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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이나 종교회의만 진리 정한다고 믿지 않아

김재성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7. 12. 7.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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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95개 조항과 면죄부(5)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7. 보름스 제국의회 앞에선 루터




1520년 한 해에 이처럼 절정에 달한 루터의 탁월함이 돋보이는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명성은 높아졌지만, 동시에 큰 재앙과 핍박도 더 크게 밀려왔다. 에크가 로마 교황청에 보고한 바에 따라서, 루터는 우물에 담겨있는 독이라고 규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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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10세는 1520년 6월 15일 루터를 출교한다고 선언했다. 42개 항목에 걸쳐서 루터의 이단성을 공표되고, 모든 글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실제로 피아자 라보나에서 루터의 책을 불태웠다. 이에 맞서서 1520년 12월 10일 아침, 비텐베르그 대학교에서 학생과 교수들이 교황청의 교서들과 스콜라주의 신학서적들을 불태웠다. 루터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 불길 속에다가 파문장을 던져버렸다. 그 파문장에는 "네가 하나님의 진리를 파괴했으므로, 오늘 주님께서는 너를 이 불길 속에서 파괴할 것이다"고 쓰여 있었다.


교황의 파문장에 맞서서, 루터는 다시 「적그리스도의 파문장에 대항하여」라는 강한 반박문을 발표했다. 1521년 1월 3일, 레오 10세는 출교서를 다시 공표했다. 이제 루터는 로마 교회로부터 모든 혜택과 지위를 잃게 되었고, 공식적인 이단으로 정죄를 당했다. 오늘날로 바꿔서 풀이해보자면, 한 사람이 그 사회에서 공민권, 혹은 시민권을 잃어버리는 처분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대체로 한 사람이 교회에서 파문을 당하면, 세속 군주들이 이에 상응하는 징벌을 내렸다.


그러나 황제 챨스 5세는 즉각적으로 루터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았다. 일부에서 황제의 처벌을 종용했지만, 그가 신중하게 대응했던 것은 루터를 지지하는 평신도들의 분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독일 지방에서는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루터편에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챨스는 자신의 취임식에서 독일지방에서는 본인의 소명을 듣지 않고서는 처벌하지 않겠다고 공언했었다. 황제는 루터의 책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고, 4월까지 보름스에서 열리는 의회에 나와서 증언을 하라고 소환했다.


    

▲루터가 동료 스투름과 함께 1521년 보름스를 향해서 갈 때, 그리고 돌아올 때 머물렀던 오펜하임. 작은 도시로 포도주 산업이 발달하다.

황제와 선제후들과 귀족들과 로마 교황청 고위 성직자들이 1521년 3월 6일, 보름스에 모였다. 황제는 루터의 신변을 안전하게 보장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미 보헤미아 콘스탄스에서 후스가 안전을 보장받았지만 화형에 처해진 것을 잘알고 있었다. 일단 이단으로 정죄를 당하면 더 이상 안전을 책임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선제후 프레데릭이 자신을 결코 보호해 준다는 보장이 없었다. 보름스는 하이델베르그 북쪽에 있는 작은 도시인데, 그들이 살던 비텐베르그에서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루터는 더 이상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그의 앞에 놓인 지옥의 문들이 분명히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나갈 수 밖에 없었다. 훗날 그는 "지붕위에 기왓장 보다 더 많은 악마들이 거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름스 의회에 나갔다.



1521년 4월 17일, 오후 네 시 창백한 모습으로 루터는 의회 앞에 세워졌다. 중앙 탁자에는 루터의 저술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리고 두 가지 질문이 던져졌다. "당신이 이 책들을 쓴 저자임을 확인해 주겠는가? 이들 가운데서 전부 혹은 일부라도 취소하겠는가?" 처음에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루터는 돌아서서 24시간 하룻 동안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다음 날 오후 6시, 사람들이 운집한 대성당에 다시 루터가 세워졌다.


황제와 군주들과 추기경들, 고위 권세자들이 모여서 그의 신앙을 점검하는 시간이었다. 루터는 10분 동안 독일어로 그리고 다시 라틴어로 매우 분명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그가 선포한 말들은 세계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새로운 개신교회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루터는 질문에 대해서 자신의 저술들을 철회하거나, 혹은 수정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전하의 위엄과 통치권으로 단순한 대답을 원하셨으나, 저는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하지 않고, 이런 방식으로 답변을 드리고자 하나이다. 저는 성경의 증언에 의해서나 제 맑은 양심에 의해서 확신하는 바에 따라서, 저는 교황이나 종교회의에서만 진리를 결정한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인데 이미 많은 오류들이 드러났고 서로 상충되는 바가 많으므로, 저는 성경에만 의존하며, 제 양심은 성경의 말씀에만 사로잡혀 있을 뿐입니다. 저는 그 어떤 것도 취소하지 않겠습니다. 왜냐면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며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제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아멘!"


대성당 내부에서 혼란이 일어났다. 챨스 황제는 매우 화가 치밀었다. 이제 충분히 들었으니 회의는 종결되었다. 루터가 큰 방을 나섰을 때, 스페인 마부가 소리쳤다.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네!" 마치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완수한 것과 같았다.


▲보름스. 1521년 루터를 심문한 대주교의 재판정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그 사건을 기념하는 곳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루터 동상과 12명의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의 동상이 세워졌다.

황제는 루터에게 4월 22일부터 24일까지 3일간을 더 연장해 주었다. 신학자들과 토론하라는 것인데, 트리에르의 대주교가 사회자로 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소득이 없이 끝이 났다. 루터는 황제에게 신변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편지를 보냈다. "저는 거룩한 말씀에 따라서 교회를 합당하게 개혁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염원이란 없습니다. 저는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악평과 불명예를 견디며, 생명을 포기하게 될 것이고, 황제 폐하의 권위와 제국은 평판이 나빠질 것입니다. 저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만을 증거하고 고백하는 자유를 원하는 것 뿐입니다."



다음 날 아침 4월 26일, 황제는 루터의 마차가 도시의 성문들을 무사히 빠져나가 집에까지 안전하게 호위할 것을 캬스파르 스투름에게 명령했다.


21세의 황제는 곧 바로 내전에 휘말려서 루터를 정죄하는 문서에 서명하지 않고 망설이게 되었다. 5월 12일,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과 네델란드 국경을 넘어섰고, 합스부르그 왕국을 공격했다. 프레데릭, 브란데부르그의 알브레트, 헤세의 필립 등 독일지역 군주들은 5월 25일 회의가 폐회되기 이전에 모두 떠났다. 5월 26일, 황제는 대성당에서 거행된 미사가 끝이 난 후에, 남아있던 고위 층과 협의하였고, 다음 날 루터가 이단이라는 문서에 서명하여 공표했다. 루터는 제국에서 법을 어긴 사형죄를 범한 자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할머니 집에 들른 루터 일행을 일단의 무리가 공격했다. 루터의 동료들은 숲으로 피신해다. 그들이 숙소를 공격했으나, 간발의 차이로 루터는 피할 수 있었다. 프레데릭의 도움으로 루터는 아제나흐 근처 숲에 있던 바르트부르크 성에 몰래 숨어들었다. 유명한 조각가이자 화가였던 알프레드 뒤러가 말한 바와 같이, "그 때 만일 루터가 죽었더라면, 누가 거룩한 복음을 우리에게 선포할 수 있겠는가?" <계속>





http://www.christiantoday.co.kr/news/294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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