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규범적 본질: 칼빈의 기독론적 이해의 고유성
문병호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I.논지
정통개혁주의신학자들은 율법의 본질(natura)을 경건하고 의로운 삶의 규범(regula vivendi pie et iuste)으로 보고 이에 기반해서 율법의 규범적 용법(usus)과 사역(officium)을 강조하는 칼빈의 신학을 기본적으로 계승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율법이라는 주제를 각론적으로 다룸에 있어서, 신학자들은 칼빈의 기독교인의 삶의 교리의 요체인 그리스도가 율법의 모범(exemplar, typus)이라는 사실만을(cf. Inst. 3.6-10) 지나치게 부각시킴으로써 그리스도와 율법에 관한 신학적·실체적 고찰을 등한시하고 윤리적·인식론적 접근에 치중해 왔다. 이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칼빈의 율법사상에 정초해서 언약에 대한 교리를 수립함에 있어서 율법이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expressio volutatis Dei)이라는 인식론적인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던 경향과 궤를 달리하지 않는다. 칼빈의 율법관을 그의 언약 사상을 통하여 조명하고자 하는 근래의 신학자들도 이와 같은 언약신학자들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다. 특히 언약 신학의 기원에 있어서의 “두 가지 개혁주의 전통(two Reformed traditions)”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최근의 논쟁 역시 율법의 규범성에 대한 인식론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논쟁은 율법의 용법에 나타난 규범성의 범위 내지 한계를 다룰 뿐이며 율법의 신학적 본질에 대한 답을 주고자 함이 아니었다. 이는 종교 개혁 세기에 있었던 율법에 관한 루터란들의 논쟁의 취지와도 일맥상통한다. 회개(poenitentia)에 있어서 율법의 역할(1537-1540), 아디아포라(adiaphora)의 범위(1548-1552), 율법의 제 삼 용법이라고 불리는 규범적인 용법(1556-1557)에 관한 논쟁들을 통하여서 루터란들은 구원 서정에 있어서의 율법의 필연성을 신자들의 삶에 어떻게 확대 적용시킬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루었다. 언약 신학자들이 복음과 관련하여 율법의 은혜적인 측면을 다룰 때 전체 하나님의 경영 혹은 경륜(dispositio, oeconomia)을 주로 문제 삼았다면, 루터란 신학자들은 구속사(Heilsgeschichte)와 개인구원 과정에 있어서 복음의 전(前)과정으로서 복음과는 구별되게 작용하는 율법의 예비적, 정죄적 기능에 중점을 두었다. 관점은 다르지만 대체로 루터란들의 논쟁도 오늘날 개혁주의자들의 두 전통 논쟁과 다를 바 없이 율법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다루기 보다는 율법의 용법의 실제를 현상적으로 다루기에 급급했다. 율법의 기원와 실체를 신학적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율법의 용법을 복음의 영향과의 관계에서 다루고자 했을 뿐이다.
칼빈은“기독론적으로” 율법을 “신학적으로” 고찰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중보자(Christus Mediator legis)로서 지금도 화해와 중재와 가르치는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Mediator reconciliationis et patrocinii et doctrinae)는 사실로부터 기독론과 구원론이 동시에 파악되며 실체적으로 연결된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중보자라는 개념을 통해서 신·구약이 그림자-실체의 유비(umbra-substantia analogia)와 약속과 성취의 유비(promissio-perfectio)로 공시적이며 통시적으로 이해된다. 이로써 율법 안의 그리스도(Christus in lege)와 그리스도 안의 율법(lex in Christo)이 함께 파악된다. 이로써 구약 시대 율법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repraesentatio)할 뿐만 아니라 그의 현재(顯在, praesentia)를 계시함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신약 시대 율법은 실체의 드러남으로서의 예수의 율법 해석과 그 실체의 완성이 함께 이해된다. 그러므로 율법의 규범성 혹은 규범적 본질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과 떼어서 논할 수 없다.
본논문은 칼빈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와 함께 성역을 담당했던 동시대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의 일단(一端)을 조명함으로써 율법의 규범적 본질과 사역에 대한 칼빈의 기독론적 이해의 고유함을 논증하고자 한다.
II.종교개혁자들의 율법관
1.루터: Lex Semper Accusat
루터는율법의 의를 복음의 의와 철저히 구별한다. 율법은 은혜에 대한 약속을 내포하지 않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보여 줌으로써 회개 과정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낼 뿐이다. 율법의 의는 선행의 공로에 의지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주어진 복음의 의—“이상한 의(iustitia aliena)”—와는 구별된다. “가장 유익한 삶의 교리인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이 의의 길로 이르게 할 수 없으며 단지 방해할 뿐이다.”
루터는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를 철저히 구별하면서 죄를 깨달아서 그리스도를 찾게하는 율법의 신학적 용법(usus theologicus)만이 참되다고 보았다. 그는 율법이 신자들을 위해서 규범적으로 사용됨을 인정하지 않았다. 갈라디아서 4장 3절 주석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율법의문자는 사람들으로 하여금 형벌의 두려움을 느끼게 해서 부득불 그것의 가르침을 좇아서 선행을 하게 만들고 이러한 곤경을 깨닫게 해서 자유의 영을 주시는 그리스도에게로 달려 가게 만들기 때문에, 율법은 후견자이다.
갈라디아서3장 19절을 주석에서 루터는 그리스도가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라는 사실만을 지적하면서, 궁극적으로 이 구절이 말하는 바는 율법보다 더 “가증스럽고,” “혐오스러우며,” “참을 수 없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우리가 중보자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을 받게 하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3장 20절을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그러므로율법이 그 빛 가운데 우리의 양심을 조명해서 우리가 죄, 죽음, 심판 그리고 하나님을 미워함과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 작용도 할 수가 없다. . . . 따라서 신학에 있어서 율법의 주요한 원리는 사람들을 개선시키지 않고 오히려 더욱 악화시킨다. 율법은 사람들의 죄를 보여 주어서 죄를 깨닫게 하고 이로써 겸손해지고 경각심을 갖게 하며 망연자실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축복된 자녀가 되는 소망을 간구하게 한다.
칼빈과같이 루터도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며, 영적이고, 신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루터는 성령에 의해서 거듭난 사람은 율법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아니하고 살아있는 신앙(fides viva)을 가지고 살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율법의 용법을 인정할 여지가 없다고 본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율법의 중보라는 적극적인 측면은 인정하지 아니하고 다만 그리스도가 율법의 종속을 파하셨다는 것만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신자들을 위한 율법의 계속적인 용법에 부정적이며, 신자들의 계속적인 회개를 위한 율법의 신학적인 용법의 유효성에 대해서도 엄격히 반대한다. “율법과 그리스도는 상호 배타적이며 함께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는 루터의 신념은 그의 전체 구원 이해에 깊이 반영되어 나타난다.
2.멜랑흐톤: Lex Accusans로부터 Lex Vivendi에로
멜랑흐톤은율법-회개-신앙(lex-poenitentia-fides)의 과정에 충실했으며 이를 칭의와 성화의 과정에 모두 적용하고자 했다. 그는 율법의 의라는 개념으로부터 법적인 회개라는 개념을 도출해 내고, 그것을 복음적 회개와 구별한다. 그는 신자들의 계속적 회개 과정에서 작용하는 율법의 정죄적 기능으로부터 율법의 규범적 용법(제 삼 용법)을 전개한다. 이것은 “육신을 강제하고 양심을 두렵게 하는(cohercere carnem et terrere conscientiam)” 율법의 처음 두 용법을 기독교인의 삶에 적용한 것에 다름 아니다. 즉 항상 정죄하는 율법(lex semper accusans)의 본질이 기독교인의 삶에 적용된 것에 다름 아니다.
비록율법의 삼중적 용법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을 한 부분은 없지만 멜랑흐톤의 로마서 주석(1532)은 그것의 신학적인 기초를 매우 조직적으로 제시한다. 멜랑흐톤은 회개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깨닫게 하는 율법의 기능을 강조하고, 이로부터 진정한 고백과 통회에 이르게 하며 더불어 우리의 공로와 선행의 의를 단념하게 하는 율법의 의를 설명한다. 멜랑흐톤에 의하면, 율법은 단순히 “우리를 정죄하는 목소리(vox legis accusantis nos)”로서 기능하며, 아무 약속도 계시하지 않는다.
회개과정의 율법의 사역을 다루면서, 멜랑흐톤은 믿음 이전에 작용하는 양심의 내적인 심판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일반법에서 기원한 “법은 죄를 드러내지만 제거하지는 못한다(Lege tantum ostendi peccatum, non tolli)”는 금언에 집착함으로써 율법을 부정적으로만 본다. 그는 이하에서 정의되는 “율법의 이중적 용법(duplex usus)”이 모세법과 자연법에 공통적으로 작용된다고 본다: “첫 번째 용법은 정치적 용법으로서 육신에 속한 사람들을 외부적으로 강요하는 것이다. 두 번째 용법은 하나님의 심판과 사람의 양심과 관계되는 것으로서 양심을 정죄하고 경성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멜랑흐톤은 갈라디아서 3장 24절은 율법의 첫번째 용법에 관계되는 것이며 본문에서 “그리스도에게로”라는 말보다 “몽학선생”이라는 말에 더욱 강조점이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심의가책 가운데 느끼는 심판의 두려움을 통해서 율법의 제 이 용법을 설명한 것과 같이 멜랑흐톤은 율법의 제 삼 용법을 설명하기 위해서 신자들의 계속적인 회개라는 개념에 의지한다. 로마서 4장 15절의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lex efficit iram)”라는 구절을 주석하면서, 멜랑흐톤은 “율법의 약속(promissio legis)”을 “은혜의 약속(promissio gratiae)”과 구별하고, 후자가 복음의 핵심을 포함하고 있다면 전자는 오직 선행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만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율법의 약속은 단지 우리가 회개에 이르는 작용만을 한다고 주장한다. 멜랑흐톤은 율법의 약속을 율법의 의와 연결시키고, 은혜의 약속을 중보자 그리스도와 연결시킨다. 율법의 규범적인 용법과 관련해서 율법의 굴레로부터의 자유와 율법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이 동시에 강조되지만,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timor dei)을 초래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본다. 결론적으로, 멜랑흐톤에 의하면, 첫 번째 두 용법과 마찬가지로 세 번째 용법도 lex accusans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데 불과하다. 이러한 특징으로부터 우리는 멜랑흐톤의 율법관에 있어서 lex accusans으로부터 lex vivendi로 넘어가는 강조점의 추이(推移)를 발견하게 된다.
3.불링거: Lex Vivendi로부터 Lex Accusans에로
율법의본질을 다룬 마태복음 주석에서 불링거는 옛 언약과 새 언약에 속한 모든 백성들을 위해서 율법의 명령들이 영원히 유효함을 강조한다. 그가 말하듯이,
하나님의법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작성되고 모세를 통하여서 그의 백성들에게 설명되고 공표된 영원하고 최고한 하나님의 의지이다. 율법을 통하여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의지—그들이 일생동안 해야 할 일과 피해야 할 일—를 알게 되고 그들이 배운대로 행하게 된다. 즉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의존해서 하나님이 규율하신 대로 살게 된다.
불링거는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를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작정과 삶의 규범을 규정하는 율법의 의라고 부른다.
주님께서율법을 처음 제정하신 것은 우리의 눈 앞에 우리의 죄와 우리가 본래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 보여 주셔서 우리가 이 길을 통해서 선생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삶의 의무를 명령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하여서 자신이 죄인이며 온전치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진실된 율법의 원래 의미를 잘 파악해서 율법이 약속한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하게 된다.
구약시대 믿음의 조상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영”과는 아직 교통하지 않았지만, 율법의 “정수(medullam),” “목적(finem)” 그리고 “영(spiritum)”은 이미 이들에게도 계시되었다. 그는 전체 구원 과정에 있어서 율법의 의의 완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영의 사역을 특히 강조한다.
성도들의믿음을 통하여 수여된 그리스도의 영은 사람을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종속되게 만든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께 복종하되 율법 아래 매인 사람들과 같이 억지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게끔 준비하게 하신다. 이와 같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오직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기독교인은 율법을 완성한다.
그러므로,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하지 아니하고 육체를 좇아 길을 가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심지어 율법의 칭의(율법을 통해서 칭의에 이르게 되는 지식을 얻음—역자 주)조차 완전하지 못하다.
결과적으로기독교인이 율법의 의를 완성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그의 영의 역사를 통해서 삶 가운데 구현하는 것이다.
불링거는은혜 언약의 약속에 기반해서 율법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그의 이러한 입장은 율법의 삼중적 용법에 대한 이해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가 “주요하고 고유한 율법의 사역(praecipuum et proprium legis officium)”이라고 부른 첫 번째 용법은 루터와 멜랑흐톤의 두 번째 용법에 해당하나 더욱 적극적이고 포괄적이다. 불링거는 율법이 우리의 죄를 정죄할 뿐만 아니라 칭의 교리에 있어서 진실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의를 계시한다고 주장한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의 “몽학선생”을 주석하면서, 불링거는 율법은 우리를 인도해서 구원자 그리스도에게 이르게 하며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의 삶(Christum et in ipso vitam)”을 선언한다고 주장한다. 율법은 우리의 안내자이자 선생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신비를 계시함으로써 “기본적인 의의 원리들 뿐만 아니라 진실하고 절대적인 의 자체(non tyrocinia tantum iustitiae, sed ipsam veram et absolutam iustitiam)”—을 전체적으로 가르친다고 말한다.
불링거의두 번째 용법은 칼빈의 세 번째 용법과 유사하다. 칼빈과 같이 불링거는 경건하고 정직한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의 작용을 강조한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 안에서 의롭게 된 사람들이 좇을 것과 멀리할 것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경건하고 올바르게 예배하는 방법(quid sequantur vel quid fugiant iustificati in fide per Christum, et quomodo pii rite colant deum)”을 가르친다. 시편으로부터 많은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불링거는 율법의 명령들이 신자들의 “권고와 위로(exhortationem et consolationem)”를 위해서도 적용된다고 강조한다. 이같이 율법의 규범적인 사역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모든 선행의 완전한 교리(doctrinam perfectissimam et fidei in Deum et omnium bonorum operum)”를 포괄한다.
그리고불링거가 “방자한 사람들을 강요하는(coercere petulantes)” 율법의 세 번째 용법이라고 부른 부분은 루터의 첫 번째 용법과 유사하다. 그러나 루터와 멜랑흐톤과는 달리 불링거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는 율법의 부정적인 용법은 오직 정치적인 용법에만 관계되는 것으로 본다. 불링거의 이와 같은 입장은 그가 루터와 멜랑흐톤과 칼빈과 같이 디모데전서 1장 8절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이라는 말씀을 율법의 정치적 용법을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한 것에서 확증된다.
갈라디아서3장 24절에 나오는 몽학선생(paedagogus)의 역할을 해석하면서 불링거는 하나님의 언약에 기반한 계속적인 은혜에 기초해서 율법의 사역과 용법을 설명한다. 율법은 우리의 칭의를 위해 값없이 주시는 은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영”에 의해서 감화를 받는 경건한 성도의 삶을 가르친다. 율법을 좇아 사는 성도의 삶을 위해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영을 불링거는 “율법의 영(spiritus legis)”이라고 부른다. 율법의 의를 “율법의 마음(mens legis)”이라고 부르고, 율법은 “경건, 믿음, 순전함, 사랑(pietatem, fidem, innocentiam et charitatem)”을 가르치고 불러 일으킨다고 말한다. 불링거는 칭의를 위한 선행의 공로에 대해서는 강한 반감을 표현하나, 칭의 과정에 있어서 삶의 규범을 계시하는 율법의 사역이 정죄하는 사역보다 앞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불링거는 율법의 첫 번째 용법을 설명하기 위해서 칼빈이 율법의 제 삼 용법을 다루면서 강조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 율법이라는 사실을 주목한다. 비록 하나님의 의지의 선언으로서 율법이 믿음의 선조들에게도 계시되었으나, 만약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의지의 계시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불링거는 강조하는데, 이는 그의 언약적 율법이해를 가장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만 그리스도가 율법의 실체이며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율법을 좇은 삶을 산다는 부분에 대한 강조는 없다.
4.부써의 Lex Vivendi와 Lex Accusans에 대한 종합적 이해
로마서주석에서 부써는 하나님의 의(iustitia dei)라는 개념으로부터 율법의 사역과 용법을 역동적으로 설명한다. 로마서 1장 17절을 주해하면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셔서 우리가 진실하고 견고한 의를 이루기 위한 열심을 가지고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서 살아가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의로우시며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deus et iustus et iustificans)”을 계시한다. “선행은 의롭다고 칭함 받은 사람을 따르나 의롭게 되고 있는 사람에 앞서지 않는다(Bona opera sequi iustificatum, non praecedere iustificandum)”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면서 부써는 삼중적 의(triplex iustitia)을 그리스도의 공로로 영생을 얻는 것,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의 영을 받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선한 것들(bona)”로 채우심을 받은 백성들이 그들의 “행위(facta)”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설명하는데 이는 그가 칭의 과정에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폭 넓게 해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같은맥락에서 부써는 로마서 3장 20절의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는 구절의 주석을 통하여서 이신칭의의 원리를 강조하면서도 시편 19편과 119편에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 있는 율법의 규범적인 용법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는 여기서 전체법이 “영생을 그저 주시는 자(largitorem)”와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진리를 교훈한다고 말하면서 율법이 전체 구원의 과정에 작용함을 강조한다.
로마서3장 21절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라는 구절에 대한 주석에도 같은 입장이 나타난다. 그는 먼저 “율법이 죄를 정죄하고 저주한다(lex accusat et condemnat [peccatum])”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나 이것이 회개에 있어서도 율법이 규범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명석하게 지적한다. “율법 외에(sine lege)”라는 말은 “율법 준수로부터가 아니라 율법 준수를 위하여(pro, non ex observatione legis)”로 해석된다. 그리고 “율법 없이 수여된 하나님의 의는 율법 없이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확증한다.
“율법은의를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를 감화함으로써 진정한 의에 이르게 하는 믿음은 율법을 더욱 견고하게 한다.” 율법이 선택된 사람들을 참 회개에 이르게 할 때, 그것은 “죄를 아는 지식(cognitio peccati)”뿐만 아니라 “올바른 삶(doctrinam vitae rectae)의 교리”를 계시한다. 이와 같이 믿음과 율법의 사역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부써는 칭의가 하나님의 의를 함께 나누는 것임(communio iustitiae)을 다시금 확인한다.
율법은하나님의 의지를 계시하는데, 이는 구원의 진리와 기독교인의 경건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진정한 경건은 “율법에 죽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nos legi mori, et iungi Christo).”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그리스도의 영은 “율법을 우리의 남편이 되게 하고,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뜻의 해석자인 율법이 마땅히 우리의 전체 삶을 인도하고 조율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선생이 되게 한다.” 이러한 중생한 자들을 위한 율법의 계속적인 효력에 대한 부써의 적극적인 입장은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불완전한 행위조차도 완전하게 받아 주시는 분이라는 확신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리스도의영으로 감화를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진정한 구원과 의로 나아갈 수 없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영이 “양자의 영(spiritus adoptionis)”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율법의 칭의(iustificatio legis, 율법을 통해서 칭의에 이르게 되는 지식을 얻음)”도 없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영이 “진정한 의를 계시하는 영(spiritus verae iustitiae)”이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성도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영이 “자유의 영(spiritus libertatis)”이기 때문이다. 율법 자체(lex per se)가 사람들을 깨닫게 해서 회개함(agere poenitentiam)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부써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의 조명함이 없으면 회개는 단순히 열매 없는 “사건(occasio)”에 불과함을 지적한다.
부써는율법은 “경건과 의의 교리(doctrina pietatis atque iustitiae),” 십계명을 “경건의 완전한 교리(doctrinam pietatis perfectam)”라고 부른다. 부써의 율법 이해에 나타나는 가장 현저한 특징은 그가 이신칭의의 교리를 다루면서 발전시킨 하나님의 의의 교통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율법의 규범적 용법을 설명한다는 것이다. 부써는 lex accusans와 lex vivendi 가운데 어느 것을 특정해서 강조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감화 받은 사람에게 율법은 이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나타내서 “죄를 더하게 하고, 소멸시키고, 저주하며(peccatum augere, occidere, condemnare)” “살리고, 지혜를 전하고, 회복하고, 조명해서(vivificare, praestare sapientiam, restituere, illuminare)” 우리가 하나님의 의의 완전함, 즉 영원한 하늘나라의 삶에 이르게 한다.
III. 칼빈의 기독론적 율법 이해
1.Lex Dei Regula Vivendi: 율법의 규범적 본질(natura)에 대한 칼빈의 이해
칼빈에의하면 하나님의 법은 경건하고 의로운 삶의 규범과 모세법이 기반하고 있는 종교의 형식(forma religionis), 즉 아브라함의 씨앗들과 맺은 은혜 언약(foedus gratuitum)을 포함한다 (Inst 2.7.1, CO 2.252). 십계명은 “경건과 의의 완전한 가르침”을 세상에 공포한 것이다.
본래(originaliter)율법은 선하고 완전한 것이었으나 범죄로 인하여 “우연히(accidentale) 죽음의 사자(ministram mortis)가 되었다.” 죄가 세상에 들어 옴으로써 비록 lex vivendi로서 율법의 본질(natura)은 변한 것이 없으나 율법의 사역(officium)은 변형되어서 이제 규범적인 역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는 신학적인 역할까지 감당하게 되었다.
그의작품들을 통해서 칼빈은 율법의 규범적이고 신학적인 사역과용법에 대해서 균형 잡힌 입장을 견지한다. 그는 전체 율법을 “삶의 규범”으로서만 파악해서 신학적인 용법을 무시하는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반박한다 (Inst 2.5.7, CO 2.235). 칼빈은 그들이 사람들의 악한 욕망과 정욕을 억제하는 굴레로서 작용하는 “율법의 자연적인 용법(l’usage naturel)”에만 집착해 있다고 비난한다.
칼빈에의하면 죄인들을 변화시켜 중생에 이르게 하는 율법의 신학적인 용법은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목적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Inst. 1.15.1-8, CO 2.134-143). 비록 율법의 조건성(conditionality)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극복되었다고 하더라도, 율법은 선과 악을 구별하는 기준으로서 고유한 기능(lex vivendi)을 계속해서 감당한다.
비록율법이 값없이 죄인들을 자녀 삼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고 구원이 하나님의 자비를 통해서만 온다고 가르치며 사람들이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게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일정한 조건하에서만 이루어 가는(sub conditione paciscitur) 고유한 기능을 계속한다.
이인용문에서 칼빈은 “conditio”라는 단어를 선행의 공로(meritum)와 연관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약 가운데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율법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conditio”라는 단어는 삶의 규범(lex vivendi)인 율법이 lex accusans로서 사람들에게 “경외감과 두려워 하는 마음(reverentia et timor)”을 일으켜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게 하는 신학적인 작용을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율법은우리가 할 수 있는 것(quid possint hominess)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것(quid debeant)을 계시한다. 1536년 기독교 강요에서 언급하듯이, “율법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이다(in lege Dei non opus respiciendum, sed mandatum)” (1.28, CO 1.46). 율법은 “우리의 힘과 능력과 역량이 아니라 우리의 의무”를 규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맞추신 의가 아니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맞추어 주신 의(iustitia accommodata)이다. 율법은 사람들이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의지와 더불어 율법의 수여자의 “영원성, 능력, 지혜, 선, 진리, 의, 자비”를 계시한다 (1536 Inst. 1.1, CO 1.27). 율법의 두 측면—명령과 약속—은 율법이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영원한 뜻을 계시한다는 사실에서 가장 현저하게 드러난다. 칼빈은 그의 첫 번째 <신앙교육서> (Catechismus)에서 “하나님의 법에 주님의 영원한 의지라고 부르기에 지극히 합당한 모든 의를 드러내는 가장 완전한 법칙(perfectissima totius iustitiae regula)이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율법은 “진정한 의에 이르는 예비 과정(tirocinium)”이 아니라 “의의 시작(initium)”이다. 율법의 의는 하나님의 “고도한 의(iustice plus haute)”와는 구별된다. 율법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비밀스런 섭리를 계시하지는 않지만, 칭의와 성화를 통한 하나님의 이중적인 의를 지시한다. 칭의와 관련해서, 율법의 의는 중보자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된 하나님의 영원한 의를 계시함으로써 믿음의 의에 사람들이 이르게끔 한다. 성화와 관련해서, 율법의 의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와 계속적으로 교통함으로써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서 살아가야 하고 살아갈 수 있음을 계시한다.
2. 율법의 사역과 용법
칼빈은그의 작품들을 통하여서 종종 lex accusans와 lex vivendi로 표현되는 율법의 이중적인 사역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러나 lex accusans를 lex vivendi의 결과물로 본다. 이러한 입장이 1559년 기독교 강요에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서 진정한 경건의 도(vera pietatis ratio)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에 자신들이 무능함을 알게 됨으로써 극심한 심판의 공포 속에서 자신들이 비자발적으로(subactos), 그러나 불가피하게(invite), 중보자에게로 이끌려 감을 깨닫게 되었다” (Inst. 2:8:1, CO 2.266). Sermon de la justification라 불리는 창세기 설교의 한 부분에서 칼빈은 율법의 정죄적인(punitive) 용법을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경건한 삶의 규범을 가르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공표하시는 것으로 파악한다.
율법은항상 lex vivendi로서 작용한다. 심지어 lex accusans로서 작용할 때에도 lex vivendi의 기능은 멈추지 않는다. 그러므로 율법은 항상 교육적인(pedagogical) 역할을 감당한다.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의 길”을 가르친다 (Inst. 1.6.2, CO 2.54). 율법을 통하여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고 (Inst. 1.9.3, CO 2.71),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으려고 노력한다 (Inst. 2.12.4, CO 2.342). 율법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니는 고유한 학교(peculiarem scholam)” (Inst. 1.6.4, CO 2.55)이며 “그리스도는 영혼의 교장(interior magister)” (Inst. 3.1.4, CO 2.397)이시다.
그러므로칼빈이 신명기 5장 2절 주석에서 말하듯이, 율법의 가르침(paedagogia)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으로 받아야 하며, 가장 높은 영광을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언약에 올려 드려야 한다.” 한편 동일한 구절에 대한 루터의 견해는 칼빈의 견해와 판이하게 다르다. 그는 호렙산 언약을 율법의 언약으로 보고, “새 언약(은혜 언약)은 우리의 행위와는 무관하게 전적으로 자비롭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고 있으나, 옛 언약(율법언약)은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우리의 행위에도 동시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세는 사람들이 지킬 수 있는 율례와 감당할 수 있는 심판의 범위를 넘어서는 약속을 하지는 않는다.” 칼빈이 은혜 언약적인 관점에서 율법의 규범적인 본질을 이해하고 이로부터 율법의 은혜를 강조한다면, 루터는 율법의 의를 행위의 의와 동일시 하면서 율법의 본질(the nature of the law)을 기본적으로 죄에 대한 비난과 저주로서 작용하는 자연법의 본질(the nature of natural law)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루터와 칼빈이 모두 바울의 신학에 충실했지만 그들의 차이는 “암시적(暗示的, connotative)”이라기 보다 “지시적(指示的, denotive)”이며, “의미론적(semantic)”이라기 보다 “신학적(theological)”이다.
율법에는인간의 죄성과 사악함을 폭로하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율법은 율법의 본래의 본질을 회복하는 적극적인 목적으로 사용된다. 마치 복음이 우연히(per accidens) 죽음의 사건(occasio)이 되기도 하나 그것이 죽음의 이유(causa)나 실체(materia)가 아니듯이, 율법도 그렇다. 비록 죽음이 “율법을 틈 타서(occasione) 죄에 의해서 들어 오지만” 율법은 “죽음의 실체(mortis materiam)”가 아니다. “올바르게 살아 가는 삶의 길(via recte vivendi)”로서 율법의 원래의 본질은 거룩하고 선하며 정직한 것이기 때문에 lex accusans로서의 사역은 우연하고(accidental) 우발적인(occasional) 것이다.
따라서율법은 중생한 사람들을 위한 용법(usus in renatis)으로 더욱 본질적으로 신학적 작용을 한다.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율법은 가르치는 사역(doctrina)과 권고(勸告)하는 사역(exhortatio)을 감당한다. 가르치는 사역으로서 율법은 거듭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규율을 알려서 그들이 “주님의 의지(Domini voluntas)를 좀 더 순수하게 알아 가는 날마다의 진보가 있도록 하는” 역할을 계속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의지를 알아 가고 “그 의지에 순응하고 적응해 가는(componat et accommodet)” 과정을 말한다. 이것은 로마서 7장 21-23절 주석에서 칼빈이 “하나님의 법”과 “마음의 법”이라고 정의한 것에 부합한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삶을 바르게 형성(形成)시켜 가는 의의 규범”이며, “마음의 법”은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려고 준비하는 것” 곧 “하나님의 법에 순응하는 것”이다.
권고의사역은 지식적(noetic) 교훈을 주는 수준을 넘어선다; 그것의 작용은 오히려 의지적(volitional)이다. 율법은 “성도들이 그것을 수시로 묵상함으로써 순종에 이르게끔 경성하게 하고(excitetur) 그 안에 더욱 굳건하게 서게 하며(roboretur) 배도(背道)한 반역의 길로부터 돌이키게 한다(retrahatur).” 율법의 명령(praeceptum)은 은혜의 약속(promissio)과 함께 주신 것이라는 것을 성령의 감화에 의해서 깨닫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의지에 맞추어서 자신들도 살아가고자 결단한다.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율법이 계시하는 약속은 성도들이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중보자 그리스도가 여전히 활동하신다는 것이다(Inst. 2.7.12, CO 2.261-262).
아래에언급하는 바와 같이 칼빈에게 있어서 율법의 권고는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중보에 의해서 우리에게 작용한다.
그리스도의영에 의해서 거듭난 사람들은 율법을 완성한다고 이해하는 해석자들은 바울이 의미하는 바와는 전혀 동 떨어진 잘못된 견해를 퍼뜨리는 사람들이다. 세상에 머물고 있는 한, 성도들은 율법의 의(iustificatio legis)가 그들 속에 가득해서 완성될 만큼의 진보를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죄사함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순종의 공로가 우리에게 나누어 질 때 율법의 의가 충족되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우리가 의롭다 칭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율법이 요구하는 완전함(perfectio)이 우리의 육체에 나타났는데, 이는 이런 엄격한 요구가 더 이상 우리를 저주하는 힘을 가지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의 띠로(spiritus sui vinculo) 자신에게 묶인 사람에게만 자신의 의(iustitiam)를 나누어 주신다. 이와 같이 바울이 중생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죄의 사자(使者, peccati minister)로 여겨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IV.Lex Vivendi로부터 Lex Vivificandi에로
고린도후서3장 17절 주석에서 “그리스도에 의해서 영감을 받는(inspiretur) 한에 있어서 율법은 살아 있으며 살리는(vivam and vivificam) 법이 될 것이다”라고 칼빈은 말한다. 특히 그리스도를 “율법의 영(spiritum eius [legis])”이며 “율법의 생명(legis vita)”이라고 지적한다.
영이모든 인간의 주요한 기능이 발생하는 근원이듯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율법에 생명을 주시고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의 본질이 아니라 그의 은혜와 관련해서 이른바 모든 사람의 보편적인 영이 된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 영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은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어서(vivifica spiritus sui virtute) 우리에게 생기를 주기 때문이다.
본주석에서 그리스도를 율법의 생명이며 영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칼빈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영의 감화로 말미암아 율법은 생의 규범(regula vitae)이자 생명을 살리는 규범(regula vivificandi)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인상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생명을 살리는 율법의 기능은 그리스도는 율법의 “끝(혹은 완성, finem)”으로서 율법의 굴레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켰으며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의 “유일한 목표(scopum)”가 된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설명된다. 본질상 삶의 규범(regula vivendi)인 율법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사람을 살리는 규범 (regula vivificandi)으로서 작용한다. 생명을 살리는 규범적인 본질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왜 그가 제 삼 용법을 “중요하며(praecipuus)” “율법의 고유한 목적에 더욱 가까운(in proprium legis finem propius)” 용법이라고 불렀는지(Inst. 2.7.12, CO 2.261), 그리고 어떻게 그가 동시대 종교개혁자들보다 더욱 본질적·신학적 율법 이해에 이르렀으며 이로써 역동적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Soli Deo Gloria in Aeternum!
[논문 초록]
칼빈의기독론적 율법관은 그가 갈라디아서 3:19를 주석하고 설교하면서 개진한 그리스도가 율법의 중보자(Christus Mediator legis)라는 개념에 기반한 역동적인 율법의 본질 이해로부터 비롯된다. 칼빈은 율법을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regula vivendi pie et iuste)으로 정의한다. 율법의 사역과 용법에 대한 그의 이해는 이러한 본질 이해에 기인한다. 율법은 본질상 그리스도를 표상(repraesentatio)할뿐만 아니라 그의 현재(praesentia)를 계시한다. 그러므로 율법 안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안의 율법을 동시에 읽어야 한다. 동시대 개혁자였던 루터, 멜랑흐톤, 불링거, 부써의 율법관을 고찰함은 칼빈 율법관의 기원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다만 이로써 우리가 이르게 되는 결론은 문자적-역사적-영적인 성경 해석에 기반한 칼빈의 기독론적 율법관의 고유성이 그의 중보자 그리스도론에 배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규명함으로써 단순한 루터란들의 신학의 계승이 아닌 고유한 율법의 사역과 용법에 대한 신학을 전개한 칼빈 이해에 합당하게 이르게 된다.
[핵심어들]
칼빈,율법, 그리스도, 규범
Calvin,Law, Christ,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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