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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기독교 논증신학

조직신학

by 김경호 진실 2016. 3. 9.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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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강 기독교 논증신학
최정호 목사
   
 

1. 논객논파

먼저, 이 논증신학의 강의를 쓰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자가당착일지 모르지만 한국교회 부흥 제1세대라고 할까?! 출발은 좋았는데 어느 시점에 와보니 하나님의 계산법에 전혀 맞지 않아 추락하는 자들이 너무 많아졌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다시는 이런 길을 가지 말아야 한다는 진심어린 부탁으로 제3강에서 논증신학을 논파한다. 내가 걸어온 길이 실패라고 생각되었던 때도 있다. 하지만 참 다행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일찍이 나에게 내로라!” 하는 인기도 주지 않으셨고, 또 나 스스로 그 인기에 메이지도 않았다. 나중에 한 테마로 접근하여 강의하겠지만 기독교 안에도 많은 마술들이 성행해왔고, 거기에 편승하여 잘 하면 성공한다.”는 자본주의 대열에 끼어들만한 인물도 못되었다. 측근 중 누군가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또 알아달라고 자기 여론형성도 못하는 사람 누가 알아주겠는가?!”라고 한다.

목회를 뒤로 한 채 언덕 저 넘어를 바라보는 나이에 객관의 눈으로도 별 볼일 없고, 또 어느 한 곳 설 자리가 없음에도 가고 올 곳이 있어 이곳, 이스탄불까지 다시 돌아오게 하신 우리 주님께 감사드린다. 이상하게도 어느 한곳이 멀어지면서 이곳 이스탄불 Göktürk 동네가 고향처럼 느껴진다. 오늘도 Nero Cafe Academy는 나를 반긴다. 도중 길목에서 언젠가 부터 인사를 건너는 현지인들도 있다. 나는 고백한다. 사람 변화에 성공이라 생각했지만 많은 착각을 낳기도 했다. 해악이다. 내가 설교하면, 그들이 변화될 것이라는 착각 후에 깨달은 것은 나는 절대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이는 목사의 강단은 모두 하나님의 음성이다.”고한다. 나도 이러면 좋겠는데, 이런 말은 나와 맞지 않다.

교회도 추세가 있다. 한때, “제자훈련이라는 명분을 걸고 나온 큰 형님이 많은 잔챙이들 앞에 나타났다. 이것은 시대의 흐름이었고, 마치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보다 제자훈련이 신적 존재인 듯 보였다. 그런데 그 큰 형님도 별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 제자 훈련이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장담했지만 큰 실수만 남겨졌다. 절대 교육으로도 훈련으로도 사람 변화를 시킬 수 없다. 물질은 자기 원소 그대로를 지탱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본성의 불변성이라고 한다.

연금술은 과학이 아니라 미신 또는 마술이다. 고대부터 원소 변환설로 일반 금속을 금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역사 속에서 한 번도 그 뜻을 이룬 적이 없다. 결국 연금술은 화학 개념에서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연금술이 가지고 있는 진짜 의미는 납을 금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무지몽매한 수준의 인간을 금 같은 고귀한 존재나 신으로 승화시키는 의미로 이해시키려 한다. 그러나 물질의 원소는 절대로 변하지 않으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이 신성한 의미도 불발탄이 되고 말았다.

세상에서 개체의 물질은 자신을 그대로 지탱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만약 이것이 저것이 되고 저것이 또 다른 이것이 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뒤죽박죽이 될까?! 전적 타락한 인간의 속성도 이와 마찬가지다. 개인의 본성은 절대로 바꿔지지 않는다. 교육으로도 훈련으로도 말이다. 하나님의 교육적 방도인 죽음만이 이것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한 축복의 죽음을 주셨다. 결국, 변화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백기를 들고 항복할 그 때에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 남는 것은 없고 결국 하나님과의 본질적인 관계만 남는데, 이것도 죽어봐야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나의 자신에 관한한 참 다행인 것은 아무 것도 아님에도 하나님은 나에게 이 세상의 더 없는 은총을 주셨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다. 이것은 명문에서 배운 것도 아니고 나의 삶의 신학이다. 그래서 나는 마당 신학자이다. 과거 신-정통(Neo-Orthodox)과 개혁주의 Seminary에서, 배운 것은 나-자신의 입장이지만 받아쓰기에 불과했다. 지금은 나의 아폴로기아 논객 아카데미(Apologia Polemic Academy)에서 논증신학을 다듬고 있다.

나의 제1신학 방법론인 기독교 시간철학은 신-정통주의나 개혁주의 신학의 커리큘럼에도 없었는데, 1982년 여름, 나의 제자, Dr. TS. Hah 로부터 기독교 시간철학을 사사 받았고, 여기서 신구약 원근법의 적용을 알게 되었다. 나는 기독교에 관한한 자칭 논객(論客)이다. 그래서 말도 많아졌다. 그것도 세상 말이 아닌 기독교 성경에 관한 말이기에 더욱 그렇다.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성경 대하여 서슴없이 말한다. 바른 성경해석일 때, 논객의 사명을 다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신구약 성경의 바른 해석은 먼저 전체적인 내러티브(Nar·ra·tive) 구성이다. 이것을 종합적(synthetical)이라 하고, 한 마디로 신구약 성경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방법론이다. 이어 각 내용의 태마와 장르 연구인데, 이것을 분석적(analytical)이라고 한다. 이미 나는 신약성경의 역사서인 사도행전을 내러티브로 주석한 적이 있다.

하나님에 관한 불가지론()이나 이방 종교인은 물론 하나님의 은총 아래 산다는 교회 안까지 논증방식을 통하여 변증법으로 좀 더 다가가고 싶다. ‘어떻게 성경대로 하나님을 말하며, 어떻게 성경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을 것인가?’ 우리의 사명과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행하며 그리고 바로 말 증거 하는 데 있다. 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서 신조나 교리 그리고 여러 신학사조가 정립되어 왔지만 아직도 그 방법대로라면 더 나은 논증방식이 필요할 것 같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의 증거방식이다. 강론이나 증거는 말하는 이의 청중 설득이나 설복이 아니며 나아가 감동이나 감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론은 이미 칼뱅(John Calvin)이 했던 말이다(The Biblical Preaching of John Calvin The context of Calvin’s preachingby Steven Lawson). 주로 말하는 이가 성경의 역사성(Text & Context or Narrative)을 배제하고 막 바로 교훈적인 의미를 적용하여 말할 때, 일방적인 자기 창작에 빠지기 쉽다. 또 말하는 자는 그 주제에 관한 한 청중의 동의와 반론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 말하는 이의 선행 조건은 성경의 역사성과 맞는 논리성이다.

기독교 강론이나 증거가 논증법일 때, 그 내용에서 진정성이 있다. 칼뱅은 논증 (논쟁) 설교의 부흥(Revival of Controversial Preaching)을 강조했다. J.그레샴 메이천(J. Gresham Machen)모든 참 부흥은 논쟁(반대 방향으로 전환)에서 태어나, 더 큰 논쟁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개혁은 딴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런 것이다.

논증은 입증이라 하고, 어떤 판단이 진리라고 그 이유를 밝힐 때 논증한다.”고 한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헛소리다. 논증은 논거를 전제로 하며, 제제 형식으로 진행된다. 논증의 궁극적인 논거가 되는 판단을 공리(公理)라 하고, 그것으로 이유가 주어진 제제를 정리(定理)라고 한다.

 

 

 

2.논증법

논증은 반론을 전제로 한 논법이다. 이것은 명확한 진리 이해와 반대주장의 잘 못을 확증하는데 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신학에 관한 논증을 논증신학(polemic theology)이라 하고 대부분 이를 참된 논거(論據)의 논제들에 대한 논증으로 생각한다. 학문이나 입론(立論)과 같은 실제를 논증법이라고 한다. “논증적으로(po·lemi·cal·ly)라는 말은 때로 논증을 좋아하는 사람, 논객이나 또는 논증가를 말한다. "polemic"은 그리스어 폴레미코(πολεμικός)에서 유래되었으며, 폴레모스(πόλεμος)는 전쟁에서 유래된 도전 또는 반대라는 뜻이다.

논증법이란 가장 중요한 주장 형식 가운데 으뜸이다. 논쟁과 비슷한 논증법은 명확한 논쟁의 논제에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두 반론 사이에 공통의견을 얻으려고 고려해도 좋다는 것은 논증에 어울리지 않으며, 단지 논쟁의 반대 관점을 논박할 때, 관점의 진실을 확고히 굳히려는 의도에만 국한된 것이다. 철학 용어를 빌리자면, 이것은 판단중지(Epoché; ἐποχή, 고대 그리스 철학) 삼가다, 멈추다에서 유래, 어떤 반론도 제기 못하는 판단중지 선언의 에포케 에 가깝다. 성경 말씀의 전제가 진리면, 상대방이 이해 불충분할지라도 그 선-전제에 어떤 이의도 제시할 수 없도록 판단중지를 거는 것을 말한다. 가장 적합한 용어는 철학에서 따온 기독교 전제주의 논증(Pre- suppositional Arguments) 방식이다. 전제주의 논증의 대가인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과 고든 하든 클라(Gordon Haddon Clark)의 서로 다른 전제주의 논증, 철학적 전제주의냐 아니냐는 철학적 유신 논증에 있어 전제주의 논증은 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기본 신앙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전제 조건으로서 하나님(God as a necessary precondition)을 요구하는 논증이라고 한다.

사실, 바른 철학은 바른 신학 앞에서 겸손하다. 신학이 엉뚱한 짓을 할 때, 철학도 엉뚱한 짓을 한다. 단지 바른 철학은 신학의 방법을 제공할 뿐 그 자체의 의미를 두지 않는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바른 신학이 아닐 때, 잘 못된 철학이 신학의 가면을 쓰고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알기로, 철학은 하나님의 존재 증명외에 기독교 신학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철학이 하나님 존재 증명에 개입할까? 흔히 말하기를, 성경은 하나님 스스로 존재 증명을 하지 않기에 믿음으로만 알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을 피데이즘(Fideism; 종교적 진리는 이성이 아닌, 신앙으로만 파악할 수 있다는 이론)이라 한다. 터틀리안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것이 불합리하기에 믿는다.”Credo quia absurdum (Tertullian's De Carne Christi On the Flesh of Christ)

하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자증(self-evidence)에 근거를 둔 교리를 발견하는데, 단지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하지 않는 어떤 증거도 성경의 신적 권위에 변호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 자신의 논증 능력 그 자체만으로 신적 증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신적 존재 증명의 한 방법론으로서의 논증신학을 채택할 수 있는데, 바로 그것이 전제주의 논증방식이다.

 

 

 

3.논증의 사전적 정의와 필요성

논증법의 사전적 정의는 논쟁으로 남의 잘 못을 논박하거나 지론이나 교리 또는 그와 유사한 조건으로 지정하여 논박하는 것을 말한다. 복합적으로, A. 논쟁의 숙련이나 실재 B. 교리의 잘 못에 대한 신학적 논쟁의 실재이다. 논증법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시대에 이성 만능주의가 실패하고 비합리주의가 현대 후(post-modern)속에 머리를 치켜들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대적 표적이 없는 혼합주의 이며, 그 여파는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과 역사적인 전통교리를 부정하고 상대화하여 그 권위를 떨어뜨렸다.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대개의 사람들은 정의 에 기초하여 부정적인단어들; 논쟁, 논증, 비난, 논박, 교리 등을 싫어한다. 그래서 논증법의 특징은 진리와 거짓이 사실로 존재함을 추정하여 논쟁하는 것이 중요하다.

 

 

 

4.논증신학의 실례

이제 논증신학에 대한 확실한 포착이 필요한 것 같다. 설교법(Didactic)은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개설되었다. B. B. 워필드 (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이 명제를 계속 유지했다. 지지를 받았던 워필드 신학의 대부분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에 채택된 칼뱅주의가 그의 충실한 지지 기반이었다. 한편 그는 모더니즘에 반대하는 그의 전투를 때로는 잊어버리기도 했고, 다른 한편 신앙 부흥운동에도 그는 확신의 입장을 드러낼 때는 반드시 개혁신앙을 짜냈다.

워필드의 확신은 17세기 신앙고백 저자들이 주로 개괄한 성경내용과 적용뿐 아니라 16세기 개혁가들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고명한 학자들이나 일반 신앙 부흥가들 간에 이외의 새로운 사실들이 이런 신앙고백적인 진술들과 상반되는 성경과도 불일치 한 것이었다. 워필드는 그의 사역동안 내내 현대 세계의 사건과 사상이 그렇게 신선한 고백들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마음가짐은 여전히 오늘날도 칼뱅주의를 잘 알고 있는 많은 개혁교회들과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순수 교파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바로 칼뱅주의 때문이다.

마이클 홀톤(Michael Scott Horton)워필트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진리 옹호에, 자유주의자들이나 보수주의자들의 그 자체 인기에 관계없이 이 세기의 죽어가는 유형의 한 표본이 되었다.”고 주장했다(Michael Horton;‘How to Be Polemical [Without Being A Downright Nasty Person]’ Modern Reformation 5, no. 5 [Sept/Oct. 1996]:4).

나아가 홀톤은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경과하여, 물론, 기독교도 로마 가톨릭도 어느 정도 논증가들이 있었지만 나중에 논증법은 단지 신학분과의 별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마침내 그것은 뜻이 맞는 동지들 끼리 포용력을 발휘하여 전부 종적을 감추었다.” 아마 우리들 가운데 기독교 변증법을 단편적으로 공부한 자들이 있지만 논증신학 논증방식 을 배운 사람은 전혀 없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 기독인들이 어떤 실수에도 달리 주장하지 아니하고도 복음을 바로 말할 수 있다고 착안했을까? 그러다 보니 교회의 역사 속에 확실한 것은 성경과 지도자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홀톤은 그 이유를 잘 설명하기를, “교회는 교리 논쟁에서 태어났으며, 교리의 상세한 내용은 수백 년 동안 논증을 통하여 우세한 길을 싸워왔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두 개의 다른 복음 사이의 논쟁이었다. 위대한 각성은 주요부분 논쟁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은총의 논증법적 변호는 인간의 전적 무능이었다. 이를테면, 존 뉴턴(John Henry Newton)은 최상의 놀라운 은총을 우리에게 주지 않았지만 그의 생애에 율법주의에 대한 논증법적인 공격을 했다.

루터와 칼뱅은 로마교회에 대항하여 최상의 격양된 논증법을 저술하지 않았지만, 오늘 날 우리에게 오순절파로 알려진 광신자들을 대항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우리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논증법을 어떤 입장에서 살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안파(Arians)에 의하여 불화를 일으키는 자로 비난을 받고 있다. 이레니우스(Irenaeus)가 교회 밖으로 그노시스파를 내 몰 때 극한 인내로 진리를 선취한 것에 대하여 정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로저 R. 니콜(Roger R. Nicole)논증신학은 역사에 애정 깊은 신학상의 논법 또는 기독교적 사건들에 대한 전면적인 처리 분과라고 했다(우리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방법). 또 그것은 신앙지식의 변호라는 변증법과 차이를 드러낸다고 했다. 마틴 루터의 자유의지의 노예에 대하여가 논증신학의 한 실례이다. 그것은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자유의지(De libero arbitrio diatribe sive collatio)에 대한 논증 제목의 대처 로 기록된 것이다.

 

 

 

 

5.서로 다른 의견 타협방법

로저 R. 니콜은 기독교가 일반적으로 논증법 보다 세계교회주의(Ecumenism)에 더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지금에 와서 이처럼 논증신학을 말한다는 것은 좀 생소하고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논증신학을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반론자들을 이기려는 여러 상황을 다루는데 아직도 미숙한 점이 많다. 그리스도인들 스스로가 트집을 잡기도하고, 또 사람에 따라 당당하게 성경의 중요한 규범을 회피한다. 끝내 많은 사람들을 확신시키지도 못하고 또 자신들에게도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어쩌면 지금 말한 전부를 회피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열심히 논증하기 위하여 주께로 부르심을 받았다. 유다서 3장처럼, 이렇게 함으로 어쩌면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오해에 휩쓸릴 수도 있고 또 특별한 어느 순간 빈 소리가 아닌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진리를 밖으로 고정시키는데 정당한 타협을 놓치며 회피하는데 휘말릴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취지와 수준에 마주하기를 제한한다. 우리는 기독교 교리의 어떤 영역에서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는 교회행정의 어떤 세부 사항에서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는 교회가 추구하는 확고한 사역의 방향에 일치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먼저 두 가지 질문 형식을 주시하고 곧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다. 이 두 가지는 우선 반론 의견과 그 반론자를 어떻게 대처하며, 나아가 어떻게 특정인과 서로 일치할 것인가?”이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 진리가 아니라면, 우리는 일치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의견 차이의 중요성을 한층 최소화 한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찬성도 무관심도 없다는 것을 그들에게 나타내어야겠지만 각 사람에게 사랑의 의무를 져야한다는 것을 볼 때 우리와 전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책임져야 한다(7:12).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다룰 것인가? 먼저, 우리가 하는 말과 그 의미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의견의 목소리를 내려한다면,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과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은 책이나 논문을 출판해야 하며, 그 다음에 그 저술에 정통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입수 가능한 독서를 게을리 한다면, 그것은 명확한 의견 차이의 발언에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의견이 다른 사람과 함께 기록된 의미를 이해하도록 조심스럽게 읽고 있는 증거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논증법이 기독교 변증법에 응용될 중요한 논증방식이라고 나는 알고 있다. 논증신학과 기독교 변증법은 분리된 학문이 아니라 동반자로서 그 역할을 다할 때 교회 강단이 살아나고 복음전파를 다할 것이다. 변증하기 위한 논증방식에는 항상 하나의 전제가 붙어야 하며, 이 전제는 꼭 진리여야 한다, 그래야 연역적 전제주의에 대한 반론인 순환논증(Circular argument)에 걸리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신학자들은 기독교 변증법이 기독교 신앙의 바깥쪽사람들로부터 일어난 반론과 공격을 상대로 다루는 것이며, 논증신학은 교회 안쪽에서 일어난 공격의 상대로 다루는 것이라고 한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우리가 교회의 안쪽에서 공격이라고 언급한다면, 놀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누구도 우리들 가운데 은총 입은 신앙을 공격할 어떤 고유한 사람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공격한 사람들은 전부터 유대인들과 기독교 신앙 안에서 현저히 나타났다.

이런 공격들은 두 가지 유형에서 온 것인데, 하나는 잘 못된 성경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사이비종파임에도 불구하고 참 기독교 단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교회 안쪽에서 성경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배교된 교리들을 가르치는 모든 사람을 포함할 수 있다. 이것은 신약시대 이후에 에비온파(Ebionites) 펠라기우스파(Pelegians), 몬타니스파(Montanists), 네스토리안파(Nestorians), 아리우스파(Arians) 그리고 많은 다른 종파들이 교회 안쪽에 포함되었다. 21세기 초, 이것들은 급진주의자들 (extremists), 에큐메니즘들(Ecumenists), 그리고 기독교 뉴 에이즈들(New ages)을 포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이교들 비기독교 단체들을 기독교라고 주장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여호와 증인들, 제 칠일 예수 재림교회, 몰몬교, 뉴에이지 운동, 이슬람, 불교, 실론 오순절 전도단, Ceylon Pentecostal Mission; CPM, 신약교회(NTC),전 세계 오순절교회(UPC) 그리고 토론토 운동 Toronto movement 등이 기독교 신앙의 근저를 공격하고 있다. 로마교회는? 그들의 수는 변함없이 늘고 있으며, 그리고 그들의 잘 못된 교훈의 영향력은 역시 널리 확장되고 있다.

기독교 변증법과 논증신학은 활동범위가 다를까? 그 궁극 목적은 그들의 잘 못을 지적하며 진리를 확립하는 데는 똑 같이 하나이다. 실재 변증법은 논증법에 대하여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수년 전에 순조롭게 분리시킨 것으로 생각되며, 그리고 논증신학을 전공한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 변증법을 연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은 없다! 오늘 날 기독교 변증학자마다 논증신학에 숙달되어야 하며 그리고 기독교 논증가들 마다 기독교 변증법에 숙달되어야 함으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많은 비난에 서로 통찰력을 같이할 수밖에 없음을 실감한다.

 

 

 

 

6.신약성경의 전례

 

 

 

나는 초기 기독교 당시 이단 영지주의+도덕 폐기론 을 배격했던 유다서에서 논증신학의 의미를 강조한다. 수십 개의 다른 구절들과 함께 이 성경구절은 논증신학이라는 성경적인 원칙으로 규정한다. 논증신학은 잘 못에 반대하여 진리를 변호하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에서 잘못된 교리에 논박을 가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1:3)

신약성경에서 복음주의에 직면한 경우든 논증적 변증적 인 모델을 발견한 경우든 여기서 질문에 답할 슬기로움이 있어야 한다. 대부분 크리스천들이 상냥함과 존경심으로 그들의 신앙을 변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전통적인 본문 베드로전서 3:15-16을 참고하고 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이미 비난 자에 대항하는 변호는 신약성경에서 다섯 번이나 언급되었다는 데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22: 1; 25:16; 고전 9:3; 고후 7:11; 딤후 4:16). 또 두 번 크리스천들이 복음을 방어하고 있다(1:7, 16; 벧전 3:15).우리의 확신에 대한 강한 변호는 모든 신약성경의 교훈에 이렇게 낯설지 않으며, 그것은 초기교회에 의하여 실행되었다.

 

 

 

7.예수의 모범

예수는 귀를 기우리고 배우러 온 사람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그들을 친절히 대하셨고, 정중하게 듣고 마음을 끄는 대화를 하셨다. 밤에 예수께 찾아온 바리새인 니고데모(3:1-21)는 그렇게 접근된 좋은 실례이다. 우리도 우리 주님의 모범을 따르는데 초대되었고, 세상의 니고데모들의 질문에 대답하며, 상냥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복음진리를 그들과 함께 나눠야 한다. 당시 혼자 결심한 사람을 직면하여 이야기를 꺼낼 때, 예수는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대화 방식으로 그들을 만났다.

예를 들면, 예수와 부자 청년과의 논쟁(19:16),또 바리새인들과 헤롯당과의 대결(12:13), 그리고 바리새인의 집에서 저녁을 잡수실 때의 논쟁(7:36-50)이다. 어쩌면 대결의 반응을 나타내신 최상의 실례는 예수께서 외식하는 자들,” ‘어리석은 맹인들,’ ‘회칠한 무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라고 언급하신 마태복음 23:13-33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들과 대결하셨고(21: 12-13; 19:45), 서로의 의사소통의 분위기에서 그들의 주장을 토론하는 어떤 방법을 찾지 않으셨지만 둘러 앉아 소동하는 그들의 상을 들어 엎으셨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의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문자 그대로 교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상을 들어 엎는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예수의 모범과 결의는 더욱이 우리의 시대에 하나님 나라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맞서서 단호히 탐구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모델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성경의 원래 의미를 좀 더 살펴보면, 예수께서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겉으로는 거룩한 척 했으나 위선으로 가득 찼던 자들에게 인간의 죽은 뼈와 같고, 강도의 굴혈, 독사의 새끼들, 회칠한 무덤이라고 까지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은 율법주의자였던 사도 바울이 말한 것을 우리에게도 주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보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23:15).

 

 

 

8. 예수의 비유 논증 방식

논리학의 차원에서, 고전 주석들을 보면, 철학의 부재로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한 예로,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5: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foot.”(NIV)

이 비유는 비유법에 국한된 것만 논하려한다. 이 비유는 은유로서, 발전된 사물의 본뜻 보다 보조 관념들만 간단하게 제시하는 비유법이다. , 직유에서, ‘~처럼’ ‘~’ like, as 과 다르다는 것에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또 은유는 직유보다 더 인상적인 표현법이어서 남용하면 문맥도 어지럽고 문장의 뜻 도 모호하게 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에서, “소금이란 무엇인가?”라고 한다면, 이미 소금을 주제로 소금을 분석하여 말하려는 의도가 짙다. 그래서 첫째, 둘째,, 소금은 방부제, 치료제, 정결제, 제사용, 조미제 등으로 확장한다면, 그 의미가 풍부해질 줄 알지만 오히려 비유의 주체이신 주님의 의도를 상실하게 된다. 비유는 강론의 토픽이 될 수 없다. 주님은 소금이 만일 그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라고 하셨다. 영어 성경 NIV을 보면, ‘but’에서 꼭 한 가지 그 맛’ its saltiness으로 제한하여 결정하고 있다.

결국, 이 비유에서 소금은 외에 아무 의미가 없다. 여기서 소금의 분석은 맞지 않다. 이를 테면, ‘소금은 염화나트륨 NaCl, Sodium chloride 을 주성분으로 짠 맛의 조미료다.’라고 한다면, 이해가 되지만 이어 체액에 존재하여 삼투압 유지에 중요한 구실을 하므로 사람이나 짐승에게 중요하며, 그 밖에 체액이 알칼리 성분을 띠도록 유지하고 완충물질로는 산과 알칼리 평행을 유지시켜 준다.’고 분석한다면, 본문의 소금 비유와는 거리가 멀다. 특히, 은유법에는 더 이상 확장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데, 이것을 환원조건 former condition이라 하고, 주체 의미로 빨리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으로도 더 이상 짠 맛을 낼 수 없다고 하여 주석가들은 팔레스타인의 평민들이 사용하던 소금은 대개 암염 岩鹽으로, 흙이나 불순물이 섞여 정제하여 소량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버렸으며 토양을 망치는 성분 때문에 아무 쓸모없이 길거리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아니다!’ 주님은 이런 유형을 의도하지 않고 단지 100% 소금의 짠맛 순도를 전제로 하셨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맛을 잃은 소금이 버려져 사람에게 밟힌다는 말씀은 만일if~then 이라는 조건진술을 환질환위법 Contraposition전칭긍정판단’ Affirmations balance으로, ‘모든 소금은 짠맛을 낸다.’를 환질하여 모든 소금은 짠맛을 안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환위하여 모든 짠맛을 안내는 것은 소금이 아니다.’그래서, 소금은 절대로 짠 맛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하며, 결국 이 소금 비유의 특성 원소를 통하여 예수는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라!’고 명하셨다(16). 소금의 특성인 짠 맛은 곧 착한 행실이다. 그럼에도 ‘But If’ 하지만의 논법에서, 환질환위법의 모순을 통하여 너희우리 는 소금의 짠 맛, 착한 행실을 세상에 나타내어야 하며, 이것은 인간 도덕성의 전면을 통한 100% 실행 불가능이라도 당연히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힘써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이다.

철학 예찬이 아니라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언어가 철학이기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 언어와 논리법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말의 앞뒤가 맞지 않으면, 어불성설 語不成說, lack of logic 또는 비논리(illogicality)라고 한다.

 

 

 

9.예수의 역설 논증 방식

또 우리는 주님의 역설논증을 배워야 한다. 무엇이든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목적 없는 혼합주의 사상을 배격하는 확실한 "판단중지"의 핵무기 장치가 필요하다. 변증법적 논증의 특성은 인간의 자기 한계적인 주간성이 서로 객관적인 입장에 도달하기 위한 상호대립의 관계가 그 투쟁의 과정을 통과하여 되는 방법인데,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8. 27-1831. 11. 14, 독일 관념철학자 에 와서 크게 완성되었다.

역설(paradox)은 성경에 많이 나타나 있다.

A. 연역법(deduction)

1) 만일 전제가 진리일 때, 필연적[necessarily] 결과로 결론도 진리이다.

2) 결론에서 진술되는 모든 내용은 이미 전제 속에 포함되어 있다.

B. 귀납법(induction)

1) 만일 전제가 진리일 때, 결론은 확률적으로는진리일수”[probably true]도 있으 나 필연적인 진리”[necessarily true]는 아니다.

2) 결론의 내용이 전제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귀납적 추론이 경험을 필요로 하 는데 반하여 연역적 추론은 엄밀한 논리적 규칙에만 의존한다.

그리고 변증법, 이 세 종류의 논리적 차원을 뛰어넘어 인식이 가능한 고차적인 방법이다. 특히 칼뱅이 일반 논리학의 차원을 뛰어넘는 구문론적인(Meta logical)데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 계시의 진리 말씀이 역설인 이유는 내용이 심오하고 인간의 일반적인 논리의 영역을 초월하여 역설 외에는 표현할 방편이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기독교의 참 진리는 이 논리학의 여러 방편들을 자유로이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변증법은 논리학과 관계가 매우 밀접할 수밖에 없다. 특히, 계시언어에 있어서, 복음이란 인간의 이성이 부패하여 그 활용성이 불분명하고 불확실하여 진리를 직접 받아들일 능력이 없음에도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며, 그 이치에 합당한 말씀을 기록한 언어를 말한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제될 때는 논리의 방법을 자유로이 응용하여 복음을 전파해야 하고 또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원활히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 내용 중에는 대체로 이렇게 사용되는 언어의 방편이나 양상들에 빚어지는 그 증거들이모두 사용되면서도 심오한 말씀들에 있어서 인간의 합리적인 이해의 영역 밖인 역설이 많이 사용되었다. 여기서 역설의 방법인 논리학의 최후 방편이 진리의 처리양식을 빌려 우리에게 전달된다. 인간은 인간 한계의 지각과 더불어 계시언어에 대한 새로운 대면과 그에 대한 자세가 돼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역설을 이해한다는 것은 인위적인 방법에서 철저한 합리의 입장에서 그 가치성을 배제하는 입장과 더불어 인간 이성을 통한 합리적 논리의 영역을 넘어선 입장에서 또 다른 수용성이 있다. 그러므로 칼뱅주의에서는 역설을 이해하는 또 다른 입장에서 이에 대한 연구와 이해가 절실히 요구된다(최정호 방법론 [역설] p.62).

 

 

 

 

10.예수의 딜레마 논증 방식

딜레마 dilemma 논법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 어느 것을 택해도 역시 딜레마에 빠지는 논법이다. 플라톤 Plato 국가론(The Republic)에서, “정의에 대하여(On Justice;어느 것이 정의 [불의]인가?)서 생각해 보았다. (On Justice [Gr. ΠερΔικαίου; La. De Justo] is a Socratic dialogue attributed to Plato, but which is considered spurious. In the short dialogue, Socrates discusses with a friend questions about what is just and unjust.)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총을 빌렸는데, 약속한 시간에 총을 돌려주려는 데, 그 친구가 미쳐버렸다. 그 총을 돌려줘야 하는가, 돌려주지 말아야 하는가?" 여기서 딜레마 논법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둘 중에 어느 하나, 즉 총을 돌려주느냐, 마느냐에 딜레마가 있다. 코미디 빅 리그 사망토론에 부쳐봐야겠다.

딜레마 논법은 양자 중 어느 것을 택해도 "올무"에 걸리는 함정이 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22:15; 12:13-17; 20:20-26), 바리새인들이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22:17; A special tax levied on subject peoples, not on Roman citizens)라고 물었다. "딜레마 논법"은 논쟁이나 토론에서 상대방을 효과 있게 골탕 먹이는 방법이다. 주님의 대답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다. 이것은 "딜레마 반환논법"으로 결국, 바리새인들이 결정해야만 했고, 그들이 오히려 "올무"에 걸려버렸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 가니라.”(22:22) 여기서 주님의 논증방식의 지혜를 배운다.

 

 

 

 

11.바울의 모범 논증 방식

이것은 단지 예수로 중단되지 않았고, 바울의 사역에서도 적격하게 대치할만한 가장 모범적인 논증법이 있었다. 바울은 예수의 방법론처럼 다양하게 논증법을 나타내보였다. 바울은 지중해 세계를 가로질러 로마 속령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만나 그들과 함께 성경을 읽을 때, 그의 메시지를 문맥에 잘 짜 맞추었으며(13:13-15), 또 그리스 철학자들의 사상을 빌려올 때도 아덴 Athens 의 아레오바고 Areopagus 에서도 그리고 그 당시 사상가들에게 공식 반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17:22-31).

그래서 바울은 대항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고, 사실 현저한 그의 논증법으로 대책을 강구했으며, 회당과 시장 안으로 들어가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전제 하에 대담하게 논증했다(13:46; 17:17; 18:28; 19:8-9; 고후 5:11; 10:5). 그는 유대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에 수용된 처리법으로 태형, 매질 폭동, 그리고 돌로 쳐 죽이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형태의 사실에 상호 이해라기보다 더 호기심을 자아냄을 알았다.

바울의 단호하고 비타협적인 자세는 사도행전에서 그의 사역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지역에서 헬라의 유대인 공동체 밖으로 갔을 때, 그들의 전통 속에서 그들을 반대하는 논증의 시간이었다(17:1-2, 17). 불신앙의 도시 에베소의 유대인 회당에서 3개월 동안 제일 먼저 설득력 있게 논증하기 시작했다(19:8). 떠나도록 강제압력을 받을 때, 그는 세속 공공 기관인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했으며, 거기서 2년 동안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 함께 토론을 계속했다(19:9 -10). 나중에 로마에서, 바울은 이태동안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며 그의 셋집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쳤다(28:23-31). 모든 사실을 통하여, 바울은 끊임없이 복음을 강론했다(1:16; 15:20; 고전 1:23). 맨 먼저 그의 마음에 떠오른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에 대한 것이며 사람들에게 권유했다. 그가 기록한 것처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5), 결과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평화적인 방법과 직면적인 방법 둘 다 효과를 얻었다(11: 34;13:32;17:4,32;18:6).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 사도들도 직면적인 접근방식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스데반은 자유민들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 의 회당 단원들에 의하여 고전을 당면했을 때, 순전히 그의 의견을 가지고 그들의 주장을 꺾으므로 그 지혜에 대항할 수 없었으며(6:9-0),마침내 그를 사형시키려는 결의를 했다(7:57-8:1). 전적 스데반을 죽이는데, “불찬성의 일치였으며, 빌립도 에티오피아 사람과 직면했을 때 똑같았다(8:26-40). 왜 그때 우리는 증인으로 이런 솔선과 어기찬 방식을 두루 생각하며, 때론 기독교 공동체 밖의 잘 못된 복음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바로 그것이 모델이라고 했을 때, 최초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복음 전파의 방법을 우리는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12.논증신학은 신적 소명

논증신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일차적 소명임을 제1강에서 강조한다. 성경계시와 교회 역사의 전체 과정은 시대를 통하여 논쟁의 불꽃과 여러 차례 진리 전면에 격심한 전투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실책으로부터 교회를 보전했던 것은 이런 큰 논쟁이었으며 교회가 굼뜨고 비대하게 성장 비-성숙 할 때 마다 마지못해 잘 못을 지적했으며, 세상 어디서도 비할 바 없는 구원의 소망을 잃어버렸다. 잘 못을 지적하는 것은 결코 쉽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지만,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부심에 게으르지도 않아야 하며, 진리 변호에 무지와 무관심은 실로 연합과 결속력의 보존에 별로 좋지 않다.

 

 

교회가 진리와 기둥의 터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다(딤전 3:15). 대부분 교회가 진리와 거짓 사이에 분별을 잃어버렸다. 디도서 1:9에서, 장로 목사 에게 기본적인 요구는 성경에 충실하지 못한 메시지를 전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바른 교훈과 일치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슬린 말을 하는 그런 자들을 논박해야하며, 또 우리는 우리의 신적 소명을 충족시켜야 한다.5) John F. MacArthur; Reckless Faith: When the Church Loses Its Will to Discern, Wheaton: Crossway Books, 1994, 52; Scripture quoted from Tit. 1:9, NASB(New American Standard Bible).

만일 우리들 가운데 진리를 사랑하는 데 실패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실패한 사람일 것이다. 고돈 클락크 Gordon Clark 가 기록한대로, “하나님은 진리시며, 진리를 경멸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과 같다.”6)Gordon H. Clark; A Christian Philosophy of Education[Jefferson, Md.: Trinity Foundation, 1988], 158; quoted in Mac Arthur, 44.

 

 

 

앞에서, 성경과 교회 역사를 중심으로 한 논증신학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좋은 참고 문헌들이 많다. 독자들은 더 많은 연구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저자는 논증신학에 이어 기독교 변증법을 정리할 이유는 이 논증 변증 법을 통하여 현실 유일신 종교라는 이들의 경전 차이점을 논증해야겠다. 나아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기독교 안에 잠복하고 있는 비-진리를 찾아서 바른 성경해석으로 그들과 끊임없는 논쟁이 있어야 함을 거듭 강조하면서 본 "논증신학" 강의를 마친다.

 

 

 

http://www.ctime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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