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그리스도 복음을 증거하라
설교란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사람들에게 전하시는 역동적 사건이다. 앞서 설교란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이 만나는 자리라고 언급했었다. 이것을 네덜란드의 신학자 아놀드 반 룰러는 ‘신율적 상호성’(theonomical reciprocity)이라는 용어로 정확하게 묘사했다. 이것이 갖는 심중한 의미는 두 가지다. 첫째, 성령은 인간 설교자의 인격성을 빼앗지 않는다. 즉, 성령 하나님은 인간 설교자의 수고와 노력을 자신의 구원 사역 속에 포함시킨다. 그러므로 인간 설교자는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설교의 책무를 성실하게 감당해야 한다. 둘째, 인간 설교자는 결코 성령의 역사를 조작할 수 없다. 설교자는 오히려 예배 중에 임재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그분께 겸손히 자리를 내어 드리고, 성령께서 친히 은혜 베푸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란 청중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청중은 설교를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 구원 사건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설교의 독특한 목적이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설교의 목적은 하나님을 떠나 원수 되었던 죄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선포를 통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하나님과 화해되고 용서받고 의롭게 되는 것이다(롬 1:17). 사도 누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설교의 목적은 집을 떠난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눅 15:11~32).
이런 설교의 위대한 목적이 성취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성령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에 근거한다. 성령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의 말씀과 함께 일하시며, 구원의 복음을 현재화한다. 창세 전 예정된 하나님의 구원이 오늘 현재에 구원 사건으로 발생한다. 이런 확신이 오늘날 설교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증거하게 만든다. 이런 수직적 차원의 성령의 구원 사역과 더불어 설교자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발생하는 회중과의 독특한 만남과 접촉은 설교의 수평적 차원을 형성한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는 “설교하는 일이란…회중들과 설교자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과 인격성과 심령과 마음의 상호작용을 수반”한다고 명확하게 지적하였다. 이것은 설교자와 회중이 함께 참여하는 직접성(immediacy)을 내포할 뿐만 아니라, 설교자와 청중 모두의 상호 의존성(interdependance)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는 설교의 특징은 무엇인가? 로이드 존스는 일차적으로 설교자의 ‘자유로움’을 꼽는다. 설교자는 자신의 완성된 원고보다 성령을 의지함으로써 성령께서 친히 말씀하시도록 자신을 내어 드려야 한다. “우리의 신앙을 성령보다 설교 원고에 둔다는 것은 정말 큰 위험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설교문에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 자신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첫째도 자유, 마지막도 자유, 언제 어디서나 자유라는 것을 확신하도록 하십시오.” 준비된 설교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는 경고는 설교 준비를 게을리 해도 좋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둘째,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설교학자 훅스트라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는 설교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말씀의 봉사자는 자신의 목소리 가운데 성령께서 자기 영혼의 줄을 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설교자는 복음의 진리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성경의 진리를 경험적으로 설교해야 한다. ‘경험적’(experimental) 설교란 설교자 개인의 일상적 경험을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 가운데 깨달은 성경의 진리를 회중들에게 전하여 회중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만드는 설교다.
마지막으로, 설교의 신비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설교는 설교자와 회중 모두가 그 결과를 예상치 못한다는 불확정성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이 불확정성의 신비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혜를 기도할 뿐만 아니라 그 행하신 일에 감사와 찬송, 영광을 돌린다. 여기서 신학의 종국적 목적인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는 ‘송영’이 울려 퍼진다. 설교는 온 백성과 만민이 하나님을 경배케 하는 평범한 도구일 뿐이다. 여기에는 설교자도 사라지고, 청중도 사라지고 오로지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찬송과 영광을 받으신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구원의 방편이다. 설교를 통해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고, 영원한 삶과 죽음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한 삶과 죽음보다 더 절실하고 가장 실존적인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작정은 오늘도 새롭게 우리 설교자들의 마음에 각인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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