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봉수 목사 / 상도중앙교회 담임
본문 / 출애굽기 20장 14절 [ 동영상으로 보기 ]
▲ 박봉수 목사 |
오늘 본문은 십계명의 제 일곱째 계명입니다. 계명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그런데 이 계명은 그 형식이 “살인하지 말라.”라는 여섯째 계명과 똑 같습니다. 이것은 간음이 살인만큼이나 해서는 안 되는 죄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은 살인을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간음도 결코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간음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간음이란 무엇일까요? 간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이토록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서는 안 되는 일로 강력하게 금하고 계신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간음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원어 “나아프”(Naaph)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나아프라는 말은 결혼하여 부부관계를 맺은 사람이 배우자 외의 다른 사람과 성적관계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를 보다 깊이 이해하려면 렘 3:8 말씀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 아닌 우상을 숭배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한 것은 하나님께 대해 나아프 즉 간음했다고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영적 간음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특별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특별한 약속을 맺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혼인서약을 하여 부부가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큰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에 금이 가게 됐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이 파기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영적 간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간음이란 단순한 음란 행위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 중 한 사람이 배우자 아닌 다른 사람과 성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배우자에게 큰 상처를 입힌 행위입니다. 부부관계에 금이 가게 만든 일입니다. 그리고 부부가 맺은 혼인 서약이 파기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 두 사람을 부부로 짝 지어주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정면으로 부정한 일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성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저지르는 음란 행위만을 문제시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매매라든지 부적절한 성관계만을 문제시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간음의 이 중대한 죄성을 간과하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간음을 미화합니다. 부부가 배우자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서 벌이는 애정행각을 사랑이라고 미화합니다. 두 사람이 부부 관계에서 맛보지 못하던 절절한 사랑을 나눈다고 아름답게 그립니다. 대부분의 영화, 드라마, 문학 작품들이 이렇습니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간음의 이 심각한 죄성을 덮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음란한 세대의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음란한 세대의 실체입니다.
간음은 왜 해서는 안 되는가?
그러면 간음은 왜 해서는 안 되는지를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간음은 이웃 사랑을 가로막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에게 사랑대신 큰 고통을 가져다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처럼 십계명은 요약해 보면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입니다. 1-4계명이 하나님 사랑에 대한 계명이라면, 5-10계명은 이웃 사랑의 계명입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 가운데 먼저 5계명은 부모님께 효도하라고 함으로써 가장 실천하기 쉬우면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이웃사랑을 말씀했습니다. 다음으로 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고 함으로써 이웃사랑의 최소한의 한계를 말씀했습니다.
이제 7계명은 우선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하기 위한 최소한의 한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성의 이웃을 사랑하고자 할 때 피해야 할 걸림돌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간음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영혼을 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잠 6:3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간음하는 자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적인 욕망에 눈이 멀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영혼이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간음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수가 없습니다. 간음이라는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마치 남북 간에 휴전선 철조망이 가로막아 남북한 사람들이 왕래할 수 없는 것처럼, 간음이라는 죄가 하나님과 간음한 사람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문이 닫힙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도 막힙니다. 찬양의 입이 열리지 않습니다. 예배를 영으로 진리로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간음은 영혼을 망하게 만듭니다.
다윗이 이런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했습니다. 그 이후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영적으로 너무도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셔야 했습니다(시 6:6). 그리고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라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문제는 간음한 자는 자기만 영혼이 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함께 간음을 저지른 그 사람도 역시 영혼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과 간음을 저지른 밧세바는 어땠을까요? 물론 왕의 강압에 못 이겨 간음에 끌려든 측면이 있긴 합니다. 그러나 거절하지 못하고 간음하여 아이까지 낳게 되면서 밧세바 역시 그 영혼이 큰 고통을 겪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간음은 이웃의 영혼을 망치는 일입니다. 그들의 영혼을 고통의 수렁 속에 빠뜨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간음은 이웃을 위해서라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공동체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창2:24을 보면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부부는 결혼을 통해 서로 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미국인들은 자기 배우자를 부를 때 여러 가지 표현을 씁니다. 공식적인 표현으로 “my wife”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사적인 표현으로 “my honey”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보다 깊은 뜻을 담아 “my half”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말은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을 이룬다는 성경적 표현에서 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부부는 둘이 한 몸을 이룬 사람들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하나를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간음은 부부 중 한 사람이 육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부부 아닌 다른 사람과 부분적으로 하나를 이루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간음은 부부의 하나 됨을 깨뜨리는 행위입니다. 부부라는 가장 견실해야 하는 공동체를 깨뜨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래서 간음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간음으로 부부 관계가 깨지면 가정도 깨집니다. 우선 자녀들은 어떻게 될까요? 부부가 간음 때문에 관계에 문제가 생긴다면 자녀들은 누구 편을 들어야 할까요? 그러다 이혼이라도 하면 자녀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엄마 아빠가 남이 됐는데 자녀들은 엄마 아빠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며 또 자녀들 사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다음으로 양 가문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간음으로 부부 관계에 문제가 생긴다면 양가 부모들은 정말 입장이 난처해 질 것입니다. 그러다 이혼이라도 하면 며느리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며, 또 사위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간음은 가정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가정 공동체의 구성원 모두를 힘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간음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 22:22을 보면 주목할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간음한 사람들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저들을 죽여서 공동체 내부의 악을 제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막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기 시작한 때 주어진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백성 공동체로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다른 이방 백성들과 성별되는 백성 공동체로 세우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간음이 일어나면 신앙 공동체가 파괴됩니다. 한 믿음으로 서로 형제요 자매의 영적 우정을 쌓아왔던 공동체가 큰 상처를 받습니다. 간음이 일어나면 그 사람들은 더 이상 신앙공동체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공동체를 파괴하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간음은 전염성이 강합니다. 마치 독감이 번지듯이 공동체에 확산될 수 있습니다. 이 간음을 허용하게 되면 그 분위기가 번져서 공동체의 거룩성을 훼손하고 공동체를 심각하게 흔듭니다.
그렇습니다. 간음은 공동체를 심각하게 훼손합니다. 공동체를 파괴하고 특히 공동체의 거룩성을 훼손합니다. 그래서 간음은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간음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그러면 간음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우선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마 5:27-28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올바로 해석해 주신 것입니다. 사실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형식적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단지 간음이라는 행위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간음이라는 행위 이전 마음의 간음까지도 해서는 안 된다고 해석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간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으로 간음을 저지르는 겉사람의 간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몸으로 간음을 저지르는 속사람의 간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겉사람의 간음은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의 간음도 최선을 다해서 막아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사실 성적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성적 욕구가 조절되지 못하면 성적인 욕망으로 분출되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의 간음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절제되지 못할 때 몸의 간음이 저질러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정말 음란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도덕과 윤리라는 빗장이 있어서 성적 욕망을 제어하는 데 나름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는 이 도덕과 윤리라는 빗장이 풀려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성적인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됐습니다. 성을 자유롭게 추구하고 향유할 수 있게 됐습니다.
게다가 그나마 법적인 장치라는 빗장마저 풀려져 버렸습니다. 1953년에 우리나라 형법에 ‘혼인빙자간음법’이라는 것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랜 논란 끝에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헌법재판소가 2009년 11월 26일에 이 법에 대해 위헌판결을 내렸고, 2012년 11월에 정식으로 폐지되었습니다. 그래서 간음을 저지르며 법 때문에 죄책감을 가지던 사람들이 죄책감을 털게 됐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가 눈만 뜨면 보고 듣는 이 문화적 환경이 성적 욕망을 자극한다는 것입니다. 인터넷, 스마트폰, TV, 영화, 드라마, 심지어 쏟아지는 홍보물에 이르기 까지 ‘섹스코드’가 넘쳐납니다. 그래서 이런 문화 속에서 스스로 마음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너무도 손쉽게 마음의 간음을 저지르게 만듭니다.
창 39장을 보면 요셉이 간음의 위기를 극복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7-10의 중요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그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더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한 마디로 요셉은 마음을 잘 지켰기 때문에 간음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자기의 마음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간음을 막아내려면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지켜보고 계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이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딤전 5: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사도 바울이 제자 디모데에게 주는 소중한 권면의 말씀입니다. 여자 성도들을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이 많은 여성들은 어머니를 대하듯 하고, 젊은 여성들은 자매를 대하듯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이것입니다.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온전히 깨끗함으로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음란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적인 대상으로 보는 눈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친 여동생을 대하듯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일전에 강남의 모 오피스텔에 성매매 단속반이 급습해서 업주를 비롯하여 성매매 여성들을 검거한 일이 있습니다. 경찰이 업주로부터 압수한 성매매 단골손님의 명단이 공개돼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들이 대부분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고, 나이도 50대 이상의 중년 남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장에서 검거된 성매매 여성들은 모두가 20대 앳된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은밀하게 성매매를 저지른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딸이나 딸보다 어린 여성들과 음란한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음란한 짓을 저지르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딸 같은 여성들, 여동생 같은 여성들을 성적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여성들을 성적 대상이 아니라 딸 친구로 여동생의 친구로 여겼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간음은 이성의 이웃을 진정한 이웃으로 볼 수만 있다면 막을 수 있습니다. 이성의 이웃을 성적인 대상으로 보기 때문에 저지른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성의 이웃을 대할 때 내 어머니 대하듯, 내 누이를 대하듯 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바울사도가 말씀하신대로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하라.”는 자세를 지켜가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십계명 일곱째 계명은 “간음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이성의 이웃을 사랑하는 최소한의 실천 지침입니다. 간음을 통해 영혼을 망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간음을 통해 속한 공동체를 파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마음의 간음을 저지르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성의 이웃을 깨끗한 마음으로 자매를 대하듯 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겉사람의 간음은 물론 속사람의 간음도 막아내야 하겠습니다.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5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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