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관용의 착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다시 절실해진 ‘양선’의 가치…한국교회 성령 충만한 착한 지도자 세워야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행 11:24)
착함(양선)은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의 열매 중 ‘양선’은 요즘 잘 사용되지 않는 말인데 쉽게 말하자면 “착함”입니다. 이상근 주석에서는 양선은 의와 친절의 의미를 가지며, “자비에 비해 보다 능동적인 선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착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착하게 살면 손해 본다”며, 착한 사람이 존경의 대상이기 보다는 어리석은 자로 매도당하는 상황입니다. 기독교윤리실천이 최근 개최한 세미나에서 “세상을 밝게 하려면 착한 게 필요하지만 착한 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하는 한계주의가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회구조, 곧 법과 관례를 고치지 않고 개별적 도덕성만으로는 세상의 짙은 어두움을 거두어 낼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착함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욱 ‘착하게 살기운동’을 해야 합니다. 왜 양선이 필요한지 오늘 본문의 주인공 바나바를 통하여 생각해 봅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
본문의 앞부분에 바나바가 안디옥으로 파송을 받은 이유가 나옵니다.(19-22절)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사건 이후 각처로 흩어진 성도들 중 어떤 이들이 안디옥에 있는 헬라인들에게 주 예수의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로 돌아옵니다. 이 소문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졌고, 이 일로 교회는 바나바를 택하여 안디옥에 가서 사실을 살피게 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나바를 파송한 일은 기뻐서라기보다는 놀라움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지금껏 복음이 유대인들 중심으로 전파되었고,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적은 수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주께로 돌아왔기에 예루살렘 교회 곧 사도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판단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은 선교라고 할 때 자연스럽게 이방인을 복음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당시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한 주님의 말씀조차 곳곳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생각했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으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방인을 사랑하거나 함께할 수 있는 이웃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 유대의 전통이었고, 그것이 율법으로 적시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파견된 바나바는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안디옥 교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려고 했습니다. 만약 바나바가 고정관념을 가지고 안디옥에 들어갔다면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파를 금지시켰을 것이고, 교회에서 이방인을 출교시켰을 것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이후 선교의 거점(據點) 교회로서의 안디옥 교회는 없었을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 중 가나안을 정탐하러 갔던 12명의 사람들의 보고처럼 다수가 가나안 진입이 불가하다고 여겨 이스라엘이 40년이나 광야에서 떠돌아다니며 온갖 고생을 한 것처럼, 이때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을 내어 쫓았다면 이후에도 오랫동안 기독교의 이방 선교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나바의 처리와 안디옥 교회의 결과를 읽어봅시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23~24절)
바나바는 안디옥의 이방인들에게 역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굳건한 마음, 곧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바나바의 이러한 판단과 시행은 혹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징계를 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이방인들을 교회에 들이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인정한 것은 교회의 대변혁의 사건일진데, 바나바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볼 줄 아는 사람, 바나바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영적 안목이 바나바의 능력이었습니다. 그 능력이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데서 나온 것이고, 그 열매로 ‘착한 결정’을 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여기에 착하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 성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착한 마음은 성령의 능력으로 선입견 없이 보는 열린 마음입니다. 또한 관례와 습관으로는 받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임재 앞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절대 신앙과 순종입니다. 그래서 착함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바울을 수용한 바나바
바나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안디옥에서 그리 멀지 않은 다소로 내려가 바울을 만났습니다. 이미 바나바는 바울의 회심 사건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을 신뢰하고 예루살렘 사도 회의에 바울을 담대히 소개시키기도 했습니다.(행 9:26~27) 이제 그를 데리고 안디옥으로 올라가 이방인 선교에 힘을 합하여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후, 그는 확신을 가지고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의 파송 선교사로 이방 선교지로 나갔습니다.
착함이 없이는 불가능한 모습입니다. 많은 경우에 믿음으로 충성되게 교회를 섬기던 사람들도 자기와 다른 스타일의 사역자를 수용하지 못하여 서로 충돌하고 비방하며 적이 될 때가 많습니다. 사역을 위한 열정과 진리 수호를 미명으로 착한 수용을 거부합니다. 그들에게는 수용이 타협 혹은 진리 포기로 단순 입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다시 착함(양선)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특별히 한국교회에 착한 사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조금만 달라도 서로 성토하려는 교계 분위기에서, 이해와 관용으로 동역할 수 있는 착한 사람들이 지도자로 많이 세워지기를 소망해봅니다.
본문 26절에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이 안디옥 교회에서 시작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 성도들을 두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바나바나 바울이 함께 더불어 있는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은 것입니다. ‘착한 사람’ 바나바 때문에 서로 다름을 수용하며 행복하게 지내는 공동체를 두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여 존귀하게 부른 것입니다.
이런 본래의 의미로 우리 한국교회가 세상에서 불려야 합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세상은 지금 우리를 개독교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독선적이고 천박하게 보였으면 이런 망측한 이름을 붙였을까요? 우리는 심각히 고민하며 반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착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착하게 살기운동이 필요합니다. 도덕적 재무장을 하자는 운동이 아닙니다. 바로 ‘성령운동’입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착한 사람을 지도자로 세워야 합니다. 교회조차도 “착한 것만으로는 안 된다”며 착함의 가치를 폄하하지 말아야 합니다. 온유와 겸손으로 착하고 착하신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길입니다.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3778
성공보다 중요한 것(눅 12:13~21) (0) | 2015.11.18 |
---|---|
디도서 3장 선한 일을 힘쓰는 그리스도인이 되라. (0) | 2015.11.05 |
이기려면 절제하세요(고전 9:24~27) (0) | 2015.11.04 |
디모데전서 3장 직분자는 경건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한다. (0) | 2015.11.01 |
고유한 맛! (0) | 2015.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