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사도는 자기목회를 “성도를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골1:18)이라고 말했다. 여기 완전하다는 말은 ‘균형을 갖춘’ ‘치우치지 않는’ 등의 의미가 들어 있다. 이 완전함은 목회자 눈에 드는 표준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님이 요구하시는 표준이다. 초대교회인 예루살렘교회를 보면 성령의 능력과 함께 말씀의 은혜가 있는 균형잡힌 교회였다. 거대한 집회가 있는가하면 아름다운 가정이 있었다. 믿음과 삶이 공존하는 양적 부흥이 질적 성장과 함께 가고 있는 은총의 교회였다.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에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목회가 균형을 잃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예가 질과 양의 불균형이다. 어떤 교회는 목회의 무게가 온통 양적 성장에만 쏠려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교인들의 질을 높여야 한다면서, 양적 성장에는 체념하는 교회들도 있다.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신념이 강한 목회자들은 온통 설교나 대화가 축복으로 채색되어있다. 마치 예수 믿는 목적이 오로지 복받는데 있다고 오해할 정도로 비춰지는 목회자들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복받으라는 말을 비성경적으로 천박한 것처럼 매도하는 자들이 있다. 저들은 십자가를 지는 경건한 삶. 세상에서 신자가 책임져야 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강조한다. 반면에 성도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좋은 것들에 대해서는 매우 소극적이다. 복을 외치는 교회는 모두가 철없이 들떠있는가하면 삶을 외치는 교회는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말씀의 은혜와 성령의 은혜에 대한 균형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성령의 은혜는 곧 말씀의 은혜가 되어야 하고 말씀은 반드시 성령을 통해 능력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성령만 외치는 교회는 항상 성령만 외치고 말씀만 강조하는 교회는 항상 말씀만 강조하는 것을 본다. 이러한 편중현상이 사라져야 한다. 목회자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은혜 받은대로” 목회한다는 말을 듣는다. 이 말은 내 방식대로 목회한다는 말이다. 아무도 자기 자신을 뛰어넘을 수 없다. 한 사람이 은혜와 은사를 다 독점하지 못한다. 또한 우리는 신학적으로 완전하지 못하다. 부득불 우리는 내가 배운 신학 내가 받은 은혜대로 목회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목회의 편중현상은 숙명이라고 본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자신의 한계점을 시인하며 “나의 목회는 한쪽이 비어있다”는 겸허함으로 임하면서 상호보완의 은총을 누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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