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빌 4:4-7. 복음적인 삶이 가능한 이유

믿음

by 김경호 진실 2016. 11. 14. 09:16

본문

빌 4:4-7. 복음적인 삶이 가능한 이유
오성환 목사(이야기가 있는 교회, 세움성경신학연구원 원장)
   

1. 바리새인은 율법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바리새인이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을 괴롭힌 사람들로만 알고 있지만, 바리새인들은 마카비 시대에 생겨난 긴 역사적 배경을 갖는다. 에스라 이후 유대인들은 급변하는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는 일로 가장 먼저 한 일은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고, 후에 헤롯이 40여 년간 새롭게 성전을 지었고, 유대인들은 선전이 자신들 가운데 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테반은 유대인들을 향해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이야기하면서 성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유대인들의 고정된 성전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음을 강하게 주장했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율법이 완성되었음을 이야기함으로 유대인들에게 돌을 맞아 죽었음을 사도행전에서 이야기하고 있다(사도행전7). 유대인들도 예수님을 고소하는 죄목으로 성전을 헐고 다시 짓는다고 말씀하신 것에서 찾을 정도로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바리새인은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여러 유대인들의 전통을 지키는 자들로서 율법의 연구와 실천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많은 율법을 613가지로 요약했고, 주변 민족들과 정체성의 다름을 드러내기 위해 음식법이 포함된 엄격한정결법을 지켰고, 안식일을 주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안식일 논쟁을 벌이시면서, 율법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히시는 이유는 그만큼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는가?’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2. 바울은 자신이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스스로를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빌립보서3:5-6)라고 이야기한다. ,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흠이 없이 살려는 사람들이고, 율법을 지키기 위해 율법을 연구하는 자들이고, 그래서 율법을 연구한 신실한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로마서7:7)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 말은 바리새인 바울이 율법을 열심히 연구하면 할수록 바울은 스스로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는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런 유대인들을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태복음23:13)라고 말씀하신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결국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말씀이다. 율법의 기능은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판단을 할 수 있는 데 까지 데리고 가는 선생의 역할 뿐이지 율법은 유대인들의 기대와 달리 구원에 이룰 수 없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율법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 스스로 종교인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종교는 유대인들처럼 자신들을 얽매고 있는 율법을 따라가는 삶을 살려는 사람들이다. 사람이 스스로 율법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 살려는 경향은 값없이 주어지기 때문에 없는 자랑할 이유가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지고 있는 특성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고린도교회에도 혹은 갈라디아 교회에도 바울의 복음에 대항하여 던져지는 거짓 복음들은 대부분 율법을 떠나면 안된다고 이야기하는 이행칭의(以行稱義)’를 강조하는 이야기들이었다.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행칭의는 지식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불교의 깨달음 혹은 득도를 지칭하는이지칭의(以知稱義)’와 같이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종교적 구원에 이르는 중요한 원리가 된다. 우리는 행함과 깨달음이라는 대부분의 종교적 구원의 원리가 아닌 믿음이라는 원리를 갖는다. ,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원리를 갖는다.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고,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심을 알고, 오직 믿음으로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는지를 알고, 오직 믿음으로만 내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4.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마리아가 취한 이 좋은 것을 말씀하신다. ‘이 좋은 것을 체험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요한복음11:2)일 수 있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 역시 그가 예수님을 친구처럼 사랑할 것이라고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에 전설에 의하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은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빌립보서3:7-8)길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은 율법에 매이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을 섬김에 대한 기쁨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인다. 이런 삶을 우리는 복음적인 삶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복음적인 삶은 조항에 매몰되어 그 조항의 의미를 무시한 적용을 요구하는 율법적인 삶과는 달리, 우리의 삶에 찾아오신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생생한 만남을 전제로 한다. 문제가 생길 때 마다 하나님의 인더와 섭리를 찾는 삶이 바로 복음적인 삶의 모습이 된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옥중에서 쓴 옥중서신이다. 옥중에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계속 요구한 것은 기뻐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기뻐함의 이유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는 것이다. , 우리들이 염려할 문제들은 기도와 간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바로 복음적인 삶을 살아가는 원리가 된다.

 

 

율법적인 삶은 율법의 조문에 매이는 삶이다. 그 조문을 따라가면 하나님과 만나는 삶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 바로 율법적인 삶이고, ‘이행칭의의 삶이지만, ‘이야기가 있는 교회가 추구하는 삶은 조문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조문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삶이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것을 말씀을 통해 찾아내는 삶이 바로 복음적인 삶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복음적인 삶은 종교에 매이지 않은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아는 삶이고, 결국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드러나는 이신칭의의 삶이다.

 

 

 

 

 

http://www.ctimes.or.kr/news/view.asp?idx=2009&msection=2&ssection=5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