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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기도는 가능한가?

황대우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6. 10. 28.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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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기도는 가능한가?

 

 

황대우 교수

(고신대학교 개혁주의학술원)

‘중보기도’라는 표현은 잘못되었는가?

우리가 사용하는 ‘중보기도’라는 말은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의미한다. 중보기도(中保祈禱)의 네 개 한자는 각각 ‘가운데(중), 지키다(보), 빌다(기), 빌다(도)’를 의미하며 ‘중보’의 사전적 의미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일이 성사되도록 주선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뜻으로 중보기도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중보기도’라는 용어 사용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그 용어 대신에 ‘도고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런데 사실 도고기도(禱告祈禱)라는 용어는 상당히 낯설고 어색할 뿐만 아니라, 네 개 한자의 의미가 각각 ‘빌다(도), 고하다(고), 빌다(기), 빌다(도)’라는 것을 고려하면 정확한 표현이라고 볼 수도 없다. ‘도고기도’보다는 조금 오해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중보기도’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그들은 ‘중보’라는 단어가 신학적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적용되어야 할 말이므로 ‘중보기도’ 역시 그리스도께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구원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중보’라는 용어를 예수 그리스도께만 사용하고 달리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롬 8:34)로서 지금도 중보사역을 계속하시는데, 그리스도의 간구를 ‘중보기도’라고 하기 때문에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을 동일한 ‘중보기도’로 표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한다.

 

 

성령도 중보기도 하신다

정말 그럴까?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간구하는 중보기도는 성자 하나님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도 하신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비록 성령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과 같은 중보자이신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처럼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신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중보자가 아니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간구하시는 그분의 기도도 ‘중보기도’라 부를 수 없는 것일까? 아마도 성령의 간구를 중보기도로 부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아니라거나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실 성자 예수님의 중보기도든 성령 하나님의 중보기도든 모두 하나님의 뜻과 부합된 기도일 수밖에 없다. 삼위 하나님의 공통적인 뜻이란 그분의 자녀로 택하신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영적으로 잘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중보기도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우리도 중보기도 할 수 있다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아니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 즉 사랑의 빚진 자요,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해야할 사람, 즉 사랑의 배달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사실 원수는 미움의 대상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원수는 미워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는 비결은 기도, 즉 중보기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다. 이것이 중보기도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원수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이것이 원수 사랑의 전형이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친히 보여주셨다. 그리고 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은 사랑하시는 자신의 지체를 위해 중보기도 하신다.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는 지금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일으키는 동력이다.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처럼 원수를 위해, 그리고 다른 지체를 위해 간구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중보기도다. 바울 사도 역시 예수님처럼 중보기도의 대가였다. 그는 자신이 세운 수많은 교회를 위해 매일 기도하기를 쉬지 않고 실천했다. 그리고 때론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골 4:3) 바울 사도의 전도 사역을 위해 골로새 교인들이 중보기도 하는 것 역시 바울을 향한 그들의 사랑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면 그것이 곧 중보기도다. 중보기도는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성도라면 다른 지체의 어려운 사정을 알 때 지체 없이 기도하기 시작해야 한다. 야고보 사도는 병든 자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기도를 부탁해야 하고 부탁받은 장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중보기도의 힘은 대단하다.

하지만 이 모든 중보기도의 대단한 능력은 사랑,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기도하는 자의 무엇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중보기도는 “믿음의 기도”이며, 사랑의 기도이다. 이 기도의 모든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온다. 기도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능력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만일 중보기도로 인해 대단한 능력의 결과가 나타났다 해도 중보기도한 사람이 자랑할 만한 자랑거리는 전혀 없다.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이것이 진실한 중보기도의 기본자세이다. 이런 중보기도는 교회의 보화이므로 잘 가르치고 강조해야 한다.

 

 

중보기도에 대한 오해

마지막으로, 성경이 가르치는 중보기도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앞 다투어 ‘중보기도팀’ 혹은 ‘중보기도특공대’ 등과 같은 이름으로 마치 중보기도를 기도에 열심 있는 몇몇 신자의 특권인 것처럼 조장하는 것은 기도, 특히 중보기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행위이다. 중보기도팀원 스스로도 마치 자신에게 특별한 기도의 재주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그래서 자신이 영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탁월한 것처럼 여기고 교만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이 모든 것은 중보기도를 오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부탁받은 중보기도의 내용은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아야 하고 다른 사람이 듣도록 공적으로 기도하지도 말아야 한다. 기도를 부탁받은 사람만 그 내용을 알고 그를 위해 비밀스럽게 기도하는 것이 중보기도의 중요한 원칙일 것이다.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발생하는 교회문제도 상당히 심각하고 많다. 특히 성도가 목사에게 찾아와 개인적으로 기도 부탁한 것을 공개적인 자리에서 기도하는 일은 때론 그를 실족시키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매우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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