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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우르시누스를 중심으로 살펴본 안식일 계명의 의미

주일

by 김경호 진실 2017. 1. 7.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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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과 우르시누스를 중심으로 살펴본 안식일 계명의 의미]

박동근 목사(한길교회-안양) : 2017년 1월 1일 주일 오후 예배

103 문. 제 4계명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답. 첫째, 복음전파와 복음에 관한 교육이 계속되어야 하며 특별히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성례에 참여하고 공적인 기도를 드리며 가난한 자들을 위한 헌금을 바치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에 정규적으로 참석해야 합니다. 둘째, 주님께서 내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심으로써 나는 힘겨운 일상생활의 악으로부터 벗어나서 이생에서 이미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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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20: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20: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20: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1. 이 계명을 다룸에 있어 두 가지 성격과 이 계명의 목적

오늘 다루게 될 네 번째 계명은 안식일에 관한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다룸에 있어 오늘날 두 가지 왜곡된 안식일에 대한 접근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안식일을 오늘날도 동일한 방식으로 동일한 날로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구약의 안식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으니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오늘날 주일로서 공예배를 드리며 성도들이 함께 교제하는 주일성수도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접근은 모두 잘못되고 치우친 주장일 뿐입니다.

이러한 잘못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제 4 계명을 다음과 같은 전제 아래서 다루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 4 계명의 특징을 우리는 발견해야 합니다. 제 4 계명은 의식적이며 도덕적인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는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도덕적인 측면에서 영구하며, 이 계명의 목적과 원인들이 성격상 영구합니다. 반면 의식적인 측면에서는 구약에서 특별히 의미를 둔 일곱째 날의 준수로서 안식일은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다루면서 조심할 점은 이 계명이 도덕법적인 측면을 구약에서 의식법적인 틀 안에서 지켰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 폐지되고 어떤 점에서 연속성을 가지고 영구한 명령으로 교회에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의식법과 도덕법적 측면을 구별하며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르시누스는 구약의 토요일 안식일이 폐지되었고, 신약 교회에서는 더 이상 의식법적인 의미를 넘어선 의미로 지키는 주일성수가 도덕적인 의미에서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목적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이 계명의 목적과 의도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공적인 예배를 유지하는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황공하게도 항상 교회에 공적인 사역이 있어야 할 것으로 여기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수단을 통해 그가 정하신 목표들을 이루시길 원하셨습니다. 그 목표는,
첫째, 하나님께서 안식일 계명을 통해 공적으로 찬양과 예배를 받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둘째, 택함받은 성도들이 이런 공적인 집회를 통해서 자극을 받고 확신을 받도록 하신 것입니다.
셋째, 사람들이 이런 수단을 통해서 복음의 믿음 안에서 서로를 강건하게 하며 또한 사랑과 선행을 촉진하도록 하려 함입니다.
넷째, 교회의 가르침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일치가 보존되고 영구히 지속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다섯째, 교회가 세상에서 눈에 보이게 드러나며, 세상 사람들과 거룩하게 구별하시기 위함입니다.

103문에도 나와 있듯, 새 언약 아래 제 4 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공적인 예배와 공적인 사역을 통해 교회의 돌봄을 받아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가르칩니다. 103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내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심으로써 나는 힘겨운 일상생활의 악으로부터 벗어나서 이생에서 이미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칼빈은 교회를 어머니로 부르며, 모든 성도들이 죄성과 연약성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말씀과 성례 등 공적인 사역을 통한 돌봄이 필요하여 제도적인 교회를 하나님께서 세우셨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힘겨운 일상생활의 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공적인 예배와 가르침과 교회의 사역을 통한 영적 돌봄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설교와 성례 그리고 공기도를 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며, 주 안에서 선한 사역을 행하므로 죄성 가운데 있는 연약한 성도들이 믿음 안에 더욱 강건해질 수 있도록 돕습니다.

칼빈은 이 날의 목적을 이렇게 가르칩니다.

이 계명의 목적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호나 일에 대해 죽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명상하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으로 그 명상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 4 계명은 이러한 목적으로 준수되었습니다.

첫째로, 제칠일의 안식은 하늘 입법자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적 휴식을 알리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신자들은 자기의 일을 제쳐놓고 하나님께서 자기들 안에서 일하시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이 일정한 날에 서로 모여 율법을 배우며 의식을 행하며 적어도 그 날은 특히 하나님의 행적을 명상하는데 바쳐서, 이렇게 회상함으로써 경건의 훈련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그 밖에 남의 권위 하에 있는 사람들과 종들에게 휴식을 전하는 날을 주셔서, 그들의 노고를 쉬는 때가 있게 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2. 구약의 제 칠일 안식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일에 대한 그림자요 예표로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의식적인 면과 그 주어진 날의 규례는 폐지되었으나, 여전히 도덕적인 의미와 목적은 성취된 국면에서 여전히 영구적으로 준수되어야 합니다.

구약의 제 칠일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공포하실 때에 모세 시대의 예배 안에서 오실 메시야를 예표하는 모형으로서 제정되었습니다(출 31:13; 겔 20:12). 그러므로 일곱 째 날의 규례로 지키던 구약의 제 칠일 안식일 규례는 메시야의 도래로 말미암아 다른 많은 의식들과 함께 폐지되었습니다.

원래 안식일의 성경적 기원은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를 모두 마치신 후에, 7일째 되던 날 안식하셨습니다. 창조 기사의 안식의 의미는 먼저는 창조를 완성하셨다는 의미요, 둘째는 창조한 피조 세계 안에서 그 지으신 인간과 더불어 교제하시고 그 창조하신 바를 누리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완성 후에 그 세계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인격적 피조물을 통해 찬송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창조의 목적은 사탄의 시험과 인간의 타락으로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안식일 규례는 이와 관련된 안식년, 희년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창조의 회복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취와 성령을 통한 교회와 성도들 안에 구속의 적용 속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안식일 규례는 그리스도의 구속 성취 안에서 베풀어지는 영적이고 영원한 안식을 예표하기 위해 제정된 것입니다. 칼빈도 구약의 안식일 규례가 영적 안식의 예시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점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구속이 적용될 때, 교회와 성도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안식일의 최고의 목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일하게 하시기 위해 우리의 일을 쉬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노동을 금한 이유는 노동을 하지 않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쉬므로 하나님께서 일하게 하시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치고 우리의 마음을 맡기고 우리의 일을 쉬므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므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얻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히 4:9). 그런데 이 일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일어나고 성취됩니다. 우리가 죽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일하게 하시는 일의 성취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죄책과 오염된 마음으로 쉼없이 괴로워할 우리의 영혼과 양심이 그리스도를 믿어 그분과 연합할 때,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죄책을 용서받으며, 부패한 마음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거룩을 경험하게 됩니다. 죄로부터의 고단한 지배로부터 벗어나 영혼이 쉼을 얻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죄인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골로새서 2:16-17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러므로 안식일과 주일의 차이가 여기서 나타나게 됩니다. 제칠일을 거룩하게 구별하는 안식일의 의식적 준수는 폐지되었지만, 도덕적 의미는 영구적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안식일이 예표하던 바는 그리스도 안에 진정한 영적인 안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후 교회는 한 날, 곧 안식 후 첫날 일요일을 정하여 공적인 예배와 사역이 지속되게 하였으나, 일요일을 정한 것은 보편 교회가 혼란과 무질서 없이, 그리고 공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모여 함께 예배하고 영적인 사역을 하는데 있어 이러한 공적 예배와 사역이 붕괘되지 않도록 질서적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주일로 정한 것입니다. 칼빈은 엄밀히 말하면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성도들은 매일 매일 모일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육신을 가졌고 연약하기에, 또 6일의 노동 명령을 생각할 때, 현실 생활 속에서 매일 모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그렇게 될 때 많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는 것입니다. 칼빈은 영적 안식은 365일 전부인 것입니다. 일요일이기에 안식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언제나 안식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연약한 성도들이 세상에서 유혹받고 죄와의 싸움에서 늘 기진하므로, 하나님께서 섭리 안에서 주께서 부활하신 한 날 일요일을 공예배와 공적 사역을 행하도록 공적우로 회집하는 날을 정해 주신 것이고, 교회는 그렇게 합의하여 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이후, 모든 참된 교회들은 주일을 구약의 제칠일처럼 날 자체에 어떤 신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도들이 날을 미신적으로 지키는 것을 철저히 피해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보편교회가 정하여 주일성수를 하는 일은 성도로서 최대의 의무가 아니라 최소한의 의무를 실행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모여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다면 그것이 좋은 일이지만, 우리의 현실과 연약성 때문에 그리고 공적 예배와 사역이 질서 안에서 한 날을 정하므로 유지되므로 주일을 거룩한 예배와 사역과 교제로 모이는 일은 최소한으로 준수되어야 하고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이후로 참된 교회는 일요일을 다른 요일과 다른 의미로 부여하거나 날 자체에 미신적인 의미를 두고 주일을 준수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였다면 바울을 통해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안식일 계명을 대하는 공통된 태도는 이것입니다. 구약의 의식법적인 의미에서 제 칠일의 율법주의적 규례로서 날의 의미를 피하기 위해 모임의 시간을 주일로 바꾸되,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미에서 한 날 모임이라는 질서를 유지시킨 것입니다.

(4: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4: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공적으로 예배하고 공적으로 사역하므로, 연약한 성도들을 돌보며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은총을 누리도록 한 날을 질서있게 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제칠일 안식일의 의식법적 구속력이 폐지되었음을 표명하기 위해 토요일 외에 다른 날을 택하되, 주의 날의 가장 적합한 부활의 요일이었던 일요일을 공적 회집의 날로 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일을 성수해야 하지만, 구약의 의식법적인 의미로부터 자유하며 이 계명이 함축한 영적이고 도덕적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일요일에 공예배와 공적 사역을 준행하는 것입니다.

3. 일요일을 주일로 성수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칠일을 구약의 방식으로 지키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엄밀히 제칠일 안식일 규례는 외적 의식에 있어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도덕법적인 측면으로서 안식일이 목적하던 바와 추구하던 내용은 여전히 남겨졌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안식일 계명은 의식법적 측면이 아니라 도덕법적 측면에 있어 그리고 안식일이 추구하던 목적과 내용에 있어 새 언약의 시대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바뀌지 않은 부분은 이러한 부분입니다.

첫째, 신약교회도 모든 성도들이 모여 함께 예배하고 성도들을 위한 사역을 베풀기 위해 일정한 날을 정하여 함께 선포된 말씀을 들으며, 성찬의 떡을 떼고, 공중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행 2:42).

우르시누스도 구약의 의식적 안식일은 폐지되었고, 신약에서는 어떤 한 요일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선포와 성례의 시행을 위하여 한 날을 정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가르친다.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하나님께서 한 날을 정하여 공 예배룰 드리고 교회의 사역을 통해 영혼들을 돌보도록 섭리하신 것은 교회의 큰 축복이며 죄성이 있고 연약한 모든 성도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둘째, 이 날을 통해 노동으로부터 사람들이 노고로부터 쉼을 얻게 하는 일도 구약이나 신약에서 중요한 안식의 목적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집회를 명령하셨고, 이 집회는 성도들의 신앙의 보존과 성장을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집회 제도와 일정한 날을 정하지 않는다면, 전 성도가 함께 지교회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교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집회가 가능하도록 질서를 부여해 주셨습니다(고전 14:40). 규정이 없으면 질서를 유지할 수 없고, 따라서 교회가 즉시 혼란과 파멸의 위험성에 빠지게 되어 성도들이 흩어지게 됩니다. 오늘날 주일성수가 범해지고 와해되면 성도들은 흩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매일 매일 모여 주일처럼 예배하고 교제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영적인 안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바 우리는 매일 매일 모여 예배드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혹자가 우리가 날들의 구별을 일체 철폐하고 매일 모이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렇게 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영적 지혜를 위해서는 매일 얼마만큼 시간을 배정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연약해서 매일 모일 수 없고, 사랑의 원칙이 그들에게서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무슨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정해 주신 질서에 복종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 나라같은 경우 성도들이 주일 외에 새벽기도회, 수요집회, 금요기도회와 같은 집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고 교제할 기회를 갖게 한 점을 가지고 부정적으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질서를 위해 한 날을 정하신 바를 잘 알고 주일 외에 집회들을 율법주의적인 의미로 여기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으면 자주 모이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주일성수를 하며, 시간과 열심과 사랑이 허락되는 한 자유 한 마음으로 영적 유익을 위해 다른 날 약속된 집회에 참여하는 것은 많은 유익을 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익을 위해 주일, 곧 일요일을 공적 모임의 날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구약의 안식일을 장차 올 일의 그림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그림자가 가리키는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취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날을 어떤날보다 중히 여기거나 더욱 신비한 힘을 부여하는 것은 미신입니다(갈 4:10-11). 그러므로 주일 한 날을 정한 것은 그 날 자체에 영험한 능력이나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이 날을 정함으로써 전체 성도의 집회가 가능해지고, 질서 가운데 말씀을 선포하고 성례를 집행하며 교회의 공적 사역을 집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일요일이 주일이 된 것은 먼저 토요일을 피함으로 구약의 율법주의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며, 한편으로는 일요일이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니 신약의 교회가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는 요일로서 적합하다고 여긴 것입니다.구약의 안식이 가리키던 바는 주의 부활에서 목적이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일을 공적 집회의 날로 정하는데 그 의미가 반영된 것입니다.

4. 주일을 어떻게 성수해야 하는 것일까요?

주일을 온전히 성수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주일에 예배 가운데 공적인 사역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말씀 선포와 성찬을 성실히 집행하는 사역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주일의 목적을 추구해야 합니다.

첫째,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을 쉬는 영원한 안식을 평생 명상해야 합니다. 주께서 성령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게 해야 합니다. 주일은 말씀과 성례를 통해 주님을 바라봄으로, 말씀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각각 개인적으로 틈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활동을 부지런히 그리고 경건하게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며 성례전을 집행하며 공중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가 제정한 합법적 질서를 일제히 지켜야 합니다. 특별히 주일의 공적 사역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상와, 장로와 집사라는 공적 직분들을 통해 집행되어야 합니다. 목사는 말씀 선포와 성례전을, 장로들은 영혼들을 영적으로 돌보는 일을, 집사들은 사랑의 사역으로 약한 자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셋째로, 기독교인들은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하지 말며 압박해서도 안되며, 그들을 육체적 노동으로부터 쉴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이러한 주일 성수를 하는 목적과 주일 성수하는 방식은 교중 성도들의 경건이 소멸하거나 쇠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성회를 부지런히 출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성경에 부합하고 어긋나지 않는 외면적 질서와 수단들을 이용해야 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주일성수의 중심에는 말씀 선포와 성례전이라는 교회의 표지가 세워져 있습니다. 우르시누스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설집에서 주일 성수의 목적이 말씀 선포와 성례전 집행과 구제의 사역이라고 할 때, 이 사역들은 교회가 그 부르심을 따라 세운 공적 직분자들에 의해 수행되는 사역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직분이 바로 서야 교회의 공적 사역이 바로 설 수 있으며, 이 공적 사역자들과 사역을 통해 주일은 은혜로이 지켜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르시누스는 제 4계명을 다루며 안식일 해설 가운데 교회의 표지와 봉사를 다루며 직분론을 함께 다루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주일 성수의 목적이 하나님을 말씀 안에서 바라봄으로 성령 안에서 그분의 구속의 은총에 참여하고 더욱 큰 힘을 얻는 것이라면, 사역자들은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더욱 힘써 연구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성도들은 목사를 위해 기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역을 소홀히 여기는 사역자에게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말씀을 준비하는 목사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성도들도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조직되면 장로님들이 전한 말씀을 성도들이 누리고 사는지 살피며 그들을 사랑의 권면으로 돕고 돌보는 일을 위해, 그리고 집사들이 사랑의 손길이 되어 연약한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도록 모든 성도들이 직분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주일은 질서 가운데 주일에 모여 성도들이 말씀선포와 성례 가운데 예배하고, 사랑으로 교제하고 돌보며 주의 부활의 생명을 찬양하고 누리고 공급받는 날인 것입니다. 이 한 날을 정한 것은 6일 노동 하루 안식이라는 창조질서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성도들의 연약함 때문에 질서와 교회 예배와 집회의 유지를 위해 주님께서 부활하신 요일로 주일을 정한 것입니다. 주일 성수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주님의 부활을 묵상하고,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 안에서 이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욱 힘을 얻어 세상을 이길 힘을 공급받는 날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주일은 우리 인생의 일주일의 중심에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 예배와 사역을 통해 지난 6일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용서받고 새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주일을 중심으로 앞으로 올 6일을 준비합니다. 주일에 은혜를 받아 다가오는 6일을 헤쳐나갑니다. 말씀과 성령 안에서 성화의 싸움을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6일의 과거를 주일날 말씀 안에서 정리하고 6일을 은혜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만일 험한 세상을 살며, 죄성이 남겨진 우리들이 주일 없이 예배 없이 세상에 직면할 때 우리의 영혼이 그리고 교회가 어떻게 될 지는 뻔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권고합니다.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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