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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부패의 원인이 ‘이신칭의’? 안주하려는 인간의 본성 탓

칭의

by 김경호 진실 2017. 11. 3.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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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평가절하하고 행위를 우상처럼 떠받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몽주의, 실존주의 기독교인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의 언행을 보면 마치 선행이 지상목표인 것처럼 보여질 정도입니다. 물론 명분상으로는 자신들도 믿음을 중시한다고 말하며, 그들이 행위를 강조하는 것은 참된 믿음의 구현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저의를 들여다보면  믿음을 하찮게 여기는 속내가 감취어져 있습니다.




초점이 다르긴 합니다만, 이 점에서도 루터(Martin Luther)는 귀감이 됩니다. 종교개혁 초기 그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를 들고 나왔을 때, 믿음의 강조가 혹 그리스도의 공로를 퇴색시킬까 노심초사하여, 이신칭의를 말할 때는 언제나 '그리스도로 인하여'를 첨가시켰습니다. 오늘날 행위를 강조하는 이들의 어법에는 이런 루터의 조심성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가 이신칭의를 견지하려고 노심초사 하는 것은 이런 루터의 심정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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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의 근저에는 믿음이 온 인류의 선행보다 무겁고, 그 믿음이 천하보다 귀한 그리스도의 피 위에 세워져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믿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해 믿는 자를 의롭다해 주십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5-26).'


만약 믿는 자를 의롭다 해 주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핏빛 공로는 그 빛이 바래지고, 하나님의 의로우심도 드러나지 못합니다. '내 평생 소원 이것 뿐'이라는 찬송가에서 '금보다 귀한 믿음이 참 보배되도다'라며 믿음을 칭송한 것도, 믿음이 기반한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입니다. 만약 누가 어떤 것을 믿음과 나란히(side by side) 두거나 믿음 위에(over faith) 둔다면 이미 믿음을 멸시한 것이고, 믿음의 근간인 그리스도의 대속을 역린(逆鱗)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믿음에 집착하며 이신칭의 공격자들에게 맨몸으로 맞서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이 참에 다시 한 번 이신칭의 공격자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신칭의에 대한 그들의 공격에는 언제나 기독교 타락이 명분으로 내걸리는데, 이신칭의가 타락을 낳았다는 추정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며, 기독교 타락의 주범이 이신칭의라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기독교 2천년사에서,-박해받던 초대교회, 종교개혁 어간의 100여년, 그리고 청교도 시대 외에-언제 부패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까?


교회의 이상적인 모델이요, 말세 교회의 표상인 초대교회(아시아 7교회)까지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는 시대를 막론하고 지상의 교회는 온전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들의 문제는 오늘날 칭의유보자들이 물고 늘어지는, 믿음과 행위의 변증법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오히려 더 많은 행위, 열심, 인내가 있었음에도 책망을 받았으며, 그 핵심적인 요인이 첫사랑의 상실이었습니다(계 2:2-4).


두아디라교회 역시 행위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영적 행음 때문에 책망받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행위(deeds), 사랑, 믿음, 섬김, 인내가 있었습니다(계 2:19-20). 차지도 뜨겁지도 않아 토하여 내침을 받으리라고 했던 라오디게아 교회는 육신의 부요함으로 인한 나태함과 미지근한 신앙이 책망의 요인이었습니다(계 3:16-17).


중세 1천 년간 로마천주교의 타락 역시, 행위의 부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력 구원의 교리적 부산물인 금욕주의, 면죄부, 보속(sacramental penance)을 위한 선행들이 넘쳐났습니다. 중세교회 문제의 핵심은 교회에로의 부와 권력의 집중과 그로 인한 배부름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과 유럽 교회를 막론하고 기독교의 부패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20세기 중반부터 이제껏 세계가 이처럼 풍요와 평화를 구가한 적이 없는데, 이는 기독교의 속화와 무관치 않습니다. 물론 그와 함께 기독교의 자성도 넘쳐났고, 교회 개혁에 대해 많은 논의가 이뤄진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19-20세기 실존주의의 등장으로 교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있었고, 여기서 파생된 무교회주의의 가세까지 합해져, 교회에 압박을 가했지만, 신학적 빈곤성으로 인해 사변적 놀음으로 끝났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이즈음 역시 신학자들이 앞다투어 교회 부패를 논하고 개혁의 담론들을 쏟아내지만, 추정컨대 이 역시 사변적 말잔치로 끝날 뿐, 교회는 여전히 지금의 모습 그대로 존속할 것입니다. 개혁을 외치는 신학자들이나 개혁의 대상인 교회들이나 풍요와 편안함 속에서 부르짖는 개혁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합니다. 전적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의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이런 분위기에서는 스스로 변화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말한 말세의 전형적인 특성이기도 합니다(살전 5:3).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고난이 오기 전에 먼저 스스로 회개해야 한다고들 말하나, 사실 이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안주를 꿈꾸는 죄인의 본성상, 외부의 충격 곧 고난의 주입없이 자의적인 개혁은 불가능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사랑하여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신다면-정말 생각하기조차 두렵지만-고난을 주실 것이라는 전망을 가집니다.


실제로 교회사에서 성도의 신앙이 온전히 빛을 발한 것은 고난과 시련의 때뿐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신사참배로 여수 교도소에 구금돼 있다가 해방으로 풀려나, 한동안 편안함을 구가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은 부지불식간에 안일함에 빠져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나를 다시 여수교도소로 보내주소서'라고 기도했다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시대를 불문하고 성도들이 속화되는 가장 큰 이유는 어떤 교리 때문이라기보다는, 부와 안일함에 안주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인간은 등 따시고 배부르면 한 눈 팔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그들의 소출을 풍성케 했을 때 그 땅에 주상을 많게 했습니다(호 10:1).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이에 때때로 시련과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도 이런 인간의 부패성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환난이 갖다 주는 인내와 연단은 성도로 하여금 세상의 유혹을 끊고 오직 하나님만 소망하게 합니다(롬 5:3-4).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낮추시고 주리게 하신 이유도, 세상의 부요함이 아닌 하늘의 만나로 그들의 양식을 삼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신 8:3).


다시 말하지만 교회의 부패는 풍요와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인간의 본성에서 기인합니다. 만일 교회 부패의 원인이 이신칭의라면, 그것의 부작용을 예상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구원 경륜으로 삼으신 자체가(엡 3:11-12) 하나님의 실수입니다. 이는 이신칭의가 구원이 경륜이 아니라 인간을 실족시키는 방편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부작용을 먼저 알아차린 칭의유보자들의 권고를 받아 하나님이 다시 그 경륜을 철회하셔야 한다면, 칭의유보자들이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자들이 됩니다.


공격자들이 항상 이신칭의의 부작용(?)이라고 말하는 교회의 방종과 부패는,-이미 오래 전에 유대인들을 통해 보여주셨듯-자기 의(義)에 배부른 교만한 자들의 실족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표입니다(벧전 2:6-8).


마지막으로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요즈음 하도 칭의유보자들이 행함이 중요하고 한국교회에 행함이 없다고 난리를 피우니, 사람들은 뭐든지 행하여 믿음이 있는 척 해보려고 합니다.


물론 선행을 학습할 필요는 있습니다. 꼭 행동주의(behaviorism) 교육학자들의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선행을 알아도 잘 해보지 않으면 실천하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어려서부터 예배, 기도, 선행 같은 좋은 습관을 몸에 배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선행이 믿음을 앞설 수 없으며, 선행이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기독교는 중생을 부인하는 행동주의(behaviorism) 교육학자들의 주장처럼, 행동을 통해 사람을 변화시키려하기보다는, 중생의 믿음에서 선한 행동을 이끌어내려는 성경적 원리를 따릅니다. 믿어 의로 거듭난 성도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은 그의 선행의 동인(動因)입니다(빌 1:6).


우리 신체 구조를 보더라도-그가 뇌와 육체의 기능이 정상이라면-행위를 유발시키기 전에 먼저 뇌에서 명령을 하달합니다.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뇌의 명령 없이 행위가 이뤄지는 일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행동 명령자인 믿음 없이 행함이 일어날 수 없으며, 동시에 사령부인 믿음이 명령을 하는데 손발이 가만히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이 원리대로라면 행함이 없음은, 행함을 명령하는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행함을 강조하기 이전에 행함의 원천이요, 행위의 명령자인 믿음을 먼저 강조합니다. 기독교 윤리를 '신앙의 윤리(The Ethics of Belief)'라 함도, 모든 것에 있어 먼저 믿음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여 거룩한 새 마음을 갖게 하고, 거룩한 열망이 생겨나게 하여(벧전 1:3) 행함을 낳습니다.


의(義)로 거듭나게 하는 참된 믿음은 신앙을 단지 의식의 차원에만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모든 백성 앞에서 자신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이다(시 116:12-14)'.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눅 19:8)'는 결단을 유발시킵니다. 삭개오의 그런 결단은 공격자들의 논리처럼 구원받기 위한 공로 축적용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그를 영접해 준 은혜 때문이었습니다(눅 19:5).


재차 강조하지만 믿음이 있는데, 행함이 없을 수 없습니다. 혹 그렇지 못한 경우가 생길 때도,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거기에 대한 근심이 생겨나고, 근심은 열심과 간절함과 분함을 일으킵니다(고후 7:11). 공격자들의 주장처럼, 어떤 사람에게 행함이 없음은, 구원에서 떨어질까 하는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정말 참된 신앙인이라면, 행함이 크든 작든,-때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작은 것이든-반드시 행함이 따릅니다. 혹은 진보의 속도가 너무 느려-사람들에게 쉽게 감지가 되던 안 되던-반드시 작은 진보라도 나타냅니다. 믿음만 있고 행위가 전무할 순 없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롯은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했고(창 18:3; 19:2),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두려움 없이 평안히 영접했고(히 11:31).


믿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을 돌았고(히 11:30), 믿음으로 베드로는 바다위로 걸음을 내딛었습니다(마 14:29), 참으로 거듭나게 하는 참된 믿음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가만히 있게 하지 못합니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304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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