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응답받는 기도에 관한 설교

라은성목사(서울)

by 김경호 진실 2015. 9. 25. 23:54

본문

하나님 확신하는 기도는 응답받는다
하나님 속성에 비춰 자신을 살피는 것이 가장 귀중한 기도
 

   
 

‘기도’는 기독교인의 ‘특권’이며 ‘임무’다. 여러 기도회에 참석하기도 하고 인도하기도 한다. 기도의 제목도 다양하지만 기도에 대한 기대 역시도 다양하다. 누구든 기도의 응답이나 응답받는 기도를 기대할 것이다. 성경에서 그 모본을 찾거나, 기도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지 뮬러(1805~1898년)를 닮으려고 한다. 아니면 기도응답의 간증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다. 부정적이든 이기적이든, 선한 의지든 의도적이든 이처럼 기도에 대한 기대를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늘 기도하셨다. 이에 따라 제자들은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다(눅 11:1). 시편은 기도들의 모음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많은 선지서에서 기도문을 읽곤 한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위한 아브라함의 기도(창 18장),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모세의 기도(출 32장), 한나의 기도(삼상 2장),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했던 욥의 기도, 다윗의 회개기도(시 6, 32, 38, 51, 102, 130, 143장), 앗수르 왕 산헤립이 침공한 가운데 질병을 얻은 히스기야의 기도(사 38장) 등은 최고의 기도문으로 여겨진다.
 

왜 기도하나?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예수님께서도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고 말씀하셨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 또 우리의 심정을 살피시기 때문에 거짓된 기도인지 참된 기도인지도 아신다. 이에 따라 한나는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삼상 2:3)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아시는데 왜 우리는 기도해야할까?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그분의 뜻은 변화되지도 않을 것인데 왜 기도 할까? 성경에는 그분이 뜻을 돌이키는 것처럼 이따금 표현되기도 한다(사 38:5 참고). 하지만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의 뜻은 결코 변함이 없다(약 1:17).

그분의 뜻이 변하는 것처럼 표현되는 것은 우리의 기도의 열심을 강조하시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더욱이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은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를 들었다(눅 18:2~3). 재판장을 괴롭게 하니 원한을 풀어준다고 하여 하나님께 떼를 쓰면 그분의 뜻이 변한다는 것이 아니라 낙심하지 않고 늘 기도하는 심정을 가지라고 권하신 것이다(눅 18:8).

전지하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칼빈 선생은 이렇게 답한다. “기도해야하는 이유는 그분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여섯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기독교강요』 3권 20장 3항).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것으로 그분의 뜻을 알기 위해 간구한다. 우리의 뜻이 그분에게 수용되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우리에게 수용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부패성을 지닌 우리는 그분의 뜻을 알더라도 순종하기엔 매우 인색하다. 그래서 환난, 연단, 인내만 아니라 고백이 기도를 통해 소망을 갖도록 한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확신으로 강화되어 간다. 비록 원치 않는 일이 발생했을 때 그분이 마련한 피할 길을 찾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기도를 하게 한다(고전 10:13).
 

바른 기도의 규칙

기도는 배워야 하고 교회는 기도 학교이다(막 11:17). 이에 대해 칼빈은 기도의 4가지 규칙을 제안한다. 이 규칙에 따라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나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기도를 통해 그분의 뜻에 나의 뜻을 ‘맞춰가는 것’이라 여긴다. ①경외심을 가져야 한다(『기독교강요』 3권 20장 4~5항). 단순한 고민거리만을 해결하기 위해 기도하지 말고 큰 걱정으로 인해 기도의 불길을 일으켜야 한다.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이성이 고안해낸 제목들을 가지고 간구하지 말고 일대일의 대화처럼 그분 앞에 진지하게 간구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②회개하는 심정을 가져야 한다(『기독교강요』 3권 20장 6~7항). 정말 필요해서 간구하는 것인가 아니면 기계적으로 형식에 따라 또는 마지못해 간구하는 것인지 살펴야 한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다(시 51:17). 상처받은 심정이란 곧 회개하는 심정을 말한다. ③겸손한 기도이다(『기독교강요』 3권 20장 8~10항). 자신을 지렁이처럼 여기고 간구할 수 있다면, 또 세리처럼 간구할 수 있다면 올바른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눅 18:13~17).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교만하고 그릇된 심정을 살피신다. 기도 속에 자신의 의를 포기할 수 있는 한 포기해야 한다. 응답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그분의 자비로서만 이루어짐을 깨닫게 된다. ④확실한 소망을 가지는 것이다(『기독교강요』 3권 20장 11~14항). 하나님은 우리의 세미한 음성에도 귀를 기울인다(시 5:1, 54:2, 55:1, 86:6, 116:2). 그런데도 우리의 뜻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응답받는 기도?

사도 야고보는 분명하게 그 이유를 말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3). 앞에서 언급한 대로 겸손하지 못하고 자신의 뜻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위의 규칙을 지킨다고 우리의 뜻이 이뤄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기도는 갈급한 심정으로 자신의 시급한 간구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자신을 준비시키고 적용되어 순종하도록 이끈다. 자신의 뜻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이 자신에게 이뤄지도록 기도한다. 이것을 우리는 응답받는 기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응답받는 기도의 표준을 ‘주기도문’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속성을 찾으라!

주기도문은 모든 기도의 주요한 모본이다. 자세한 내용을 여기서 살필 수 없지만-6가지 청원이 있지만-서론과 결론 부분만 다루도록 한다.

예수님은 서론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라고 권한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하늘’이란 의미를 생각해보자. 하늘이란 그분의 뜻을 우리의 감성과 수준에 맞추려고 하지 말라는 의미다. 높은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초월해 계시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판단 너머에 계시며 포괄적이며 공평하신 완전한 분이시다.

또 ‘우리’라는 의미는 나의 뜻에 집중하지 말고 우리의 뜻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일원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나눈 형제자매다. 자신의 뜻만 바라는 것에 집중되다보면 이기적이고 타인 또는 이웃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집을 매매하고 싶다고 간구한다고 하자. 누구든 비싸게 팔고 싶겠지만 주위 시세가 있고 구매하는 자를 고려해야 한다. 또 장학금을 받기 위해 기도한다고 하자. 다른 학생이 받지 않게 되는데 이런 기도는 ‘우리’라는 기도에 어긋난다. 이기적 간구보다 이웃과 교회 더 나아가서 국가의 이익 되는 간구를 해야 한다. 자신의 간구가 과연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해가 되는지 살피는 진실한 심정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라는 의미에 담겨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라고 권한다. 아버지는 지상의 아버지라고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긍정적이지 않는 아버지나 남성성의 아버지라는 개념으로 상상하지 말고 성경에서 말하는 아버지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아버지’는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 아버지에게 아들은 순종한다.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를 때는 그분이 우리를 끝까지 보호하고 지키고 인도한다는 확신 속에 간구하라는 의미다. 동시에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고백도 함께 담겨 있다.

결론에서 예수님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권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칼빈 선생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속성과 말씀에 대해 묵상하는 것을 결코 무시해선 안된다”고 하고(『기독교강요』 3권 20장 13항), 또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의 관용에만 근거하고 개인의 공로와는 전혀 무관”하며(『기독교강요』 3권 20장 10항), 그리고 “그분의 속성에 기도 확신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얻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한다(『기독교강요』 3권 20장 47항). 결국 기도 응답의 확신은 하나님의 속성에 있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무엇일까?

그분이 어떤 분임을 아는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는 누구에게 하는지 몰라 갈팡질팡할 것이다. 그분이 아버지시고, 영이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자존하시고, 편만하심을 신뢰할 수 있다면, 즉 그분이 자신에게 어떤 분임을 깨닫고 간구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확신에 찰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

응답받는 기도는 하나님의 속성에 달려 있다. 그것에 비춰 자신을 살피는 것이 가장 귀중한 기도며 확신을 갖는 기도이다.

728x90

'라은성목사(서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생에 대하여  (0) 2015.09.28
조상의 죄들에 대한 설교  (0) 2015.09.28
‘참된 교회’에 관한 설교  (0) 2015.09.25
종교개혁에 대한 설교  (0) 2015.09.25
양심에 관한 설교  (0) 2015.09.21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