 빛’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 속에 있는 빛, 말하자면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우리 마음을 이끌어 인도하는 삶의 목표가 어두우면, 건전하지 못한 악한 것, 잘못된 것이라고 하면 우리가 당하는 어두움이 얼마나 더 비참한 것이겠는가라는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에서는 우리는 한꺼번에 여러가지 목표를 추구할 수 없고, 우리의 삶의 중심은, 삶의 주된 목표가 단 하나일 수 밖에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 없고, 어느 한편을 미워하고 사랑하듯이 우리의 삶의 목표도 동시에 두 가지를 함께 추구할 수 없고, 세상도 적당히 즐기고 하나님도 섬기는 이런 삶도 살 수 없고, 어느 하나를 택하고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하는 선택의 결단이 요구된다고 말씀합니다. 또는 어느 하나를 결코 놓칠 수 없는, 꼭 붙잡고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최고의 목표를 정한다면 또 하나는 가볍게 여기며 경시할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삶의 다양한 목표에 대해서 두 가지 태도가 가능함을 암시합니다. 어느 하나를 택하고 다른 하나는 미워하며 버려야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옳지 못한 악한 삶의 목표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악한 삶의 목표, 하나님을 거스리는 삶의 목표는 당연히 미워하고 끊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을 미워하고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다른 하나는 최고의 목표에 철저히 종속시킬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최고의 목표와는 별도로 그처럼 중요하게 생각되지는 않지만 예를 들어, 하나님을 제일의 목표로 덜 중요시 여기고 추구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최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삶의 목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경우를 25절에서 마지막 절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우선 ‘목숨을 위해서 무엇을 먹고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목숨이라는 것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의 생명 즉, 현 창조질서 속에서 영위되는 생존과 삶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육적 생명을 사는 동안에 우리 모든 삶이 이루어지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은 우리 오늘 삶이 몸을 기관으로 삼아, 우리 몸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고 마실까,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는 말씀은 우리가 육신을 입고 세상을 사는 동안 무엇을 먹고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육적 생명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뜻을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육적 생존을 위해 먹고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위해 염려하는가를 아는 것이 필요한 줄 압니다.
육적 생존을 위해서 무엇을 입고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육적 생존, 우리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사는 그 자체를 목표로 삼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삶 그 자체를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자체를 삶의 목표로 삼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은 온통, ‘어떻게 하면 이 세상 사는 동안에 모든 것을 최고로 누리며 살까, 어떻게 하면 최고로 먹고 마시며 입고 살까’ 하는 것으로 쏠려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에게 나타나는 매우 아리러니컬한 현상의 출발점은 이 세상에 사는 삶 자체를 최고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먹고 마시고 입는 일에 있어서 최고의 것을 누리자 하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하다보니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어서 잘 먹고 마시며, 잘 입는 삶의 수단이 삶의 목적이 되어 버리고, 삶의 수단을 획득하기 위해서 쉽게 말하자면, 돈을 벌기 위해 오히려 자기의 삶을 혹사하는 웃지 못할 일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잘 살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하니까 먹을 것을 구했는데 나중에는 먹기 위해서 아둥바둥 살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돈을 버는데, 또 돈을 벌기 위해서 밥을 굶고 절약하여 자신의 몸과 삶을 혹사하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얼마든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런 웃지 못할 어리석은 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중요한 것은 사는 것이지 육적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인 음식이나 의복이 아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육신이 살기 위해서 먹고 입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 먹고 입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선 이 말씀은 육적 생존 그 자체를, 이 세상에서 사는 삶 자체를 삶의 최고 목표로 삼을 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 즉, 잘 먹고 잘 입는 것을 추구하며 이런 것을 위해서 몸을 혹사하는 일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어리석은 짓임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동시에 육적 생존,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 우리 삶은 매우 중요하다는 뜻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 사는 삶이 결코 하나님 앞에 무의미하거나 악한 것이거나 한 것이 아니라 극히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육적 생존이 그렇게 중요한 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것을 그 아래에서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공중의 새를 보라 먹고 살기 위해서, 육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씨를 뿌리거나 추수하거나 저장하지도 않지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먹이시느니라. 이처럼 하찮은 미물에 지나지 않은 새, 하찮은 피조물까지 창조주로서 하나님께서 먹이신다고 한다면 이들보다 훨씬 중요한(귀중한) 너희, 새보다도 귀중한 피조물이며, 더우기 죽어 망할 인류 가운데서 구원하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너희를, 더우기 너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먹이시지 않겠느냐? 잘 먹고 입기 위해서 돈 벌러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온갖 수완과 재주를 부리는 사람아, 과연 네가 무엇을 염려하고 힘쓴다고 할 수 있느냐? 네가 열심히 일해서 벌어 먹고 사니 너의 힘으로 벌어 먹고 사는 줄 아느냐?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너를 돌보시는 손길을 멈추신다면 네가 천 년, 만 년 먹고 살기 위해서 저축한 돈과 재물이 누구의 것이 되는 줄 아느냐? 어찌해서 지금껏 너희를 먹여 살리신 분이 하나님이신 줄 모르느냐는 말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들의 하찮은 풀도 저절로, 제 힘으로 자라는 것 같으나 실상은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며 입히신다고 하면, 들풀보다 한없이 귀한 너희를 헐벗어 얼어 죽게 하시겠느냐?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늘 하나님의 은혜로 먹고 살면서도 그의 긍휼하심과 사랑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이 어리석은 자들아 하고 질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무엇을 먹고 마시며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런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신뢰하지 않는 이방인들이 느끼는 삶의 불안이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그들로서는 당연히 느낄 수 밖에 없는 불안이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신뢰하는 너희는 염려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너희들의 육신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너희가 먹어야 산다는 사실을 모르겠는가? 더 나아가서는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최고로 마시며, 입고 살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없는 이방인이 생각하는, 세상에 사는 육적 생존이 전부이며, 마치 하늘이나 영혼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줄로 알고 살고 하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일 뿐이며, 너희는 그렇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오해해서 먼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봉사, 바치면 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 특히 돈을 많이 주실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 육신의 병고침을 받기 위해서, 사업 잘되고 출세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입시철만 되면 새벽기도회가 터져나가고, 남편의 승진을 위해서 철야하는 것을 볼 때 이런 요소가 전혀 없다고 말못할 것입니다. 입시생을 둔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서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의와 나라를 구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최고 목표요, 그 외의 모든 것은 최고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조금 봉사하면 우리에게 좋은 것을 많이 채워준다는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최고 목표요 그 외의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유일한 최고 목표로서 우리의 전 삶이,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모든 삶이 오직 이 목적을 위루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에게 간구하는 자체가 주기도문에 보면 일용할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의 필요를 위해 일용할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체가 그저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육적 생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육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귀한 것이기 때문에 그 귀한 일용할 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 영혼을 부르실지 모르는 항시 대기 상태에서 삶을 사는 이 에상에서 살 때,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이 세상에서 잘사는 것을, 생의 유일한 목표인 줄로 아는 세상 사람들 처럼 천 년, 만 년 먹고 즐길 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지 말며, 그날 밤 죽게 될 것을 모르고 ‘내 영혼아 먹고 즐기자’ 하는 어리석은 부자 처럼 되지 말 것이며, 오직 일용할 것을 구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실 것을 믿으며,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아무 일 안해도 먹을 것이 생긴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을 하며 그 일을 통해 먹을 것을 공급한다는 말씀입니다. 혹시 내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많은 재물을 허락하신다면 이것은 나와 내 자식이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라 생각하지 말고, 뭔가 하나님을 위해 그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도록 주신 것으로 깨닫고 뜻있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돈 많이 생겼다고 먹고 즐기자고 하는 사람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대로 놔두신다면 저주지 결코 복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달란트든지, 재물이든지, 어떤 귀한 것이든지 간에 여러분의 명예나, 자랑이나, 여러분의 자신들을 위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도록, 그의 뜻을 이루도록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 우리의 육적 생존은 무용지물로써 악하거나 버려야 할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삶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오해가 많은데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은 이 세상은 허망한 것이니 이 세상의 삶은 의미도 없고 관심가질 필요도 없으며, 오직 죽어서 갈 천당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고 오해할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전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오히려 세상사는 동안에 육신을 입고 사는 바른 삶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씀,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 삶을 통하여 그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시기를 원하신다라는 말을 인정하는 사람 가운데서도 어떤 삶의 부분은 하나님 나라의 삶이며, 어떤 삶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삶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옳습니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들 중에 수요일, 교회에서 관계하는 활동 즉, 전도나 심방만이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요, 직장이나 가정에서의 일, 특별히 빨래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 상관없는 세상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어떤 집사님이 그러더군요. ‘목사님 제발 세상일 그만하고 하나님 일만 했으면 좋겠어요. 매일 밥 짓고 빨래하는 일 못 견디겠어요’, ‘집사님 밥 짓고 빨래하는 일이 하나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하나님 나라와 관계없는 세상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 교회에서는 천사 같은데 직장이나 가정에서는 세상 사람보다 못하는 경우가 있고, 흔히 말하는 대로 교회에서는 천사요, 집에 들어가면 마귀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물론 일반 직장은 예수믿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삶의 세상 사람들, 직장은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과 원리를 따르는 곳이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과의 갈등과 고통이 크고, 교회에 오면 모두 착한데, 그런 사람들에게 시달리다 보니까 나의 연약한 모습이 드러날 경우도 있고, 특별히 가정이라는 것은 가족들과 항시 같이 지냅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속속들이 압니다. 내 약점이 무엇인지 내 모습을 그대로 압니다. 늘 함께 지내는 만큼 나의 모든 약점이 드러나서 부딪히고, 또 만만하니까 나의 연약함이 더 잘 노출될 수도 있어서 교회에서 보다는 직장에서, 사회에서의 모습이 못하다고 하는 것을 이해할만하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절대 그것이 옳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전도하고 심방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일이요, 가정이나 직장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곳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이중생활, 이중인격이 형성된다고 하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게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에게 자기의 전부를 포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와 처자와 전토를 다 버리고 오직 주를 쫒았나이다’ 하는 말씀은 물론 특별한 경우에는 문자 그대로 가족을 버린 것으로 이해 할 수 있겠으나, 근본 의미는 내 삶 전체를 단 한 개도 남기지 않고 주께 드린다는, 주의 발 앞에 드린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오해해서 자기 가족과 처자를 죽도록 희생시킨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의 참 뜻은 그 어느 하나라도 나만을 위한 독자적인 영역으로 남겨 두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주의 다스림에 복속시키나이다, 주의 영광을 위해 드리나이다, 이 모든 삶에서 주의 뜻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하겠다고 하는 헌신의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가정과 자녀가 망가지도록 방치하는 일은 큰 죄인 것입니다. 물론 특별한 경우 선교사나 여러가지 특별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만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가정과 자녀가 망쳐지든, 내 마누라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두 사람은 힘을 합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 짝지워 주셔서 이루어진 가정이요, 자녀는 내 것이 아니라는, 믿는 가정의 경건한 양육을 받아서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기 위해 부부에게 위탁하신 영혼, 결코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경건하게 잘 키우도록 맡기신 하나님의 영혼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녀는 결코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경건하게 키우도록 맡기신 하나님의 영혼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먼 곳에 있는 남보다, 내 아내와 남편이, 내 자녀를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살도록 지도해야 할 책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내 자식 내 가족만을 아는 저급한 이기주의와는 구별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어떤 특별한 삶의 부분에서만 섬김 받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에서, 직장과 가정에서까지, 오히려 가정에서부터 출발해서 직장 모든 삶의 영역에서 섬김을 받으시되, 하나님의 복된 나라가 그의 복된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세상 일, 직장 일을 하다가 다 팽개쳐 버리고 신학교로 뛰어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처지가 어떠하든지 바로 그 삶의 장소에서 우리의 모든 삶이, 가정과 직장의 일들이 하나님께 거룩하게 헌신되어 진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리 삭개오는 예수님을 믿고 세리직을 그만 두거나 재물을 전부 불태워 쓰레기로 버렸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그는 오히려 이전에 착취해서 긁어모았던 그 돈을 불쌍한 자의 필요를 채우며, 생명을 구하는, 긍휼을 베푸는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외적인 삶의 모습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으나 그의 삶 전체가 이전에는 더럽고 추하며, 남을 짓밟고 하는 삶, 거스리고 반역하는 삶이 변해서 하나님께로 긍휼을 베푸는 사랑의 삶, 원수까지 사랑해서 화평하게 사는 삶,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기꺼이 고난 받기를 기뻐하는 삶, 자기를 세속과 끊어 날마다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된 생명의 나라,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 가정과 일터, 교회에서 이루어 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 이것이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주 기도의 뜻인 것입니다. 이 기도는 주의 나라가 마지막 날 온 우주에 충만되기를, 완성되기를 기도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오늘 현재 내 삶 속에서 가정과 일터에서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우리의 삶이, 그 전체가 단 한 곳도 남김없이 전부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 먹고 마시는 것까지 주를 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일을 이루기 위해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의 부족과 무능함을 고백하고, 천지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우리 아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신령과 삶 속에 역사하시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을 누리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7:1-12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자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사 저희를 찾지 않으시면 우리는 사망 가운데서 죽어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심판과 진노 아래 있는 자식임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나이다. 주님께서 외면하시면 우리는 그 순간으로 우리 생명은 귾어지며 울부짖으며 죽어갈 수 밖에 없는 것을 주 앞에 고백하오니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독생자를 죽게하신 하나님께 생명의 성령님으로 하여금, 주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 영혼을 살려주시며, 새롭게 하시며, 힘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바로 앞에서는 영생을 얻은 자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삶의 최고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 거룩하고 은혜로우신 다스림이 땅 위에, 특별히 내 삶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와같은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재림하시는 날 이 땅 위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간구하는 기도일 뿐만 아니라, 오늘 현재 나의 모든 삶의 부분들에서 순간 순간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며 실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다른 한편으로 보면 주 기도문 중에 ‘우리에게 일용할 것을 주옵시고’라고 하는 기도의 참된 의미가 무엇이냐를 밝혀주는 말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지난 번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일용할 것, 육신의 필요를 구하는 진정한 목적은 육적생존 그 자체를 위하여 먹고, 마시고, 잘 입어 즐기기 위함이 아니요,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현하는 고귀한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일용할 것들을 하나님께 구하는 진정한 목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저 육신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그저 먹고 살기 위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몸이 주께서 허락하시는 동안, 그 생명을 허락하시는 동안 내 삶 속의 나의 활동과 나의 모든 삶의 부분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일용할 것들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하는 기도의 다음 내용 즉,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라고 하는 기도와 관련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자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사는 만큼,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이 진정한 삶의 목표에 위배됨이 없는지를 늘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참된 삶의 목표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분명히 밝혀서 행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고, 또한 자기 자신과 관계되는 한 아무리 엄격하게 옳고 그름을 따진다고 해도 아무 탈이 없습니다마는, 참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마는 이 옳고 그름을 밝히는 일이 남과 즉, 이웃과 관계될 때는 반드시 주의해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웃과 더불어 옳고 그름을 밝히는 일 즉, 남의 잘못에 대해서 취해야 할 올바른 자세에 대해서 가르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우선 얼핏 들으면 오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비판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우리 말에서는 남을 정죄한다는 뜻을 갖습니다마는, 그저 판단하지 말라는 그런 말씀으로 번역할 때는 조금 우리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뭐냐하면 판단하지 말라고 하니 전혀 선악간에 판단을 내리지 말라고 하는 것인가? 전혀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그저 덮어두라고 하는 말씀인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 6:36 이하에 보면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 밝혀주고 있습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마태복음에는 간단하게 기록된 이 말씀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는 그 말씀 사이에 누가복음에 보면 긴 말씀이 삽입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누가복음 말씀에 따르면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 다음에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이 따라오며 그 뒤에 또 용서하라는 말씀이 따라옵니다. 즉, 여기에서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의 뜻은 남을 정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남의 잘못을 일일이 다 들추어 내어서 하나하나 정죄해 가며 저 사람은 나쁜 사람, 저 사람은 악한 사람이라고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는 그 자체를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숨은 동기, 마음의 자세를 문제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뾰족한 마음, 남을 정죄해서 허물어 뜨릴려고 하는 마음, 멸시하는 마음, ‘너는 그런 인간이야’ 하고 낙인 찍는 마음, 이런 마음의 자세를 경계하고 책망하고 있다고 말씀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에 보면 비판하지 말라 남을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 다음에 정죄하지 말고 오히려 용서하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히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도 용서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비판하지 말라’고 한 말씀은 이 주 기도문 중에 어떤 말씀과 관련되는가 하면 앞서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그 말씀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을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도 정죄받지 않고 용서받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더우기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 바로 앞에 누가복음에 보면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남을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도 용서를 받으리라는 이 말씀은 결국 너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은 대로 남에게 긍휼을 베풀면 너희도 긍휼을 입으리라고 하는 그 말씀과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의 잘못에 대해 정죄하려고 하는 뾰족한 마음, 정죄해서 그 사람을 허물어 뜨리고 내려 밟아버리려고 하는 마음, 또 멸시하는 마음을 갖지 말고 오히려 그를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남을 불쌍히,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남을 재는 그 척도를 가지고 우리를 재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남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우리를 대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남을 정죄하는, 혹독하고 엄한 마음으로 남을 대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엄하고 혹독하게 대하실 것이요, 우리가 남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겨 그를 용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실 것은 우리가 남을 두고 긍휼히 여기면 이것이 네게 무슨 공로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남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었으니 참으로 그 긍휼을 바로 입은 자라고 그러면, 그 긍휼을 체험한 자라면 자연스럽게 남을 긍휼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자기 마음이 괴로워서 견디질 못합니다. 남에게 혹독하고 엄한 마음을 품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도 그 마음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네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라 남의 잘못을 비판하고 정죄하려 하지 말고 그 전에 네 자신을 먼저 돌아보아라. 네 자신도 허물이 많은데 아니 오히려 더 큰 허물이 있는데 어째서 남을 비판하려는 마음이 그리도 급한가? 누가복음 6:39을 보면 바로 이 본문 말씀 ‘네 눈의 들보를 먼저 빼라’고 하는 말씀 앞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네 자신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어찌 남의 잘못을 보고 고치려고 드느냐 정죄하려고까지 드느냐 자기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것은 소경이나 마찬가지인데 소경된 자가 다른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는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말지 먼저 네 자신을 돌아보고, 먼저 네 자신의 허물과 잘못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가 선생의 수준을 넘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제자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은 그저 선생 만큼만 되면 그게 최고입니다. 그가 달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입니다. 제자가 선생보다, 선생 이상이 되리라고 바라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 말씀일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제자는 선생을 능가할 수 없다’고 한다면 네가 만일 남을 가르치려고 할 경우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하고 가르치려고 할 경우 결국 제자가 선생보다 뛰어날 수 없으니까 기껏해 봐야 그 사람이 네 수준 밖에 못된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눈에 들보가 있으면서 남의 눈의 티를 가지고 야단을 할려고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남을 가르칠려고 들면 오히려 자기보다 나은 적은 허물을 가진 사람을 쓸어내려 자기 수준으로 만드는 것이 되어버리니 그 결과가 어떻게 좋을 수가 있겠는가라는 뜻의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서 내가 죄짓지 않겠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죄짓지 않는 것도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도 연약에 쌓여있는 만큼 범죄한 자를 볼 때, 먼저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를 어찌하든지 바로 세우려고 하는 마음으로 그를 온유하게 권고할 것이요, 또 그와같이 범죄한 경우를 볼 때 항상 너 자신을 살펴서 너도 같은 시험에 떨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남의 잘못을 정죄하기 보다는 나 역시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고, 온유한 심령으로 실수한 형제를 도와서 다시 일으키는 일을 가리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우리가 서로의 짐을 나누어지는 길이요,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계명, 사랑의 계명을 온전히 이루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아무 것도 아니면서 무엇이나 된 것 처럼, 저 자신도 늘 실수하면서 저는 마치 평생 실수 안하는 사람인 것 처럼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려고 달려드는 사람, 이런 사람을 스스로 속이는 자라 그럽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앞의 말씀에서는 잘못을 범한 자 특히 우리에게 빚진 자, 나에게 잘못을 범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용서와 긍휼을 베푸는 일에 있어서 조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개나 돼지 처럼, 짐승 처럼 무지막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베풀면 감사하기는 커녕, 오히려 덤벼들어서 그 사람을 해하고 상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긍휼히 여겨서 용서하면 감사하지는 않고 마치 자기가 옳아서 당연히 받을 권리로서 받는 것 처럼 꼿꼿하게 받고, 그의 잘못을 간절한 마음으로 충고할 때 오히려 지은 범죄를 당연시하고 뉘우치지 않는, 회개치 않는, 긍휼을 베푼 사람의 값진 사랑과 은혜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짓밟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긍휼을 베풀되 지혜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긍휼과 사랑을 베풀되 거룩한 것이 더럽힘을 당하고 짓밟히지 않도록, 진리가 손상되지 않도록 진주 처럼 값지고 소중한 것이 짓밟히지 않도록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께서도 늘 경험하시겠습니다마는 용서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단순히 그저 내가 네가 한 일을 잊어버리겠다, 그저 그렇게 용서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요, 더 나아가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는 뜻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들보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래도 하나님 말씀 앞에서 기도하면서 자기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야 얼마든지 혹독하게 비판해도 좋겠습니다. 그러나 남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우리는 굉장히 조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적 의미에서 모두 다 소경입니다. 희미하게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소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잘못을 우리가 잘 모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도 그런 경험이 많을 것입니다. 저 사람하는 행동보고 ‘틀렸다, 저래가지고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기회가 닿아서 그 사람하고 이야기가 되어서 조용히 사정을 물어 보면 제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딴판인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에게 머리가 수그러지고 그저 내 얼굴이 달아 오르는 그런 경험을 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남의 사정을 잘 모릅니다. 그러니 남을 판단하고, 고치려들고, 정죄하려기 보다는 먼저 내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늘 남의 잘못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생각할 때에 우리는 항상 여지를 두어야 합니다. 우선 내가 그 사람의 참된 사정을 알 수 없기 때문이고 나도 꼭같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엄하고 혹독하게 그를 대하면 하나님께서도 나에게 혹독하고 엄하게 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남의 잘못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겠는가에 대해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 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어떤 사람의 잘못이 드러나는 경우 산지사방 흩어져 다니면서 그저외고 다니지 말고, 욕하고 다니지 말고, 그저 온유한 심령으로 그 사람을 바로 잡으라 그럽니다. 혹독한 심령으로, 사나운 심령으로 ‘당신은 왜 이랬어’ 하고 따지고 들고, 정죄해서 바로 잡으라 그러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심령으로 벗어난 길에서 돌이켜 보고 세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온유한 심령으로 할 수 밖에 없는 것과, 네 자신을 돌아보아 시험받지 않도록 조심할 수 밖에 없는 것과, 네 자신을 돌아보아 시험받지 않도록 조심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나 역시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했을 때 ‘그래, 누구나 그럴 수 있지 뭐 좋아’ 이렇게 해버리면 참 마음이 좋은 사람 같이 보이나 그런식의 용서를 할 경우 무너지는 것이 있습니다. 성결이 무너집니다. 의로움이 무너져 버립니다. 여러분 쉬운 예를 듭시다. 여러분의 자녀가 잘못했을 때 ‘뭐 그럴 수도 있어’ 맨 날 그렇게 해보십시요, 그 아이가 어떻게 자라겠는가.
갈라디아서 말씀에서 잘못이 발각될 경우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 사람을 바로잡으라’ 그랬습니다. 본래 떨어진 자리에서부터 본래의 자리로 회복시키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래서 더 힘든 것입니다. 그저 용서하고 끝나면, 나 모르겠다 하고 끝나 버리면 되는 것 같은데 용서는 그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바른 자리에까지 다시 회복시켜야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이렇습니다. 이러한 용서가 아니고 ‘인간이면 누구나 다 그럴 수 있지’ 해버리면 참으로 거룩한 것, 값진 것, 성결과 의가 손상을 받거나 짓밟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를 용서할 때도 그 아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바로 세우는, 의를 세우는 용서가 아니면 그 용서는 값싼 용서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이 말씀은 동시에 우리가 긍휼을 베풀어야할 대상에 대해 너무 순진한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 내가 사랑을 베풀면 상대방이 감지덕지 할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베푸는 사랑을 짓밟고 은혜를 원수로 갚을 만큼 악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가장 쉬운 예로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얻는 것 만큼 복된 일이 어디있습니까? 그러나 전도를 해보십시요. 누가 감지덕지 합니까. 귀찮다고 쫓아내기나 하지요, 우리가 사랑을 베풀고 살아야 할 이 세상이 이처럼 악하다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늘 지혜롭게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지혜롭게 하라고 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개 약삭빠르게 행동하라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그 제자들을 보내면서 말씀하신 것이 있는데, ‘내가 너희를 이리 떼에게 보내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뱀 처럼 지혜롭되 동시에 비둘기 처럼 순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지혜는 성결과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말씀하시기를 위에서부터 오는 지혜 즉, 하나님에게서부터 주어지는 지혜는 첫째로 화평하고 그것과 분리될 수 없이 또 성결하다고 그럽니다. 절대 약삭빠르게 행동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 말씀은 앞의 부분과 연결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일견할 때 그저 한 번 얼핏 보게 되면 우선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 같고, 특별히 우리가 낙심치 말고 간절히 기도할 것을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낙심치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들어주신다, 응답하신다고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앞에 말씀드린 내용들과 연결이 된다고 한다면,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라고 하는 이 말씀은 앞에 드린 내용을 전제로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남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사는 자는 하나님께 이와같이 구할 수 있다고 하는 뜻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 36:38 이하를 보면 ‘주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되 누르고 넘치도록 갚아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긍휼을 베푸는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그 삶 속에 하나님의 긍휼이 놀랍도록 풍성하게 임한다고 하는 사실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와같은 약속이 주어져 있으니 너희는 구하라, 이와같은 용서와 긍휼의 삶을 사는 자는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고, 간구하는 자마다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갚아주신다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사람은 악한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긍휼을 베풀며 살 때 사람은 무지막지하게 은혜를 악으로 갚을지라도, 사람은 갚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은 갚아주시며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 때, 누르고 되어 넘치도록 갚아주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에 대한 말씀 7절에서부터 11절까지에서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강조하려고 하는 점은 11절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악한 너희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나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자녀에게 더더욱 선한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즉, 이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구하는 자에게 아낌없이 선을 베푸신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강조가 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입니다. 우리가 이 내용을 앞에 말씀드린 것과 연결시켜 본다고 한다면 아마 다음과 같은 뜻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긍휼히 베풀되 거룩한 것과 소중한 것이 짓밟히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의와 성결이 무너지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의와 성결이 무너지지 않도록, 손상받지 않도록 하라, 그리고 너희가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은 이처럼 악한 세상이니 지혜롭게 처신하라. 이런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하는데 인색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악하고 이기적인 것이 우리의 섬품인데 거기다가 함부로 선을 베풀지 말고 성결과 의가 다치지 않도록, 그리고 세상이 악하니 지혜롭게 처신을 해야 한다고 하니까 이것을 구실로 삼아서 될 수 있는대로나 편하게, 약삭빠르게 살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우리 심정이 이렇게 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지심을 일으켜서 남을 도와줄 마음이 생기게 하셨는데도 딱 돌아서면 또 마음이 변하고 그럽니다. 어떻게든지 구실을 찾아서 안도와줄려고 합니다.
사실 악한 세상 가운데서 지혜롭게 살라고 하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내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마음이 생기기보다는, 상대방의 악함을 구실로 삼아 될 수 있는대로 선을 행하는데 인색한 방향으로 우리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경험합니다. 저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베풀어야 소용없어, 틀렸어, 밑빠진 독에 물 붓기지, 아무리 해봐야 저 사람은 소망이 없어, 뭐 누구 도와준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효과를 내라는 법이 있는가 그렇게 변명을 삼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 바로 다음에 아낌없이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강조한 것은 위 말씀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지 말라’는 것을 변명과 구실로 삼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선을 행하며 긍휼을 베푸는 일에 있어서 인색하지 말고, 구하는 자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받으라고 하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이 단락의 말씀이 어떻게 시작된 것을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를 베풀라’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받아 형제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대로 흔들어 눌러 넘치도록 갚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너희가 남이 너희에게 해 주었으면 하는 대로 먼저 남에게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먼저 행하라. 네가 먼저 사랑을 베풀라. 내가 사랑을 베풀면 저 사람의 반응이 어떠할까 제대로 효과가 나타날까, 나에게 감사할까, 그런 것 따지지 말고 먼저 네가 사랑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이웃관계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말하는 원리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웃 사랑의 기본 자세에 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판하는 자세, 남을 정죄하고 낙인찍으며, 허물어 뜨릴려고 하는 자세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을 본받아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자세를 가질 것을 명하십니다. 내가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보아서 상대방이 어떤 아픔을 느끼며, 그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서 그 사람을 일으켜 바로 세우기 위해,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남에 대해서 비판하고 정죄하는 시선을 사랑과 긍휼의 시선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잘못을 권고하고 일깨울 때 먼저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거든 차라리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미워하는 마음으로 해봐야 괜히 그 사람 신경만 건드리고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왜하마면 용서라고 하는 것은 그저 잘못해도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웃에 대한 우리의 태도의 근본 원리가 항상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남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없이 그 사람을 대하면 그 사람을 망하게나 하고 자기도 상할 뿐입니다. 남의 잘못이 있을 때 물론 그것에 대한 시비의 판든은 분명해야 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분명해야겠으나, 내가 참으로 그를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솟아나기 전에는 그에게 그의 잘못을 권고할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내가 그를 바라보는 눈이 비판하고 정죄하는 시선이 아니라,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시선이 될 때까지 기도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주실 때 그에게 찾아가 지혜롭게 권면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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