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31일 마침내 총회역사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총회역사관의 문이 열렸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5월 25일 총회회관에서 제1차 연구학술세미나가 개최됐다. 이날 세미나는 교단의 정체성인 개혁신앙, 순교신앙, 세계선교 사역 중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순교신앙을 재조명하는 자리였다. 먼저 순교와 순직에 대한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순교와 순직에 대한 교단 차원의 매뉴얼 마련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어 순교자로서 주기철 목사가 수감됐던 의성경찰서가 기독교사적지로서 보존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논의됐다.<편집자 주>
순교자와 순직자 선정을 위한 성경적·역사적 고찰
순교의 성경적 이해와 선정 가이드라인 신약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순교는 스데반의 경우를 들 수 있다(행 7:54~60). 스데반의 죽음은 복음을 증거하는 현장에서 핍박자들에 의해 돌로 죽임을 당한 경우이다.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는 증인이 있었다. 증인은 바로 바울이었다. “사울은 그가 죽임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 7:60) 요한계시록 2장에는 안디바가 죽임을 당한 기록이 나온다. 성경은 안디바가 죽임을 당한 이유를 “죽임을 당할 때도 나의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 하였도다”(13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요한계시록에는 여러 익명의 순교자들이 거명된다. 그들은 죽기까지 신앙을 지키며 박해 가운데 죽은 성도들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계 6:9),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계 13:15),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계 20:4) 요한계시록에서 순교자들의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이유들을 밝히고 있다. 바로 ‘말씀의 증인’으로, ‘우상 숭배 거절’로, 그리고 ‘예수의 증언’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신약에 나타난 순교의 공통된 4가지 요건이 있다. 첫째는 실제로 죽임을 당해야 하고, 둘째는 예수의 증인으로 신앙을 지키고 복음을 전파하다 죽음을 당해야 하고, 셋째는 그리스도의 신앙을 반대하거나 증오하는 자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하고, 넷째는 박해 현장에서 죽음을 당해야 한다. 이러한 자료를 기초로 순교기준 설정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순교는 고귀한 것이다. 순교자 선정을 위한 엄정한 조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순직자 선정을 위한 가이드라인
순직자에 대한 사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순직의 관점에서 정리할 수 밖에 없다. 사전적 의미로 순직은 업무 중 사망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리고 업무의 종류에 대해서도 선별을 해야 한다. 그래서 순직자를 선정하기 위해서 두 가지 요건이 설정되어야 한다. 첫째로 순직자 구분에 필요한 사항은 교회의 직분이다. 교회에는 평신도 직분자인 유치원과 주일학교 교사, 사찰, 교회 차량 운전자로부터 성직자인 목사, 장로, 전도사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분자들이 있다. 그래서 이들 모두를 직분자로 포함할 것인지 아니면 어디까지를 순직자로 포함할 것인가를 선정해야 한다. 둘째로 순직자 선정에 필요한 사항은 업무 구분이다. 평신도나 성직자가 업무를 수행하다 사망한 경우인데, 업무의 종류와 사망한 경위를 파악해서 선정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가 강단에서 예배 중 설교하다 사망한 경우, 선교사가 사역을 하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경우, 교회 건축하다 사망한 경우 등 다양한 경우에 대한 선정 기준이 있어야 한다. 이처럼 순직자 선정의 범위는 많은 연구와 검토를 거쳐 규정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마무리하면서 염려되는 몇 가지를 정리한다. ①순교자와 순직자의 선정이 난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②순교와 순직의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③순교자의 정의는 엄선해야 한다. ④순직은 성경과 교회사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제도 도입에 있어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 ⑤순직과 순교는 기계론적인 규정에 의존하는 것 보다 많은 성도들에 의해 공감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
순교자 주기철 목사와 구 의성경찰서 관계 연구 주기철 목사와 의성경찰서 최근 주기철 목사에 관해 제기된 문제는 2016년 제101회 총회에 경중노회(노회장 하태봉)가 ‘주기철 목사의 일제 강점기 의성경찰서 수난 기념 사업의 건’이다. 그렇다면 주기철 목사와 구 의성경찰서는 어떤 관계가 있나? 주기철 목사는 제2차 검속 기간인 1938년 8월부터 1939년 2월까지 의성경찰서에서 보냈다. 당시 주기철 목사가 의성경찰서에 수감된 표면적인 이유는 당시 의성읍교회의 담임목사인 유재기 목사(1905-1949)의 ‘농우회(農友會) 사건’과 연루해서였다. 농우회는 1931년 4월, 평양 서장대 기독교인 묘지 부근에서 열린 평양신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유재기, 배민수, 김철훈, 박학전 등이 모의하여 조직된 기독교 지하운동단체였다. 이 농우회는 겉으로는 농민을 계몽시킨다는 목적을 가졌지만, 실질적으로는 총독부 정책에 항거하는 신앙투쟁을 벌이기 시작하였고, 신사참배 반대와 복음운동, 신앙운동이 주된 활동이었다. 주기철 목사가 마산 문창교회에서 사역할 때 경남노회 주최 농촌 수양회에 유재기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여 여러 날 함께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1938년 8월 18일 평안남도 경찰당국은 주기철 목사를 의성으로 압송해 의성경찰서에 구속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의 의성경찰서 검속의 실질적인 이유는 1938년 9월에 있을 장로교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할 것을 염두에 둔 예비적 조치였다. 예수교 장로회 총회 직전에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주기철 목사를 검속함으로 막강한 교세를 자랑하는 평남노회를 와해시키면서 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가결을 단행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약 7개월 동안 의성경찰서에서 수감되는 동안 주기철 목사는 ‘오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유수의 설교를 작성하는 등 그의 순교사상이 구체화 되었다. 따라서 의성경찰서는 그의 순교신앙의 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구 의성경찰서 건축물에 대한 자료 검증
현재 경상북도 의성읍 후죽리 678-2와 678-8 번지에 위치한 와가 건물이 일제 강점기 구 의성경찰서라는 의견이 제시되어 검증이 요구된다. 현재 오른쪽 678-2번지 건물은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지만 <의성읍지>에 따르면 의성읍의 유일한 문화재로서 1965년에 대대적으로 수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678-8번지 건물은 현재는 재활용센터로 활용되고 있는데 겉모습은 원형을 거의 상실했다. 이는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용도 사용되면서 생긴 결과로 추정된다. 보다 분명한 또 하나의 자료는 1942년 신사참배와 의성읍교회 폐문 문제로 의성경찰서에 수감되었던 적이 있던 정운권의 증언이다. 그가 쓴 <칠년대환란과 천년왕국>이란 책에 당시 의성새마을 유아원으로 사용하던 후죽리 678-2번지 와가 앞에서 직접 ‘일제 때 의성경찰서’라는 설명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다. 또 이 장소가 일제 강점기의 의성경찰서였다는 의성철파교회 담임인 추성환 목사와 철파교회 신해준 원로장로, 철파교회 안영순 원로장로, 제일교회 오세원 원로장로 등은 물론 지역주민들의 증언을 확보했다. 이상과 같은 자료와 증언에 의하면 현재 후죽동의 와가는 일제 강점기 때에 의성경찰서로 사용하던 건물이 확실하다. 의성읍의 후죽동 와가가 가지는 역사적인, 특히 교회사적인 의의를 생각해 볼 때 이 건물은 사적지로 보존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특히 이 건물은 주기철 목사의 순교와 관련되어 남북한 전체를 통틀어 유일한 보존 유물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잘 보존되고 관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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