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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고침의 은사에 대하여

이성호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7. 12. 27.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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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고침의 은사에 대하여




이성호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청소년 시절에 필자는 "신앙계"라는 월간지에 한동안 푹 빠진 적이 있었다. 그 잡지에는 항상 여러 종류의 기적적인 치유에 대한 간증이 실려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들도 실려 있었다. 필자는 그런 간증에 큰 매력을 느꼈고 그것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런 간증문들을 읽을 때마다 “정말 대단하다!”라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센가 모르게 그런 간증문을 읽지 않게 되었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신앙계를 읽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암이 나았다”는 것은 환자에게는 큰 복음일 수 있을 것이다.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암에 걸리더라도 나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병이 나았다”는 사실은 비교적 건강했던 필자에게 큰 의미가 없어졌다. 청소년 시절에 나에게는 학업이나 이성교제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였다. 결국 “병이 나았다”는 반복적 이야기가 점점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신유의 은사를 나도 가졌으면 좋겠다는 열망도 완전히 사라졌다.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보았을 때 병고침의 여러 간증들은 나의 삶에 아무런 영적 유익을 주지 못하였다. (실제로 병이 나은 사람은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병고침의 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아쉽게도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물론 병고침의 기사는 성경 여러 곳에 나온다. 또한 병고침의 은사에 대한 언급도 분명히 있다.(고전 12:28) 하지만 그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없다. 따라서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자의적으로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특히 성경에 기록된 병고침과 오늘날 일어나는 병고침을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성경에 기록된 병고침의 기사는 오늘날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로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구분해야 병고침의 은사에 대한 오류들을 최대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이 병고침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단언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이 가장 성경적이다. 그러나 병고침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이 부분만큼은 성도들은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한다. 이 부분만 제대로 성도들이 인식해도 병고침과 관련된 대부분의 그릇된 오류들로부터 스스로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병고침에 대한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동일하지 않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사역에 대한 기사가 많이 등장한다. 당연히 우리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기도를 통해서 병이 기적적으로 낫는 경우 그것을 구원과 동일하게 생각하기 쉬운데 이 경우 병고침은 오히려 참된 신앙에 큰 방해물이 될 수 있다. 병이 나았으나 그것이 오히려 불신과 심판에 대한 근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눅 17:17)

 

   둘째, 병고침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과 병고침의 은사는 다르다. 병고침이 복음의 본질은 아니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병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하고 있다. 특히 병이 들었을 때 성도들은 교회의 장로(목사)들을 초청하여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도록 해야 한다(약 5: 13-16). 그런데 야고보서가 이것을 명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목사가 병고치는 은사가 더 많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목사의 기도를 통해서 병고침을 받게 되면 목사의 말씀 사역도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접하게 되는데 병고침을 위해서는 누구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어떤 특별한 사람만이 병을 고칠 수 있다거나 더 큰 능력을 가진다고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실, 병을 고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목사를 초청하라는 야고보의 명령도 목사가 병고치는 능력이 더 많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목사의 기도를 통해서 병이 낫지 못하였다고 해서 더 “용한” 사람을 찾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셋째, 거짓 선지자들이 더 큰 병고침의 은사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은 마태복음 7장 마지막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거짓 선지자들은 1) “주여, 주여”하는 자들이다. 2) 주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자들이다. 3)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노릇”이라는 단어는 원문에 없음),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는 자들이다. 병고침은 “많은 권능”의 대표적인 예이다. 거짓 선지자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가? 주의 이름으로 열심히 사역을 했을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 거짓 선지자들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와 같은 행위들을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근거로 생각하였다. 거짓 선지자들도 얼마든지 병고침의 사역을 주의 이름으로 행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도 병고침에 대해서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넷째, 병고침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병고침과 오늘날의 병고침을 동일한 선상에 놓는 것이다. 어떤 목사가 맹인의 눈을 뜨게 했다고 가정하자. 그것이 예수님의 사역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다른 모든 행위도 마찬가지이지만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구속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하신 것은 본인이 세상의 빛이시라는 것을 증거하시기 위함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아무리 맹인의 눈을 많이 뜨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능력의 대단함을 나타낼 뿐이다.

 

   다섯째, 소위 병고침의 은사를 가진 자들 중에 가장 악한 자들은 병고침을 댓가로 돈을 요구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돈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가 신성모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생각 자체가 이교도적인 생각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성을 원하시지만 그 정성 때문에 움직이는 분이 아니시다. 구원과 마찬가지로 병고침도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질 뿐이다.

 

   여섯째, 병고침의 은사는 병고침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병고침의 은사는 그야말로 병고치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 같다. 즉 이 은사를 가진 사람이 “병이 나아라”라고 선언하면 병이 바로 낫는 역사가 일어난다. 상황에 따라 병이 낫기도 하고 안 낫기도 하는 것은 병고침의 은사로 보기에는 곤란한 것 같다.

 

   일곱째, 병고침의 은사와 관련된 논쟁 중 가장 치열한 부분은 이 은사가 오늘날 계속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에 관한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 대해서 성경이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령의 모든 은사가 지속되는 것은 아니며(예언이나 사도), 성령의 모든 은사가 멈춘 것도 아니다(섬김이나 다스림). 그런데 병고침의 은사는 어디에 속할까? 필자는 여기에 대해서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 이 은사가 계속된다고 생각하면 이 은사를 열심히 구하고 그런 사람을 잘 분별하여 교회의 직분자로 세워서 교회에 유익하도록 하면 될 것이고, 이 은사가 이제는 중지되었다고 생각하면 지속적인 다른 은사들에 힘을 써서 교회를 바로 세우면 될 것이다. 하지만 둘 중에 어느 하나에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는 것은 성경이 명한 바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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