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하나님의 복음의 세계화
소실과 전진의 역사가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을 이끌어 나가는데 있어 세계화(세계 복음화) 의 계획과 그 목적을 가지셨다. 그것은 구약 이스라엘과 신약 교회를 통한 온 세상 만민 구원이다. 구약 이스라엘과 신약 교회를 택하여 복음의 세계화에 도구로 삼으셨다.
그런데, 성경의 구속사적 맥락이 이스라엘과 교회라고 했을 때, 우리는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왜 구약 이스라엘이 역사를 뒤로 하고 지평 저 너머 사라졌는가? 이에 평형과 상응 관계인 지역교회가 역사를 뒤로 하고 지평 저 너머 사라져야 하는가? 이것은 많은 회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그 대답은 복음의 세계화에서 이스라엘이 지평 저 너머 사라짐과 같이 지역교회도 사라질 때, 복음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된다는 것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것은 이스라엘과 교회의 소실과 전진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2.에덴에서 우르까지
인간의 이동 역사가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기 전에 인류(인간) 의 4가지 기본 사건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창 1-2), 인간의 타락(3-5), 대홍수 사건(6-9), 그리고 이어 민족들(10-12)의 대이동의 역사가 인류 복음화(세계화)에 필연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성경은 인류의 이동 역사이며 이를 통하여 세계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에덴에서 인간의 죄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는 저주와 축복이라는 이중 장치에 걸려 있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범죄로 인한 인간의 저주를 어느 한 부분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추적하신다. 시간의 극히 작은 부분, 지리적 가파른 협곡, 아직도 문명의 후미지고 덜 깬 오지의 족속들, 이를테면, 브라질 카나마리 인디안들 (Kanamari Indians 꾸부러지고 깊숙이 멀리 떨어진 땅, 구비 친 이타쿠아이[Itaquai]강, 500년간 정복과 질병 또 유린되기 쉬운 아마존 지역, 35만 명 정도)과 같은 숨겨진 종족들, 그리고 비록 문자가 없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까지 철저히 축복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온 세계이며, 성경은 전 인류가 그 내용의 중심이다. 모든 역사적 혼란, 노정, 심판, 그리고 징벌을 통한 화해의 목적을 가진 하나님의 역사가 성경 말씀의 중심 주제이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믿으면 좋고 , 그렇지 않을 때 논리적인 설명은 가능하지만 이해시키기는 어렵다. 사실, 이해는 그 사람의 몫이다. 언젠가 내가 쓴 『정당한 성경연구를 위한 방법론』 에서 이미 밝혔듯이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천지창조(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설명하여 이해를 시키며 더욱 설득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천지창조에서, 6일 창조의 원리와 구체적인 시간의 배열, 인간의 타락과 죄의 기원, 그리고 인간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방도 등이 소상하게 나타나 있다.
3.하나님의 세계화의 통일 체계인 메시아 혈통
하나님의 세계화의 발단은 이스라엘의 전(前)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전조(前兆)로 그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인간의 범죄와 타락 배후에 하나님의 구원의 길인, “메시아 혈통”(Messiah line)이 세계화의 통일 체계에 확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택한 백성보다 사람이라는 역사 배후에 하나님의 주권, 선택, 그리고 언약이라는 구원의 길이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의 세계화의 발단 역사를 보면, 창세기 2:8에,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라고 했다.
“창설”은 일종의 설비(設備)로 사람이 살 수 있는 거주지 건설의 의미뿐만 아니라 “동방에”라는 위치와 방향을 선정했다(창세기 2:8 또는 2:10 이하의 에덴 위치는 별개의 전승을 나타낼 이유는 없다.) 에덴은 실재하는 땅이지만 많은 흥미를 가진 자들의 지역관찰에 의하여 여기저기 있다 할지라도 나아가 레지널드 아서 워커(Reginald Arthur Walker, 1917-1989)처럼 그의 소논문에서 에덴이 지금의 아르메니아(Armenia)라고 할지라도 상관없다. 그렇게 실재하는 지리적 의미나 내용적 의미도 가나안처럼 철저히 소실되었다.
그 이유는 타락한 인간이 에덴을 떠남으로 인류 최초의 이동과 정착이 시작되었으며, 그 내용은 타락과 홍수 그리고 바벨탑 사건에서 명백해진다. 하나님의 의도는 비록 인간이 불순종함에도 불구하고 저주속의 축복이라는 이중구조를 통하여 온 세계에 확장된 것은 역시 땅 끝 구원의 언약에서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타락은 자손에 대한 언약으로(창3:15), 홍수 사건은 셈의 장막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으로(창9;25-27), 그리고 바벨탑 사건의 종족 분산은 세계라는 축복의 언약으로 확대된 것이다(창12:1-3).
그래서 인간은 철저한 타락으로 하나님 앞에 섬과 동시에 종족 발달과 더불어 세계 인류 (국가, 사회) 와 문화 발전이라는 막중한 책임 앞에 서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유전적인(遺傳, 조상의 특질이 자녀에게 이르는) 저주보다 훨씬 더 많은 생명 구원 의 축복을 받게 되었다. 인류는 아담으로부터 순례자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자손들이 땅 끝을 향하여 이동할 때마다 그들 앞에 보이는 지평은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으로 빛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지리적 에덴은 아담의 범죄로 쫓겨났지만 하나님은 얼마든지 인간을 에덴에 계속 머물게 할 수 있었다. 인간을 에덴에 내쫓은 이유는 결과적으로 온 지면에 인류가 퍼짐으로 만민구원의 한 가지 방도를 이미 영원 속에서 작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구애를 받지 않으신다. 단지 인간의 자유의지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 하나님은 단 시간 내에 인류 구원이라는 자신의 의도를 성취하실 수 있지만 에덴을 출발점으로 하여 먼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지리, 종족, 언어, 그리고 문화의 확장으로 자신의 의도를 성취하신다.
영국 시인 밀턴(John Milton 1608-1674) 이 쓴 「실낙원」 (Paradise Lost)을 보면, 이야기는 창세기를 소재로 한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낙원 추방을 묘사하고 있다. 사탄과 그 무리들에 대하여, 낙원의 축복과 천지창조에 대한 천사 라파엘에 대하여, 타락 후 아담과 하와 나아가 사탄에게 찾아온 저주와 고통에 대하여, 그리고 인류 역사와 구원의 희망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서사시적(敍事詩的) 고전문학 형식으로 인간의 원죄(原罪)와 구원의 가능성을 성공적으로 융합한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실낙원』의 주제가 사탄의 유혹에 패배한 아담과 하와의 낙원 상실이라면, 『복낙원』(Paradise Regained)은 둘째 아담으로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의 유혹을 이기고 인류에게 상실된 낙원을 회복시켜준다는 주제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실낙원을 한 청년의 “낙원 발견”을 주제로 한 속편을 써달라는 요청으로 1665-66년경에 씌어 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 밖의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접근 방식 중 하나일지 모르나 상실된 지리적 에덴은 절대로 회복되지 않는다. 또 상실된 지리적 가나안도 절대로 회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설하신 에덴의 본질이 불완전하다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역사는 에덴을 뒤로 한 체 메시아 라인의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미래와 장소이다. 그래서 복낙원의 의미도 시험에서 이기신 그리스도께 있다.
4.자손의 진보와 세계화
결국 땅은 인간 타락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인류는 땅과 문화적 진보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 월터 카이저(Walter C. Kaiser; 구약신학에 대하여: “제5장 족장시대 이전”)의 말대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을 향한 지시가 있기 전, 시대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선택한 것은 복의 방편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한 그 자손의 진보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세계화의 계획임에는 틀림없다.
에덴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인류 최초의 살인은 망명자(亡命者)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고 결국, 가인이 제일 먼저 망명한 곳이 에덴 동편 놋(Nod) 땅인데, 고대 중동연구 학자인 데이비드 로블(David Robl) 은 그의 책, 『문명의 창세기』 에서, 놋 땅은 오늘 날 엘부르즈(Elburz) 산맥 서쪽, 아르데빌 시 주변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르데빌 북쪽에 노크디(Nokdi)라는 마을이 있는데, 언어학적으로 노크드(Nokd) 라는 단어 어미에 -i를 붙이면 아랍어로 “소속”, 즉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역시 터키어도 아랍어의 영향으로 어미에 -i를 붙이면 형용사가 되어 “포함된”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래서 가인이 쫓겨난 지역을 이곳, 카스피 해 주변 아르데빌의 노크디로 추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존 스키너는 “망명”에 대하여 이렇게 반론한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창 4:16)에서, 동사 “거주하다”는 방랑생활과 꼭 일치하지 않는다(창 13:12, 5:10 등)고 한다. 이것은 “방랑하는 땅”이라는 지리적인 확인을 할 수 없다는데 의견을 모은다. 우리는 13절 이하에서,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가인의 이름이 집단 어의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마지막 구절들에 터치한 어느 서술이든 삭막한 사막의 삶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의 자손들의 타고난 현실은 도시화의 한계를 넘어 개간하지 아니한 지역을 떠돌아다니는 불운한 것이었다고 한다.
가인 형벌의 완화에 대한 연구는 더욱 필요하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4:13) 라는 가인의 탄원은 모든 현대적 판례(判例)로 보아 다소 이해가 되어 진다. 이것은 죄의 용서를 바라는 의미이다. 가인의 고뇌에 찬 이 울부짖음은 흔히 있는, 자의로 동정심을 불러일으킴을 얻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mark)를 주셨는데, 혹자는 손목의 상처라고 하지만 어떤 것인지 잘 알 길이 없고 단지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의 목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 후, 비로소 가인이 한 도시를 건설하게 된다. 그 도시의 이름은 그의 아들의 이름대로 에녹이라 했다. 비록 이것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인류 최초의 도시로 이스라엘의 여리고나 터키의 차탈효육(Catal Hoyuk)이나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도시보다 먼저 건설된 것이다.
여기서부터 정착된 삶을 영위하며 그의 계보가 형성된다. 예외적인 것은 전체 문장 구성으로 볼 때, 이해력이 있는 저자가 17절 하반절로부터 계보를 첨가함으로써 가인의 계보는 방랑자도 형제 살해자도 아니다. 그리고 가축을 사육하기 전에는 도시건설을 하지 않았다고 본다. 하지만 페니키안(Poenician) 전설은 시대착오가 많고 그들은 고대 계보 학자들의 추리력에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5.가인의 계보
가인의 계보를 따라 에녹의 4대 후손인 라멕에 이르러 인류 문명이 시작되었다. 이 계보의 논지는 세계의 제2세대를 처음 경험하게 되는 세 가지 지류가 나눠진다. 그 세 아들이 영구적으로 사회 문화의 세 구분을 나타낸다고 보며, 세 사람의 양식은 계보 저자들에 대한 특별 관심을 가지게 된다. 아다의 아들, 야발은 장막에 거하며 가축을 치는 유목민의 조상이 된다. 이것은 종족적이기 보다 목축의 성격을 의미한다.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사람의 조상이 된다. 인간 존재의 선명한 측면을 드러내는 이 두 직업은 음악과 함께 고전적인 양치기와 관련됨을 상기시키는 그 어머니 아다에 있다. 그와 동시에 연상되는 것은 잘 알 수 없는 실라의 자녀들인, 금속 세공인, 두발가인과 나아마(Naamah; 히브리어 성경 “naim”에서 나왔고, 의미는 “아름다운”으로 “덕성의 성격”[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 또 이방종교를 노래함)의 결합이다(그리스 신화;Hephestos와 Aphrodite -사랑과 미의 여신과 일치?). 우리는 그가 놋쇠와 철을 세공하는 모든 기술자의 조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라멕이 살인을 한다. 그 내용은 어린 소년을 죽인 것이다. 그 죄 가가 무거운 것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 시(詩)는 살아 있듯 맹렬한 앙심 깊은 복수심이 베두인들(Bedouin; 아랍의 badw بَدْو 에 badawī بَدَوِي의 복수, 사막에 거주는 아랍 종족) 관례의 주요부분 형식을 갖추고 있다. 두발가인에 의한 무기 발명품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거의 보편적으로 꾸민 목자(Herder) 라는 뜻일 것이며, 따라서 라멕의 “살육 노래” 때문에 말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노래의 내용은 그런 근거를 암시해 주지 않으며 이 견해는 모호한 계보와 관련하여 말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더 이상 말할 가치가 없다. 라멕의 고대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써 자주적으로 연구의 필요성은 계보 속에 있으며 다소 중요한 것을 공급해준다.
일반적으로 라멕의 뜻은 적에 속해 있는 어떤 종족의 남자나 소년을 죽임으로 하찮은 신체 상해의 앙갚음일 수도 있다. 양쪽 가족 간의 법칙에서 폭행 현행범은 아니지만, 같은 종류의 범죄가 아니라는데 있다. 만일 라멕이 그가 받았던 손상에 어울리게 피해자(희생용)로 발탁된 것이라면, 대구법은 문자 그대로 취할 수 없을 것이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4:23-24).
이 노래는 계보와 함께 두 가지 쟁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두 아내의 이름과 가인에 대하여 넌지시 가리키고 있다. 언급된 가인의 양보 없는 복수는 잘 알려진 당대의 부족과 서로 겨루어야만 했을 것이다.
6.셋의 계보
셋의 계보가 단편적으로 나타난다(창4:25-6). 이어 5장에서 셋의 계보에 대한 서론이 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 5:2).
여기서 인간은 하나님의 대면자로서 축복을 받은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창1:26,27)과 모양을 닮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윤리적인 의미 보다는 인간의 경이로운 신체구조에서 영육간의 합치된 전적인 인간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에 있어 하나님의 형상이 먼저 있었고 이 형상이 창조로 옮겨져 공간과 시간 속에 들어왔을 때 형상은 모양 화된 것이다. 인류는 그 창조의 때에 있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것으로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근거가 된다(창9:6).
아담이 셋을 낳아 자신을 닮은 모양의 인간이 태어났다. 인간은 그 부모를 닮게끔 되어 있다. 그러나 형상은 항상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은 원래 무형의 존재이지만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유형적이며 영적인 존재로 나타나는데, 이 내용은 히브리 성경의 어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 “젤렘 엘로힘”으로 표현했고 하나님의 모양을 “테무드”라고 했다. 전자는 실체를 닮은 모습을 말하며, 후자는 모습을 닮은 존재를 말한다.
창세기 5장에 아담과 노아의 족보가 있고 누가복음 3장에 예수와 아담의 족보가 있다. 이것은 한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져 있으며 아담의 모양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출생된 셋의 족보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땅 위의 풍요와 다산이었다. 홍수 이후에도 이 축복은 계속되었다. 하나님의 축복은 구원의 상징이다. 홍수 이전의 족장들, 즉 아담을 통한 셋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창조(1:1-2:4a)와 노아 홍수(6:9ff.) 사이의 간격은 1,656년에 걸쳐 그 연대학적 시대의 확정된 지속 기간이 이 열 족장의 명단에 연결되어 있다. 역시 첫 아이 출생, 지내며 산 잔류기간, 그리고 죽은 해를 통하여 연대 측정은 별로 어렵지 않다(Jack Finegan’ Handbook of Biblical Chronology, p.195, TABLE 참고). 이 계통(lineage)의 목적은 역시 때가 흐름으로 역사적 으뜸 시대에 지속적으로 이런 특수성에 의하여 이 세상의 인구가 증가할 것을 묘사하고 있으며, 그것은 오랜 기간 동안 히브리인들의 본원적인 시간 개념에서 널리 알려진 요소였다. 창세기 5:6-20의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그리고 야렛의 구분은 엄밀하게 규칙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 연대와 성경의 역사 계보와 연대를 앎으로써 메시아의 구원 계통(창3:15)과 전 인류의 배교시대(창 6:1-12;11:1-9)를 통하여 하나님 구속 계획 실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짐으로 현실과 종말 구원에 이르는(예수 그리스도) 신앙을 가지는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