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적인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은 아무 공로 없으나 소망과 함께 하며 사랑으로 역사한다
■ 믿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 이신칭의(以信稱義), 이를 루터는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근본조항이라고 주장하였고, 칼빈은 구원의 문이 돌아가는 중심축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은 무엇인가? 칼빈은 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굳고 확실한 지식이다.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신 약속의 진리에 기초하는 것으로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계시되고 우리의 심장에 새겨진다.”(<기독교 강요>, 3.2.7)
믿음은 단지 추상적인 관념이나 심리적 정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성령의 역사로서, 거듭남의 은혜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는 것(credere, to believe)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말씀을 듣는 것(audire, to hear)이다. 그 들음은 귀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 믿음은 말씀으로부터 나오고, 말씀에 머물며, 말씀을 지향한다.
“믿음을 떠받쳐서 지탱하는 기초는 말씀이다. 말씀이 빗나가면 믿음은 쓰러진다. 그러므로 말씀을 제거한다면 결단코 아무 믿음도 남지 않는다.”(<기독교 강요>, 3.2.6)
빛이 태양의 소산이듯이 믿음은 말씀으로부터 나오는 거역할 수 없는 진리를 실어 나른다. 믿음은 말씀을 통한 성령의 효과적인 작용으로 말미암는다. 이 점에 있어서, 칼빈은 믿음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감화(persuasio, persuasion)”라고 부른다.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지식과 그 선하심이 실재함에 대한 확실한 감화이다.”(<기독교 강요>, 3.2.12)
이렇듯 “믿음의 역사”는(살후 1:11)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택함 받은 백성이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되는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성자로서 스스로 말씀이시고, 성령으로서 스스로 말씀하시되,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그 말씀의 은혜를 누리게 하신다. ‘구원의 역사’가 오직 여기에만 있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이 없고, 말씀을 들음이 없이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없다(롬 10:17).
■ 믿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유일한 것
하나님은 아들의 다 이루신 의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되, 그들의 믿음을 보신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히 11:6).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도(聖徒)’라고 불리고, 교회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교인(敎人)’이라고 불린다. 이러한 칭호들이 주어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아들을 믿는 ‘신자(信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것은 믿음밖에 없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유일하게 칭찬하신 것은 믿음이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이 방황하던 열 두해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도(막 5:25~34), 변방에 내버려져 나그네의 적선으로 살아가던 맹인 거지 바디매오도(막 10:46~52), 최전선에서 전쟁을 주도하며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하루하루를 그저 운명에 맡기고 연명하던 이방 백부장도(눅 7:2~10),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본적이 없다”라고 하시면서 칭찬하셨다. 믿음만 있으면 칭찬하셨다. 반면에 주님은 믿음 없음만 나무라셨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 4:40)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눅 9:41)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8:26) 하시면서 불신(不信)을 책망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말(馬)의 힘이 세다고 해서, 우리의 다리가 억세다고 해서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그를 경외하고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기뻐하신다(시 147:10~11). 즉 우리의 소유도 자질도 문제 삼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요구하지 아니하시고, 그 자신이 친히 행하신 일을 우리가 인정하기를 원하신다. 그가 우리에게서 찾으시는 것은 우리의 공로, 자질, 족보, 신분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다. 여기에 구원의 대원리가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 전적인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
믿음 외에는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없다. 이는 오실 예수를 바라보던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다를 바 없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을 자기 백성 삼으시되, 그들의 믿음을 그 의로 여기셨다(창 15:6).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는 생래적으로 사망에 속하고 전적으로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하여 그 무엇으로도 스스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의 언약으로 그 길을 여셨으니,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사는 길이었다. 의인은 없되, 하나도 없고, 여호와를 찾는 이도 없지만(시 14:1~4; 53:1~4), 하나님은 믿음을 의로 여기셔서 택함 받은 자기 백성을 살려내고자 하셨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참조. 합 2:4; 갈 3:11)
생명은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명령에 스스로 순종함으로써 취해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의를 다 이루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주어진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롬 3:28). 우리 구원을 위하여 “오직 믿음의 법”이 역사한다(롬 3:27).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 외에는 구원의 의가 없다(롬 3:22). 이를 위하여 아버지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한 “큰 일”을 자기와 하나이신 아들을 통하여 친히 이루셨다(행 2:11; 요 10:30; 참조. 시 126:2~3).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하나님은 오직 우리의 믿음만 헤아리신다. 무조건적인 은총을 베푸시되, 오직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하신다. 믿음이 공로는 아니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가 없다.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주지 않으신 것은 찾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게 하시고, 우리 안에서 믿음을 찾으신다. 그러므로 믿음도 은혜이며, 은혜가 믿음보다 앞선다. 달리 말하면, 믿음은 오직 은혜로만 역사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 2:5)
■ 믿음은 도구일 뿐 공로가 아니다
믿음은 전적인 은혜의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을 믿는 것, 곧 우리 속에 믿음이 주어져 있음을 믿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것조차 우리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의 태생이나 의지나 뜻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우리가 창세 전에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기 때문이다(요 1:13). 그러므로 믿음 이전에 은혜가 있고, 은혜 이전에 영원한 작정이 있다.
칼빈은 예정론을 통하여 이를 확정함으로써 종교개혁의 신학적 체계를 완성시켰다. 하나님은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시는 바(요 8:30), 정하신 자에게 믿음을 주심으로써 그리하신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오직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부여된다(살전 1:4~5; 딛 1:1).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성도는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되는 생명의 길에 서게 된다(유 1:3).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믿음은 ‘거짓 믿음’이며(마 15:13), ‘참 믿음’을 가지고 끝내 파선(破船)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딤전 1:19; 3:9).
▲ ●기고 문병호 교수 (총신 신대원) |
믿음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지만, 믿음에는 아무 공로도 없다. 유일한 공로, 유일한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밖에 없다. 믿음은 공로를 얻는 도구일 뿐, 공로 자체가 되지 못한다. 아들을 믿고 그의 공로에 대하여 ‘아멘’하는 것이(고후 1:20) 믿음의 본질을 이룬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곧 소망의 실상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고 참는다. 그것만이 참 소망이기 때문이다(롬 8:24~25). 믿음은 항상 소망과 함께 하며(벧전 1:21),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한다(갈 5:6). 이렇듯,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모두 전적인 은혜이다(살전 1:3).
영원히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Soli Deo gloria in aetern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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