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 교수 은퇴 기념강좌 발췌문>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
-보수주의의 명예-
박영선 교수(합동신학대학원 실천신학, 남포교회)...
<이 원고는 2013년 11월 29일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대강당에서 있었던 박영선 교수 은퇴 기념강좌의 내용을 강의안에 의존하여 임의로 작성한 것입니다. 원고의 일부 내용 중 미흡한 점이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발췌자 : 송영찬>
인류 역사 속에서 보수주의는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그 풍부하고 명예로운 것에 대하여 그다지 깊은 관심과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끊임없는 도전을 받아야 하는 보수주의는 이 시대에 과연 자기 자신을 무엇이라고 증명할 것인가에 대해 궁색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보수주의를 통해 누가 존경을 받고 있는가를 우리는 놓치고 있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 속에서 어느 순간이라도 실패한 적이 없으셨다. 심지어 예수님의 죽음마저도 실패가 아니었다. 이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보수주의이다. 이런 점에서 보수주의가 가지고 있는 명예와 가치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Text(역사적 사실)와 Context(역사적 의미)
보수주의는 역사성의 인식에서부터 자유주의와 다르다. 보수주의는 역사, 곧 사실을 하나님의 경륜과 약속의 시행으로 본다. 반면에 자유주의는 역사, 곧 사실보다는 실존의 공감과 이해에 우선을 둔다. 그 결과 사실보다는 그 의미에 치중한다. 보수주의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과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그대로 고백한다. 반면에 자유주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실보다는 그 의미가 무엇인가에 더 관심을 가지고 강조한다. 여기에서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의미의 충돌이 발생한다.
그러나 역사는 언제나 사실(text)을 담고 흘러간다. 이와 관련해 하나님은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는 비와 눈이 하늘로부터 내려서 그리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적셔서 소출이 나게 하며 싹이 나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는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는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사 55:8-11)라고 선언하신다.
그렇지만 역사라고 하는 시, 공간 속에서 사실(text)과 정황(context)의 구별은 그리 쉽지 않다. 오히려 역사적 사실보다는 그 정황(context) 압도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개인의 신앙체험에서 보듯이, text가 context와 너무 깊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 text는 그 특정한 context 이외의 것으로는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은 자유주의의 주장과도 연결된다.
특히 인문학자들에게 있어 역사의 context 밖에 보이지 않아서 그들은 text를 무시한 채 역사를 '반복'이라고 하거나 심지어 인생을 '윤회'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그들은 역사 속에 녹아든 text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학교를 보는 것과 같다. 학교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학교 자체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매년 학생들이 입학하고 승급하고 졸업을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윤회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또한 해마다 학생들의 입학과 졸업이 반복된다고 해서 학교가 발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은 본문과 정황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역사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의 틀은 변하지 않고 그 안에서 수많은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각각의 정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과 찾아오심에 대해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밭에 감춰진 보화는 그 context의 보잘 것 없음으로 말미암아 그 text 자체를 무시케 하게 만든다. 그와 같이 말구유는 역사지만 그 말구유에서 태어난 예수는 조작되거나 신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text를 감싸고 있는 context를 더 잘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이다.
보수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본문, 곧 text를 존중한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 그 text를 보여주신다. 그것이 바로 계시이다. 특히 구약이 그렇다. 구약에는 문맥이 있다. 그 문맥이 없다면 신약조차 있을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보수주의는 하나님만이 주도권과 능력을 행사하시며 그 안에서 자신의 성품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가장 중요한 신학 원리로 고백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text를 context 없이 전하면, 다만 고함과 공허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context 속에서 text를 전달 할 수 있어야 한다. 전후 사정이 없다면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전달할 수 없다.
구약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역사는 거듭해서 실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의 실패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셨지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역사 속에서 충돌을 통해 자신을 보이셨다. 그것이 바로 계시였으며 이 계시는 전인격적인 성숙을 그 목적으로 주어졌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주권 사상이다.
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context와 text 자체, 또 이해와 설득이 모두 하나님께만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역사의 내용과 사실보다 우선하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근거하고 그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 바울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야곱이 경험한 벧엘 사건을 통해서 이미 확인된 바 있다. 창세기 28장 10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야곱에게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증언하신다. 야곱에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시며 이삭의 하나님이시다. 조부와 부친의 하나님 곧 과거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야곱의 하나님 곧 현재의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조상들에서 하신 약속을 실행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여기에서 그 하나님은 미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2. 기독교 신앙의 실제적 이해
하나님의 주권 사상은 하나님의 역사성으로 실제가 된다. 곧 역사라고 하는 그릇 속에서 비로소 야곱은 역사의 문맥인 정황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실제적 이해가 있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몇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유산(모태 신앙), 체험(극적 회심), 기복(현실)이 동기가 되거나 정황(context)을 가지는 경우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그 계기를 통해서 text를 만나게 된다.
둘째는 개인 현실에서 느끼는 실존적 결단, 현실적 필요, 정체성의 질문 등에 의해 구체화 되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특성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정황(context)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오신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신앙의 본질적 특성을 전부 가지거나 균형을 가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들의 정황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다음과 같이 취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장로교에서는 전통과 역사를 인정한다. 감리교에서는 헌신과 열정을 강조하게 된다. 순복음에서는 체험적 신앙을 그 정점으로 가진다. 이런 것들은 모두 text의 정황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로부터 기인한다. 그 결과 설명이 달라진다. 본문, 즉 text는 동일하지만 그 안에 담김 정황을 설명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서로 신학이 다르다고 매도하면 안 된다.
잘 아는 것처럼 각자 자신이 정황을 이해하는 방법들의 다양성, 즉 그 장점들이나 또는 특징들을 중심으로 설명하거나 증언을 하게 된다. 이것이 변증이고, 이러한 변증의 과정을 통해 균형과 종합을 위해 하나의 신학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각각의 신학은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의 방식과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정황 이해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자유주의에서는 context를 공감하고 납득하는 방식을 취한다. 거기에는 남다른 열심과 정열이 있다. 심지어 감동과 환희, 사색과 성찰도 있다. 그들은 누구보다 이 방면에서 많은 고뇌를 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체험주의이거나 신비주의로 빠지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스스로 정황의 근거를 확보하려는 시도들 때문이다. 반면에 보수주의, 특히 장로교는 그들과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한다.
보수주의는 일종의 원어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신앙이 모국어인 자신들은 실상 자기가 가진 유산을 잘 모르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외국인들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누구보다 많이 공부를 한다. 특히 문법과 철자를 사용함에 있어 영어를 사용하는 원어민보다 더 잘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외국인들이 원어민들보다 더 영어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와 같이 신앙 그 자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에 비해 성경 원어나 성서 역사의 배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별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유주의자들은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 독일어 심지어 불어까지도 공부한다. 그리고 이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잘 아는 것처럼 언어(말)는 역사와 유산으로 만들어 진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그 역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정작 text를 대할 때 오류에 빠지게 된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그런 외적인 것들에 대해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무엇보다도 역사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거기에서 구체적인 정황을 찾으며 마침내 역사의 완성을 보고 있다. 이것이 다른 점이다.
결국 보수주의자들은 체험(확인), 헌신(열정), 공감(실존) 등이 결국 하나님의 크기와 약속과 능력 그리고 성품 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것이 보수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다. 혹시 그와 같은 모든 정황들을 잘 모른다 할지라도 보수주의는 결국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역사의 완성을 향하게 된다.
따라서 보수주의자들은 비록 자기 자신이 속한 역사의 성격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정황을 해석하고 변증함에 있어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배타적인 신학이라거나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이지 다름의 차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로 배타적일 때 기독교 신앙을 훼손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이 사실을 교회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 가톨릭에서는 장엄한 형식과 아름다움에 text를 담아 자신들의 진심을 표하는 방식을 강조했다. 그래서 가톨릭은 성상이나 성화와 미사 혹은 화려한 예식(일곱 성례)와 같은 것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이러한 가톨릭의 형식이 오히려 text를 가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교리로써 사실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교리문답이나 신앙고백서들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했다. 이것들은 모두 사실 자체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선포 위주의 방식을 택했다. 이때부터 설교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계몽주의 영향을 받게 되자 설명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통적인 선포 위주의 설교를 설명 위주의 설교로 바꾸게 되었다. 그러한 설명을 통해 설교자들은 신자들에게 공감을 유도하고 신앙을 납득시키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칼 바르트의 신정통 방식이다.
또 다른 방식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사실이 중시된 선포에서 사실은 하나의 명분에 지나지 않고 그 내용만을 강조하는 방식이 등장했다. 이로써 사실은 더 이상 실제적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자유주의 방식이다. 이 자유주의에서는 내용의 공감만을 강조하게 된다.
3. 자유주의를 향한 질문
자유주의에서는 text보다는 context의 의미, 가치, 이해, 공감 등에 강조점을 둔다. 때문에 그들은 초시간적 추상적 개념들에 초점을 둔다. 한마디로 이것은 환상적이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이 추상적 개념들을 도입함에 있어 실존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context의 의미, 가치, 이해, 공감 등을 실감해야 할 자아, 곧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매우 고무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신앙으로 이끄는 문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자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기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자칫하면 이 길만이 신앙으로 가는 유일한 길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자유주의의 인식론을 향해 질문해야 한다. 곧 “인간이 다만 신적 의지와 능력에 의해 조종되는 존재라면 곤란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 보수주의 곧 개혁주의는 답을 해야 한다. 그 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의 선택과 책임은 명예요 영광이다.
둘째, 그러나 인간의 공감과 이해에 의해 성립되는 신의 존재나 의지일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의 변덕스러움과 피조물로서의 한계와는 진정 달라야 할 것 아닌가?
셋째, 신앙인의 감격은 피조물에게 없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의 선하심과 능력에 근거한다.
성경은 이상의 사실들을 증거한다. 곧 인간의 곤경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증언한다. 그것은 고백이 아니라 진술이다. 생각한다고 해서 존재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도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존재만 인정하게 되면 생각 없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은 무척이나 성경 본문에 충성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성경을 주신 하나님을 먼저 보아야 한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들이지만 생각도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개혁주의는 인간의 이해에 묶인 신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자유주의가 말하듯, 공감을 요구한다는 점은 인간에게 필수적이지만 그것이 근거가 되거나 출발점은 되지 못한다. 나와 현재라는 정점은 얼마나 작은 것인가?
한편, 하나님의 임재가 삶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재로 인한 여러 죄악이 구체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선지서들은 징벌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징벌은 은혜가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도덕이 아니며, 윤리를 초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존재의 절대성을 말하기 위함이다. 곧 하나님의 없음이 벌이고 그것이 곧 재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상을 볼 때 자유주의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더 분명해진다.
먼저 (1) 교리를 외우듯이 거대한 종교개혁의 유산을 누려야 한다. 이 교리들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교리는 나중에 이해하게 된다. 거기에 인격이 따라야 한다. 곧 하나님의 일하시는 정황 속에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교리를 가졌다는 것이 우리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타인에 대한 경멸로 나타나는 배타적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것은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배우는 것과 같다.
집나간 자식이 정신 차리는 문제는 아버지의 부요와 선하심을 증명한다. 반면에 집에 있는 자신의 유익과 명예에 대한 책임도 말하고 있다. 큰 아들에게 있어 동생이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다는 비난이 전부라면 결코 “얘야,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부요와 선하심을 즐기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다.
(2)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담긴 부요함에 참여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바울 사도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21)이라고 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인간적 노력을 무한히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누리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큰 법칙이 있다. 곧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원칙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 부요함과 신실함을 누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4. 역설이 담긴 text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보수주의에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보수주의가 대면하고 있는 과제이다. 곧 (1) 유신론 안에서 전체 세계관이 항상 정확히 이해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2) 교회가 (죽은) 전통주의 항목, 즉 context가 배제된 채로 text에 집착하는 경향을 지녀왔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필연과 자유를 동시에 말하는 성경으로서 text를 받아들이는 방법에 익숙해져야 한다. 제임스 사이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내가 필연과 자유를 관념의 세계에서 생각지 않고, '신 앞에 서 있다' 하는 현실에서 생각한다면, 그리고 내가 '신의 처분에 맡겨져 있으며' 동시에 '모든 것은 내개 달렸다'는 것을 안다면, 이 두 개의 조화될 수 없는 명제를 두 개의 분할된 타당성의 영역에 돌림으로써 내가 살아가야 할 역설에서 벗어나려 해서는 안 된다. 또는 어떤 신학적 기교로써 이 둘의 관념적 화해에 도움을 주려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필연과 자유를 동시에 스스로 취하여 함께 살아야 하며, 또한 함께 살 때만 이 두 가지는 하나가 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요구하신다. “모든 정황에 네가 들어가 살아라.” 이 명령을 기억하라. 이럴 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반면에 text에서 보이는 역설을 잘못 수용할 때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1) 신 앞에서 인간의 위치를 역설적으로 이해한 진술이 위세를 떨치는 이유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대부분의 인간이 자신의 입장을 비역설적으로 진술할 능력이 없다는 데 있다.
2) 대부분의 비역설적 선언은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거나 인간의 의미를 부인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즉 그들은 펠라기안이거나 극단적 초칼빈주의로 흐른다. 펠라기안주의는 모든 것을 사람에게로 책임을 넘긴다. 초칼빈주의는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책임을 넘긴다.
3) 역설을 의지하는 것의 약점은 멈취야 할 지점(경계)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계를 정할 외적인 객관적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역설이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 그런데 사실 그 지점을 알기란 결코 만만치 않다.
5. 신학과 신학자 그리고 목회자
과연 신학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에게인가, 아니면 인간에게인가? 여기에 하나님과 학문의 대립이 있다. 계시와 인식의 대립이 있다. 사실과 의미의 대립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학문의 대상일 수 없다. 곧 신학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신학이 존재하는 거다. 마찬가지로 계시가 있기 때문에 인식을 필요로 한다. 인식을 위해 계시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이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의미를 가지기 위해 사실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 관계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주도권이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인간에게 주도권이 있다면 그리고 이해하고 납득하는 내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과 우연 속에 있는 존재라면, 의미와 이해와 객관적 기준을 가지지 못하며 다만 억지가 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사실은 우연으로부터인가, 필연으로부터인가? 우연이면 사실은 단순한 반복일 뿐이며, 허무주의에 불과하며, 역사는 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곧 역사가 우연이라 한다면 거기에는 그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 반면에 필연이라면 거기에는 그 필연을 만드신 분의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우리가 이미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어느 것 하나도 역사의 사실은 실패하거나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실패하게 하거나 망하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은 결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경우에 보면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근거를 만드는 것을 보게 된다. 곧 인간은 자신과 현실을 설명할 세계관을 필요로 하고, 대부분은 내용보다 어떤 주류나 인물로 그것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면 다만 지도자를 따르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을 유지, 보전 하려고 한다. 자기가 아닌 칼빈이나 박윤선을 내세우는 것으로 모두를 납득시키려 한다. 그리고 칼빈을 모르면, 박윤선을 모르면 신학이 다르다고 함으로써 책임을 모면하거나 그 책임을 덮어씌우려고 한다.
과거 일본 역사에서 위대한 장수라고 하면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를 내세운다. 그런데 그들이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은 그들에게 복종한 무지하고 순종적인 병졸들 때문이었다. 우리는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병졸들을 보아야 한다.
병졸들의 무지와 순진은 절대적 다수에게 준 복이다. 그러니 지도자들이라면 우월함으로 자신을 확인하려말고 유통업자 같은 역할임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서 목회자와 신학자의 역할을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기쁘신 은혜에 속한다. 여기에는 우리의 승인이나 획득이 필요하지 않는다. 단지 사람은 그 하나님의 은혜에 공감하거나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의존의 책임을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가지는 것이다. 때문에 교육과 진심으로 그들을 공감시켜서 자신의 짐을 덜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실존적, 인격적 요소인 ‘나’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한다.
1) 실존적이라는 말은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한다(롬 12:1). 삶으로써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다. 2) 인격적이라는 말은 기계적이지 않고 더 풍성하고 깊은 관계를 의미한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만큼 풍요롭고 풍성해져야 함을 의미한다.
6. 결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그 하나님은 폭풍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신다(욥 40:6). 그때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욥에게 보이신다. 그러자 비로소 욥은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2-3)라고 실토하면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5-6)라고 고백한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그리고 땅을 보라. 그리고 그 세계 안에 있는 만물을 보라. 이것들을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다. 바로 사망으로부터 생명을 가져오시는 분이시다. 곧 부활 사건이 그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내일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면서 오늘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죽음에서 생명을 만드시는 분이다. 그것이 바로 부활 사건이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가지고 있다.
아무런 이유와 자격 없이 어느 시대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내셨고 세우셨음을 자랑스러운 명예로 여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