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rmon of the Isaiah 4:2-5
이사야 4장 2- 5
[ 본 문 ]
2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탁월하고 혹은 높고 아름다울 것이며영화롭다. 아름답다.3 시온에 남아 있는 자,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4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5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6 또 천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
들어가는말
오늘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의 이스라엘의 영광에 대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가 그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서 그날에 아름답고 영화로운 열매를 취하게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예루살렘의 영광은 유대인들 자신들의 의(義)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에 기초한다.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모든 것에 선행하여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오직 구원은 그 하나님의 자비하시고 은혜로우시고 기뻐하신 뜻으로 된 것이다.
우리의 구원의 제일 원인은 늘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분의 은혜가 제일 원인으로서 선행(先行)하고 그 은혜가 우리에게 선물의 형태로 주어졌다.
이후에 신자가 하나님을 자각하며 회개하고 신앙을 갖게 된다.
그 신앙에 의하여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
그리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하신 구원의 도리이다.(롬 8:30)
이것은 우리의 눈에 기이한 것이며 우리와 우리 자손이 영영히 간직해야 할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I.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높고 영화로울 것이다.
이 본문에서 처음 기록된 말씀은 “그 날에”(אוהה םויב)이다. 선지자 이사야가 증거하는 “그 날”(אוהה םויב)은 어떤 날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만물의 역사(歷史)가 종결되고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부터 도래하는 날이다.
그날은 여호와의 영광의 날이며 동시에 모든 죄악된 인생들에게 죄에 대한 최후의 심판의 날이기도 하다.
그 날은 성도들이 모든 싸움의 최종적인 승리를 쟁취하는 날이며 동시에 불신앙의 사람들이 그들의 죄로 인하여서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되는 날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승리와 영광의 날이면서 동시에 불신앙의 인생들에게 저주와 진노와 심판의 날이다. 그렇게 희비가 엇갈리는 그 날에 유대와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될 영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씀한다.
그 날이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동일하게 영광의 날이 되는 것은 그때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때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서 지금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이시다.
선지자 이사야는 증거한다.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דובצלו יבצל הוהי המצ היה אוהה םויב)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증거하는 바는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유대와 예루살렘에 대한 여호와의 위로의 말씀이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전 장에서 들은 유대의 예루살렘 거민들은 그들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을 인하여서 심각한 공포에 떨게되었다.
전 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유대와 예루살렘이 칼과 전란(戰亂)으로 망할 것이고 백성들은 슬퍼하고 곡을 할 것이라고 증거하였다.
그런 선지자의 말씀은 유대의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심각한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이전의 선지자를 통하여서 말씀하신 바 언약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서 증거되는 바는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한 심판의 말씀뿐이고 예루살렘에 대한 소망이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크신 자비로우심에 대하여서 증거하였다. 그리고 이전에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들은 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 언약의 약속은 결코 폐하여지지 않았다.
두 번째는 이런 약속의 성취는 여호와의 자비하심에 기초하며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주어질 것임을 증거한다.
유대와 예루살렘 거민들이 구원을 받게되는 것은 그들의 신앙이 기초가 아니다. 오직 그 은혜를 주시고자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하심이 기초이다.
유대와 예루살렘이 얻게된 신앙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선물이다. 성도들의 신앙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한 형태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이 구원의 기초가 아니다.
오히려 믿음은 구원의 수단에 불과하다.
오직 구원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유대와 예루살렘 거민들의 극심한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무한하신 자비하심으로 그들을 대하시며 그 사랑으로 인도하신다.
그 다음 구절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높고 영화로울 것이다.”(לארשׁי תטילפל תרזפתלו ןואגל ץראה ירפ)고 증거한다. 후반부는 전반부와 평행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그 날에”(אוהה םויב)라는 말씀에 연결되어서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דובצלו יבצל הוהי המצ היהי)와 “그 땅의 소산이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요”가 평행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나서 전치사구로서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לארשׁי תטילפל)라는 말씀으로 되어있다.
“여호와의 싹”(הוהי המצ)과 “그 땅의 소산”(ץראה ירפ)이 동일한 의미의 다른 표현으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싹”과 “그 땅의 소산”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열매란 싹이나고 잎이나서 맺히는 과실이다.
그러므로 “그 땅의 소산”(ץראה ירפ)이 지향하는 바는 여호와의 싹으로부터 열매를 맺게되는 하나님 나라의 기업이다.
비록 그 열매가 맺혀질 것인가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희미한 싹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결국 열매를 맺으실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모든 것에 선행하여서 있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도들에게 그 나라의 소산으로 먹이시겠다고 증거하신다.
그것은 신자가 가게 될 하나님 나라에서 얻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다. 그렇다면 선지자 이사야가 증거하는 하나님 나라의 기업이란 무엇인가?
이 본문 말씀과 연관하여서 우리들은 마태복음 20장 1-16절의 말씀을 상고 해 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20장 1-16절 말씀의 비유를 통하여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설명하신다.
첫 번째 그 기업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유로우시고 기뻐하신 뜻 가운데 주시는 은혜 언약의 성취에 기초한다.
이 본문에서 신자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이러하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의 포도원에 먼저 들어온 자나 나중에 들어온 자나 동일하게 “하루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작정하셨다.
그래서 이제 저녁이 되어서 일을 마치고 회계할 때 주님께서 그 삯을 나중온 자에게 먼저 주고 일찍 온 자에게 나중에 주었다.
이것은 언듯 보면 불공평한 듯이 보인다.
그렇게 보게되는 것은 인생들의 부패성 때문이다.
그 상급을 주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각자에게 가장 공평하게 나누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것을 깨닫게 되면 하나님께서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 일을 가지고 쓸데 없이 자랑한다.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먼저 된자로서 나중 된자도 있고 나중 된자로서 먼저 된자도 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먼저 나와서 젊어서부터 주님께 충성하였기에 더 많은 상급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은 여전히 구원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의 그 비유를 통하여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이러하다.
하나님 나라의 기업은 그 기업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며 그 일을 위하여서 수고한 성도들의 행위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기업을 은혜 언약이라 한다.
하나님께서 오직 그의 은혜로만 주시는 것이다.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에 기초한다.
누구든지 그 은혜 언약 위에 자신의 공로를 올려 놓으려 한다면 여전히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고 축소하고 왜곡하며 은폐시키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 온자나 나중온자에게 포도원 주인이 동일한 데나리온을 주신다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의 기업은 각자의 분량의 따라 다양성은 있지만 그 기업의 본질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의 행위에 그 공로가 기초하지 않는다. 그 기업의 모든 혜택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에 기초한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다. 인간의 공로를 자랑할 수 없다.
결국 이 기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 기업을 얻을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성도들은 그 기업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힌 바 되어 그 기업의 양자(Adoption)가 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공로에 기초하여서 하나님 나라의 후사로서 유업을 얻는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하는 수고와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은 자세를 가져야 한다.
누가 복음 17장 7-10절 말씀이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서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서 가져야 할 자세는 이러하다.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두 번째 그 기업은 모든 자에게 공평하다.
그 기업이 모든 자에게 공평하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기업이 인간의 공로로 얻을 수 없다는 교리에 기초한다.
신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거해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었다.
그래서 그 기업을 얻은 자들은 공평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최고의 선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으로 함께 하시는 것 자체가 무한한 은혜이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방패이시오 최고의 상급이시다.(창 15:1)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것이라”고 하였다.(요 17:3)
우리를 창조하셔서 이 땅에서 존재하게 하시고 그의 아들을 주셔서 구속하신 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지각하고 그의 영원하식 기업의 풍성한 은혜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성도들의 생애 최고의 선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주신 분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마태복음 본문에서 하시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 분의 사랑 안에서 성도들은 공평하며 변함없으신 그의 사랑을 따라 살아간다.
http://cafe.daum.net/reformedvillage/WlQ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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