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9:9-13. 하나님을 만남 | |
1.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물론 하나님의 은혜를 바탕으로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결코 하나님을 알 수 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구세주로 인정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가질 수 있다.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5:17)’라는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것으로서의 삶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새것으로서의 삶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전제된 삶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베드로처럼 자신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삭개오처럼 삶의 가치가 변하기도 한다. 그리고 바울처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빌립보서3:7)’여길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만남으로 우리는 모세처럼 잃어버렸던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모세는 바로를 피해 광야로 나가 40년을 살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상실했을 것이다. 수만 명의 애굽 군대를 지휘하던 모세가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양치기로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마 자신의 사라진 정체성으로 인한 혼란이었을 것이다. 그 모세에게 하나님은 만남을 요구하셨고,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새로운 40년의 삶이 열리게 된다. 아마 상실한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새로운 실존에서 해결되었을 것이고,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을 나와야 한다는 새로운 사명이 모세를 우리가 아는 못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렇게 새로운 실존을 만들어가는 원리이다. 2. 요한은 그의 공동체에게 계시록을 쓰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강조한다. 요한 계시록의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당하고 있는 삶의 고통의 이유가 사탄의 역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이기셨고, 사탄을 결박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금 당장은 현실적인 삶의 고통과 만날지라도 ‘삶에서 만나는 하나님’으로 인해, 그리고 이미 승리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승리의 삶을 누리자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히브리서2:1)’믿음으로 굳게 잡음으로 바람에 밀려 떠내려가는 배처럼 예수님으로부터 떠밀려 가지 말자는 말이다. 히브리서가 쓰여진 삶의 정황도 역시 요한계시록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았던 예가 바로 요셉이었다. 요셉은 끝 모르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삶에서 꿈을 주신 하나님을 잊지 않은 사람이고, 결국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와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 사람이다. 그래서 형들을 만났을 때, 요셉은 하나님이 섭리를 이야기할 수 있었고, 야곱이 죽고 난 이후에 두려움에 떠는 형제들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렇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실존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위해 살아가게 우리를 이끌어준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이 바로 그런 하나님의 원하심을 삶에서 이루어가려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성이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애통함을 느끼는 자들이고, 하나님 앞에서 가난함을 깨닫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삶에서 이루어내는 사람들이다. 3.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과 갈멜 산에서 한판 붙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불로 입증함으로 승리를 거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스라엘 왕 아합의 부인인 이세벨의 위협을 받는다. 영적인 승리와 함께 영적인 대적들을 진멸하는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현실적인 위협 앞에서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열왕기상19:3-4)’했다. 그리고 로뎀나무 아래서 잠이 든다.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의 이런 모습을 ‘탈진’이고, 이런 엘리야를 하나님께서 격려하심으로 엘리야가 새로운 일을 할 수 있게 만드셨다고 말하지만,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한다고 자신의 처지를 말에 비추어 보면, 마치 물위를 걷다가 바람과 파도를 보고 바다에 빠졌던 베드로같이 엘리야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하심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온전한 만남이 깨지고 만 것이다. 그런 엘리야를 하나님은 만나주시고, 만남을 통해‘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엘리야는 자신의 특별한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자신 외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없다고 말하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4. 문제는 엘리야가 예상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데 있다. 엘리야는 아마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열왕기상19:11)’는 강한 바람같은 음성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기대했을지 모른다. 아니면, 지진이나 불과 같이 엄청난 초자연적인 상황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엘리야에게 실망스럽게 하나님은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신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신다.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엘리야는 살아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신다. 그 삶의 정황이나 삶의 문제로 고통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만남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래서 다윗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시23:3)’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만난 자들의 노래는 이럴게 만들어진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말이다. 삶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야기하는 우리가 되자. 연락처 ☎070-7817-3627, 010-8952-3627(오성환 목사) E-Mail : shsiny@hanmail.net 주소 : 광주시 서구 계수로51번길 4-4(쌍촌동 1318-1) 20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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