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주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송의 제사 2018. 12. 16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은 그 제단에서 먹을 권한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13:10-15)
1. 하나님의 법을 지키자
지난주에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우리의 제사가 무엇인가에 대해 히브리서가 말하는 것을 1차로 들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반포한 교리 즉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사는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우리의 바른 제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모든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 들어선 우리가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 두 가지 방책은 교리와 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교리 없는 신앙을 상상할 수 없고 바른 윤리 없는 신앙은 무용지물입니다. 교리는 믿음의 법이요 윤리는 법을 지키는 삶입니다. 언제나 이것을 잊지 말고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그 후속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 중 찬미의 제사가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를 논합니다. 즉 우리의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가를 논합니다. 이것을 논하기 위해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제사가 얼마나 다른가를 논합니다.
2.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제사
먼저 본문 10-12절을 봅니다.
~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시대의 신자들보다 더 높은 제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구약시대의 짐승으로 드리던 어떤 제사와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짐승들의 희생 제사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예표하는 상징적인 것일 뿐입니다. 다만 그리스도는 구약시대의 제사장들이 행하던 제사의 방식만은 하나도 어기지 않고 따랐다고 증언합니다.
~ 첫째,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려면 제물이 필요했는데 구약시대에는 짐승들로 드려졌지만 그리스도는 자신을 직접 제물로 드렸습니다. 둘째, 바쳐진 제물은 오직 하나님만 열납 하시는 것임을 증명했습니다. 즉, 구약시대에도 제사장들이 제물을 먹을 권한이 없어 오직 피만 드렸듯이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도 오직 하나님만 열납 하신 것입니다. 바쳐진 제물은 더 이상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란으로 둘로 나누어진 어떤 교회에서 바쳐진 헌금을 돌려달라는 성도들이 있다 하여 화제가 되었었는데 그런 요구는 천만부당한 것입니다. 셋째, 제물을 영문 밖에서 불태웠듯이 그리스도도 영문(파렘볼레) 밖에서 고초를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문 밖’이 주는 메시지를 읽어야 합니다. 그것은 공개적으로 능욕을 당하고 고초를 겪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 공개되는 것을 꺼립니다. 그래서 사생활보호가 있고 다른 사람의 사적인 일을 공개하면 명예훼손으로 처벌을 받게 됩니다. 심지어 부부사이에도 사생활보호는 철저히 준수됩니다. 그만큼 개인의 인격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발가벗긴 채 공개된 장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치욕을 당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그 어떤 신들도 이런 모습으로 공개되지 않습니다. 모든 가짜 신들은 겉보기에 경건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치장합니다. 신비한 존재로 각인되어야 사람들의 이목을 받고 존경을 받기 때문에 그렇게 위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리스도는 우리가 받아야 할 죄 값을 대신 치루기 위해 모든 수모를 다 겪으신 분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영문 밖’이 말하는 메시지를 읽고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의 묵상거리는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백성들을 정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의 육적인 이스라엘을 정결키 위해 동물의 피를 잡아 뿌렸듯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적인 이스라엘의 죄를 속하고 그들이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회복하도록 하시기 위해 그의 피로 정결한 백성을 만드셔야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대 속죄일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드려지는 희생 제사를 총괄하는 제사이며 영원한 화목 제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영적인 희생 제사에 참여하여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성례전이요 영원히 기념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인 것입니다. 이 거룩한 음식을 먹는 우리는 무한한 특권을 누리는 것입니다. 단지 동물의 제물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 되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어 먹고 마시는 것이야 말로 주의 식탁에서 영원히 누리는 만찬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13-14절을 봅니다.
앞에서 우리는 구약의 제사와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차이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의무는 무엇인가요? 다시 말해 그리스도도 직접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우리도 그와 함께 수모를 당하고 치욕을 당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의 개인적인 유익을 지키고 누리기 위해 시도할 체면이나 권리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의 것이므로, 주께서 값을 칠고 사신 바 된 주의 소유이므로 오직 주를 위해 살고 죽어야 합니다. 오직 주만 바라보며 우리 앞에 다가올 영원한 도성을 소망하며 주님에게로 주님과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정말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참된 희생 제물이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는 구약에서 행하던 방식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은 잘 아는 바입니다. 그것들은 단지 상징적이고 예표적이고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자는 실체를 나타내는 그림일 뿐입니다. 오직 우리의 실체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떤 제사를 드려야 합니까? 어떤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까? 그 해답으로 오늘 본문이 제시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 내용입니다. 하나는 지난주에 살핀 바대로입니다. 그것을 한 단어로 제시하자면 ‘선행’(유포이이아)입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의 제사는 무엇입니까? 그 해답이 오늘 본문 15절이 말하는 ‘찬미의 제사’입니다.
3. 무엇이 찬미의 제사입니까?
요즘 성경은 찬미 대신 찬송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찬미는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일로서 찬미(praise)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가까이 나아가는 예배 행위의 하나로 찬송(hymn)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같은 의미이지만 찬미는 보다 넓은 예배의 개념이고 찬송은 예배와 찬미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찬미와 찬송은 예배에서 빠질 수 없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엔 찬송 자체가 예배의 전부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신약성경은 교회의 노래들을 세 종류로 구별합니다. ‘시(프살모스)’와 ‘찬미(휨노스)’와 ‘신령한 노래들(호데 프뉴마티케)’이 그것입니다(엡5:19, 골3:16). 결국 이것들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찬송이란,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섭리사역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이니이다(셀라)”(시67:3-4)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117:1-2)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에게 그런 영광의 찬송을 돌리지 못한 존재임을 동시에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1:21)
어쨌든 찬송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요한 행위이자 삶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오늘 하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은 언제든지 찬송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주님의 고난을 다시 바라봅니다. 주님은 우리가 치루어야 할 죄 값을 대신 치루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치욕을 대신 당하시고 직접 희생 제물이 되어 우리 대신에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가시어 지금도 우리의 중보자로서 일하시며 우리의 안전한 처소를 만드시기 위해 사역을 하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영구한 도성을 만드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우리가 이 미래의 도성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이 도성이 언제 나타납니까? 드디어 요한계시록 21장에 등장합니다. 주님이 완전하게 만드신 영구한 하늘의 예루살렘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도성이 하늘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2)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20-11)
참 신자는 주님만 생각해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사람입니다. 자연스럽게 그의 입술은 찬송의 입술이 됩니다. 눈에는 감동의 눈물이 고이고 가슴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가 전율이 되어 울립니다. 참 신자는 주야로 항상 주님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쉼 없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만 생각하면 기쁨의 찬송이 입에서 터져 나오는 사람입니다.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기에 아름답게 보이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자각하므로 그저 감사뿐입니다. 이것이 찬미의 제사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는 15절에서 주님의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나 깨나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이름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주님에게 미친 상태로 사는 인생을 말합니다. 바로 이 삶이 찬미와 찬송의 제사입니다. 이 삶이 하나님이 기뻐 영광 받으시는 최고의 인생입니다.
4. 결어
오늘 히브리서는 우리의 삶이 찬미의 제사여야 함을 가르칩니다. 찬미의 제사는 우리 인생 그 자체이며 곧 지금의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찬미의 제사와 함께 하나님이 바라시는 진정한 예배는 어떤 예배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예배에 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먼저 사마리아인들의 잘못된 예배의 개념을 수정하시고 계십니다.
먼저 예배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21절에서 주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눈에 보이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자 시도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지은 예루살렘 성을 생명처럼 사랑하고 아낀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가시적인 예배의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을 돌 하나 남기시지 않으시고 로마군의 손을 빌려 다 무너뜨리셨습니다. 예배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어떤 마음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믿음 없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둘째, 22절에서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지 말라”고 교훈하셨습니다.
~ 이것은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고 예배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이 지어낸 우상들과는 달리 믿는 자들과 직접 관계하고 소통하는 인격적인 절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우상들은 기도와 간구와 소원에 응답할 능력이 없는 허상들입니다. 그들은 인격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그저 나무와 돌과 철과 금은보석으로 만들어진 조각품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을 섬기는 아덴 사람들을 행하여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17:23-25)하며 “우리는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한다”(28)고 선언하고 가르쳤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며 소원을 빌고 있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셋째, 주님은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고 가르쳤습니다.
~ 여기서 주님은 구약의 제사라는 단어 대신에 ’예배‘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면서 지금까지는 짐승의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다면 이제는 ’곧 이때‘, 즉 ’주님이 오신 이때‘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예배하는 때‘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직접 희생 제물이 되시어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를 단번에 드림으로 구약 제사를 단번에 완성하셨기에 이제 우리는 자유롭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선언이야 말로 구약 제사의 무거운 짐을 단숨에 벗기신 자유의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제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무거운 죄의 짐을 벗기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는 감동의 시간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참된 예배를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신령으로 드려야 합니다.
~ 이는 ‘성령으로’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육적인 예배가 아니라 영적인 예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시간은 성령이 지배하는 구별된 시간이자 장소이며 마음입니다. 특히 예배는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을 중시합니다.
~ 모든 이방종교들은 외형적인 것들을 중시합니다. 제사를 드릴 때 음식을 놓는 자리를 가지고 종종 다투기도 합니다. 오른 쪽에 무엇을 놓고 왼쪽에 무엇을 놓고 앞쪽에 무엇을 놓고 서로 실랑이를 벌입니다. 절은 언제하고 몇 번 하고 쓸데없는 일을 가지고 논쟁합니다. 집안마다 마을마다 지역마다 의식이 다릅니다. 그러나 이런 의식들은 경건의 모양은 갖추었는지 몰라도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개 이방종교인들은 의복을 중시합니다. 제사를 드리는 제주들의 옷이 있고 중님들은 승복을 입고 신부들은 신부복장을 입고 다닙니다. 오직 목사만 지정된 옷이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은 의관을 갖춰 입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반인들이 입고 다니는 옷을 입으셨습니다.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속이 중요합니다. 속에는 온갖 탐심을 가졌으면서 겉으로 위장한들 소용없는 일입니다. 반드시 가짜는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십니다. 신령함이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그 능력에서 찾는 것입니다. 능력의 예배는 예배자들의 미음을 변화시킵니다. 이런 예배가 신령한 예배이고 역동적인 예배인 것입니다.
~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성령 안에서’(in sprit)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기 위해 예배자는 반드시 회개와 죄 용서함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성령은 거룩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거룩한 곳에 이르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모습을 만드십니다. 동시에 우리가 스스로 거룩을 추구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 다가가기 위해 세속의 흙이 묻은 신발을 벗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이 거룩한 예배자가 되기 위해 먼저 간절기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진리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 ‘진정’이란 말은 ‘진리 안에서’(in truth)라는 말입니다. 예배는 진리를 선포하고 진리를 듣는 시간입니다. 세상의 철학이나 일리 있는 말을 논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사람은 참 진리를 까달았을 때가 가장 감격하는 순간입니다. 다시 말해 참 진리이신 하나님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 큰 감동을 주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죽었던 애인이 살아 돌아왔다 해도 비교도 안 되는 기쁨입니다. 목욕탕에서 ‘비중’을 발견한 아르키메데스의 기쁨도 이에 견줄 수 없습니다. 진짜 ‘유레카’는 하나님을 발견할 때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을 발견하고 뜬눈으로 밤을 보낸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은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져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었다”(시39:3)고 고백했습니다. 그리하여 진리를 받은 후에 그는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40:8)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의 이 감동은 아르키메데스보다 결코 적은 감동이 아닙니다.
~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영원불변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성경에 게시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을 발견하고 만남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해 가장 큰 진리를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 무엇보다 예배에서는 항상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선포입니다. 기쁨의 소식입니다. 최근 들어 한국교회는 이상항 중병을 앓고 있습니다. 지루하다는 이유로 말씀선포를 줄인 것입니다. 대신에 찬양을 위주로 하는 예배가 늘어났습니다. 이들은 재미있는 예배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예배는 찬양일색의 콘서트가 아닙니다. 말씀선포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가장 중시되어야 할 예배의 핵심입니다. 말씀의 시간을 더욱 늘려야 합니다. 그것만이 사람을 살리는 길입니다. 그런데 찬양예배는 인기가 있고 말씀예배에는 시큰둥합니다. 이런 일은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런 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니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사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소망하는 우리의 진정한 찬미의 제사입니다. 그런 예배자의 태도로 한 주간의 삶을 충실하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 50주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송의 제사 (바로선개혁교회) |작성자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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